애플 제품을 좋아하든 싫어하던, 스티브 잡스를 알던 모르던, 이 영화는 상당히 흥미롭고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잡스의 개인사의 트라우마와. 회사의 창업기,성장기, 그리고 잡스의 몰락. 다시 복귀해서, 화려한 성공. 이른 죽음. 등등. 그 자신의 일생이 마치 영화의 각본 처럼 드라마틱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인물자체가 평면적이거나 일차원적 성격의 캐릭터가 아니라, 다면성의 인간적인 호오를 비교적 객관적 평가와 시선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의 스마트 세대들에게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가 나오게 된 과정부터 아이폰,아이패드(영화에서는 처음에 2001년 아이팟 발표하는걸 시작으로 하지만)출현 까지 대략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그래서 한 인물의 전기 영화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개인용 전자기기의 혁명적 역사를 압축적으로 볼 수 있다. 훌륭한 전기 영화는 이름을 남긴 인물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다양하게 그 인물을 받아들이게 만들면서, 시간의 압축을 통해 인물의 삶 뿐만 아니라 시대의 역사를 인지하게 해야 좋은 (전기)영화라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가 죽고나서 그 두꺼운 전기책이 나왔는데, 그다지 읽을 생각이 없었다. 전기 영화는 좋아하지만, 대부분 두꺼운 전기책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 책을 읽은 사람의 대부분 한마디 평은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은 아니었구나..란 평이 지배적인데, 어쨌거나 그 책을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없던 내겐 이 영화의 개봉은 단비 같은 것 이었다.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배우 애쉬턴 커쳐가 잡스 역을 맡았다. 



 말년의 잡스 보단, 젊었을 때 머리 기른 잡스의 모습과 애쉬튼 커쳐의 모습은 정말 흡사하다. 살짝 펄잼의 에디 베더의 분위기도 엿 보이는데, 특히 대학 교정을 맨발로 다니거나 인도 여행과 자연 속에서 영감의 기를 받는 장면등. 70년대를 배경으로 흐르는 클래식 록 음악이 너무나 좋다. 비틀즈 보단 밥 딜런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영화속에 삽입된 밥 딜런의 노래가 너무 좋았다. 나는 70년대의 미국 차들과 음악들이 왜이리 좋은지..푹 빠져서 넋놓고 영화에 몰입했다. 


 이 사람의 근본 뿌리가 버려진 아이 였다는 것에서 출발한 결핍의 내면성이 어떻게 발현되어 성공했고 좌절했는지,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출생은 그랬지만 좋은 양부모 밑에서 성장했고, 인생의 절대 동반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나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맺은건 일대일생의 운 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업이 막 진행될 무렵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생기자 철저히 버리고 그 슬픔과 번뇌를 일로 매진하며 승화시켰던 듯 싶다. 나중에 그의 딸 이름을 따서 리사 프로젝트에 올인 하는 모습도 자신이 못다한 아버지로써의 역할을 대신해 새로운 컴퓨터 창조에 집착을 보였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는 자신이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존재 였기 때문에, 사람이 아닌 기계의 가치에 몰두 했다고 여겨진다. 


 리사 프로젝트가 좌초되고, 궁여지책으로 매킨토시 팀에 가담하게 됐고, 가격이 높게 출시되면서 애플은 하향세를 걷게 된다. 경영 이사진에 의해서 잡스는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런 성공과 몰락의 와중에. 워즈니악을 비롯해 처음의 친구들도 잃게 되고, 명예는 실추됐고, 곤경에 빠지게 된다. 결국. 자신의 신념과 제품에 대한 가치 창조의 예술가적 외골수의 기질과 열정이. 사람도 잃고 자신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영화 이야기와는 번외로 애플의 침체기에 나의 컴퓨터 역사를 뒤돌아 보며 실제 애플의 역사를 체감해 본다.

 나의 첫 컴퓨터가 1990년 삼보 트라이젬 흑백 XT 컴퓨터였는데, 이건 지금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가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DOS 시스템이었다. 문자 명령문으로 실행하고 파일을 이동하는 그런것.. 당시 다니던 보습학원(영어,수학,컴퓨터_도스나 GW베이직 을 배우는)에 컴퓨터 관련 잡지의 광고를 보며, 어떤 컴퓨터를 살까 알아보던중 애플 컴퓨터가 눈에 들어왔는데, 본체가 피자박스 같이 넓적한 어떤 모델이었다. 그때 그걸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대세는 아니어도 윈도우 95가 나오기 전, 애플의 선구적인 GUI를 맛볼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처음 GUI 오퍼레이팅 시스템을 잡스가 매우 만족하며 감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걸 베낀 빌 게이츠에게 엄청난 분노를 하는 장면도. 암튼 마이크로소프트 도스 시절에 최고의 추억어린 게임은 페르시안 왕자 였다. 학원 원장이 텔넷,초기 인터넷을 접속해 보여주며 여기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고 알려주던 일. 중1짜리 눈엔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컴퓨터 강사의 보기드문 엄청나게 큰 가슴에 혹 했었지. 그 아가씨에게 찝적대는 원장을 관찰하는 것도 재밌었고..


 그러다 잊혀져 가고 있던 애플 컴퓨터를 다시 인지한 것은 미대를 들어가고서 부터다. 대학 1학년땐, 수강신청도 종이 문서로 하고, 수업중엔 콤파스나 자와 샤프로 제도 수업이 있었으니, 아직 포토샵의 존재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군대 휴학을 했고, 97~98년 사이에 우연히 동기 누나를 만나 학교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애플 컴퓨터를 500만원 넘게 들여서 구입했고, 포토샵이나 전자 편집 프로그램인 쿼크에 대해서 이야기 해줬다. 당시 500만원이면 엄청 큰 돈 이었다. 미대에서 매킨토시를 많이 쓰는 이유가 충무로의 전자 출판. 실무 쪽엔 전부 쿼크를 쓰고 있으니, 그렇게 비싼 애플 컴퓨터를 써야 했던 것이었다. 원래 애플이 비싼것도 있지만, 당시 엘렉스 컴퓨터란 총판업체가 비싸게 공급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애플은 지금의 애플을 상상 못할 정도로 정말 몰락한 회사였다. 


 95년인가 96년에 신촌의 구,신영극장에서 본 '토이 스토리'도 잊을 수 없다. 엄청 재미있고 신기했던 그 작품이 스티브 잡스의 재기의 발판인 것도 몰랐지만, 2000년 초반 다시 학교에 가니, 애플의 컬러풀한 모니터 일체형 누드 아이맥과. 특이한 디자인의 매킨토시 G3가  동기들의 자취방에 종종 보였다. 당시 매킨토시를 쓰는 사람은 대부분 잘 사는집 자제들이었다. G3를 가진 동기형이 오양 비디오를 비롯해 여럿 동영상 창을 열고 동시에 플레이하는 신공?을 보이며 자신의 매킨토시를 자랑하던 일이 기억난다. 사실 이런 성능 보다는 아이맥 디자인의 혁신 같은거에 감탄했다. 영화에서도 지금 수석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와 스티브 잡스가 아이맥의 가치와 혁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창조적 영감을 발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제품을 실제 처음 보았을때, 그냥 이쁘기만한 물건이 아닌 이걸 만든 사람의 철학이 스며있는, 예술 작품을 본 듯한 묘한 감흥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이팟이 나오기 전에 난 국내 엠피 쓰리 플레이어 업체인 새한 엠피맨의 제품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최초의 엠피 쓰리 플레이어를 만든 것은 우리나라의 중소기업들 이었을 것이다. 당시 휴게실에서 선배들이 허리에 찬 플레이어를 보고 만보기냐고 우스개 섞인 질문을 던지던 일이 기억난다. 곧 애플에서 아이팟을 공개했고, 소니 워크맨의 혁명을 잇는 문화적 사건이 되었다. 엠피 쓰리 플레이어의 이런 과정을 보면서, 애플의 전략을 여실히 느낄수 있었는데, 그들은 물건을 파는 기업이지만. 단순히 물건만을 파는게 아닌, 그 제품을 통해 문화를 일구거나 재편하는, 즉 더 큰 가치창조를 하는 기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대 최고의 뮤지션인 U2의 보노를 만나, 음원제공을 약속받고, 그럼으로써 디지털 음원의 유통과 확산의 길을 개척한 것이다. (이후 디지털 음원의 확산 과정에 대한 호불호는 제외하고서라도) 




 나의 첫 애플은 결국 2011년 말 맥북프로 인데, 쓰다보니,나같은 경우는 자잘한 것에 감동을 받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거,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일체형의 은색의 바디에 정밀하고 세밀한 작은 스피커 구멍들. 잠자기 모드일때. 본체 앞쪽에 마치 사람이 숨쉬는듯 작고 하얀 LED 불빛이 점멸하는 모습은 사람같이 살아있는 영혼을 느끼게 한다. 이런 소소한 것들 까지 신경써 디자인한 물건은 단순한 제품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무형의 감각들이 서로 소통하고 있다. 내 정신과 손 끝의 설명할 수 없는 작용. 그리고 이 터치의 촉감은 단순한 사물성 이상을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말하니 애플 추종자 처럼 들리겠지만, 난 카메라, 컴퓨터, 자전거, 자동차, 악기 등등의 사물에 어느 정도의 페티시즘이 있다. 자본주의하의 물신숭배의 의미가 아니라, 나랑 밀접한 관계의 사물엔 단지 무생물이 아닌 사물의 영혼이 있다고 믿는 습성이라 할까..

 여하튼 2000년대 이후 최초의 아이맥, 아이팟 이래로 애플은 승승장구 하며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애플. 스티브 잡스의 탁월함은 전자기기 제품만을 파는 회사가 아니었단 점이다. 제품과. 소프트웨어의 일체. 그리고 아름답고 실용적인 디자인을 통해. 인간의 삶을 혁신하는데 선도했다는 점이다. 그 의도가 비즈니스 차원 뿐이라고 해도, 그는 남들이 하지 않는 길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개척했다. 그 성공과 실패의 고단한 삶에서, 나는 무엇에 확신을 갖고 열정적으로 추구할지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인간적인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한곳에 매진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배경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기업의 가치를 드라마틱하게 일구었던 스티브 잡스의 일종의 자화상인데 그의 삶을 통해 우리 시대의 선구적 가치가 무엇일지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음 좋겠다. 이익창출 + 플러스 뭔가를..


 p.s> 처음 아이맥을 본 감탄의 여파를 이어 당시 애플의 주식을 샀었더라면, 이란 가정이, 요즘 경제 관련 책을 많이 보다 보니.. 자연스레 떠올랐다. 영감이 왔으면. 바로 해야해.. 곧 이 될지. 나중이 될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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