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아주 화창한 날의 오후. 오랬만에 종로에 나갔다. 드로잉 강좌 사람들과 단체로 로댕 전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를 위해 특별히 초대된 분이 계셨다. 파리의 로댕 갤러리에서 관광가이드를 하시는 40대의 평범한 한국인 이었다. 선생님 말로는 미술을 전공하신 분이 아닌데. 파리에서 혼자 미술 이론, 작가론,을 독파하여, 한국인 상대로 스타 가이드가 되셨단다. 직업적 예술 가이드. 근데 막상 이분의 가이드.를 들어보니. 전문적인 큐레이터(학예연구사) 보다 더, 깊이 있고, 예리하며, 조리있고, 재미있게 설명을 너무 잘 하신다. 그 동안 나는 어느 전시장을 가더라도, 누군가가 설명해주는 작품 감상법을 혐오했었다. 하지만 이 분의 조근조근한 말을 열린 마음으로 집중해서 듣다 보니, 나의 무지의 소치를 여실히 깨달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이 정확했다. 내게는 아는 만큼 더 잘 볼려고 노력했다. 라고 말 할 수 있겠다.

 물론 내가 로댕에 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때문에, 양동이에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는 것과 같은 쾌감을 눈과 귀로. 느꼈을 것이다. 어쨋거나 이 정도의 도슨트 라면 나는 충분히 귀를 열고 들어볼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미술관의 도슨트는 감상을 방해한다는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이제는 갤러리에서 일하면 누구나 다 큐레이터라고들 한다. 이거는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큐레이터라고 하기엔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우리 일행을 옆으로 미술관 측의 젊은 도슨트가 마이크와 확성 장치로 우르르 사람들을 끌고 다녔다. 소리가 커서 안 들을려고 해도 들렸는데, 달달 외워서 앵무새처럼 읊조리고 있었다. 매우 안 좋은 목소리로.. 나는 소리에 민감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내용을 떠나서 완벽한 소음 공해 였다. 내용 또한 우리의 스타가이드? 분에 비해서 유치원 수준의 것이었다.

 우리의 가이드님이 말하기를. 여기 전시는 대략 구색만 맞춘, 거의 B급(소품) 작품들만 왔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처음으로 보이는 '신의 손' 이란 작품과 한 두개 빼고는 파리의 로댕 갤러리의 주요 작품과는 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소품이지만. 구색을 맞추려고 했는지.. '청동시대''지옥의 문''생각하는 사람''입맞 춤' 등 학창시절 미술 교과서에서 얼핏 봤던, 들어봤던 작품들은 거의 다 있었다.   
 입장료가 성인 12,000원 인데. 난 항상 이런 관제 미술관의 요금이 항상 불만이었다. 이런 20세기 서양미술 대가들의 전시는 그냥 서울시 차원에서 무료로 해야하지 않나 항상 생각한다. 현대 미술의 대가들이라지만 외국에 비싼 개런티 주고, 시민한테 장사한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내가 조각 작품을 제대로 감상 해봤던 기억이 없다. 봤더라도 감흥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무엇을 감상한다는 것은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봐야 하는데, 알다시피 현대사회에서 무엇을 본다는 것은 다분히 표면적인 감상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아주 오랬만에 미술관에 왔기에, 그리고 근대 조각의 선구자..현대의 미켈란젤로..등등 대단한 수식어가 붙는 천재 조각가의 전시이기에 그 어느때 보다 집중력이 높았다. 


 첫 작품인 '신의 손' 부터 그동안 많이 보았던, 회화나 사진 전시의 허접함?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 이었다. 로댕 조각의 세가지 재료. 대리석,청동,석고, 중 아주 하이얀 대리석(화강암?) 으로 만들어진, 대단히 매끈하고 투명한 우윳빛의 색깔이 빛을 발한다. 손의 디테일한 묘사는 경이롭다. 마치 생명이 깃든 듯하다. 조각가에게 또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돌을 어루만지는 손은. 매우 상징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미'를 창조하는 손. 예술(창조)이란 것의 근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사람의 손은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얼굴보다도 자신의 손을 더 자주 보지 않을까. 키보드 위의 내 손을 한 번 유심히 쳐다본다. 이 이쁘장한 손이 이룩할 것은 무엇인가?.. 현재 이 손의 표정은 우울한 열정이다.

 '청동시대' 이 작품은 미술 교과서에서 본 기억이 있다. 로댕이 37살때 세간에 주목받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이 작품에 대한 의심, 비난 때문이었다. 너무 사실적이고 정교해서 모델의 몸에서 직접 주물을 뜬 작품이라는 오해의 논란에 빠졌다고 한다. 로댕은 천부적 재능과 열정으로 40세 이후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고 한다. 

 분명. 조각은 거친 노동이다. 이러한 점이. 작품의 덩어리에서 고단한 노동의 열기가 느껴진다. 이 실제 사이즈의 남자 조각을 보니. 18살때 친구의 집에서 본 여자 누드 조각상이 떠올랐다. 친구의 누나가 홍대 조소과에 다녔는데 졸작으로 자신의 실제 사이즈 누드 전신조각상을 만든 것이었다. 매우 아름다운 조각이었다. 자신의 젊은날의 아름다운 몸을 조각으로 빚어내는 일. 시간을 정지시키는 그 작업은 누드사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멋지고 감동적인 일이다. 손재주가 있다면 평생 사랑할(같이 살) 사람의 젊음의 미를 조각으로 봉인해 거실의 한 모퉁이에 세워두면 얼마나 멋질까..

 가이드님이 많은 걸 이야기 해 주셨는데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리고, 그 때 느꼇던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회상만 남는다. 결국 내게 남는건 작품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경험 그 자체의 느낌이다. 이 작품이 더욱 아름다웠던 것은 우리 신체와 거의 같은 비율인 1:1의 스케일을 지니고 있어서 였다. 그리고 뭔가 오묘한 표정과 몸짓, 마치 자아의 본질을 깨달은 듯한 자의 모습이었다. 저 포즈 아주 섹시한거 같아서 거울앞에서 해 보았는데, 내가 코믹한 데오드란트 광고 모델 처럼 보였다. 푸쉬업을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다음에 우리가 본 것은 '지옥의 문' 이었다.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은 생애 최대의 역작 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생각하는 사람'도 이 작품의 일부로써, 다양한 인간 형상들이 표현되 있다. 원래 작품은 거대한 스케일 인거 같은데. 여기 전시된 것은 그냥 맛보기로 작은 독립된 조각들이 몇개 전시됐을 뿐 이었다. 대신 (맨위 사진) 독립된 '생각하는 남자' 는 채색된 석고상 조각으로 그동안 우리가 봐오던 청동상과는 느낌이 다르다. 청동으로 만든 '생각하는 남자'는 총 7개의 진품 에디션이 있는데 그중 5번째 작품이 우리나라에 있다고 한다. 어렸을때. 덕수궁인가 어딘가에서 그것을 봤던 것 같다.
 거칠고 투박한 고뇌의 기운이 넘쳐난다. 다른 신체 비율에 비해서 손이 꽤 크다. 손이 말하는 표정이 저 포즈의 핵심인것 같다. 자아의 돌아봄, 내면의 자각, 그것은 평생에 걸쳐 행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인간인 이상..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 말을 설명할때, 항상 이야기하는 '칼레의 시민' 의 연유가 되는 실화를 기리기 위해 칼레 시에서 의뢰한 작품이란다. 자세한 이야기는 검색으로 공부하시길. 이런거 공부해두면 일거양득일 것이다. 자신한텐 물론.. 이성한테 지적인 면을 보일때, 우리 가이드님처럼 소근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이야기를 한다면 아주 성공적 일 것이다. 이야기에 흡입력이 있어, 점점 우리 일행 말고도 다른이들이 같이 귀기울이고 움직였다. 전시된 작품은 작은 크기의 소품 구성이었는데. 위 사진 처럼 실제 사이즈 의 작품은 인물들의 제각각 표정이 압권이라고 한다.
 역사의 가슴아픈 기억을 이렇게 완벽한 조각으로 영원히 기리는 것. 이것이 예술의 진정한 가치이고 기능이지 않을까. 그 희생의 숭고한 정신은 로댕의 조각 작품을 통해서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죽음 앞에선 인간의 본능적. 고뇌, 두려움. 망설임. 회환, 분노의 다양한 감정들이 로댕의 손에 의해 고스란히 살아났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이 조각 앞에서 연민을 느끼지만, 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가슴속에 새겨봐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나..?  참 가슴아픈 역사다. 백성들 등골만 빨아먹은 우리의 역사. 그러한 역사를 가진 현재의 우리 사회 모습에선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슬프게도 요원한 말일 수 있겠다.  

 이 작품 '입 맞춤' 또한 사진으로 많이 보아온 작품이다. 마음속에 염장을 지르는 매우 아름다운 작품이다. 큰 스케일의 석고상 이었다. 여자 골반에 얹힌 남자의 손이 왜이리 자꾸 눈길이 가는지.. 이 작품이 발표됐을때. 꽤 논란이 됐다고 한다. 여자의 포즈가 너무 도전적 이어서 남자들이 불쾌했었나 보다. (자세히 보면  수동적인 포즈 같으면서도. 남자의 목을 휘감은 저 적극적인 팔과. 키스의 역동성은 여자로부터 나온다.)
 20세기 이전, 초 까지의 여성은 남자와 동격조차도 아닌 인간 이하의 대상으로 봤다고 한다. 그러한 사회상. 가치관 에서 저 여자의 포즈는 대단히 도발적인 것이었고, 20세기의 새로운 여성상의 시작을 예고하는 작품이 되었다.
 사진속에서도 저 남자의 손의 표정에 자꾸 시선이 간다. 왠지 긴장한 듯한 저 손이 심금을 울린다. 어떤 그림이던 조각이던 손의 묘사 처리가 미숙하면 맥이 빠지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로댕의 조각 작품은 손의 표현에 있어서 압권이다. 조각에 마지막 숨결을 불어넣는 로댕의 솜씨야 말로 신의 손 이라고 불릴 만 하다.

 이번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왼쪽의 '안드로메다' 라는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이다. 작은 사이즈의 작품인데 어떠한 큰 조각상 보다 더 내 가슴을 울렸다. 저 여인의 등을 보면서 무한한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뭐 이런 요상한 기분이 다 있나..
나도 잘 모르겠지만, 저 등의 표정? 극 사실적인 등의 묘사를 보면서 삶의 환희와 비애를 동시에 느끼는 그럼 감정이었다고 할까. 등의 미세한 굴곡들과 섬세한 근육 표현은 여성의 육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엉덩이나 가슴, 혹은 손이나 허벅지가 아니라 등 이었구나 라는 확실한 자각을 일깨웠다.
 저 덩어리의 아름다움. 더 정확히 말해서 여체의 아름다움은, 이 지구상의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성적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근원적인 그리움에 대한 소망이나, 미의 본질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같은 계절의 몸매가 아름다우면서 노출이 심한 여인을 보는 것은 도시 라는 미술관의 살아있는 조각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여자들이 오해하는 것이 남자가 조건반사 처럼 길거리의 늘씬한 다른 여인에게 고개를 돌리게 되는 상황인데, 내가 보기엔 그런 시선은 남자의 본능적인 잠재의식의 발로이고, 통제 할 수 없는 유전자의 뿌리깊은 영향인 것 같다. 나의 경우는 신체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대해서 유미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 같다. 솔직히 9할 이상은..또 사람 또는 사물이 내 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 의 아름다움도 있다고 생각한다.
 설명되지 않는 눈의 입 맞춤은 도처에 있지만, 마음의 잠식, 정신계의 충격은 안드로메다 만큼 초월적이다.

 이 방에 전시된 작품들은 에로틱한 작품이 많고, 로댕의 여자 누드 드로잉, 스케치 들도 전시 되 있다.  여체는 미의 본질인 것인가..예술의 영감은 여체의 아름다움에서 시작하는가...

 다음 방에는 로댕의 연인인 까미유 끌로델의 조각들이 전시 되 있다 그 둘은 대단한 사랑이었던듯. 한 사람이 미칠 정도였으니. 그리고 로댕의 원래 부인에 대해서도 설명해 줬는데, 로댕이 너무 부러웠다. 아무리 까미유 끌로델과의 사랑이 깊어도. 본 부인을 내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들은 이야기를 잊어버려 설명하긴 힘들지만. 이자벨 아자니 가 주연한 영화 까미유 끌로델을 추천한다. 꼭 다시 챙겨 봐야 겠단 생각을 그 때 했었으나. 아직도 보지 못하고 있다. 곧..감상을. 젊은 이자벨 아자니를 보는 기쁨도 함께..

 마지막 방에는 프랑스의 대문호인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의 조각이 인상 깊었다. 특히 발자크의 조각은 구상(똑같이 닮게 만든 조각)을 넘어서 작가의 독자적인 해석. 표현이 가미된 추상의 영역으로 진화된 조각을 선보인다. 발자크는 대단한 추남이었던 모양인데, 독특한 삶의 방식을 가졌던 사람인 모양이다. 오후 4시에 잠을 자서 밤 12시에 일어나. 활동하고, 하루에 마시는 커피 양이 어마어마 했고, 그래서 일찍 죽었나.. 아무튼 꽤나 기인 이었던 모양이다. 이 사람의 글에 매우 관심이 가는데 로댕이 만든 조각을 보니, 사람의 형상 보다는 사람을 본뜬 두꺼비를 만들어 놓은거 같아 보였다. 외모가 어쨌거나, 이 대단한 추남의 영혼은 정 반대로 아름다울 것 같다. 그러니 대문호라는 호칭이.. 사람을 외모의 잣대로만 평가하기는 참 섭섭한 일 일 것이다. 
 


 위 사진은 로댕의 '성당' 이란 작품인데, 전시된 작품은 아니고 인터넷서 사진을 검색하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소개해본다.  솔직히 말이 필요없는 울림을 전달한다. 저 부드러운 형상 속에 모든게 담겨 있는것 같다. 우리의 존재 근원 자체도..

 나는 조각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느끼며, 앎과 직관사이의 간극을 좁혔다. 미술 관람의 뿌듯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예를 들자면 배*우의 사진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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