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5가 어느 허름한 건물에서 IMF 실직자를 위한 사진 강좌를 맡고 있을 때였다. 직장을 잃은 약 서른 명 남짓의 사람들이 사진 분야의 취업을 위한 재교육을 받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 들었다. 10대에서 60대까지 저마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다 뜻하지 않는 경제 위기에 실직자가 되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매우 난감했다.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직업전선으로 나아갈 사진을 가르쳐야 하는지, 아니면 사진이란 무엇인가부터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할지, 아니면 고급스런 사진 테크닉을 통해서 순수 및 예술사진을 가르쳐야 할지 참 막막했다. 그래서 우선 이들이 왜 이곳을 오게 되었는지, 그 많은 노동부 실직자 프로그램 가운데서 사진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에게A4 용지 한 장씩을 건네면서 이곳을 찾은 이유를 쓰도록 했다.

 

 한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스무 명 정도가 제출을 했다. 이것들을 단숨에 읽어내려 가다가 가슴을 적시는 한 장의 이유서와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다 싶어 그들에게 읽어주면서 짧은 시간동안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방향을 잡게 되었다. 사연의 주인공은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 1년이 채 안되어 실직을 당한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사연은 대략 이러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는데 단짝 네 명이 놀러왔습니다. 졸업하면 서로 만나기도 어렵다고 해서 기념사진이라도 찍자고 했습니다. 마침 카메라도 있고 필름도 있었습니다. 우린 마당으로 나가 서로 번갈아가며 추억을 위해, 우정을 위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다가 장독대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기로 했습니다. 삼각대를 가지고와 막 카메라를 막 올릴 때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막내 여동생이 보고 있다가 자기도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달려왔습니다. 일단 우리끼리 찍고 싶어서 ”안돼“하고 밀쳐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셔터가 눌러져 ”찰칵“소리를 냈습니다. 다시 찍으러 갔는데 그것이 마지막 필름이었습니다. 그 막내 여동생은 이틀 후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마지막 사진에 밀쳐진 동생의 빨간 바지 한 짝이 찍혀있었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릅니다. 함께 찍을 걸, 그렇게 같이 찍고 싶어 했는데 못 찍게 밀쳐낸 것이 가슴에 못이 박히고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이라도 배워 제 동생 같은 아이들을 찍어주고 싶어서 찾았습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 4개월 동안 실직자들에게 가르쳤던 사진의 모습은 이것들을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사진의 본질과 사진술의 활용, 그것은 사진의 존재 이유에 관한 것이었고, 또 예술로서 사진의 활용에 관한 것이었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은 왜 이 땅에 왔는가. 지난 160 여년 동안 사진의 한 일은 무엇이었으며, 세상은 사진에 의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학습시켰다. 그리고 또 빛을 통해 구현되는 사진술이 어떤 수단과 도구로서 현실과 만나 촬영, 현상, 인화를 통해서 표현되는가를 가르쳤다. 돌이켜 보면 그때, 사진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과 만나고자 했던 실직자들에게 강조했던 학습의 내용은 이것이 전부였고 모두였다. 테크닉보다 사진의 의미, 즉 의미로서의 사진, 특히 존재증명, 부재증명으로서 사진의 의미를 일깨웠고, 또 그것들이 어떻게 찰나의 미학으로서 자리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사진은 1839년 8월 19일 프랑스에서 다게르라는 사람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명된 다. 그러나 역사에서 누가 발명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진이 왜 세상에 나타나야 했는지, 나타난 사진이 어느 곳에 어떻게 이용되었는지가 더 중요했다. 때문에 사진만큼 분명한 탄생 이유와 분명한 쓰임새가 있는 표현매체는 없다. 사진에는 다른 예술 장르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출생신고서를 갖고 있다. 왜 발명되게 되었는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밝히는 출생신고서가 사진에는 있다.

 

 사진이 지난 165년 동안 걸어왔던 모습, 이 땅에서 수행했던 모습들은 출생신고서의 내용이다. 바로 존재증명과 부재증명이었다. 사진은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잘 찍고 못 찍고에 앞서 사라진 부재를 이야기한다. 세상의 모든 사진은 어떤 이유로 찍혀졌건 간에,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찍혀졌던 간에 숙명적으로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를 말한다. 그때 거기, 그 자리에 존재했으나,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없다는 존재증명과 부재증명이 사진의 본질이고, 사진의 시작점이자 끝점이다. 사진예술은 이것들을 형상화 하는데 있다. 그래서 회화나 음악, 시와 소설과 달리 미적 감각과 쾌락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여느 표현매체와 달리 목숨보다 소중한 인간 존재의 자국과 정체성을 위해서 존재한다.

 

세상의 모든 사진은 존재에 대한 상처이고, 눈물이고, 그리움이다. 위대한 인물 사진과 위대한 다큐멘터리 사진이 말하듯이 사진은 사라진 존재 앞에서 그 존재가 저렇게, 저런 모습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 아픈 시간의 상처를 안긴다. 이것이 사진예술의 토대이다. 먼 훗날 그때 이런 모습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 하려 했던 예술의 모습, 다시는 올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영원히 기억하고자, 영원히 기념하고자 순간을 붙잡아두려는 순간성이 예술의 모습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많이 찍혀진 사진이 인물사진이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찍혀진 장소가 집이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찍혀진 순간이 기념의 순간이다.

 

한 장의 사진 속에는 인물이든, 풍경이든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를 지시한다. 시간의 변화이고, 철학적으로는 생성과 소멸의 순간이다. 사진예술은 순간을 겨냥한다. 생의 한 순간을 날카롭게 잘라 영원이 정지시키는 순간을 늘 노린다. 그리하여 찍혀진 주인공들이 사라지는 순간 생의 한 때를 의미화 한다. 수많은 가족사진이, 수많은 증명사진이, 수많은 기념사진이, 수많은 인물사진이 이러한 의미 속에 있다. “저게 나였다는 사실을”... 그렇게 사진예술은 시간이 예술의 토대가 되었고, 테크닉은 시간 이미지를 극화하는데 기여해왔다. 19세기 위대한 초상사진가 나다르의 사진에서부터 영국의 카메론 여사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사진에서 다이안 아버스 사진까지, 수많은 사진들은 여기에 봉사했다.

 

사진을 “찰나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정적 순간이란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을 의미하고, 생의 한 순간을 정지시켜 영원히 그때의 순간으로 남게 하는 결정성을 의미한다. 전자가 사진술에 관한 이야기라면, 후자는 사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다. 훌륭한 사진이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을 찰나적으로 포착하는데 있고, 그 대상들을 영원히 정지시키는 시간 속에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의 사진으로 말해지는 까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도 순간에 의해 태어나고, 순간에 의해 역사화 되었던 사진이다. 기념사진과 가족사진이 의미부여 되고, 인물사진이 각별한 애정을 받았던 것도 찰나의 미학 속에 있는 순간성이다. 사진예술의 절정은 삶의 한 때를, 다시는 못 올 시간을, 결코 재생될 수 사건을, 결코 두 번 다시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을 담는데 있다. 사진에서 결정적 순간이중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셔터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 시간과 공간이 하나가 된 순간,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그때 그 순간이 결정적으로 박힐 때이다.

 

사진은 세상이 날아와 박히는 모습이다. 찍히는 순간 세상의 모습이 축소되어 필름에 앉는 모습이다. 이것이 화학약품에 의해 현상되고 인화지에 의해 인화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해서 “사진(寫眞)”이라고 부른다. 사진에는 존재했던 세상, 존재했던 시간, 존재했던 공간이 고스란히 박혀있다. 그래서 이 부분이 오늘날 디카나 폰카에 의해서 찍혀지는 디지털 사진과 다른 모습이다. 디지털 카메라에는 세상이 날아와 박힌 모습이 아니다. 0과 1이라는 수치만 있다. 그래서 필카가 마치 지문처럼 세상이 묻어나는 색인영상이라면, 디카는 이미지 없이 오로지 0과 1만 있는 수치영상이다. 뿐만 아니라 필카가 시간의 순서를 바꿀 수도 없고 삭제할 수 없는 반면에 디카는 마음대로 시간의 순서를 거역하고 마음에 안 들면 지운다. 필카와 디카의 또 다른 차이점이다. 거스를 수 없는 것과 거스를 수 있는 것, 지울 수 없는 것과 지울 수 있는 것의 차이가 양자의 차이다.

 

 

세계의 역사 속에서 사진이 수행했던 업적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은 진실을 찾는 업적이었고, 증명하는 업적이었다. 전쟁터에서, 사건 현장에서, 가난과 질병 앞에서 그리고 평범한 삶의 한 가운데서 사진기는 포착하고 사진은 말해왔다. 진실을... 그래서 사진은 진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국 공통어처럼 사진을 통해서 진실을 보았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참인지 깨달았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에드워드 웨스톤, 로버트 프랭크, 로버트 메이플소프 등 위대한 사진가들은 진실을 말했던 사진가들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디지털이 세상을 지배한다 해도 인류가 여전히 진실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 사진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언제나 영원한 찰나의 미학 속에서 숨쉴 것이다.

찰나의 미학으로서의 사진. 글 진동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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