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선생님의 모든 책을 읽고 있지만, 이 책은 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것으로..학위논문으로 쓰여진것을 대중을 위해 쉬운 글로..풀어쓴 것이라 한다. 모든 책들이 다 명저이지만 이 책은 초기 저작으로써..한 철학자의 큰 테마와. 대중과의 소통으로써의 글쓰기의 모범을 여실히 보여준다. 타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써의 철학. 그럼으로써 진정한 주체성의 회복이 친절한 글쓰기의 전형으로 다가온다.

 책의 처음. '장자'를 읽는 이유와 그 의미 라는 장의 첫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책을 읽는 의미에 대한 글이므로, 귀감이 된다.
 "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책만큼 시간과 생성이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없다. 지금 내 앞에 방금 서점에서 구입한 책이 있다고 해보자. 이 책은 우리에게는 미래의 시간이자. 나를 이러저러하게 다르게 생성시킬 수 있는 잠재성이다. 이 책의 20페이지를 읽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 책을 통해서 이미 읽은 19페이지들이라는 과거와 지금 펼쳐져 있는 20페이지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그 많은 미래가 생성된다. 그러나 사실 이미 읽었다는 이 19페이지들도 흘러간 과거라기보다는 어느 때이든 미래로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읽었던 앞 페이지들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의 책이 열어 주는 다층적인 시간 속에서 자라왔고, 또 자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자라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책이 이런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책들은 그저 한 장 한 장 넘겨지고는 끝내 잊혀지게 되는 운명에 빠져 있다. 이렇게 책에는 다시 넘겨지는 책이 있는가 하면 한 번 넘겨지면 잊혀져 버리고 마는 책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매번 넘기고 다시 넘기는 책, 나아가 세대를 거쳐서 다시 또 넘겨지는 책을 고전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고전은 덧없는 세상에서 영원성을 확보한 행복한 책이다.~~"

장자. 사실 모든 동.서양 철학자들의 이름은 수시로 들어왔지만. 그들이 말하는 생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인간 사유의 역사를 모르고 나의 존재와 세상을 알 수 있겠는가. 최소한 몇몇 철학의 봉우리들은 올라가봐야 한다. 높은 곳에서 관조하고. 나의 삶과 어떻게 접목시킬지 궁리하고 행동하고. 실천해 봐야한다. 그 중의 동양 철학의 관심사 중에 하나가 장자 였다. 이전에 장자를 독파해 보려고..시도해 보려 했지만..너무나 많은 책들과..너무나 많은 해석들..속에서..우왕좌왕 했고. 솔직히 원문의 의미와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 형식의 고전은. 많은 해설서 들이 나왔나보다.    
 저자들의 해석이나 주장이 다양한데. 내가 시도해보려 했던..묵점 이란 호를 가진 노학자?의 장자에서는, 현재 나온, 장자에 관한 책들은 거의 쓰레기 라며, 입에서 말하기 조차 민망한 단어를 책에 써가며 혹평해댔다. 뭐든지 극단으로 치닫는 생각은 무서운법. 고전의 해석은 정답은 없는법 아니겠는가..어떻게 현실에 접목시켜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공부여야 하지..누군 맞고 틀리고 가 어디 있나..장자가 오늘의 나비가 되어..비웃을 일이다. 

 제목 그대도..저자는 장자를..타자와의 소통을 직접적으로 문제삼고 있고,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사유하였으며, 나아가 이런 소통을 몸소 실천하려고 했던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p.15
 장자철학의 고유성은 바로 자신의 철학체계에 타자를 도입했다는 데 있다. 타자는 사유라는 사변적 공간에서가 아니라 항상 삶이라는 실천적 공간에서 문제가 된다. p.16
 타자. 타자성의 중요성은 많이 들어왔어도, 그것을 몸소 사유하고, 실천하기는 만만치 않았음을 시인한다. 너를 진정으로 알려는 의지와 노력이 사랑의 다른 이름 일수도 있다.
 아무래도..아직은 나의 견해보다는. 책을 요약해 새겨두고 실천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 
 
 
 요약 _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서양에서는 진리 (Truth) 라고 한다면 동양에서는 이것을 도 라고 한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는 사실 주체와 타자의 일치라는 근본적인 경험을 전제로 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p.230

 결론장 _ 우리가 진정으로 타자와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유아론적 꿈으로부터 깨어나야만 한다. 문제는 꿈과 깨어남이 주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 꿈꾸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깨어있는 것이냐.' 의 문제는 주체로부터 결정될 수 없는 것이다.
 꿈과 깨어남을 결정하는 기준은 주체라기보다 타자 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자에게는 꿈이 '주체가 스스로에게 닫혀 있음' 을 의미한다면, 깨어남은 '주체가 타자에게로 열려있음' 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개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비약을 (Salto mortale) 수행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비약에 실패해서 주체와 타자 사이에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타자와 소통하려면 우리는 이런 심연을 건너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주체 형식의 변화는 조우한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점에서 장자가 권고하는 자유는 우리가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부단히 자신을 극복하고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가 실현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주체가 새로운 타자와 소통해서 새로운 주체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정 이야기에서 _ 마음을 수양해서 인칭적 자의식을 제거하려는 노력도 타자와 잘 소통하기 위해서다. -~ 도대체 왜 마음을 수양하는지 망각한 채 마음만을 수양하게 된 것이다.
 타자와 관계하지 않는 허심이나 소를 자르지 않는 날카로운 칼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단지 편집증에 지나지 않는 자기도착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삶의 공간은 우리가 매번 예기치 않던 타자의 타자성과 마주치게 되는 공간이다.

 철학은 기존의 삶의 형식에 대한 비판과 수양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철학은 기존의 삶의 형식과 질적으로 다른 주체 및 타자 형식, 즉 주체와 타자를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서야 이념을 통해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철학의 진정한 역할이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장자로부터 배우게 되는 마지막 교훈일 것이다.
 새로운 체계, 새로운 의미, 나아가 새로운 주체를 우리의 힘으로 구성하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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