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에 이어서..

 시내를 벗어나니 공기는 더욱 좋아졌다. 내가 오늘 하루 묵을 게스트하우스는 동.북부 위치의 일주도로상에 있었다. 작고 아담한 집에 젊은 여행객들이 우글거렸다. 군대 침상같은 마루에 자리를 배정받고, 곧 있을 저녁을 기대하며 그냥 반 쯤 누워 제주도 관련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어둑어둑해지는 사이 더욱 많은 여행객들이 몰려왔다. 대부분 서울에서 온듯한 젊은 여행객들이었다. 일을 보는 젊은이들 또한 서울에서온 장기 체류자들인것 같았다. 암튼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 내일 뭘 할까를 생각해보았다. 다시 시내로 나가서 스쿠터를 빌려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날씨는 매우 흐렸고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한다.

 두툼하고 흰기름띠가 적당히 박힌 돼지고기가 모닥불에 달궈진 솥뚜겅 위에서, 바삭한 기름 알맹이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워낙 두툼해서 다 익어서 먹기 까지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오늘밤에 묵는 사람이 무려 40명이 넘었다. 거의 매일 이 정도라면 숙박비가 싸다 해도 꽤 괜찮은 수익인 셈이다.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면서 어느 연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야기중에 서울의 옆동네에 살고 고등학교 동문인것을 알았다. 서로 눈치껏 나이는 묻지 않았다. 나보다 어릴것이라 확신했는데, 상대방은 내가 외모적으로 더 어려보여서, 내심 옥식각신하는것 같았다. 우연히 여행지에서 만난, 동문과 선후배 따지는것이 우습지 않은가..그저 참 세상이 좁구나 란 생각뿐..아니 우리나라가 좁구나일뿐.. 다음날, 숙소를 떠날때, 인사하며 어짜피 헤어지니까, 서로 물었는데, 그는 2년 후배였다. 제주도에서 그렇게 만난 인연이라면, 언젠가 동네에서 우연히 볼 인연이 또 있겠지.

 고기는 환상적이었다. 사냥 후 숫사자처럼, 엄청난 포식을 한 후, 마을을 거쳐 해변가 쪽으로 산책을 갔다. 500미터를 걸어가니 조그만 해변의 월정해수욕장이 나왔다. 배도 부르고 바다를 마주보니 제주도에 온 것이 온 몸으로 체험되었다. 저 멀리 보이는 캄캄한 바다를 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바다쪽으로 깊숙히 쭉 뻗은 방파제의 끝에 앉아 명상을(좌선)했다. 거세지는 바람과함께 방파제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잡생각은 힘을 잃었다. 서울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몇시간만에 이렇게 파도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내 감각들에 주는 선물같았다. 귓볼을 감싸 흐르는 바닷바람이 내 영혼을 쓰다듬는다. 한 시간정도 앉아있다 일어나서 하늘을 보니, 유독 반짝이는 별 하나만이 하늘에 놓여있었다. 

 숙소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일찍 누웠다. 누군가의 코걸이에 중간중간 깼지만, 새벽 5시에 일어났을떄는 너무나 상쾌했다. 새벽에도 그리 춥지 않기에 다음에 제주도 여행은 침낭과 매트리스로 비박을 해도 되겠단 생각을 해보았다. 6시에 전원 기상해서 승합차 두대에 나눠타고 다랑쉬 오름앞에서 내렸다. 날씨가 흐렸기 때문에 다랑쉬오름은 안 올라가고 대신에 그 앞에있는 낮은 갈대숲 오름을 올랐다. 흐린아침에 하늘이 개일 기미가 안 보인다. 고급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중년사진쟁이들이 많이 띄인다. 김영갑의 책이 영향이 큰 듯하다. 롤라이플렉스로 몇장찍긴했는데 빛이 그리 좋지 못하다. 롤라이플렉스는 역시 여자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오래된 쇳덩이 치곤 크나큰 영광이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다들 제각각 흩어졌다. 시내에 나가 스쿠터를 빌려 탄다고 해도. 비도 올것 같고, 사진을 찍더라도 빛이 안 좋아, 스쿠터 투어는 포기했다. 월정해수욕장에서 시내쪽으로 해안도로를 걸었다. 2년전 엠티에서 매우 맑았던 그 길을 걸었던것 같은데 반대로 걸어서 인지 새로웠다. 2년만에 내가 무엇이 변했나 생각해보기도 하고, 후회에 몸서리 치기도 했다. 일요일이라 다음이 주최하는 국제 마라톤 대회의 참가자들이 씩씩거리며 도로를 내 달리고 있었다. 비바람이 흩날리고 에메랄드빛 파도는 거셌다. 비바람이 몰아쳐 해변의 정자에 누워 달콤한 잠을 자기도 하며 배낭에 눌린 어깨를 쉬게했다. 제주도 동,남부 여행을 포기한게 그리 후회롭지 않았다. 보고,찍는 것보다. 이 순간의 느낌이 더 중요했다. 



 오후에 시내의 바닷가 쪽의 해수랜드 찜질방에 들어갔다. 시설이 매우 좋다. 해수욕, 찜질방 수면실 등등 모든게 지대로다..2년전 첫 제주도방문시 숙박했던 모텔이 바로 뒤에 있었다. 냉장고에 촬영된 필름을 놓고가 다시 찾으로 온 기억이 있다. 다시 그곳이다. 내일의 한라산 등산을 위해 일찍 쉬었다. 바다가 내려보이는 큰 유리창앞에서 가지고온 탐라견문록이란 책을 읽었다. 여행길에 선택받은 두권의 책중 하나인데..그저 그렇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버릴 수도 없이, 배낭무게에 일조해야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느긋하게 목욕을 했다. 버스터미날서 6시에 성판악행 첫차여서 여기서 5시에는 나가야한다. 택시를 못잡을 생각에 걸어갈 것을 염두해두면서 새벽부터 서둘렀지만 5시에 딱 문앞을 나서니 택시가 딱 문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게 왠 행운이람.. 그리고 택시탈때까지 비가 사정없이 내렸는데, 비도 뚝 그쳣다. 덕분에 버스터미날에서 무료한 40분을 보냈다. 근처에 편의점도 식당도 없다.
 성판악으로 가는 버스는 새벽의 안개를 뚫고 5 16 도로를 달렸다. 동이 트면서 서서히 안개가 걷혔다. 성판악 휴게소서 간단히 김밥을 먹고, 7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백록담까지 9.6km 긴 길이다. 그러나 코스의 2/3 까지는 마치 리조트의 산책로 같은 아주 편한 길이었다. 그래도 어느 순간 해발 1000 미터가 넘더니,, 공기의 느낌이 점점 틀려진다. 진달래 휴게소에서 아주 맛나게 사발면과 초코파이를 먹었다. 혼자온 젊은 여인이 눈에 띄었는데,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산에 다니는 복장도 아닌것이, 사연이 있는듯했다. 뭐 어쨋거나 정상에 다가올수록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무가 없어지는 고원지대가 나타나고 구름이 시선 밑에서 뭉게진다. 바람은 차고 칼칼해지고, 처음보는 자연의 모습에 온 몸이 열린다. 이제는 배낭의 무게도 잊었다. 


 파랗고 깊은 호수를 상상했지만, 백록담의 물은 거의 말라 있었다. 운무속에 갇힌 백록담 정상은 이내 점점 날씨가 개이더니, 하산할때는 뙤약볕이 내리쬤다. 백록담이 보이는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찍어주는 사이, 아까 그 혼자 온 여인이 올라와서 새침이 사진찍길래 사진찍어줬다. 공주과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 한라산 정상의 영험한 분위기와는 상반되었다. 그나저나 체코에서 온 청년이 먹고있는, 식빵에 참치캔을 언져서 먹는 그 기름 향기가 아주 죽여줬다. 나도 나중에 꼭 산에가 먹으리라 다짐하며.. 초코파이로 허기를 달랬다.


 관음사 코스로 내려오는 하산길은 경치는 정말 죽여줬다. 그러나 내려오는 길이 8.6 km 인데,너무 길어서 지루했다. 1950 미터의 산이니 내려오는데만도 한 나절이 걸렸다. 무릎에 부하가 많이 걸리면서 이번여행도 급격히 마무리 되고 있었다. 이 글 또한 지루해졌다. 해수욕탕에 담근  내 두 다리는 꽤 뚜꺼워져 있었다.
  멀리 나아가리라.. 오래동안 길의 참맛을 알아가리라..
서울 아침의 창공은 희뿌연 안개로 혼탁했다. 아마도 바로 아래 사진의 저 구름들이 많이 그리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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