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때처럼 집을 나서, 채 오분이 안 걸리는 집 앞 초등학교의 한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 날 아침은 잔 뜩 흐린 잿빛하늘 이었다. 운동장 너머 구로구청 건물에선 하얀 먼지들이 피어 올랐다. 건물 위 사람들의 다급함과, 그 상공을 유유히 선회하는 헬리곱터의 관망이 대조적이었다. 아마 그 날이 있기 얼마 전 쯤엔. 옆 건물인 경찰서 옥상에서. 매우 작아보이는 사람들의 생소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무지막지한 몽둥이질의 모습은, 어른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낳게 했다.

 매캐한 냄새가 교실까지 퍼지는듯 했다. 홍씨 성을 가졌던 담임 선생님의 옷에서 풍겨오던 기분좋은 냄새는 사라졌다. 첫 교시가 시작하기도 전에. 다들 집에 가라고 했다.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그저 우리는 일찍 집에가 놀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기대치 않은 일상의 일탈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땐 몰랐고. 그 후로도 잘 몰랐었다. 그 날 아침의 흐린 풍경과 헬리콥터의 경박한 소리만이 생생히 기억난다.

 우리가 매일 야구하며 놀던 장소는 구로구청의 후문 담벼락 이었다. 포수 대신 담벼락 기둥의 밑에서 2~3번째 칸이 스트라이크 존 이었다. 그날 오후 친구들과 그 공터를 나서니. 카키색 군복을 입은 전경들과 . 대학생들이 도로에서 대치하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일반 시민들이. 구경꾼 라인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구경하는 아저씨들 틈에서, 그 대치 상황을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한 여대생이 전경에게 붙잡혀 머리채를 잡힌채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구경꾼들 중에 한 아저씨가..큰 소리로. 분노섞인 울분으로 개탄을 했다. 개새끼들 이라고...전두환 노태우 개 씨발 새끼..어쩌고 저ㅉ고. 난 인상 좋아 보이는 대통령 아저씨 한테 욕하는게 이상하게 들렸었다. 그러나 그 여학생이 끌려가는 모습을 본, 내게도.. 그 울분은 사람들에게 전염되는듯 했다. 초등학생인 나까지도. 가슴 저 밑바닥에서 뭔가가 움찔거렸다.

 우리는 꼬마의 지위를 이용해 이리저리 구경을 다녔다. 방패를 든 전경들이 왜이리 큰지. 그 앞에 서면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들을 보는둣 했다. 대치의 소강상태 중에 대학생 진영에서 한 명이 나와 돌을 던졌다. 무언가를 외치며. 그는 있는 힘껏 전경들을 향해 던졌다. 돌의 궤적은 정말 높고 길었다. 최동원 보다도 폼이 멋졌다. 야구를 좋아하는 우리는 그 역동적인 모습에 반했다. 단지 그 멋진 폼에 반해 또 무언가를 던지기를 바랬다. 어린 꼬마 구경꾼이었으므로..
 투명한 소주병에 불이 피워 올랐다. 시커먼 연기가 아지랑이 처럼 꼬불거렸다. 아까 그 멋진 폼의 대학생 아저씨가. 그걸 휙휙 돌리면서. 전진했다. 곧 폭발할것 같은 그 불은 창공을 가르며. 최후를 예고했다. 아스팔트위에 순식간 불꽃이 피워올랐다. 잠깐의 전열이 흐트러지고..불은 금새. 사그라 졌다. 멋있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LA올림픽의 어떤 장면보다도 더 멋졌다. 슈가 레이 레너드 보다 더..

 거의 매일 테레비 에선 내가 보았던 장면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복덕방이나 슈퍼 앞에 모인 아저씨들은 이상한데 가서 엄청 고생한? 고생 하는 이야기들을 했다. 우리 아빠는 대통령이 죽으면. 김일성이 쳐들어온다고 했다. 엄청 무서웠다. 나는 이승복 처럼 말 할 자신이 없었다. 그 인상 좋은 대통령 아저씨가 죽지 않기를 바랬다. 꿈속에조차 김일성이 나올까 두려웠다. 

 몇 일 후, 우리는 예전같이 사람들이 물러간 그 공터에서 야구를 하며 놀았다. 선동렬의 역투는 화염병과 돌덩이를 던지던 멋진 대학생 형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게 했다. 우리가 신나게 노는 동안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전선줄위에 일렬로 늘어선, 삐악거리던 제비들은 점차 그 수가 줄어 들었다. 대신 다음해 서울엔. 흰둥이 와 깜시 등이..많이 모여 들었다. 어느날 학교에선 세상에서 제일 빠른 사람인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을 보러 갔다. 테레비 속에서 보던 사람들이..한 가득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싸인을 부탁했고..그들은 카메라로 나를 찍었다. 

 그렇게 1987년의 그 풍경은 저멀리 묻혀졌다. 

 TV토크쇼에 나온 유명한 여성 소설가가 그해. 그날. 그곳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자료화면도 잠깐 보여주면서.. 나는 묘한 감흥이 들었다. 그 때 머리채가 잡혀 끌려가던 여대생의 모습과..잊혀졌던 다양한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꽤 이뻣을 여작가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꼬마의 모습과. 그 세월의 강이 추억에 잠기게 했다. 그녀는 나름 파란만장한 자신의 인생을 행복의 깨달음을 얻은 상태로 이야기 했다. 동시공간의 어떤 경험? 풍경을 공유했다는 동질감이 그녀의 삶 이야기에 더욱 빠져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미 그녀의 삶이 내 마음에 들어온 듯 하다. 그때의 대학생 누나가.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는 딸이 있단다. 그 세월의 흐름속에 나는. 무엇을 보았나..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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