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대학 친구의 결혼식 참가를 끝으로 결혼 의식 3부작의 막을 내렸다. 1부는 약  10일전의 동기 모임. 2부는 토요일 저녁의 스튜디오 웨딩 촬영. 3부는 천호동의 한  웨딩홀에서 열린 결혼식.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긴 지하철 노선속에서 대략 한 달간의 내 삶을 돌아보았다. 마치 요즘의 이상한 날씨 처럼 나는 여전히 변덕스러운 마음의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대학 동기들은 나보고 언제나 설레임중이라고 말했다. 미스터 셀레임. 나쁘지 않은 말이다. 단지 마침표가 없다는게 문제 라면 문제다. 나는 여전히 진흙속에 핀 연꽃이 되기를 갈망하며 크고 부드러운 솜털을 가진 연잎으로 빗방울들을 모으고 있다. 넓적하고 투명한 물방울은 영롱하게 나를 비춘다.

망망대해는 깊고 푸를 지언정 아무것도 아니다.

변덕스러웠던 4월에 내가 깨달은 것은 삶에서 실패,실수라고 여겼던 점에 대해 집착? 하면 모든 것은 부정성의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성공의 기억은 성공을 낳게 한다. 누구나 자신의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지만 자신의 장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긍정적인 면이 발달되고, 어떤 일이든 성공에 가까워진다. 어떤 일에 성공하는 사람은 그 순간순간. 자신이 성공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 좋은 경험이 또 밑거름이 되고, 되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나의 이성문제는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Darkside of the Moon> 이다.  달의 어두운 저편을 탐구하는 꼴이었다. 우울하고 회의적 이었다. 언젠가 영국의 소설가 닉 혼비의 <High Fidelity>(영화로도 나왔는데 국내 제목은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영화보단 소설이 더 밀도 있음) 를 읽으면서 소설속의 주인공 이 깨달은 바를 나도 역시 가슴 깊이 끄덕대고 있었다. 그것은 첫사랑? 첫 이성관계의 잘못된 시작이었다. 첫 단추 부터 잘 못 끼운 셔츠의 구겨진 모양새 였다. 어느 정도 구겨질 때 까지 자신의 첫 단추를 잘 못 끼웠는지를 모른다. 소설속에서는 주인공이 옛 여인들을 한 명씩 찾아가서 그 때 왜 그랬냐고 물어가면서 자신의 문제를 찾아가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현실에서 내가 그런다면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결혼해서 엄마가 되어있을 그 모습을. 19살 고3의 나는 이상한 짝사랑의 열병에 사로잡혔었다. 그것이 첫 단추의 심각한 오류였다. 그 때 왜 그녀가 프랑스 누벨바그의 기수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줄 앤 짐> 처럼 그랬는지 묻지 않아도 이제 나는 알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소심함에서 오는, 표현할줄 모르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나를 시험했고,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소설 '소나기'처럼 애틋하게 쓸수도 있지만 세월은 나를 여기도 아닌 거기도 아닌 곳에 놓았다. 단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아이는 중학교때 자살시도를 했던적이 있고, 피가 나면 잘 멈추지 않는 병?을 좀 앓고 있었다는, 조금은 이상한 아이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이상했었고..

 마침표를 못 찍고 도망쳤기 때문에 답습은 계속되었다. 21살 때에는 한 여인에게 다가가 마음을 열었다. 여인이 대뜸 했던 말은 '저 서른 이에요'. 내 눈엔 25살로 봤기에, 용기내어봤지만, 그 당시 서른이라는 말은 왜이리 충격적이었는지..지금은 아니지만 그 말은 '저 노처녀 에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아무렴 어때. 하지만 나는 말을 잊어버렸고, 10분간 같이 걸으면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뒤 한 달 정도 매일 같은 시각에 마주쳤는데, 그저 눈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내 눈은 여전히 아무렴 어때 였지만, 그 여인의 눈은 노처녀의 슬픔과 새파랗게 젊은놈한테 고백을 받은 기쁨이 살짝 공존하는 듯 했다. 나는 이미 서른이 넘었고, 간혹 그 여인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지, 여전히 노처녀일지 궁금하다.

 그 뒤 숱한 찌질함의 기억이 엄습해 오지만 아까 말했듯이 나는 이제 좋은 기억?만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가려 한다. 잠시 기억을 들추어보니, 이런, 내가 왜 그런 여자애들에 시큰둥했는지 지금의 판단으론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생각할 수록/생각 보다/ 많다. 타율 3할7푼5리?ㅜㅜ 그렇게 야무닥지고 이쁜 실밥의 하얀 공들을 쉬크하게 뻥뻥 외야로 날려 버렸다. 왜 그랬을까. 누군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나는 왜 애써 방망이를 휘둘렀을까. 연애의 보수적 성향?. 그럴지도 모르는 것이 나는 항상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감정의 여파에 꽤 오랬동안 휘둘려 왔다. only one 의 정신이 마침표를 제대로 찍지 못한상태에서 유통기한을 갱신하고 갱신했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책이나 영화를 많이 봐서 어떤 미디어적 허상이 나를 잠식했던듯 싶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미디어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눈과 눈길의 대면에서 오가는 것이다. 나는 침묵이 두려워 많은 말들을 했던 것 같다. 그 침묵 조차도 대화의 여백의 되어 소통의 요소가 되는 것을 안다. 이심전심의 묘는 진실한 마음속에서 흐른다는 사실을 이제 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음은 내 자신의 고유한 투명함을 유지하는 길이다. 진실한 마음은 어떠한 언어로 발설되는 순간 탁해진다. 나는 이제 그것을 간직한다. 그 동안 내 타율의 핵심은 본의 아니게 시큰둥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감정의 줄다리기는 무의미하다. 감정의 줄다리기는 정치가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개개인의 자립과 민주주의 원칙을 고수할때에 진정한 사귐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왜 그녀가 엷은 미소만 짓고 있었는지를 이제 좀 알 것도 같다.

 몇주전에 만난 대학 후배가 영화 500일의 썸머를 보면서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05 05 10 작성.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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