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1편에 이어. 2011/04/09 - [음악] - Smashing Pumpkins 스매싱 펌킨스 라는.. 이란 말에 대한 슬픔.

 내가 스매싱 펌킨스에 결정적으로 빠지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 신촌의 음악(뮤직비디오) 감상실 이었던. 백스테이지 에서 본. 이 SNL 라이브 영상 이었다. 이미 그 전 부터 많이 좋아하고 있었지만. 이 라이브를 본 이후론 매니아 가 되버렸다. 처음으로 빌리 코건이 삭발한 모습도 인상 깊었고..그 광폭한 디스토션 사운드가..엄청난 음량으로 전율케 했다. 90년대 중반 얼터너티브의 완결과. 밴드를 소개하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포스트모던한 영화의 환기. 그 추억이 정겹다.


 이 노래가 수록된 3집 멜론콜리와 무한한 슬픔 은..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렸고. 줄줄이..히트곡 들이 쏟아졌다. tonight tonight, 1979, zero, muzzle, thirty three 등등..더블 앨범으로 700만장을 팔았다.
 
 1996,97년 그들은 최고의 전성기로써. 세계 투어 공연이 한창이던때. 투어 키보디스트가..마약 과용으로 호텔에서 사망했고. 동시에..드러머 지미 챔벌린이..알콜 중독으로 밴드의 독재자 빌리 코건에 의해 짤리게 된다. 최고의 성공의 나날에 드리우진 검은 그림자 였다. 사실상 밴드는 3인조로 활동하던 이 때 부터 하강 곡선을 그리게 된다. 4번째 앨범인 'Ava Adore' 1998 년에 발표 되었지만. 전작의 크나큰 성공에 반푼어치 기대도 못 미치는 작품이 되 버렸다. 매니아 입장에선..이것도 좋은 음반 이었지만. 성공의 피로가 누적되었고. 빌리 코건의 엄마가 암으로 죽은 개인 적인 슬픔과. 밴드 사운드의 중축인 출중한 드러머가 낙오 된 상황에서..진이 빠진 앨범이 되었다.

 이 들이 98년에 다시 세계 투어를 돌 때, 유럽의 대 규모 야외 공연 등에선 여전히 많은 관중을 동원하고 있었지만.. 이미 오아시스와 버브 등의 브릿팝 밴드에 비해선 록의 열정의 많이 사그러졌다. 그들이 다시 유럽 투어를 돌 때. 전세계에선 버브의 비터 스윗 심포니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2000년에 5번째 음반인 마쉬나를 발표함과 동시에..밴드의 해체를 선언했다. 90년대 록 음악씬을 주름잡던 밴드가 10년의 활동 끝에 역사 속으로 희미 해져 갔다. 이 마쉬나 투어 에서 2000년 7월 4일? 에 우리나라 체조경기장에서 내한 공연을 펼쳤었다. 내한 공연 사상 전설의 공연으로 불리는.. 뮤지션과 관객이 혼연 일체가 되어..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은 공연 이었다. 관중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혼신을 다해 공연을 펼쳤고..뮤지션. 관객. 서로 감동했다. 빌리 코건은 공연 중에도 자신들이 했던 수많은 공연 중에서도..탑 5안에 드는 미친 관객이라고 그랬고..그 후 많은 인터뷰 에서도 한국 공연을 손꼽았었다. 이렇게 청춘은 스매싱 펌킨스의 해체와 더불어..아쉬움을 남기며 흘러가고 있었다. 
 한국 공연의 마지막 앵콜..어쿠스틱 1979

빌리 코건은 스매싱 펌킨스를 해체후, 새로운 밴드 즈완 Zwan 을 결성한다. 드러머는 역시 스매싱 펌킨스의 지미 챔벌린..나머지 멤버들은. 인디 밴드에서 활동하는 걸출한 뮤지션들 이란다. 그러나 이 역시 2003년 단 한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해체 되고 만다. 역시나 빌리 코건의 독재..모든 곡을 자기가 만들고 프로듀스 하고.. 기타가 세명임에도 불구하고..자기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모양새인.. 다음 라이브 모습을 봐도..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따로 없다.


 그 후. 솔로 앨범을 냈다가 실패를 맛보게 된다. 시집도 출간했고. 영화 음악 활동 등을 하다 2006년에 다시 스매싱 펌킨스를 재 결성 한다. 즈완 때와 마찬가지로. 드러머 만 함께 하고 나머진 새 인물들로..스매싱 펌킨스는 빌리 코건 자체 였기 때문에 어떤 밴드명을 갔다 대도. 빌리 코건의 밴드 였다.

 나는 새로 결성한 스매싱 펌킨스의 앨범을 좋아하지 않는다. 메탈에 가까운 하이 게인 사운드는..시대에 뒤쳐져 보인다. 그렇다고 빌리 코건이 개러지 락을 할 기대는 안 하지만. 뭔가 음악에 진한 향수가 없었다. 이미 성공할 만큼 성공한 뮤지션이어서 인지. 다작의 작곡 재능이 밑천이 드러났는지 모르겠지만. 90년 초 중반의 외줄타기 하면서 짓이기며 내뱉는 치열한 감성을 느끼기 힘들었다. 하지만 최근에 만든 곡들을 들어보니..어떤 완숙한 경지에 오른 것도 같다. 40대 중반에 이른 편안함이 음악에 흐른다. 낭랑한 목소리는 여전하고. 음악을 만드는 솜씨는 더욱 탄탄하다. 사진에서 보듯이, 커트 코베인 의 미망인. 커트니 러브와의 관계도 꾸준한 것 같다. 이제는 시카고를 대표하는 유명인사인 그는 또 어떠한 음악을 내 놓을지..귀추가 주목된다. 예전 만큼은 아니지만 열렬한 팬으로써..감사를 보낸다. 그가 늙어 가는 모습에..나의 청춘도 어느덧 흘러 갔다..

 작곡 하는 모습.


 


 


 최근에 내가 자주 가는 디지털 관련 동호회의 게시판에 스매싱 펌킨스 라는 밴드가 MP3를 배포합니다. 라는 제목으로 글이 올라왔다.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스매싱 펌킨스 라는.. 이라니.. 댓글이 무수히 달렸는데..아니나 다를까. 나같이 충격을 받은 같은 세대 들이 많았다. 다들..90년대의 청춘을 보냈던. 그들은, 실질적으로 90년대의 록 음악중 가장 성공적인 밴드 였던 스매싱 펌킨스가, 뭐뭐.. 라는 밴드로 치부되어 버린 작금의 현실에 세월의 무상함을 여실히 느꼈다. 

 데뷔 한지 20년 째가 되는 록 밴드 이고, 현재는 리더 빌리 코건 혼자 독수공방하는 모양새니, 모를수도 있겠지만. 나같이 90년대 얼터너티브 록 세대 에겐. 꽤 서글프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 내겐 스매싱 펌킨스가 청춘의 모든 분노와 슬픔을 대변했고. 어루만져 주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의 대학생들이 위 사진속 스매싱 펌킨스가 데뷔할 때 태어난 이들이다. 

 1991년에 데뷔 앨범을 발표한 이래. 1993년 부터 1998년 까지. 그들은 전세계 최고의 밴드중 하나였다. 2000년에 서울에서의 첫 공연이자 마지막 무대를 선사하고 해체했고. 지금은 다시 빌리 코건 혼자서 꾸려 나가고 있다. 어느덧 위 사진속 20대 초반의 그들은 40대 중반의 중년으로 변해 있었고. 그들은 역사속 레전드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스매싱 펌킨스의 통산 3집 앨범인 멜론 콜리 와 무한한 슬픔은 1995년 후반부에 발매 되었다. 이 앨범은 총 러닝 타임이 2시간 분량의 더블 앨범 이었다. 피아노 소품부터. 전형적인 얼터너티브 록. 헤비메탈, 데스메탈. 인더스트리얼. 동요와..자장가 같은 노래 까지. 28곡은 무슨 종합 선물 셋트와 같았다. 이런 방대한 양과 다채로운 형식. 예술관에도 불구하고. 한 뮤지션이 혼신을 다해 만든 이 음반은 대중적으로 700만장이 팔리는 큰 성공을 거뒀고. 1996년, 그래미 어워드를 비롯한 주요 세개의 시상식을 석권했다. 내가 대학생이 된 그해에는 스매싱 펌킨스가 지구상 최고의 록 밴드였다.


 

 고등학교 때 부터 이들의 데뷔 음반을 들어왔고. 이들의 성공을 알린 2집 사이미즈 드림 에서의 Today 란 곡은 너바나와 펄잼 이외로. 이들이 대중들에게 급속히 파급되는 효과를 낳았다. 

 스매싱 펌킨스의 시작은 사진속 아주 명민해 보이는 시카고 출신의 백인 청년에 의해 시작 되었다. 1967년 물고기자리 출생의 빌리 코건은 블루스 뮤지션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음악적 재능은 물려받았지만. 가정은 불안정 해 보인다. 유아적 자폐성이나 신경증적인 요소, 멜랑콜리함이 음악의 주요 성분이다.
 커트 코베인이나 에디 베더에 비해 가정사에 얽힌 개인사가 많이 들어나지 않았지만. 장애인 동생을 돌봤다는 미담과. 유투브에 보이는 청소년기에 찍은 홈 비디오에서 그의 기타 실력은 이미 대단한 인물이 될 싹수가 엿 보였다. 

 생긴것 만큼 고등학교 때 꽤 공부를 잘 했던 모양인데. 대학을 안 가고. 뮤지션의 꿈을 품고. 더 마크드 란 밴드를 만들어 플로리다에서 활동한다. 그 후. 시카고의 레코드 점에서 만난 일본계 제임스 이하와 의기 투합해 스매싱 펌킨스를 만든다. 아마 이 쯔음에 그의 여자친구가 나중에 커트 코베인의 부인이 될 커트니 러브 였다. 같은 67년 물고기좌의 커트 코베인 과의 악연은 이미 한 여자를 두고..싹트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스매싱 펌킨스의 데뷔 음반인 Gish (1991)는 너바나의 Nevermind (1991) 와 프로듀서가 같았다. 부치 빅 이란  사람인데 록음악계의 거물이다. 나중에 가비지란 밴드를 이끈다. 같은 해에 같은 프로듀서에 의해 만들어진 음반이지만 너바나의 음반은 역사에 남을 대대적인 반향을 얻어낸 반면. 스매싱 펌킨스의 음반은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성공에는 이르지 못한다. 
 
 자의식 강하기로 유명한 빌리 코건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여자친구였었던 커트니 러브도. 커트 코베인 에게로 갔다. 밴드내에선 다른 멤버들 끼리 연애질의 위태로움과 드러머는 알콜 과다 섭취등등..안밖으로 문제가 산 만했다. 밴드의 리더로써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가 상당했다고 한다. 그당시 그는 신경 쇠약에 걸려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머리 숱도 없어 보이고 그의 표정은 정말. 생의 긴장과. 부담속에 부서질듯 말듯한 모습이다. 


 그는 2번째 음반에서도 성공을 못하면 일반 직장인이 될 각오로 자신의 모든 음악적 역량을 쏟아 부었다. 그의 완벽주의적 성격은. 밴드의 모든 곡의 작사 작곡. 프로듀스 까지 맡은 것도 모자라 베이스와 세컨 기타 파트 까지 멤버들을 놔둔채 자신이 다 녹음 했다고 한다. 대단한 독재주의자다. 다른 멤버들의 분노와 상처가 컷음은 말 할 것도 없고. 밴드는 성공하기도 전에 풍지박살 날 뻔 했다. 그런 와중에 심기일전의 노래가 Today 였다. 최악의 상황에서 그는 Today is the greatest day I've ever known 이라고 부른다. 그리곤. 이 노래를 시점으로 대박이 난다. 

 http://www.youtube.com/watch?v=RHUd896Sur0

 이 뮤직 비디오의 마지막 홀로 남긴 빌리 코건의 모습은 우연찮게 현재의 스매싱 펌킨스를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곡이 수록된 2집 사이미즈 드림은 많은 곡들이 히트침으로써 3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다. 개개의 곡도 좋지만. 앨범의 완성도 면에서..빌리 코건의 완벽주의 성향이 느껴진다. 앨범의 첫 곡 Cherub Rock 의 겹겹이 쌓은 오버 더빙은. 묵직한 오버드라이브 기타의 감동을 자아낸다. 한 예술가가 역경을 거쳐 모든걸 다 쏟아부은 역작이다. disarm 과 mayonaise 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 다음에 계속..2011/05/07 - [음악] - Smashing Pumpkins 스매싱 펌킨스 라는 밴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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