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두툼한 책이다. 그래서 다른 목적으로도 책이 쓰일 수 있다..목침이 아니라..지침? 베개로 삼기 딱 좋은 두께다..양장본 이지만 본문 종이가 재생지 여서..딱딱하지 않고..적당히 푹신한 감도 있다. 아마 내가 구입한 책들중..가장 두꺼운 책 일듯 싶다. 보통 두꺼운 책들은 사놓고 읽진 않는데. 이 책은..처음 부터 쭉 읽어야 하는 책 이 아니라..동.서양의 철학자들을 각각의 주제로..배치해 놓고. 한 주제에 두 철학자가 어떻게 사유하는지 보여준다. 철학의 역사서는 아니지만..워낙 다루는 철학자가 많아서..다 읽고 나면 큰 주요한 흐름은 궤뚫을 수 있을것 같다. 강신주 선생님의 다른 저서와 마찬가지로..대단히 친절한 문장이다. 전혀 어렵지 않고..몰랐던 철학자들에게..벌써 친밀한 느낌마저 든다. 책 속의 이 많은 철학자들을 공부한 저자의 지적 범위에 대해 놀라게 된다. 대중을 위한 쉬운 철학책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저자 본인이..철학의 어려움을 사유하고. 어떻게 쉽게 전달할까. 를 고민한 결과이다. 이 분 강좌를 하나 듣고 있는데..오늘..저자 싸인을 받아두려..이 책을 들고 나오는 걸 깜박 잊었다. 오늘이 마지막 강의 인데..

 다음글은 시골의사 박경철 님의 리뷰. 참조 바랍니다..

철학 vs 철학’(그린비 펴냄)의 저자 강신주는 우리가 접하는 모든 학문의 근본이 수학과 철학이라고 말한다. 수학은 과학적 구조를 가진 모든 학문의 기초다. 이를테면 과학기술이나 건축, 설계, 기계공학, 심지어 계량경제학 같은 분야 말이다. 이렇게 수학적 지식이 바탕을 이룬 학문의 발전은 탑을 쌓아올린다는 특징이 있다. 이를테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는 것이다. 누군가가 쌓아올린 지식과 이론이 부정되면 누군가는 다른 돌을 얹어간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탑의 높이는 점점 더 까마득해진다. 소위 과학문명의 발달이다.

 

반면 철학을 바탕으로 한 학문의 특징은 수평적이고 산발적이다. 문학, 사학, 철학 같은 인문학이 그러하다. 데카르트를 알아야 칸트를 알고 칸트를 알아야 헤겔과 라캉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데카르트, 칸트, 소쉬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모두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미적분을 모르면 로켓을 발사할 수 없지만, 데카르트를 몰라도 데리다를 논할 수 있다.

 

인문학의 존재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과학기술의 시대에 첨탑만 쌓아올리면 정작 이 탑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용도가 무엇인지 고민할 여유가 없다. 그저 높이, 더 높이만 외친다. 이를 해결하는 것이 사유의 힘이고 통찰이다. 결국 수학적 학문과 철학적 학문의 교집합만이 높이와 넓이 이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인 셈.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당위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과학기술의 경쟁에 내몰려 통찰과 안목이 소멸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식의 첨탑 쌓기 경쟁이 전부가 되면서 문명은 이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과학 우위의 시대에 철학 부재가 낳은 비극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문학을 논하기 전에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 물리학을 위해 수학이 필요하듯, 인문학을 하려면 철학부터 접해야 한다는 사실. 인문학 특강을 듣기 위해 최고경영자(CEO)들이 호텔에 몰려봐야 철학적 바탕이 없으면 헛일이다.

 

철학적 사유를 도외시한 채 인문학을 논하는 것은 인수분해를 모르면서 혜성의 궤적을 추적하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는 않다. 철학으로의 접근이 어렵기 때문이다. 철학을 논하는 언어들은 생경하고 철학자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는 불편하다. 이런 철학적 사유와 언어들에 쉽게 접근하는 방식이 바로 철학사를 읽는 것이다. 난해한 철학자들의 개별적 사유를 공부하기에 앞서 철학의 조류가 변하는 과정과 배경을 이해하고, 그들 철학의 논점과 요지를 이해한다면 자신에게 적합한 철학자를 만나는 것이 가능하다.

 

한데 철학사 책을 읽다 보면 미로의 입구 찾기는 고사하고, 도처에서 미궁에 빠지고 만다. 연대기적 구성을 중심으로 한 천편일률적 형식의 철학사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갈증이다. 이런 고민을 해결해줄 만한 역저가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이다. 저자는 이 시대의 고민들을 논제로 내세워, 이 논제에 대립적인 또는 비교될 만한 논지를 전개한 철학자들의 사유를 병렬로 배치했다. 어떤 주제에 대한 철학적 사유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철학에는 정답이 없는지, 정답이 없음에도 우리는 왜 철학을 가까이해야 하는지를 철학자 간의 논리싸움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수많은 철학사 책에서 느끼게 되는 갈증을 일거에 해소한 걸작이자, ‘철학사의 아이폰’이라 하겠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철학사의 주요 논점이 현대의 화두로 변신해 부활하는 실상을 목도하고, 인류사상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간파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철학 입문자뿐 아니라, 철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일지도 모른다. 구름 위에서 고아한 단어들만 쏟아내며 철학을 ‘그들만의 학문’으로 끌어안던 철학자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출처] 철학대 철학|작성자 시골의사


 강신주 선생님의 모든 책을 읽고 있지만, 이 책은 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것으로..학위논문으로 쓰여진것을 대중을 위해 쉬운 글로..풀어쓴 것이라 한다. 모든 책들이 다 명저이지만 이 책은 초기 저작으로써..한 철학자의 큰 테마와. 대중과의 소통으로써의 글쓰기의 모범을 여실히 보여준다. 타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써의 철학. 그럼으로써 진정한 주체성의 회복이 친절한 글쓰기의 전형으로 다가온다.

 책의 처음. '장자'를 읽는 이유와 그 의미 라는 장의 첫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책을 읽는 의미에 대한 글이므로, 귀감이 된다.
 "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책만큼 시간과 생성이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없다. 지금 내 앞에 방금 서점에서 구입한 책이 있다고 해보자. 이 책은 우리에게는 미래의 시간이자. 나를 이러저러하게 다르게 생성시킬 수 있는 잠재성이다. 이 책의 20페이지를 읽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 책을 통해서 이미 읽은 19페이지들이라는 과거와 지금 펼쳐져 있는 20페이지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그 많은 미래가 생성된다. 그러나 사실 이미 읽었다는 이 19페이지들도 흘러간 과거라기보다는 어느 때이든 미래로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읽었던 앞 페이지들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의 책이 열어 주는 다층적인 시간 속에서 자라왔고, 또 자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자라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책이 이런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책들은 그저 한 장 한 장 넘겨지고는 끝내 잊혀지게 되는 운명에 빠져 있다. 이렇게 책에는 다시 넘겨지는 책이 있는가 하면 한 번 넘겨지면 잊혀져 버리고 마는 책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매번 넘기고 다시 넘기는 책, 나아가 세대를 거쳐서 다시 또 넘겨지는 책을 고전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고전은 덧없는 세상에서 영원성을 확보한 행복한 책이다.~~"

장자. 사실 모든 동.서양 철학자들의 이름은 수시로 들어왔지만. 그들이 말하는 생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인간 사유의 역사를 모르고 나의 존재와 세상을 알 수 있겠는가. 최소한 몇몇 철학의 봉우리들은 올라가봐야 한다. 높은 곳에서 관조하고. 나의 삶과 어떻게 접목시킬지 궁리하고 행동하고. 실천해 봐야한다. 그 중의 동양 철학의 관심사 중에 하나가 장자 였다. 이전에 장자를 독파해 보려고..시도해 보려 했지만..너무나 많은 책들과..너무나 많은 해석들..속에서..우왕좌왕 했고. 솔직히 원문의 의미와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 형식의 고전은. 많은 해설서 들이 나왔나보다.    
 저자들의 해석이나 주장이 다양한데. 내가 시도해보려 했던..묵점 이란 호를 가진 노학자?의 장자에서는, 현재 나온, 장자에 관한 책들은 거의 쓰레기 라며, 입에서 말하기 조차 민망한 단어를 책에 써가며 혹평해댔다. 뭐든지 극단으로 치닫는 생각은 무서운법. 고전의 해석은 정답은 없는법 아니겠는가..어떻게 현실에 접목시켜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공부여야 하지..누군 맞고 틀리고 가 어디 있나..장자가 오늘의 나비가 되어..비웃을 일이다. 

 제목 그대도..저자는 장자를..타자와의 소통을 직접적으로 문제삼고 있고,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사유하였으며, 나아가 이런 소통을 몸소 실천하려고 했던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p.15
 장자철학의 고유성은 바로 자신의 철학체계에 타자를 도입했다는 데 있다. 타자는 사유라는 사변적 공간에서가 아니라 항상 삶이라는 실천적 공간에서 문제가 된다. p.16
 타자. 타자성의 중요성은 많이 들어왔어도, 그것을 몸소 사유하고, 실천하기는 만만치 않았음을 시인한다. 너를 진정으로 알려는 의지와 노력이 사랑의 다른 이름 일수도 있다.
 아무래도..아직은 나의 견해보다는. 책을 요약해 새겨두고 실천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 
 
 
 요약 _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서양에서는 진리 (Truth) 라고 한다면 동양에서는 이것을 도 라고 한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는 사실 주체와 타자의 일치라는 근본적인 경험을 전제로 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p.230

 결론장 _ 우리가 진정으로 타자와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유아론적 꿈으로부터 깨어나야만 한다. 문제는 꿈과 깨어남이 주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 꿈꾸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깨어있는 것이냐.' 의 문제는 주체로부터 결정될 수 없는 것이다.
 꿈과 깨어남을 결정하는 기준은 주체라기보다 타자 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자에게는 꿈이 '주체가 스스로에게 닫혀 있음' 을 의미한다면, 깨어남은 '주체가 타자에게로 열려있음' 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개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비약을 (Salto mortale) 수행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비약에 실패해서 주체와 타자 사이에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타자와 소통하려면 우리는 이런 심연을 건너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주체 형식의 변화는 조우한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점에서 장자가 권고하는 자유는 우리가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부단히 자신을 극복하고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가 실현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주체가 새로운 타자와 소통해서 새로운 주체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정 이야기에서 _ 마음을 수양해서 인칭적 자의식을 제거하려는 노력도 타자와 잘 소통하기 위해서다. -~ 도대체 왜 마음을 수양하는지 망각한 채 마음만을 수양하게 된 것이다.
 타자와 관계하지 않는 허심이나 소를 자르지 않는 날카로운 칼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단지 편집증에 지나지 않는 자기도착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삶의 공간은 우리가 매번 예기치 않던 타자의 타자성과 마주치게 되는 공간이다.

 철학은 기존의 삶의 형식에 대한 비판과 수양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철학은 기존의 삶의 형식과 질적으로 다른 주체 및 타자 형식, 즉 주체와 타자를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서야 이념을 통해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철학의 진정한 역할이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장자로부터 배우게 되는 마지막 교훈일 것이다.
 새로운 체계, 새로운 의미, 나아가 새로운 주체를 우리의 힘으로 구성하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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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만나기 전, 이 책의 저자인 강신주 님의 근작인 ' 상처받지 않을 권리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라는 부제가 붙은) 를 우연히 읽었었다. 우연한 책의 인연이 이렇게 강렬할  줄이야 그 땐 몰랐었다. 그 책을 빌려놓고도 다른 책을 읽느라, 반납을 얼마 남기지 않고 펼쳐 들었는데, 오호라~ 노다지를 캐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서 강신주 님의 다른 저작물을 검색해서 두번째로 읽은 책이 이 책이었다. 

 이 책 역시 좋은 책의 모든 요소는 다 갖추고 있었다.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책의 구성 요소들도 완벽했다.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본문의 내용을 친절하게 꿰뚫고 있으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각 장마다 더 읽을 책들을 소개하는데,책의 핵심을 간략히 찔러준다. 공부의 의욕을 내심 불러 일으킨다. 또 본문의 주석 또한 이렇게 쉽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엔 완벽히 좋은 책 이어서, 앞으로 이런 책을 쓰고 싶단 욕망과 함께, 강신주 님의 글쓰기는 나의 롤 모델 이 되었다. 공부의 내공이 매우 높아야 하는 당위성이 따라야 하겠지만, 마음속에 목표가 생긴다는 것은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철학이 없는 삶과, 삶이 없는 철학은 말 자체만으로도 뭔가 불안하다. 저자는 한쪽이 부재한 현대사회의 병듬에 대해서 아쉬워하고, 절름발이 와 같은 마음의 불안은 삶과 철학이 만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 책의 목적은 철학과 삶의 만남을 주선하는,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을 더욱더 풍성하고 윤택하게 만드는것에 있다. 철학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으려면, 한때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삶에 대한 성찰이자 기록이어야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삶의 낯설게 보기를 통하여, 맹목적인 삶을 반성하고, 철학적 사유(거리두기)를 통해서 삶을 제대로 음미하자고 말한다.

 철학적 사유로 우리는 미리 삶에 낯설어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철학은 우리에게 ' 내가 나중에 알게 될 것을 지금 알 수 있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고 한다. 철학적 사유가 불편함과 당혹감을 준다고 해도, 삶의 현실에서 직면하게 될 그것에 비한다면 적다고 할 수 있다. * 그런 점에서 철학적 사유란, 다시 반복되지 않을 소중한 삶을 후회 없이 살겠다는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주옥 같은 본문의 글들은 빌려온 책의 한번 보기 로는 미흡하다. 이런 책 이야 말로 책장에 꼿아두고 두고두고 음미하고 사유해야 할 책이다. 좀 더 낳은 공부의 길에 친절한 Hub 로써 역할을 톡톡히 한다.
 많은 사유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사랑에 관한 바디우의 철학이 인상 깊었다. 사랑은 하나가 아니라 둘을 지향해야 한다는. 논리에 나도 쉽게 수긍되었다. 개별성의 존재를 존중하고 인정할때에 진정한 사랑은 가능하다는 말이었던 듯 싶다.

 산을 좋아하는 내게 p75의 글은 주옥같았다. _ 우리가 산에 오르는 이유도, 산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아주 보잘것없는 정도로 작게 조망할 수 있는 고도감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 자신이 사는 곳과 우리가 살 수 없는 곳 사이의 차이를 즐기는 것이기도 합니다._ 이런 예시로 참된 철학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지금 여기'와, '어디도 아닌곳' 사이에 있으려고 하는 의지를 통해 존재할수 있다고 한다. '어디도 아닌곳'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 여기' 를 반성하고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감, 혹은 낯섦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라고..

 공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저자의 책을 통해서, 철학과 삶이 부재한 우리의 일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편견과 생활만이 가득찬 이 사회에서 자살을 예방하는 길은 각자 삶의 철학을 이뤄, 철학이 있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여야 합니다. 하루에 자살하는 사람의 숫자가 절 깜짝 놀라게 해서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나','고통' 을 한 발 물러서 낯설게 보자고..

앞으로 글을 독백체에서 마지막 문단 처럼 대화체로 바꿔볼까 생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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