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데니스 호퍼가 죽었을 때, 단연 생각나는 영화 '이지 라이더'.  코폴라 감독이 죽었을 때, 공중파 티비에서 더빙판으로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를 방영하는걸 찜질방에서 보고, 역시 대단한 감독과 영화라고 찬탄을 했다. 마찬가지로 데니스 호퍼 감독이 죽었을 때, kbs에서 이 영화의 더빙판을 해줬던 모양이다.  (코폴라 감독은 아직 안 죽었다 함.. 착각하고 있었음)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비디오 테입 대여 시절이었다. 사막을 가르는 두 대의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사진은 남자들에게 무의식 깊숙이 뭔가를 자극하고 갈망하는 방아쇠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자유라는 이름의 도달하기 힘든 이상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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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 라이더(Easy Rider 1969) : 파국이 예정된 자유와 평등을 향한 질주

  데이스 호퍼(Dennis Hopper) 감독

 

  1960년대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원자폭탄으로 얼룩진 20세기에 대한 비판의식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매카시즘으로 얼어붙었던 1950년대를 지나 60년대에 도착한 미국은 좌파 경향의 사회운동(흑인, 여성의 권리운동과 반전운동)과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으로 흥분과 혼돈이 교차하고 있었다.

 

  사회운동은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날로 심각해져 가는 베트남 전쟁과 거듭되는 암살사건(케네디 형제,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은 1970년대의 패배를 암시하고 있었다. 장르-스타-스튜디오 시스템의 공식으로 운영되던 할리우드 영화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발표된 1967년은 ‘혁명의 해’로 불릴 만큼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아메리칸 뉴시네마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1960년대 젊은이들의 복잡한 감정을 영화로 담아낸 결과였다.

 

  데니스 호퍼의 1969년 작 <이지 라이더>는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결정판이었다. 빌리(데니스 호퍼)와 캡틴 아메리카(피터 폰다)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미국을 찾아서’(캡틴 아메리카의 가죽 점퍼와 헬멧과 모터사이클에는 성조기가 그려져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올리언스까지 여행을 떠난다. 돈은 마약 밀매로 마련했고, 일용할 양식은 마약과 마리화나이다. 그들의 여정에 히피들과 변호사 조지 핸슨(잭 니콜슨)이 스쳐 지나간다. 히피들은 문명을 거부하고 기존의 질서를 비판하면서 무한한 ‘자유’가 허용되는 새로운 삶과 기독교의 원시공동체를 꿈꾸고, 조지(조지 워싱턴?)는 전쟁과 빈곤, 지도자와 모든 인생고가 사라져버린 평등한 사회를 이야기한다.

 

  영화는 자유와 평등을 명시한 미국 독립선언의 실현 불가능성, 아메리칸 드림과 미국 역사에 대한 회의로 빠져 들어간다. 모래땅에 씨를 뿌리는 히피들은 이상주의자들이며, 알코올 중독에 빠진 조지는 허무주의자일 뿐이다. 빌리와 캡틴 아메리카는 뉴올리언스에서 열리는 마르디그라(사육제의 마지막 날)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하지만, 축제의 제물로 바쳐진 것은 기성세대(또는 보수주의자들)의 총에 맞아 죽는 그들 자신이었고, 남은 것은 아메리칸 드림의 파산이었다.

 

  노예시장으로 악명 높았던 뉴올리언스에서, 실패했다고 고백하는 두 사람은 미국 역사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에 할리우드식 영화 만들기에서 벗어난 방법이 영화의 주제를 뒷받침한다. 스타를 배제하고, 카메라를 스튜디오에서 야외로 옮기고, 장르를 패러디하는 저예산의 독립영화. 서부영화의 와이어트 어프와 빌리 더 키드는 캡틴 아메리카와 빌리가 되고, 서부에서 동쪽으로 무대를 옮긴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패배자가 된다. 동성애를 암시하는 버디 무비와 가정이 없는 로드 무비의 형식, 록 다큐멘터리와 뮤직 비디오를 예견하게 하는 반전 무드의 록 음악 사용……. 고전적 영화문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와 미국 언더그라운드 운동의 기수 케네스 앵거의 <떠오르는 전갈궁>은 참고서가 되었다.

 

  “위대한 영화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되었을 때 오류가 발생한다”는 고다르의 예언처럼 데니스 호퍼와 아메리칸 뉴시네마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1970년대의 보수주의 물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모두 빼앗기고 덧없이 시들어갔다.

 

  ㅡ김경욱(영화평론가)


「이지 라이더」는 한 편의 예술작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스토리는 별로 대단할 것이 없다. 빌리(데니스 호퍼)와 캡틴 아메리카(피터 폰다)라는 별명의 젊은이가 큰 돈을 벌게 되어 멕시코에 가서 마약을 구입한다. 이들은 부자가 된 기분으로 참회 화요일에 뉴올리언즈를 방문하겠다던 오랜 꿈을 실현하기로 하고 오토바이 두 대를 사서 국토 횡단을 시작한다. 도중에 모뉴먼트 밸리와 타오스 푸에블로를 비롯한 서부의 유명한 아이콘을 지나친다. 

그들은 히피의 코뮨에도 들르고 감옥에도 갇히게 되는데 거기서 만난 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빠져 나오고, 또 두 명의 매춘부와 함께 뉴올리언즈의 한 묘지에서 마약파티를 벌인다. 이 모든 것이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진다.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이 이야기는 1968년 이후 세대의 할리우드 영화의 발생단계에 속하는 영화이며, 처음으로 스크린에 ‘대안사회’를 담아낸 작품 중 하나다. 긴 머리에 선글라스를 쓰고 인디언 목걸이를 한 호퍼와 성조기가 그려진 헬멧과 오토바이를 탄 폰다, 두 오토바이족은 아이콘적 인물이다. 

사용한 마약의 양도 엄청났다(영화 속에서뿐 아니라 배우와 제작진이 소비한 양도 많았다고 한다). 두 주인공은 히피 여자들과 알몸으로 수영을 하고, 변호사 친구 조지와 마리화나를 피우며 캠프파이어를 하고 철학자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잭 니콜슨이 처음으로 맡은 큰 역할인 조지는 부잣집의 아들로 경직된 사회를 거부하며, 미국이 관습을 벗어난 모든 것을 두려워하며 파멸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물건이 되어 있는데도 자유롭다고 느끼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조지가 내뱉은 이 말은 곧바로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이지 라이더」는 대부분의 할리우드 관습에 도전한다. 젊은이에 의한, 젊은이를 위한 영화이며(이 영화를 감독할 당시 호퍼는 32세였다), 반문화의 기수인 스테펜울프, 지미 헨드릭스, 밥 딜런 등 음악이 등장한다. 주 인물(니콜슨, 호퍼, 폰다) 중에 스타는 없었고, 서사는 인물만큼이나 제멋대로다. 전통적인 사랑이야기도 없으며, 결말은 잔인할 정도로 비극적이다. 아주 적은 제작비로 엄청난 흥행수익을 올렸고 그럼으로써 할리우드의 관습에 반항하는 새로운 영화의 길을 닦아놓은 셈이다. 그중에는 다시 잭 니콜슨이 등장하는 「잃어버린 전주곡」과 「마빈 가든스의 왕」도 포함된다.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누가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호퍼는 자신이 단순히 연출과 출연만 한 것이 아니라 대본까지 책임진 이 영화의 ‘작가’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달리 보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주인공들과 조지의 대화 같은 영화의 가장 굵직한 장면은 사전에 테리 서던—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대본작업에도 참여했던—이 써놓았던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모두 동의하는 사실도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목이 서던의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_ 네이버캐스트


그들은 자유를 찾을 수 있었을까?


  1960년대 후반의 미국. 그 곳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좌파경향의 사회운동, 즉 흑인 인권운동과 반전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이 있었으며 날로 심각해져가는 베트남전, 그리고 거듭 일어나는 암살 사건 등이 가세하여 더욱 불안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 가운데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혼란 가득한 상황 속에서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어 하는 탈출에의 욕구를 담아낸 영화가 ‘Easy rider’라고 생각한다.

 

  빌리와 캡틴 아메리카. 이 두 젊은이들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들의 양식은 마리화나와 마약이었고 오토바이 두 대가 그들이 가진 재산의 전부였다.  비단 이 두 사람만이 자유를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는 건 아니었다. 오토바이 여행 여정중 만나게 되는 히피와 변호사 조지 또한 그러하다. 히피들은 문명을 거부함과 동시에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무한한 자유가 허용되는 삶과 기독교의 원시공동체로의 회귀를 꿈꾸었으며, 조지 또한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지만 두려워하며, 전쟁과 빈곤, 모든 인생고가 사라져 버린 평등한 사회가 되기를 지향한다.

 

  이들은 그럼 그렇게 원했던 자유를 얻을 수 있었을까? 환각제를 일삼으며 현실과 유리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온 것은 어이없는 죽음뿐이었고 남겨진 건 성조기와 고장이 나버린 오토바이 뿐이었다. 영화의 오프닝부터 끝까지 따라다니는 성조기는 이들의 머리위에서 항상 억압세력으로 작용하는 미국의 힘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이 죽어버림으로써 꿈이 모두 무산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 해석해 보면 그들은 실제의 삶에서 얻지 못한 자유를, 죽음이라는 잘못된 해결을 통해서라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다시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삶에서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꼭 어떠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메시지가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무언가의 혁명이 일어나려면 꼭 그만큼의 선동 세력이 있어야 하고, 얼마만큼의 희생을 감내해야 하고, 그 다음에야 무언가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정반합 구도가 아니던가. 공산주의를 밀어내고 자유주의가 이 세상을 다질 때까지의 과정이 그러했으며, 모든 새로운 체제가 들어설 때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희생까지도 감내하면서 나서는 선동주자들은 그리 많지 않은 소수일 뿐이다. 나머지 대다수는 겁이 나서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게 사실이다. 그들을 겁나게 하는 대상은 차마 대항할 수 없는 지배 권력 체제이다.

 

  영화는 처음의 독립선언서 정신을 망각한 채로 점점 자유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는 미국에 대한 반기를 들며 체제전복을 꿈꾸고, 점점 사람들을 위협하는 시대적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다룬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빌리와 캡틴 아메리카, 그리고 변호사 조지가 다 그러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높여보기도 전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는데 그들을 죽인 건 기존의 보수 세력들이었다. 데니스 호퍼 감독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폭력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도리어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닐까? 그들이 꿈꾸었던 건 어떻게 보면 모든 이들의 이상과도 동일할 것이다. 불안이 없는, 빈곤이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고 무참하게 세 명의 이상주의자들이 죽는 장면을 통하여 그 현실의 실현 가능성이란 점점 더 힘들어 질 것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_ 네이버 리뷰어


1960년대 후반 미국은 공포의 매카시즘이 사라지고 나서 한쪽에서는 베트남전쟁 확산을 본질적으로 반대하는 반전운동과 인권운동을 필두로 하는 사회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다른 한쪽에는 보수주의 세력도 있었다. 이러한 진보와 보수주의 논리 속에서 젊은이들에게는 기성 세대의 권위를 부정 또는 저항하는 분위기가 나타났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의식 구조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이다.

마약을 판매하여 모터사이클을 구입한 와이어트(피터 폰다)와 빌리(데니스 호퍼)는 남부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 뉴올리언스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데 독특한 방식으로 생활하는 히피족을 만난다. 히피족의 철저한 무소유적인 공동체 생활방식에 관심이 끌려 얼마 동안 같이 생활하지만 자신들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라고 훌쩍 떠나 어느 도회지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변호사 조지 한슨(잭 니콜슨)을 만나는데 한슨은 기존 질서의 억압과 권위주의에 신물이 나 이들과 같이 여행을 떠난다. 한슨이 여행 중 청년들에게 살해되자 와이어트와 빌리는 허무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환각의 세계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도 뉴올리언스에서 사육제의 마지막 날에 농부들의 총에 사살된다.

1960년대 아메리칸 뉴 시네마(American New Cinema)의 대표작으로 영화계에 충격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계의 흐름까지 바꾸어놓은 걸작이다. 영화에서 젊은이들은 새로운 것을 향해 떠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허무한 죽음뿐이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는, 나약한 젊은이들이 저지르는 무모함과 충동적인 감정의 대가가 무엇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그들의 죽음 자체가 하나의 시대적인 아픔이다.

[출처] 이지 라이더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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