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감상하고 리뷰를 바로 써야지, 조금 지나서 쓰려고 하니, 막 보고나서의 할 말 많음이 어디론가 쏙 들어가버렸다. 

  매튜 매커너히가 당연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을만 했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디카프리오도 잘 했지만, 이 영화에서의 매커너히는 연기에 관해서 범접할 수 없는 지존의 경지에 오른 듯 하다. 그리고 '더 울프~' 에서의 짧은 조연 연기도 무척 인상깊었고, 원래 이 글에 앞서 리뷰를 쓰려 했던 영화 '머드(2012)'도 무척 좋았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이 배우는 포텐셜이 터지고 대운이 들어오는 시기가 맞물린게 아닌가. 다니엘 데이 루이스 의 연기와 필적하는 명배우의 반열에 들었다. 

 언젠가. 전성기 때,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를 찬탄했던 어떤 글이 떠오른다. 역할에 따라 살을 찌우고 빼고 그런 노력을 넘어서 같은 시기에 완전 극과 극의 정신적,심리적 벡터를 가진 인물의 연기를 완벽하게 오가는 거에 탄복한다는 요지였다. 나도 동의했다. 성격파 배우로의 이미지가 큰 그가 되게 가벼운 연기조차 영화에 완벽히 녹아드는 걸 보며 정말 남다른 배우로구나를 여실히 통감했다. 위에 말한 매튜 매커너히의 일련의 최근작에서도 이런 완벽한 배우의 모습이 눈에 띄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 우드로프가 로데오 경기에 출전한다. 성난 소의 등 위에서 중심을 잡는 그의 모습이 순간 정지되며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는 기존 제도와 권력에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그에 저항함으로써 사회적 진보를 이루게 한, 한 실존 인물에 대한 연대기 이자, 방탕한 탕아였던 자기 자신의 성장담이다. 영화의 감동은 주인공 우드로프의 변화의 양상에서 드러나는 인간애의 발현이다. 나만의 고통이나 이익이 아닌, 다수에게 되돌려지는 일종의 자비적 행보는 큰 울림을 준다. 그건 그가 전혀 도덕적이거나 평범한 사람의 가치에 준하는 삶이 아니라, 그야말로 쓰레기라 불릴수 있는 타락한 카우보이의 삶을 살던 텍사스 마초맨 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소가 갇혀 대기하는 밀폐된 공간에서 쓰리썸으로 떡치는 우드로프의 동물적 모습이다.(저런 질낮은 표현을 쓴것은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그 장면에 대한 인상의 사실적이자 제일 적합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_부디 저질이라고 치부하지 않기를.) 그 공간이 마지막 장면에서의 우드로프의 로데오 경기를 내다 보는 카메라의 시점이고 소 등위에서 중심을 잡는 우드로프를 순간 정지하여 보여주며 끝내는데, 공간을 통한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순환고리는 이 한편의 영화를 통해 한 인간 삶의 변화를 감동적으로 응축하고 있다. 개인의 쾌락.이기를 넘어선 공통의 가치에 투신 했던 자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의 여운은 오래 남았다. 

  아래 부턴 스포일러 포함 

  텍사스 카우보이 오리지널 마초 우드로프는 전기기술자로 일하며 술,마약,섹스,도박 등등 방탕한 삶을 일삼는다. 몸은 점점 말라가고 몸에 사건 사고가 터지면서,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병원에서 30일 시한부 삶을 선고받는다. 항 HIV 바이러스 치료제로 아직 임상실험중인 AZT란 약을 몰래 빼내어 복용하지만 상태만 악화 된다. 절박하게 직접 이 병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멕시코의 한 의사를 찾아 가게 되는데, 그 의사에게서 들은 말은, AZT의 부작용의 심각성과 그 대안으로 비타민, 아연, 단백질 등의 약제를 추천받는다. 미국 식약청(FDA)에 승인이 되지 않은 약품에 아직 규제가 없던 시절, 그는 대량으로 약품을 가져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이란 명칭으로 모텔방에 사무실을 꾸리고, 자기 처럼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에게 판매를 한다. 여기서 병원과 제약회사가 어떻게 공모하여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돈을 벌어들이는 더러운 공생관계를 볼 수 있고, 그것에 반하는 운동? 을 우드로프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이제는 에이즈가 공포의 병이 아닌 잘 관리하면 오래 살 수 있는 병이 된 것이다. 


  
  에이즈에 걸리기전 그의 삶은 너무나 난장판이자 동성애,여성성에 대한 극단의 혐오를 가진 악한 자로 보이지만, 시한부를 선고 받고 자신이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가 겪는 변화는 은근 감동적이다. 대놓고 휴머니즘적 환골탈태가 아니라, 그 따듯한 본성이 드러나는 몇몇 순간들이 그렇다. 비지니스 파트너인 트랜스젠더 레이언(자레드 레토. 남우 조연상 수상)에 대한 태도도 그렇고(대표적으로 마트에서 벌어진 일) 여자 의사와의 정서적 관계나, 경찰관 친구에게 보내줬던 약품 등등, 일면 더럽고 거친 그의 삶에 보석같이 빛나는 선한 본성의 발현이었다. 막판에는 식약청과 법원의 압박에도 자기 사비를 털어 아픈 사람들에게 옳은 약을 구해주고자 하는 자비심까지 엿보인다. 같이 일한 동료들이 나열해서 그에게 고마움과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장면에선 감동이 몰려왔다. 


   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 80년대 내가 꼬맹이 시절때에, 이 에이즈란 말은 공포 그 자체였다. 70~8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나 뉴욕을 위시해 전세계적으로 번진 희기병. 혈액에 면역 체계가 없어지는,, HIV 바이러스 자체가 규명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도 그려지듯이, 내 몸안의 특정한 세포나 바이러스를 죽이는게 아니라,(AZT는 좋은 세포도 다 죽임) 면역 체계를 강화시킬 수 있는 물질을 섭취하고, 자연적인 섭생을 함으로써 관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드로프가 레이언과 마트에서 장 볼때, 가공식품 먹지 말고 유기농 채소 위주로 담고, 마약은 면역을 떨어뜨린다느니, 자신이 에이즈가 걸림으로서 완전 다른 삶 의 차원으로 들어간다. 병이 완벽한 인생 변곡점의 동기가 되고, 공부를 함으로서 자신이 투신해야할 가치를 찾았다. 

  이 에이즈 란 병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과도한 정기의 남용으로 인한 필연적 과정으로 보인다. 60년대 성혁명 이후로 급진적인 성의 행태는 마약의 환각과 어울려 자연의 정기를 고갈시키는 쾌락으로만으로 치달았다. 히피들의 자연을 사랑하고 사랑과 평화를 외치는 건, 실상 개인의 극단적인 쾌락만 추구했을 뿐, 결과적으로 허세어린 치기의 공허한 모순이었다. 그들이 추구해야 할 건, 아메리카 땅의 인디언들의 전통과, 기상을 이어받는 자연과의 합일 이어야 했지, 동물적 쾌락의 무분별한 추구는 결과적으로 80년대 에이즈의 창궐을 비롯해, 수많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잉태되고 사산되고,, 그러한, 잘 알려지지 않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포스트모던의 가치를 두가지로 수렴한다면 다양성과 자율성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90년대 중반 이후로 어쨌던간 이런 흐름 속에 기존의 의식, 가치들이 와해되고 해체되어 다양성의 수렴 과정이라고 불 수 있는데, 나한텐 아직 동성연애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그러니까 게이들에 대한 본질적 반감 보다는 그들의 사랑의 행위에 대해 극단적인 거부감이 있다. 그건 당연히 조물주나, 자연에 반하는, 정상이 아닌 것이다. 요즘 같이 비주류, 소외계층, 음지문화에 대한 관대한 시선과 드러냄은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넘어 자부심까지 가지며 거리 축제를 벌이고 그러는데 솔직히 말하면 못마땅하다. 사회적 억압에 맞서, 동성애자 운동가들의 노력은 충분히 이해가되나, 자칫 그것이 당연한 거고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헤게모니의 전도는 위험하다. 일례로 모임에서 어떤 젊은 여성이 에이즈와 동성애, 동성연애의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고 피력하며, 동성애에 대한 사회진보적 분위기에 매몰되, 그것에 대한 부정적 사고를 무식한 꼰대나 갖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는데, 나는 이런 것이야말로 무지의 소산이고, 그런 비주류 문화의 오도 인 것 같다. 어쩌면 그녀가 레즈비언만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르는데, 나는 민망함에도 불구하고, 애널섹스의 위험성이 가진, 더 큰 쾌락을 위한 자연적이지 않은 무리수가 피의 오염을 불러오는지 일갈해 버렸다. 

  사랑의 다양한 행태가 사랑의 본질을 우선할 순 없다. 자율성을 존중하지만 극단적인 감각의 쾌락 추구는 위험해 보인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남자와 바람이 났거나, 여자친구가 흑인과 바람이 났다면, 절대 이전으로 돌아 올 수 없다는 우스개 말은, 너무 육체적 쾌락에 집착한 시각이고, 그게 요즘 욕망 벡터의 전부다. 자연, 모든 사물과 교감 할 수 있는 정기를 보호하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 

  영화속에서, 데이빗 보위와 함께 글램록의 양두산맥 이었던 T-REX의 요절한 천재 마크 볼란의 사진과 음악이 끊임없이 노출되어진다. 우드로프의 동업자인 트랜스젠더 레이언의 우상으로, 글램록의 특성상 그 분위기가 다분하지만 마크 볼란이 동성애자인 건 처음 알았다. 영화속에서 듣는 데이빗 보위와 티렉스의 노래는 너무나 좋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주루룩 나오는 주옥같은 음악이 티렉스의 마크 볼란 노래다. 

  1991년에 에이즈로 죽은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 를 통해 동성연애의 실상과 에이즈의 공포를 상징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이 영화를 통해 오랬만에 에이즈에 대한 어릴적 공포의 추억과 다양한 상념들을 불러왔고, 지금의 다양한 면역 계통 병들을 생각해 보면, 병은 어떤 대가 라 생각된다. 자연.환경.생명의 위기에 대한 대가의 변화.
  에이즈와 동성애에 대한 더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여기서 줄여야 겠다. 이런 주절거림이 영화의 감동의 본말을 주객전도 하는 것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성찰하게 하는 좋은 영화였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신 (2014)  (0) 2014.04.22
님은 먼곳에 (2008)  (1) 2014.04.07
행복한 사전 (2013)  (0) 2014.02.22
르누아르 (2012)  (0) 2014.02.17
집으로 가는 길 (2013)  (0) 2014.01.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