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러 가려고 부랴부랴 상수역에 들어섰다. 계단 귀퉁이에서 잠시 전화를 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여자였는데. 사실 목소리의 기억이 안 떠올랐으면 바로 옆에 지나쳐도 몰랐을 것이다. 상대가 나를 먼저 알아보지 않는한.. 얼굴이 많이 변해서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이가 나랑 동갑이니..내 시선의 끈기는 찰나 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후 3년 만 이던가. 19살 입시 미술학원에서의 동기인데 20대 중 후반 그 모임으로 좀 보다가 서른 이후론 거의 연락이 끊겼었는데, 한 한달전에 갑자기 전화가 와 당황했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 때의 전화가 아니었으면, 난 또 상대의 이름이 생각안나는 당황함 속에 뻘줌하게 대화를 이어갔을 것이다. 이번에는 일말의 지체도 없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대화인데도, 중간에 이름을 넣어서 불렀고, 난 뿌듯했다.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었는데, 한 번은 지하철에서 내려 같은 방향으로 가는 대학 동기 여자애를 만난적이 있었다. 먼저 내 이름을 불러서 알아봤고,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속으로 아무리 이름을 생각하려 해도 생각이 안나. 솔직히 미안한데..이름이 기억안난다고 했더니, 표정에서 너무 온화한 관용의 웃음을 보여주어서 나의 무안한 상황을 무마시켜주었었다.

 그렇다고 예고치 않은 순간의 마주침에서 내가 대비할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삶의 우연성에 내가 개입할 여지는 없으며, 노화에 의한 기억력의 감퇴? 를 거스를 방법은 없다.
 상대와의 우연한 마주침으로 인해, 단절된 과거와의 갑작스런 조우는 나의 존재 역사를 각인시키게 한다. 상대를 통해 그때의 사람들은 다시 기억속에 불려지고, 잠시 회상했다.

 딱히 이유가 없었는데, 나는 지하철 게이트 앞에서 발길을 뒤로 돌렸다. 영화를 봐야겠단 흥미가 뚝 떨어졌다. 그 순간 19살의 나와 지금의 내가 본질적으로 그다지 변하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미성숙함. 그러한 자각은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보았던. 스탠리 큐브릭의 ' 풀 메탈 자켓 ' 은 그때나 지금이나 명작이다. 다만 조금 더 의미. 의도가 보일 뿐..

 이 영화에 대해 조금더 알아보았는데, 이 감독이 전에 만든 작품중에. ' 히든 ' 이랑 ' 퍼니게임 ' 이 있었다. 줄리엣 비노쉬가 나왔던 ' 히든 '은 그래도 볼만했었는데, '퍼니게임'은 상당히 불쾌한 영화였다고 각인된 기억이 있다. 그래서 망설여 졌는데, 아우구스트 잔더의 흑백사진에 영향을 받은 엄격한 흑백영상의 영화이고, 유수한 영화제의 상을 두루 받았다기에.. 다음 날 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제대로 빠져들지 못했다. 문제는 흑백영상의 하얀 부분에 자막이 겹쳐지면 독해가 쉽게 안 되는 문제가 있었고, 그러다보니 영화속에 몰입을 못했다. 그리고 한 관객을  보면서 착각을 하게 되었는데, 조금은 어색한 인사를 나눠야 되게 되는 샹황..그러나 반가운..다양한 감정의 상념속에서, 헤메이다가 영화를 놓쳤고, 그 착각도. 착각일뿐인..좀 허탈한 상황이었다.

 영화는 대단한 예술 영화 임에는 틀림없다. 흑백 영상의 미학, 조명,구도,미장센 등등..은 완벽했고, 내용 또한 심오한 은유가 심어져 있었다. 영화 평론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이 영화를 되새김질 하는데, 다만 가슴속에 사뭇치는 감동은 내게 없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보는 내내 내 자신의 문제에 봉착되어 영화에 마음이 쏠리지 못했다. 예술 작품을 통해 관계의 본질적 의미에 당돌하지 않고, 나의 심안에 봉착되었다. 어제 내려놓음 으로써 개운했던 마음은 또다시 흔들렸다. 

 인상깊은 장면은 어떤 사고의 용의자로 의심되는 한 아이가 개울의 다리 난간 위에서 걷는 장면인데, 왜 그러냐고 추긍하는 선생에게 하는 말이..신이 나를 지켜주시는지 아닌지 시험하고 있었다. 라는 대사. 부분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느끼는 것은 신은 자신의 용기와 비례한다..자신의 한계, 자신을 넘어서는 길이 신의 보우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년전 독일의 평화로운 마을에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감독은 파시즘. 계급문제. 억압적 사회. 개인의 내면성의 분출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추악한 심성의 고발, 을  영화의 은유적 장치로 점점 죄어오듯 관객에게 전달한다. 독일인의 원죄에 대한 의미, 탐구라 할까..어른과 아이. 절대적 선과 악의 구별없이, 잔혹한 전쟁을 2번이나 치르게 만드는 나라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2시간 20분 좀 힘들었지만. 영상의 짜임새가 완벽해서 볼만은 했던 영화였다. 다만 좀 마음이 갑갑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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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 참 이쁘다. 마음(생명)을 가지게 된 공기인형(섹스대용품) 배두나./ 이 아침 햇빛속 창가의 물방울이 손에 닿은 감촉을 느끼며 내뱉은 첫 말이 '키레이' 이쁘다 였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마음도 이쁘다를 연발했다. 영화의 빛, 역광으로 인한 오로라가 맺힌 부서질듯한 빛이 이뻣고, 섬세한 카메라 무빙샷(Dolly Shot)과 색감은 물론. 배두나의 머리스타일과..옷들은 내가 여자가 되고 싶을 정도로 이뻣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그리는 사랑의 마음이 너무 이쁘다. 후~하며 사랑의 마음을 불어내는온기는 생명을 전달한다. 마지막에 배두나가 불어내는 사랑의 바람은 상처받고 외로운 모든 이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된다.. 생명의 씨앗이 자기도 모르게 가슴속에 자리잡고. 한 줄기 아침 햇살은 그것을 깨운다. 세상을 향해 무심코 '키레이'라고 내뱉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쁘다. 그렇게 사랑은 이어진다. 내 호홉을 다해, 사랑은 타인에게 심어진다. 


 이 영화는 개인주의가 고착되 각자의 섬이 된 사회의 일면. 개인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처음. 인형에게 사람처럼 대하며, 말하고 섹스하고 씻기며 대화하는 장면은 은근히 충격적이다. 마음을 가지게 되면 아프다는거, 마음의 마주침은 서로 피곤하다는 것은 개인의 고립으로 이어지고, 이런 지극히 병적인 개인의 내면을 만들어냈다. 각자의 섬에 갇혀 마음이 비워진 현대인(일본사회)의 슬픈 내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생명은 혼자서는 채울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꽃도 암술과 수술만으로 부족하고 곤충이나 바람이 있어야 수정이 된다. 생명은 빈 공간을 가지고 있고, 그 공간은 다른 사람만이 채울 수 있다. 아마 세상은 이런 사람들의 총합. 하지만 우리는 서로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알게 모르게 조각나는 것과 함께 무관심으로 있는 관계.가끔은 역겨워하는 생각도 용서되는 관계.세상이 불안정하게 만들어진건 왜일까? 꽃이 피어 있다. 가까운 곳에 곤충의 모습을 한 타인이 빛을 좇아 날아 다닌다. 나도 어떤 때는 누구를 위한 곤충이었을까? 당신도 어느 때는 나를 위한 바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공원에서 만난 노인과 대화를 나누다 시를 듣게 되는데. 곧이어 이어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 모습의 몽타지 화면이 흐르면서 배두나의 나레이션으로 읊는다. 대단히 잘된 연출이다.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면서도, 관객과 공감과 위로를 주고받는 듯한 효과다. 이 몽타지 화면 씬의 처음 장면이 자전거바퀴에 공기 펌프로 바람을 집어 넣는 남자 모습인데. 사소한 장면 같아도..다음 씬의 중요한 복선 같은게 된다.


 배두나가 일하는 DVD 대여점. 실수로 팔뚝이 찢어져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공기가 빠지며 몸이 수축된다. 배두나가 첫눈에 반한 남자 알바는 그것에 놀라지만, 재빨리 스카치 테이프로 팔뚝을 봉합하고 배꼽의 노즐을 입에 대고 공기(생명)(사랑)를 불어넣어준다. 배두나는 오르*즘을 느끼는듯 다 채워지자 서로를 껴안는다. 이 장면. 대단히 아름답다. 어느 영화의 섹스씬 보다도 독특하고 아름답고.마음이 전해진다.
 사랑하는 남자의 공기가 자신의 몸을 채운 배두나는 평소 자기 혼자 펌프로 공기를 채우는 기구를 버린다. ( 배두나 혼자 나체로 공기 채우는 이전의 장면도 너무 이뻣다.)
 이 사랑의 방식, 공기인형과 인간의 사랑은 후반부에 대단한 오류를 일으키게 되지만. 어긋나는 사랑의 방식을 넘어서 그 진정한 마음만은 아름답다.

 그리고 이어지는사랑에 겨운 배두나의 모습들..비틀즈의 스토베리필즈 포에버에 나오는 오르간 소리와 비슷한 음악이 흐르면서 아름다운 몽타지 화면들이 흐른다. 

 배두나란 배우는 참 개성있는 얼굴이고, 자신의 분위기에 맞게 참 연기를 잘 한다. 뉴욕에 있을때 우연히 거리에서 보게 되었는데. 생각했던것 보다 키와 몸이 커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녀의 얼굴은 길거리에서 배두나를 닮은 사람인가? 긴가민가 하는 상황이 아니라..딱 보자마자 아 배두나 란 말이 바로 튀어나오는, 그런 얼굴을 가졌다. 나같이 누굴 닮았단 말을 많이 듣는 얼굴 보다는 확실한 개성을 가진 얼굴이 좋다. 노출씬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대단히 아름다운 연기와 화면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가진다는건 가슴을 아프게 한다는걸 배두나는 깨우친다. 고립된 사람의 마음에 상처받고,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진 공방에 찾아가, 주인에게 첫 말을 '타다이마' 다녀왔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 곳에서 그녀의 본질(다른 사람의 대신,대용)을 깨닫고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뭐든지 해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의 방식,교환은 어쩔수 없는 파국을 맞는다. 이 남자의 사랑은 상대에 대한 섬세한 배려에서 비롯되었지만 순진한 배두나는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려다. 그녀의 바람을 그에게 채우질 못한다.

 대단히 독특한 에로틱함이 흐른다. 또다른 독특한 사랑이야기 였던 스웨덴 영화 '렛미인'이 생각났다. 공포스런 장면이 두려워서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지만. 이 영화와 비교해 봐야겠다.
 타인과의 사랑. 진정한 소통은 무엇인가.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한 것인가.. 그러나 한 줄기 마음의 바람은 자신도 모르게 심어진다. 첫 눈에 반한다는 것도 그렇고, 어느날 아침 햇살의 싱그러운 공기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키레이' 라고 말하는 그 순간 삶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
 누군가를 알아서 사랑한다는 것은 이기적 거래일수 있다.사랑은 한 순간에 모든게 열리는 것이다. 모든 분별을 넘어서..

 카메라의 섬세한 움직임들은 영화의 차분한 리듬을 유지시킨다. 또 소품들과 미장센의 효과도 크다. 빈병이나..바람개비. 종소리, 꽃 등은 중요한 메타포 이다. 아무튼 이 영화 극장에서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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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재미있고 유쾌한 그것도 실화인 영화가 있다니. 누군가가 재밌다는 단 한 줄의 촌평이 아니었더라도, 이 두 주연 배우 만으로도 충분히 구미가 땡기는 영화였다. 다만. 개봉관이 많지 않아. 개봉영화를 관심있게 챙기지 않는한 그냥 지나쳐 버린다.

 신촌의 한 영화관에서 보았는데 매표원이 나보고 미성년자 아니시냐고 물어보았다. 모자에 눈이 보이는 연한 썬글라스를 썻긴 해도, 좀 황당했다. 황당해 하며 아니죠~하며 길게 입꼬리가 올라가는걸 느꼈다. 참 단순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그것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도..

 나는 이 영화가. 담배 회사 필립 모리스의 창업주 에 관한 영화 인줄 막연히 생각했다. 짐 캐리 역할이 스티븐 러셀 이고. 이완 맥그리거 의 역이 필립 모리스 였다. 그 둘의 인물은 실존 인물이고. 이 영화는 믿기지 않게도 실화이다.

 이 둘의 사랑 영화이다. 그러니까..퀴어 영화.  근데..동성애를 떠나서 아주 독특하고, 기상천외한 인물. 스티븐 러셀. 이었다. 가뜩이나 이 대단한 실존 인물을. 영화 배우 캐릭터 사상 가장 독보적 존재중 하나인 짐 캐리 라는 대 배우가 열연한다. 짐 캐리가 나온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 영화의 독특한 정서.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마치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이 짐 캐리 라면,, 이 영화처럼 될 것이다. 독특한 사기꾼의 탈옥기.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애인 필립 모리스.

 이 영화에서 필립 모리스 역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스티븐 러셀에 비해 비중이 적을지 몰라도. 교도서 도서관에서 둘이 한눈에 사랑에 빠진 이후 스티븐 러셀의 인생에서 매우 큰 존재로 남는다. 이 여성형 게이를 완벽하게 연기한 이완 맥그리거에 탄복했다. 마치 여성의 내면을 보는듯한 그의 섬세한 말투. 소심한 표정, 바로 부서질듯한 연약한 눈빛등..동성애, 게이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둘이 같은 감방 침대에 누워 서로 안고 자는 모습이 왜이리 포근해 보이고. 영화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완 맥그리거 뒷통수에 강한 햇빛이 후광을 비출때. 중년에 접어든 이 백인 배우가 너무 환하게 웃으며 슬로우모션 되는 걸 보며, 참 이쁘다고 생각했다. 뭐 이거 내가 이상한게 아니고.. 영화를 직접 보시면 알 것이다. 오해마시길..

 스티븐 러셀이 필립 모리스를 만나기 전. 다른 애인(남자)하고 섹스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짐 캐리의 재밌는 표정과 연기래서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근데 이런거에 민감한 분은 불편할 수 있겠다. 여자들끼리 그러는건 보기 좋은데?, 남자들끼리 그러는건 좀..또..교도소 안의 얘기가 많아서. 똥꼬가 뚫린다.내지.거길 Su*k 한다는 말과 장면도 등장하지만..이 모두..짐 캐리의 코믹함에 역겨움이 무마된다.

 이 영화의 연출도 매우 독특하다. 장면마다. 뒤통수 치는 황당함, 기발함을 선사한다. 대표적으로 교도소에서 밤마다 괴성을 질러 필립 모리스가 잠을 못 잔다고 불평하자. 스티븐 러셀이 다른 죄수를 사주에 그 괴성질렀던 남자를 죽도록 패게 하는데. 이 섬세한 감성의 필립 모리스가 그 사실을 알고. 그 맞은 사람에게 연민을 느껴..눈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거 같은 분노로 스티븐 러셀에게 화난듯 다그치자. 스티븐 러셀은 내가 시켰다고 고백하자. 필립 모리스는 금방, 감격의 눈빛으로 너무 행복해 하며, 너무 고맙다며. 그를 껴안는다. 이런식의 장면이 많은데.. 이완 맥그리거의 연기의 내공이 없었다면, 어런 반전의 효과가 반감되었을 것이다.

 짐 캐리의 혼신의 연기도 찬탄할 만하다. 에이즈 말기 환자를 완벽히 **로 연기해 내는데, 그 얼굴 자체가 천혜의 마스크였다.

 뭐 대단한 교훈 같은게 있는게 아니라. 이런 사람의 인생이야기도 있구나..이런 사랑도 있구나 정도로 보면, 대단한 두 배우가 알아서 영화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염소를 노려 보는 사람들' 과 함께..이완 맥그리거 연타.. 즐겁다..

참고로 정말 담배 회사 필립 모리스 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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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전
감독 김대우 (2010 / 한국)
출연 김주혁,류승범,조여정
상세보기

 이 영화가 흥행하고 있고 재밌다는 것에 나는 의문이다. 영화 상품으로서의 잘 만들어진(구색갖춘)것에는 틀림없으나, 매우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작품으로 보인다.  춘향전을 뒤집어 보는 설정(모티브)만 신선? 했을 뿐, 영화상 어떠한 점도 내가 보기엔 함량미달이다. 그나마 수확?(볼만한)했던 것은 변학도의 캐릭터와 완벽하고 독특한 연기가 압권이었던 것에 있다. 마노인(오달수)의 캐릭터와 연기는 여전히 유쾌하며 이 영화에 어울리지만. 주인공 방자역인 김주혁의 받아주는 연기가 뒷받침을 못 했을뿐만 아니라 마노인을 통해서 자기의 연기도 못 살려내었다. (<음란서생>의 한석규와 오달수의 대면을 기억해 보면 더욱 그렇다.)

 김대우 감독의 전작인 <음란서생>을 아주 좋게 봤었다. 그 영화를 대학교 친구들이랑 단체로 봤었는데 (대다수가 여자였었던) 나는 너무 재미있게 봐서 극장문을 나서며 낄낄거리며 다른 애들(여자)의 반응을 살피고 물었다. 대다수가 그냥저냥 뭔가 아쉬운 영화라고..나처럼 그다지 재미를 못 느낀것이, 매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음란서생>은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너무 많은걸 담으려다, 흥행은 지지부진 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 영화는 지극히 남자의 시각, 재미에 촛점을 맞춘 영화여서 흥행에 실패했다고 본다. 현대의 모든 상품, 마케팅에는 여심, 여성의 코드(기호)에 맞춰야지 살아남을 수 있다. 카페나 레스토랑. 쇼핑, 영화등..젊은 남녀가 데이트(소비)시 하는 모든것은 여자의 마음(욕망)을 살만한게 녹아있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대중 상업 영화의 기획에서 그 여심을 잡느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음란서생>이 역작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했다는 경험을 밑바탕으로 김대우 감독은 방자전에서 여성의 코드에 촛점을 확실히 맞춘듯하다. 그것이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남자들이 이 영화를 그냥저냥인 영화. 한여름의 녹아버린 하드 같은 허무한 영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

 영화의 골격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 같다. 현재 시간의 작가(인물)에게 이야기를 하고 그것이 플래쉬백화 되어 주 내용이 펼쳐지는 구조. 팀 버튼의 <가위손>도 이런 구조고, 이런 방식의 영화는 수두룩하게 많지만, 이야기를 들어주는 공형진의 역할은 거의 생명력(캐릭터)이 없다. 내가 보기엔 배우로썬 무덤과도 같은 역할이다. 이런 구조의 다른 영화들이 엮는 방식과 비중을 비교해보면 방자전은 참 어거지가 다분한 설정이다. 

 이야기, 삶의 이야기가 (담)긴,(닮)은,  사람이 다른이에겐 매력이자, 그 사람만의 존재적 가치 이다. 씁쓸한 이야기라도 세월은 미담을 낳고, 또 그렇게 기억하고자 한다. 

 이야기하는 방자의 씁슬함이 캐릭터의의 생동감을 다 잡아먹어 버렸다. 기존의 춘향전을 뒤집어 고정관념적 배우의 역할 조차도 도치된. 그래서 관객들에게 신선함과 색다름을 준 것은 좋으나. 이야기속 방자의 캐릭터는 생명력을 잃고 배우는 시종일관 다운된 톤으로 연기한다. 당연히 하인이니까..신분적으로 종속된 역활이어서 그랬을까?  이야기의 결말이야 비극이니까..공형진에게 이야기 할때는 다운되어야 하지만. 이야기속 초반 부터 방자는 뭔가 심오하다. 방자가 주인공이 되었다고 어깨에 힘좀 들어가서 였나. 마치 유인촌이 장관 완장을 차고 거들먹거리는 꼴처럼, 매우 어색하다. 김주혁이나. 감독이 제일 크게 실수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방자는 방자다우면서 춘향이와 사랑했어야 한다. 그 캐릭터의 대비가 영화에 더 큰 활력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연출은 전반적으로 평이하고 지루하다. 처음이나 절정이나. 끝이나, 거의 샷의 길이와 템포. 호홉등이 일정하게 느껴진다. 샷과 샷, 시퀀스와 시퀀스의 텐션.(밀고 당기기)은 사라졌고, 점진적으로 이야기의 절정으로 가는 것은 그냥 처음의 모티브(설정) 뿐이다. 관객이 재미를 느끼는 것은 단지. 초반부에는 마노인의 캐릭터와 오달수의 능청스런 연기. 후반부에는 변학도의 SM적 독특함. 그리고 정사씬 정도. 근데 그것도 내가 보기엔 너무 뻔한, 판에 박은 연출이었다. 야동을 많이 접하지 못한 여성관객을 위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해피엔드>에서의 전도연 주진모의 베드씬이 내게는 인상이 깊었고, 이재용 감독의 <스캔달> 에서의 배용준 전도연 이소연 의 씬들이나 심지어 <음란서생>의 야릇한 긴장감 조차에도 많이 못 미친다. 조여정의 호빵두개를 얻은듯한 억지스러운 성형 가슴은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여체에 대한 모독이다. 굳이 벗기고 가슴을 드러내고. 섹스씬을 넣었어야 했을까? 진짜 야한거는 보여주지 않고 소리와 입담으로 표현하는 건데.. 김대우 감독의 그런 강점 조차 이 영화에선 발휘되지 않았다고 본다. 이몽룡과 향단이의 섹스씬이 감정이 없는 패배자의 허무여서라 그렇다 해도 방자와 춘향이의 섹스는 정말 사랑이 통하는 구나 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감정이 오갔어야 한다. 그러나 섹스의 패션화 같이 표면적으로 겉돌뿐이다. 혹은 펜시적 베드씬.. 영상의 뗏갈, 조명의 사용 조차. <음란서생>에 비해 못하다. 수준급이긴 하나. 전작이 빛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아쉽다. 

 춘향이의 요즘세태를 반영한 사랑과 실리의 갈등을 넘어 노골적 실리 추구는 타당해 보이나 방자와의 사랑은 그 만큼 납득하기 어렵다. 이몽령과 춘향이가 합방했을때, 이상한 소리만 들리고 밖에서 방자가 듣고 시무룩하게 체념하고 있는 것도 납득이 안가고..아무리 하인이래지만..첫눈에 뿅 갔는데.. 
  제일 공감갔던 장면은 이몽령이 한양 유학 가기전 방자가 잘못 건네준 서찰을 보고 배신, 분노의 감정. 사실 그가 양반이랍시고 사랑에 관해서 한게 하나도 없지만, 오히려 초반에 차게굴기 라는 대단한 착각.이 안쓰러워서인지도. 류승범의 그 싸이코적 눈빛의 강렬함은 그 엿같은 감정이 잘 전해졌다. 영화 처음부터 마약에 취한듯한 그 요상한 눈빛은 마지막 절벽씬의 황당함을 어느정도 수긍케 했으나, 그냥 억지스럽다가 정확한 표현일듯 싶다.

 변학도의 나는 독특하지 않으면 안 *려유 하는 게 왜이리 웃긴지..근데 조여정이라니..마치 MSG잔득 든 다시다 같은데 그게 이뻐? 차라리 대사 없는 기생들이 더 독특하던데..현재 드라마에서 장희빈역을 하는 이소연이 차라리 춘향이였으면 내가 이렇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진 않을텐데...

 기존 춘향전의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정조지킴의 미담을 뒤엎고 새로운 현대적 통념(정조없음.실리추구) 을 제시하려 했으나. 예리한 비판의식도 없고, 절절한 감정도 없고. 재미는 그냥 약간 곁다리일 뿐이고 한마디로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영화로 보인다. 이런게 흥행하다니 어지간히 볼게 없나 보다..그나저나..뒤에서 집중해서 노려보기 효과가 있을까..영화라지만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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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에 비해서 우리나라 제목이 좀 격이 떨어진다. 여름에 잠깐 팔리고 마는 헐리우드 청춘물 같은 우리말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유명한 도리스 되리 감독의 작품이다. 예전 비디오 테잎시절, 대여점에서 월척을 건졌던 영화 중에 <파니 핑크 Keiner Liebt Mich>(1994)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때는 20대 초반이어서 서른즈음의 노처녀?의 우정, 사랑, 그리고 소통의 문제를 섬세한 감각으로 그려냈던 그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겠지만 대단히 좋은 작품으로 기억에 남아있었다.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은 다 아실 영화이다. 그 당시 컬트적 선풍을 끌었으니까..
 그 영화의 파일을 구하던중. 도리스 되리 감독의 이 작품도 구하게 되었다.
그림 형제의 <어부와 그의 아내>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란다. 

 남녀간의 사랑. 결혼. 성향(기질)의 충돌과 극복 이야기를 아기자기 하게 수놓는다. 영화속은 볼거리와 들을거리가 매우 좋고 풍부하다. 수시로 나오는 배경음악은 정말. 베스트 오브 베스트 이다. 내가 딱 좋아하는 음악 장르들(모던록) 이 감각적인 영상과 함께. 수시로 흐른다.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다. 물고기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판타지 스러운. 오프닝 시퀀스의 편집과 음악은 가히 일품이다. 일본 시골을 배경으로 독일인 들. 여주인공이 매우 이쁘다. 여자는 직물 디자이너. 그런데 남자 주인공들의 직업이 되게 특이하다. 잉어 감별사,물고기 치료사? 이런 설정 자체가 영화에 빠져들게 만든다. 새롭고 뭔가 알게되는 즐거움.. 포스터 속의 위쪽 물고기를 단학 이라 부르는데 희기한 물고기래서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는 모양이다. 여 주인공도 이런 호기심. 특이함. 희소성에 남자 주인공에 빠지게 되고.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결혼을 하게 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사랑과 현실의 차이의 괴리를 보여준다. 각각의 부모들이 그들의 결혼 사진을 보면서 반응하는 모습이 그들의, 차이의 복선이면서 되게 웃기다. 



 독일로 돌아온 그들은 캠핑카에서 신혼을 시작한다. 우여곡절끝에 여자는 직물 디자이너로 성공하게 되고..남자는 육아에 전념하면서..그들의 위기와 갈등은 서서히 정점에 다다른다. 남자는 여자에게 " 간충이란 아메바가 있어. 뇌는 없는데 계획만 있지. 이 아메바는 일부러 달팽이에게 먹힌 다음 달팽이 뇌로 들어가 신경을 망가뜨려서 달팽이를 뭍으로 올라가게 만들지. 그러면 양에 먹히고 아메바는 양의 간으로 가. 아메바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지. 그게 목표야. 아메바가 목적을 달성하면 양은 죽어버려.." 이렇게 말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영화의 정점에서 기생충 이란 가시돋힌 비유로 말한다. 이 말을 하기전에 감독이 깔아놓은 장치들이 매우 효과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얻은 부 도 물거품 처럼 사라지고. 그들은 잠시 헤어졌다, 다시 처음의 그 캠핑카로 돌아가 서로만 있으면 다 좋아 라는 사랑의 처음 단계로 돌아 간다. 그리고 다시 여주인공이 사업구상을 하면서 유쾌하게 끝난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 어항속 잉어 부부가 개구리로 변하는 장면 이다. 그런데 첫 장면에서 마법에 걸린 어항속 잉어부부의 나레이션 중에 3년간 진실되게 사랑하는 커플을 만나야만 풀리는 것이었는데 겨우 어류에서 양서류가 되었으니..사랑의 완성?은 아직 멀었다는..웃기면서도 씁슬한 도리스 되리 감독의 혜안과 위트가 담겨있다.

 서로 다른 삶의 가치관 성향 기질을 가진 사람이 만나 갈등과 화해의 반복속에서 파국으로 치닫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현실적이면서도 환타지한 텃치로 그려냈다. 템포가 빠르고 화려하다. 텃치가 가벼워 <레볼루셔너리 로드> 처럼 진중함이 덜 해 보이지만. 주제의식만은 부족하지 않다. 남 녀 간의 우주적 충돌을 그린 카오스적 상황을 예리하면서 재밌게 그렸다. *"당신은 목표가 없어!”라는 여자의 비난과당신은 항상 계획만 하지!”라는 남자의 비난은 남녀가 함께 살면서 빚어지는 갈등의 숱한 버전 중 하나일 뿐이고, 그 문제의 핵심에는 상대의 성향(기질)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내게 맞춰주길 원하기 때문이라는 해묵었지만 여전히 유효한 원인을 제시한다. 

 P.S. 극중 여자 주인공이 디자인한 옷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가장 기발하고 특이한 패션쇼 장면. 매우 인상깊었다. 김영신 이란 이름의 한국여인이 일본인 연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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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없어진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조근조근하게 일갈한다. 시를 읽지도 쓰지도. 가슴에 품지도 않는 이 메마른 사회에 시를 통해 상처를 보듬고 제대로 보자고 한다. 주인공의 말대로 '시는 참 어려워요..어떻게 써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현실의 콘크리트삶 속에 시는 유기되었다. 상실된 감성은 나만이 이 지구상의 존재라는 이기적 착각으로 모든것에 상처를 준다. 풀 한포기의 구기진 생명이나. 꽃 한 봉우리의, 한 때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강간은 그저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가 없는 세상은 폭력이다. 보이지 않은 폭력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보듬어주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세상을 움직인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점은 시인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었던 킹콩도 석양를 보며 절절히 아름다워 하지 않는가. 시를 느낄 수 없게 만드는 이 시대의 정신이 비극을 낳았다. 우리시대의 자화상이자 경고이다. 이창동 감독의 모든 작품이 이 리얼리즘에 입각해 우리 마음에 비수를 꼿는다. 저릿한 아름다움이 있다. 삶을 보는 깊이와 관조에 나는 아무런 토를 달지 못하고 성은에 망극할 따름이다. 그는 진정한 작가이다. 

 영화의 모든 부분이 다 좋았지만 특히 더 좋았던 것은 소리 였다. '멋진하루' 이후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섬세한 소리를 담은 영화는 흔치 않다. 이어폰만 꼿고 다니는 현대인들에게 이 영화는 소리를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감각의 정화를 이루려고 하는 듯 하다. 못 느끼더라도 아무도 모르게 그것은 자신의 감성에 쌓였다. 

 영상 또한 공기감을 잘 살려내었다. 장면마다 그 공간의 습기,습도,기온 까지 표현된 그 질감은 시각적으로 매우 아름다웠다. 태양이 내리쬐는 일광의 장면에서 약간 푸른빛이 도는게 후지필름을 썻을꺼 같은 생각이 든다. 난 오히려 그것이 한국의 여름 느낌에 맞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따듯한 앰버 가 낀 영상을 좋아하지만, 이 영화에선 서슬프런 감정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색감은 탁월했다. ( 아멜리아 같은 영화. 너무 앰버가 강해 눈 피곤해서 못 보겠지 않은가.ㅋ)

연기 또한 이창동 감독의 완벽한 집요함이 드러난다. 연기와 사실의 애매한 경계들. 감상에 빠지지 않는 절제등. 감독의 확실한 위치에서 자칫 튈수 있는 부분을 전체에 녹아들게 한다. 이문열 스럽게 생긴 그 아저씨,중년형사의 연기는 꽤 인상깊었다. 주인공 윤정희의 딸로 나오는 배우는 대사도 없고 후반부 한 컷에서만 나오는데 그 삶의 퍽퍽한 느낌을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피해자 엄마도 그렇고. 반면에 남자들은 특히 가해자 아버지들의 그 뻔뻔하고 속물적인 말투와 표정은 배우들의 존재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해주는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다.
 
 음악은 특히 기억나는게 없는데 영화 음악이 기억나질 않는게 최상의 음악이다. 심지어 크레딧 올라갈때 무슨 음악이 나왔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영혼의 먹먹한 저릿함이 엄습했다.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렇다. 시는 참 쓰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 노력은 포기하지 말자. 
 시가 떠오르는 그 순간이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눈을 감으니 캄캄하다. 눈을 뜨니 눈부신 날들이 가득이다. 오늘 하루 는 인생의 작은 축소판이다. 그러니 헛투로 보내지 말자. 2시간 반이나 흘렀던가. 가슴이 울렁거린다.  


 
 
 

 

어제 낮에 점찍어둔 새 자전거를 보러 신촌의 메가박스에 갔었다. 완연한 여름이 되어 매우 더운, 그러나 시각은 시원 상큼한 계절이 왔다. 나를 포함한 아저씨 셋은 신촌에 도착하여 감탄을 연발했다. (나만 그랬나..) 너무나 아름다운 젊음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5월의 눈부신  태양속에서 너무나도 이뻣다. 왠지 이 글이 끝날때까지 이쁘다. 아름답다 라는 말을 연신 해댈꺼 같다. 그러려니 하시길 바란다. 

 저렴한 픽시(Fixed gear)자전거는 막상 실물을 보니, 한 번에 감이 안왔다. 모양이야 이뻣지만 그 쇠붙이는 내 마음에 들어오질 못했다. 사물을 고를때도 푼크툼이 분명 작용한다. 시선이 내리 꼿히고 내 마음을 찌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월급 3개월치를 못받고 있는 표정이 분명한 자전거 샵의 점원은 아마도 5개월치 못받고, 진상부려 짤릴거 같다. 그 만큼 태도가 불쾌했었다. 살 맘도 없었지만,, 이 메가박스 건물의 쇼핑몰 자체가 전부 파리날림으로 죽어가는 느낌이다. 우리는 땡볕으로 다시 나와 이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역시 생글한 오월의 태양이 좋다. 어디를 둘러봐도..핫팬츠..핫팬츠..좋다. 나쁘다 로 이원적으로 말하기가 좀 그렇다. 남자니까 본능적으로 시선이 가다가도, 자기네집 마루바닥에서나 입고 뒹글대야할텐데 왜.. 하는 생각이 절로드는,, 몰개성적 유행에 편승해 죄다 그렇게 입는건 추하다. 솔직히 말하면 몸매 좋은 사람만 입어야 한다. 간혹. 용기를 낸 어떤 사람은 좀 불쾌하다. 내 생각엔 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우리의 생활문화가 더욱 급격히 서구화 되면서 사람들의 체형도 변하지 않았나 싶다. 아파트. 외식. 밥상이 아닌 식탁문화 .침대 등등.. 진화 라고 부를 정도로 길고 늘씬한 다리를 가진 젊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 나는 계속 오~ 아름답다. 를 연발한다. 끈적이지 않은 담백한 시선을 살짝 흘려주는게 예의다. 하하하.

 작년에 종종 혼자 자주 갔었던 이대안의 예술전용관 아트하우스 모모가 생각났다. 처음에 갈땐 좀 떨렸는데 금새 적응돼 나름 분위기를 즐겼던듯 싶다. 거기서 처음 본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매우 인상깊었었다. 집으로 가는 안양천 길을 달리며 얼마나 가슴이 아팠던가..엊그제 같은 그날..나는 누구에게 전화를 했었는데..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하하하를 보자고 제안했다. 30대의 우리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그동안 매우 좋아했다. 만장일치. 우리는 이대안의 ECC와 인공공원을 보며 수족관속의 데코레이션 같다고 폄했다. 내 옆에 여자가 있었다면.'오 이쁜 공원이네요~' 그랬을지도..일본식 정원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그런걸 흉내냈거나..유럽식 인공정원을 흉내낸듯하다. 아무튼 잡탕. 티켓부스의 여직원은 남자셋이 하하하 보러온게 웃긴건지. 누구한테 프로포즈 라도 받았는지 연실 웃어댔다. 역시 여자는 웃으면 다 이쁘다. ( 이 여직원은 하하하를 보았고. 우리가 꼭 김상경,유준상,김강우 같아 보여서 계속 웃었을 것이다.  아무렴어때. 작은 웃음을 줄 수 있어서 나 또한 기쁘다. 하하하. )

 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20대 초반에 단성사에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을 시작으로 매번 극장에서 챙겨보았었다. 팬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은 삶의 푼크툼 같기도 하고. 인간 욕망의 희곡 같기도 하고. 또한 추억이 버무려진. 비빔밥같기도 했다. 그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4번째 작품인 생활의 발견 이다. 역시 김상경의 찌질함의 극치. 예전에 좀 좋아했던 추상미의 베드씬등..재미면에서도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하하하는 생활의 발견을 잇는 좀 더 진화된 코미디 같다. 홍상수의 영화는 서른이 넘어야지 진정한 맛을 알아간다. 30대의 찌질함이 단련되 갈수록. 이 영화들은 빛을 발한다. 다만 24살때 보았던 오 수정은 참 난감했었다. 좋아했던 여자애와의 첫 데이트 였는데 참.. 고 이은주 씨의 리얼한 성인 연기에 난 욹그락 불그락..말도 아니었다. 내가 영화 고르는 센스는 참 오매불망이었다. 본의 아니게 오매불망한 일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하하 정말 재밌다. 하하하 정말 웃기다. 하하하 ㅋㅋㅋ 웃다보면 영화속 찌질함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삶의 한없이 가벼운 존재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영화의 시작은 흑백 사진속 두 인물이 나레이션하는 목소리로 시작한다. 이 방식 매우 좋다. 경제적이고 신선했다. 이 부분 때문에 중간중간 영화가 정리되기도 하고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주 무대는 통영, 한국의 나폴리 라고 홍보하는 항구 도시. 한 번 가보고 싶다. 복국도 먹어보고 싶다. 영화속에 나오는 그 모텔도 가보고 싶다. 왠지 이순신 관련 유적지에는 문소리 같은 말투의 여자가 있을거 같다. 예지원만 빼고 이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가 좋았는데. 그 중 군계일학은 문소리였다. 그 이상한 말투..이상한 행동. 뭐 나름 괜찮은 몸매. 의상..하나하나 다 인상깊었다. 어쩜 다 저렇게 천연덕 스러울까. 대단한 배우들이다. 연기를 내려놓고. 또 다른 연기아닌 연기를 한다. 이것이 홍상수 감독의 스타일이다. 뚜렷한 대본 없이. 술집이라면 배우들이 진짜 술 먹고 적당히 취해서 큰 틀안에서 지네들이 연기를 한다. 감독은 상황과 큰 흐름만 제시해주고 배우들의 자연스런? 인간의 희극적 연기를 이끌어낸다. 얼마나 감독의 통제가 들어가는지는 모르곘지만. 이러한 것이 홍상수의 연출 스타일이다. 대단한 배우들이 있기에 그 대사들은 정말 웃기고 맛깔나다. 인간은 얼마나 웃긴 동물인가..생활의 발견에서 김상경이란 배우를 발견했다면. 하하하에선 문소리를 발견했다. 끊임없이 웃기다. 그 말투 하나만으로도 먹고 들어간다. 유준상은 머리칼이 얇은것이 내 친구를 계속 연상케 했다. 안 본지 오래 되어서 더욱 그랬다. 또 유준상만 보면 그의 진짜 부인 홍은희가 생각나는데. 부러운 마누라를 둬서 그런가보다. 시인인 김강우도 좋았다. 좀 더 후까시를 버려나가면 김상경 같은 대가가 될 것이다.  시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영화속 같이 엉뚱하고 웃긴일이 되버렸지만 그래도 좋다. 문소리의 명대사 "시? 그건 다 써. 나도 써." 하하하.

 영화속 김상경 같은 뱀같이 능굴맞고 천역덕스러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대책없음.모성본능을 자극할 듯한 어눌함. 먹고 사는 고민에서 벗어나면 그렇게 되나. 집안 빠방한 감독같이 그렇게 예술의 유희를 즐기면 뱀같이 될까. 요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을 읽고 있는 나로썬.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극과 극인 이 영화가 내심 유쾌하지 만은 않았다. 역시 오래 남는건 레이먼드 카버의 치열한 삶속에서의 예술 이다. (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숏컷을 다시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길었고. 충분히 재밌었다. 초기 영화에 비해 여자들도 매우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그다지 고상하지 않다는걸 여실히 보여준다. 뭐 여자도 마찬가지인가.. 아무튼 이날 우리의(나의) 대화는 반 이상은 방앗간 스러운 대화에 . 석사 스타일의 대화 잠깐. 자전거. 그리고 또 방앗간 대화.. 거리의 사람들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내 마음은 계속 공허했다. 하하하. 2010.05.22


 이 작품은 200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받았다고 한다. 나도 두손 두발 모아 기립 박수?를 열렬히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너무 좋으면 사실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아님 헛소리를 연발하던가.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게 두렵다. 영화 평론이나 리뷰는 너무 잘 쓴 글이 많아서 내 글의 수준에 대한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솔직함과 성실은 그 무엇보다 더 강하다. 시간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이 영화는 내 하드디스크에 오래 숙성되어 있었다. 언제 다운받았는지도 모르게 숨은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굴한 기분이다. 뭔가 아무 정보도 없지만 괜찮은 영화일꺼라는 직감. 그것이 발휘되었고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좋은 작품과의 인연은 언제 어디서고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좋은 사람과의 인연은 언제 어디서고 인식의 충격이다.

 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저 광고 전단의 우리말 제목을 봐보자. 그냥 교실 이라고 쓰면 될것을 한글로 굳이 클래스로 쓰는 것은 무슨 개똥같은 심보일까. 작년에 책 읽어 주는 남자. 더 리더도 마찬가지였고..등등등. 되게 많다.  차라리 대한국 이라고 나라명을 바꾸는게 어떨지..요새 인간의 탈을 쓴 쥐들의 쇼를 보면 아예 미국의 52번째? 주로 편입하는것이 맘 편하지 않을까..우리 고유의 언어는 중요하다.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이다. 인간의 사고, 가치관의 근본은 어떠한 언어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마도 Class 가진, 교실말고도 계급이나 의식의 층을 말하는 것을 그냥 영어로 표현했다고 믿고 싶다. 그런데 위 아래. 선생님과 학생의 카피 문구는 꽤나 헐리우드 찌라시?ㅋ 같은 발상이다.

 영화를 보면 지극히 프랑스 영화 답다. 뚜렷한 기승전결과. 해피엔딩. 그런 것은 기대안하시라 믿는다. 대신 첨예한 사고와 논리 그리고 사회와 교육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소설인데. 주인공 선생님이 원작자 이다. 실제로 선생님 경험이 있었던 소설가 인 모양이다. 이름은 프랑소아 베고도. 원작 소설도 번역되었다. 전문 배우가 아닌 사람들이 이 영화에 출연한 것인데. 이 영화의 형식이 다큐멘터리 적인 면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좁은 교실에서 영상의 화각은 표준화각으로 일정하고. 카메라는 교실과. 교무실. 공놀이 하는 학교 운동장? 모습등. 학교를 벗어나지 않는다. 학교의 문제. 특히 교실에서의 선생님과 학생들의 입장차이에서 벌어지는 첨예한 수업을 일정한 화각속에서 다큐멘터리적으로 보여주는데 관객은 금새 이 영화의 화각에 동요되버린다. 어느새 이 교실의 어느 한 구석에 앉아 교사와 학생의 설전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어떤 방식이던간에 연출은 대단하다. 컷과 컷의 연속성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고 편집의 리듬은 논쟁속으로 점점 스며들게 만든다. 일정하게 꽉찬 프레임은 논리의 끈을 풀어지지 않게 한다. 사족이 들어설 틈이 없게 만든다. 영화의 긴장과 갈등은 점점 깊어지고 지극히 현실적으로 해결?되지만. 결론은 뚜렷히 제시하지 않는다. 프랑스 특유의 담론적 구조. 영화속의 갈등사항을 겪으면서 관객은 여러 각도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익숙한 것. 제도적인 것에대한 의문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토론으로써 풀어나간다. 해결이나 뚜렷한 답이 없어도 그 과정속에서 인간 사회와 개인은 성장하는 것이다. 첨예한 대립속에서도 약간의 희망적인 부분이 엿보인다. 
 가장 진보적인 사회의식, 똘레랑스(관용)이 깔려있는 나라인 프랑스. 그들의 문제인 이민자들의 불평등과 소외 .말리 출신의 그 학생이 퇴학당함으로써 다시 안정을 찾은 듯 하지만. 프랑스 사회의 뿌리깊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담론을 이끄는 것이리라.

 이 땅의 많은 선생님들이 이 영화를 보고 느꼇으면 좋겠다. 또다른 스트레스가 될 지언정 선생과 학생의 소통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사회는 요원한 토론 ,담론의 문화가 통용되는 그들의 문화가 부럽다.
 영화를 한 번 보고 글을 쓰려니 매우 어렵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생각이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글을 써서 이 글을 보는 사람에게 송구스럽다. 지우면 되지 않냐고. 그러기엔 아깝다.ㅋ 대신 다른 좋은 글 링크를..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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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vie.naver.com/movie/board/review/read.nhn?nid=2198359
http://blog.naver.com/yuhwani?Redirect=Log&logNo=140106064977
http://blog.naver.com/cooljay7?Redirect=Log&logNo=10084338385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7508

 전통적 의미의 영화보기는 이제 많이 퇴색햇다. 필름 릴이 돌아가고 빛을 비춰 영사막에 투영되는 이미지의 잔상을 보는 영화보기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한 때는 서울극장이 제일 신선한,생생한 영사용 필름이 공급된다 하기에 거기서 첫 개봉되는 영화를 찾아 본다는 말도 있었다.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되버린 필름 시대의 잔상이다. 필름 시대의 마지막 대미를 나는 경험했고, 그 경험은 내 역사속의 노스탤지어가 되버렸다. 대학에선 필름 편집.(스틴백) 직접 필름을 칼로 잘라 테이프로 이어붙여 완성된 필름 릴(편집본)을 만드는 수업을 마지막으로 했었고, 대학원에선 칼라염료사진 인화를 마지막으로 했었다. 그 후로 그런 수업이 진행되질 않았다. 앞으로 전혀 쓰이질 않는 기술을 배웠지만 그 경험은 기술의 역사를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아날로그적인 수고와 물리적 감각의 느낌들. 그것은 20세기 모던소년의 최후였다.

 나는 이제 극장을 자주 가지 않는다. 필름이 사라지고 디지털의 대세가 되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광고의 짜증에서 분이 삭히지 않길 때문이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서 정당한 돈을 지불하고 상영관에 앉아서 15분 간을 광고의 폭력에 시달리는게 도저히 참을 수 가 없다. 돈 주고 광고를 보러 온게 아닌데. 눈을 감을 순 있지만 귀를 막을 수 없다. 소리의 공해는 시각만큼 피곤하다. 그나마 비교적 예술전용관들은 광고가 적어서 다행이다. 우리는 광고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 내 피를 빨아먹으려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모기처럼 되버린 광고의 폐해에서 우리는 자신의 방호벽을 세워야 한다. 신종플루 보다 더 무서운 것은 광고에 노출된 자신의 잠재의식의 욕망의 범람이다. 광고와 정보의 이성적 구분. 그것이 무너지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철저한 노예가 되버린다. 

 예전처럼 영화를 자주 보진 않지만 꼭 극장에서 봐야할 영화 아니고선 그냥 집에서 곰플레이어로 본다. 약간의 돈을 지불하는지 안 하는지는 별로 신경쓰질 않는다.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충실한 모던의 영화 소비자 였다. 갈때까지 간 마케팅이 나의 문화적 취미를 소멸시켰다. 집에서 영화보기도 나름 좋다. 기타를 잡고 가볍게 아르페지오를 막 튕기던가. 서서 지압 발판을 밡으면서 영화보기도 동시에 할 수 있어서 좋다. 한 없이 자세가 불량해지고 기네스 맥주나. 와인을 홀짝거리기도 하고 사타구니를 맘대로 긁어대기도..아무튼 완전한 자유이다.

 특정한 영화 관람방식을 고수 하지 않지만 최근에 개봉한 영화 허트 로커를 다시 보면서 극장에서 봤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극장에서 본 관객들은 다들 그 폭탄 해체의 과정의 극도의 긴장감.(공감각적 이입) 을 여실히 느꼈다고 한다. 개봉하기전 곰플레이어 로 봤는데 꽤 수작이긴 해도 대단하게 느끼지는 못했다. 뭔가 2퍼센트의 부족함이. 극장에서 봤더라면 채워지지 않았을까. 처음으로 의심하게 된 영화였다.
 이 영화를 곰플레이어로 두 번 봤다. 미국,미군의 정치,역사적 입장,관점을 배제하고, 나는 이영화가 선(禪) 에 관한 영화로 보여졌다. 삶과 죽음을 초월해서 자기 자신을 내 던져 그 몰입하는 그 순간의 정점.희열을 그린 매우 멋진 영화였다. 자본주의 물직적 욕망, 가정의 안위, 모든 곁치레를 다 버리고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단 한가지는 폭탄 해체의 몰입의 순간이다. 참선, 최선,은 폭탄해체의 그 순간이었으며, 그는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그것을 느낀적은 서른살때. 북한산 족두리봉(여자의 유두를 닮은 봉우리여서 유두봉 이라고 불린다.) 에서의 바위 릿지 경험이었다.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내 등산화의 접지력만 믿고 경사진 바위에 달라붙었느데. 한 번 미끌어지면 그냥 추락하는 매끈한 바위 위에서 내 몸은 극도의 아드레날린이 분출되었다. 심장의 고동은 내 머리까지 진동했고 상념이 들어설 틈이 전혀 없고. 오직 내 호홉과 손 과 발끝의 미세한 감각의 확충. 실수하지 말아야지. 살아야지 하는 생존의 본능만이 존재했다. 관념적 나 란 실체는 여지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고통과 기쁨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스파이더맨이 되어 선의 의미를 탐구했다. 나는 지금 이순간 진짜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선 이라 생각한다. 보통의 삶에선 쉽지 않다.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긴 해도 우리는 선과악의 판단의 딜레마에 항상 고통스럽다. 존 레논의 말처럼 인생은 무언가에 몰두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 영화의 폭탄 폭발 장면은 하나의 예술이다. 미학적 아름다움이 충만하다. 공간과 시간은 사진이라는 복제 매체로 인해 폭발의 순간 조차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 1초에 몇 프레임을 찍었을까. 고속촬영으로 인한 노출 부족의 어색함은 전혀 찾아보기 어렵다. 생각해보니 내가 유치원때 처음 그린 그림이..폭발의 모습이었다. 좀 더 파고 들어가고 싶지만 다음에..
저격 시퀀스에서도 매우 사실감 넘치는데. 이름이 생각안나는 유명한 배우가 느닷없이 적탄에 쓰러지는 것도 의외였고, 시간의 압축속에서도 공간감과 긴장이 그대로 서려있었다. 사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어제 서울숲 매점에서 카프리 썬을 보고서, 이 영화속 저격씬에서 부사수가 총을 겨눈 사수에게 카프리 썬?을 빨대 꼿아 마시게 하는 장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완벽한 광고의 효과였다. 오랬만에 빨대 꼿아 마시는 카프리 썬은 영화속 인물들의 갈증상황을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이제 광고의 기능은 그런것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헐리우드 유명 배우를 쓰지 않음으로써 폭발씬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극도의 긴장을 잘 살려내었다. 톰 크루즈가 주인공으로 폭탄 해체를 한다면 우리는 안 터질줄 뻔히 안다. 반면에 유명배우는 어이없는 한 방에 쓰러트리고 만다. 

 좋은 영화 였지만. 왠지 미군의 개입과 작전은 여전히 역겹다. 그리고 각본이 대단히 좋은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은 여전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곰플레이어로 두번 보니 극장엘 안 가도 되겠다. 곰플레이어는 영화의 시뮬라르크럼이다. 

 예수의 참혹한 수난과 죽음을 리얼하게 묘사한 이 작품을 뒤늦게 보았다. 극장 개봉시에도 많은 논란이 되었었는데, 여러가지 논란 중에서도 적나라한 폭력 장면이 나로써는 매우 두려웠었다. ( 개인적으로 피에 대한 공포심이 커서, 잔혹한 장면이나, 내옆의 누군가가 피가 나고 아퍼한다면 내 몸이 아픈것처럼 동일시를 느끼는 감각이 예민하다. 그래서 공포영화는 질색한다. )  그런 내게 예수의 삶에 관심이 가지게 된 계기를 언젠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독실한 카톨릭 집안인 외가집에서 본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의 조각이었다. 아주 어릴때 였는데 세밀하게 묘사된 고통스런 예수상은 어린 마음에 슬픔과 의문을 심어 주었던것 같다.
 잊혀졌던 오랜 의문은 작년에 존경하는 지식인 김규항 님의 책 예수전을 통해서 서서히 사라졌다. 여러번 읽으면서 마음에 담을 아주 멋진 책이었다. 또 조영남 씨가 쓴 책 예수의 샅바를 잡다 도 재미있게 읽었었다. 수박 겉핥기 식의 예수에 관한 관심이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것 같다. 특히 이 영화를 보고나서 더욱 예수님의 삶에 관한 앎의 의지가 강해진걸 느낀다.  

 
 유다의 밀고로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되기 까지의 예수의 수난의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이성적으로 분석, 비판, 평가 할 필요가 없는 작품인것 같다. 크리스찬 이면 누구나 다 아는 성경의 이야기 이고, 예수의 수난을 두고 고담준론이나 성서의 해석.고증에 왈가불가 하기 보단 마음과 몸으로 깊이 느껴야 하는 영화다. 그 처절한  고통을 그 한없는 용서를. 관람자 내면에 조금이라도 승화 시켜야 한다. 그 끔직한 수난의 묘사가 내 마음을 허물고 같이 아파할때, 피에 대한 공포의 편견은 없어지고 담담하고 숙연하게 예수의 마지막 삶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아야 했다. 인간의 마음속의 선과 악 을 넘어서는 그 무한한 진리를..느낀다.

 유명한 배우인 감독 멜 깁슨의 의도는 확연하다. 죽음이 난무하고 폭력이 장난처럼 익숙해진 이 시대에 예수의 수난을 더욱더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에게 고통을 일깨우고 하루하루 감사하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무감각한 주변의 폭력에 대한 확실한 각성으로써 잔인한 묘사는 꽤 큰 울림을 준다. 책에서는 못 느끼는 확실한 공감각적 표현으로 인해 그 고통은 내면으로 체득화되어 나의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더 이상 선혈이 두렵거나 보기 싫지도 않다. 기분 나쁜 공포영화속 피와는 당연히 차원이 다르다. 끔찍하지만 성스럽다. 그 가 흘린 피를 통해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의 삶을 돌아보고 배워야 한다. 그 분을 통해 매일매일 거듭 태어나야 한다.

 나는 크리스찬이 아니다. 불교적 가르침과 수행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을 넘어선 신의 존재를 믿는다. 나는 불교도도 아니고 천주교도 아닌 그저 나날이 수행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그 하나. 하느님을 믿는다. 나는 보았으므로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P.S.  네이버 지식인 fox317 글 발췌.

이 영화의 감독 멜깁슨은 이 영화를 성경 그대로를 옮겨 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마태, 누가, 요한, 마가 복음서를 비롯,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슬픈 수난'에 소개된 성 앤 캐써린 에머리치의 일기들, 그리고 성 마리아 오브 아그레다의 '하나님의 신비한 도시' 등 다양한 자료를 원전으로 하여 충실히 인용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 반유대인적 내용으로 제작 단계부터 많은 논란을 일으켰었죠...
예수가 죽기 전 12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영화배우 멜 깁슨이 감독, 제작, 시나리오 집필 등 1인 3역을 맡았고, 특히 유태인들과 일부 기독교 신자들의 반발로 제작 기간 중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미국 개봉시 평론가들의 반응은 호평과 혹평으로 양분되었는데요...개인의 종교적 관점이 다소 실린 듯한 후자쪽 평론가들의 반응이 숫적으로 약간 우세하였다고 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아 자수를 하는 대형 범죄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늘어만 갔고 반대로 이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한 유대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죠.

이 영화는 서기 33년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라틴어와 아랍어로 촬영할 계획이 알려진 후, 촬영 초기부터 투자자로부터 외면을 받았고, 멜 깁슨은 자산 3천만불을 투입하여 영화 제작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어려움은 영화제작 도중, 반유대인적 내용에 항의하는 유대인 출신 거물들과 종교인들의 비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죠. 극중 예수의 죽음이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한 것으로 비춰지면서 영화는 유대반명예훼손연맹 등의 단체로부터 강력 항의를 받았고, 유대인 출신이 많은 메이저 영화사들의 사장들로부터 "앞으로는 멜 깁슨과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비난을 들었으며, 이 덕분에 완성된 필름은 배급자를 찾지못해 1년 가까이 창고 안에서 잠자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한 뒤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영화가 엄청난 논쟁의 중심에 섰던 것이 흥행면에서 도움이 되었는지, 엄청난 수입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사순절이었던 수요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첫날인 수요일 하루동안에만 2,356만불(이틀동안의 유료시사회 수입을 합치면 2,656만불)을 벌어들이는 기염을 토해 흥행돌풍을 예상케 했는데, 이는 역대 5번째로 높은 수요일 당일 수입(1위는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의 3,450만불)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70대 후반 나이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마지막 연기작 으로써, 삶과 죽음에 대한 숙고의 성찰을 보여준다.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감독이 노년에 와서 삶의 철학을 영화 속에 응축한 이 작품은 그의 영화 인생에서 최고의 정점을 이룬다. 1992년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이어지는 그의 수두룩한 명작들 ( 퍼펙트 월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스페이스 카우보이,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라 베이비, 아버지의 깃발, 체인질링.. ) 을 넘어 흥행과 비평 모두 최고를 달렸다. 노장 감독의 의례적 대우가 아니라, 진정 깊이 있는 삶의 성찰을 통한 노 감독의 따뜻하며 예리한 메시지를 담은 역작이다.


 작년에 국내 개봉시 처음 봤을때보다,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보니, 좀 더 깊이있는 메시지와 잔잔한 재미를 뱔견하여,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다시보기를 권하는 바이며 처음보시는 분은 나의 감상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물론 영화 감상후에..( 이 글은 줄거리 위주가 아니라 그리 상관은 없겠다.)  자 그럼 영화속으로..

 영화의 시작과 끝은 장례식 장면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죽음은 끝인가 시작인가? 27살 애송이 신부의 판에 박힌 설교에서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시작한다. 삶은 무엇인가?. 시작과 끝은 삶과 죽음이라는 굴레를 반복하듯이 사람들의 관계속으로 이동한다.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 부인의 죽음으로써 그는 타인과의 관계의 새로운 국면으로 영화는 전개되며, 삶의 변화를 통해 구원에 이루며, 결국 마지막에 그는 숭고의 죽음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에게 삶의 국면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한다. 영화속에서의 결말을 넘어선 현실의 관객 모두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는 고스란히 전해진다.

 월트 코왈스키는 한국전 참전용사로써 평생 내면의 상처를 가진, 지극히 보수적인 폴란드계 백인 영감탱이 이다.  그의 부인은 평생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그를  걱정해 죽기전 신부님한테 부탁한다. 그래서 책만 읽은 애송이 신부는 그렇게 냉대를 당하면서도 장례식 이후,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말 뿐인 구원과 참회의 공허한 설교는 그의 인생경험에 비춰볼때 턱도 없이 가소롭기만 하다.

 월트와 신부의 대립을 통해서 타인의 삶에 참여(관계)하는 방식의 문제를 제시한다. 월트는 전쟁체험에서 죽음에 대한 경험 ( 살기 위한 즉각적인 적을 살상하는 반응 ) 을 통해 부질없는 말이 먼저가 아니라 행동으로 삶을 실천하는 모습을 시종일관 보여준다. 영화속에서 이러한 계기의 시작은, 월트가 옆집의 몽족 사람들에게 쥐새끼 같은 동양놈들이라고 증오의 시선을 보내던 차에 신부는 월트가 있는 술집에 찾아와 삶과 죽음에 대해 질문한다. 월트는 죽음에 대한 고통스런 체험은 생생히 말하지만 삶의 문제에 대해선 이렇다할 답변을 못한다. 삶에 대해선 모른다는 신부의 일침에.. ' 그럴지도 모르지 '라고 그는 낮게 읖조린다. 그리곤 영화는 삶의 문제에 월트가 어떻게 참여하는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특히나 이 장면에서 인물에 떨어지는 조명이, 빛 과 어둠으로 극단적인데 삶과 죽음이라는 큰 화두를, 시종일관 영상과 상황속에서 대비를 통해 보여준다. 대체적으로 초반과 후반의 월트가 등장하는 씬은 강한 명암대비를 이루어 삶과 죽음의 줄타기 하는 듯한 심리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때로는 인공적인 조명의 사용을 최대한 배제하고 자연적인 빛의 상황하에서 인물의 다양한 심리를 표현한다. 얼굴에 드리워지는 음영의 농도와 양이 영화속 인물의 심리를 드러낸다고 보면 된다.

 
 영화의 첫 대사가 친구인 듯한 늙은 노인이 월트에게 조문하면서 "부인의 명복을 비네
She's a real Bitch." 라고 말한다. 영화 내내 월트의 친구들과의 대화 방식은 이런식이다. 이태리계 이발사, 아일랜드계 공사 감독관 과  대화에서의 재미도 그러하고, 마지막 월트의 유언장에도 여전하다. 타오에게도 그런식의 남자들의 대화법을 교육시키는데 이러한 삶의 태도는 신부의 교과서 읊조리는 공허한 말 과 극명히 대비를 이룬다. 그는 행동이 결여된, 경험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말들은 철저히 배척한다. 자신의 말이 아닌 것들은 죽어 있는 말로써, 그와 친구들과의 말은 죽음을 넘어선 삶을 유희하는 풍류의 자세를 보여준다.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과 죽어있는 말의 차이를 통해 타인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가르치고 일깨운다.

 신부는 불쑥 월트의 집, 술집에  찾아와 대뜸 월트라고 부르는데 정작 월트는 미스터 코왈스키 라고 부르라고 정색을 하며 말한다. 관계의 기본인 호칭부터 월트는 심기가 불편한 것이다. 이스트우드 감독은 끊임없이 소통의 기본인 호칭 문제를 대화 속에서 계속 야기시키고, 관계의 진정한 발전에서 그것은 무마된다.

 이러한 점은 노년의 감독이 미국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잔소리 같은 가르침이다. 실제로 공화당 지지자인 이스트우드 감독은 미국의 보수적인 가치들을 역설한다. 큰아들의 도요타 랜드크루저 SUV 를 타는 것을 마땅치찮은 시선을 보내며 포드를 타면 어디 덧 나나 라고 읊조린다. ( 현재 도요타 자동차 가 말이 많지만 그 일이 터지기 전까지 미국 젊은이들은 도요타가 미국 차 브랜드 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 만큼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절대적이었고, 현지화 되었었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죽음을 앞두고 신부한테 고해성사 하는 세가지 이야기 ( 젊었을때 다른 여인과 고작 키스한점,(불륜), 세금을 탈세한 점, 자식들에게 정이 없었던 점 ) 는 미국인 에게 고하는 직접적인 메시지 이다.


 월트의 행동 자체가, 이스트우드가 말하려는 미국의 보수적 견지의 가치를 보여주려는 듯 하다. 월트가 초반에 야만인 이라고 불렀던 옆집 몽족 사람들에게 참여하는 계기는, 몽족 갱들이 밤에 타오를 괴롭히는 소란에서, 월트는 한국전에서 썼던 M1 소총을 들이대며 그들을 물리친다. 위압적이고 으스스한 자세로, 그리고 또 타오의 누나 수가 길거리에서 흑인 깡패한테 위험에 처했을때,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과 대결한다. ( 이스트우드 감독을 유명하게 만든 황야의 무법자. 더티 해리 형사의 냉혹한 인상을 찌푸리며..) 보통 사람들로써는 어려운, 이웃의 위험에 참여함으로써 월트는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며 이웃 ( 타 민족 ) 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수가 몽족 갱들에게 심각하게 폭행을 당했을때, 그는 분노에 치밀며 반격을 행하리라고 다짐한다. 그는 자신과 이웃이 조금이라도 당하는 꼴을 못 보고 어떤식이라도 행동을 취한다. 그의 행동에서 즉각적인 미국의 단면을 보았으나, 마지막 행동은 우리에겐 큰 반전 이었다. 모든 이념, 사상, 종교 를 넘어서는 숭고의 자세 그 자체로써, 60년전 한국전쟁에서의 죄의식으로부터 구원받는다. 빚진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죽음으로써..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 미국인들 이면서 각자 꼬리표가 앞에 붙는다. 결국 백인이던 흑인이던 다 이방인 이라는, 월트 자신은 폴란드계 영감이며 이태리계 이발사, 아일랜드계, 아프리칸 흑인, 멕시칸 갱, 몽족. 그리고 병원내에서 월트는 인도 사람들 사이에 앉아서 무슬림 간호사로 부터 코스키 라는 이상한 발음으로 불려지고 중국계 의사한테 상담 받는다. 월트의 인상은 지푸려지지만 결국 이런 인종의 비빔밥화가 된 미국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면을 옆집의 몽족 소년 타오와의 관계에서 깨닫는다. 이웃을 돕는 타오의 심성을 발견한 그는 개인주의가 심화된 사회에서 타오에게 노동의 수고를 가지고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차고의 평생 모은 공구들, 1972년 포드 그랜 토리노 를 통해 남자가 가져야할 가치, 풍류 들을 가르친다. 영화속의 모든 점들이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훈수 인것 같다.
 이러한 다 인종 국가에서 어떻게 화합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월트의 삶과 변화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월트의 장례식에선 애송이 신부도 깨달은 바가 있어 설교의 내용 자체가 진솔한 말로 바뀐다. 영화 초반에 월트의 부인 장례식 이후 월트의 집과 옆집 타오네 집의  아기의 탄생 파티의 대비 처럼 유언장 앞에선 월트의 자식과 타오는 서로 엇갈린다. 타오의 엺은 미소는 월트의 죽음으로써 또 다른 삶이 전이 되는 것은 암시한다.(1972 포드 그랜 토리노를 통해서)
  영화속에서 여러번 변주되어 들렸던 메인 주제곡은 월트(이스트우드) 감독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노래 불러진다. 아스라이 울려퍼지는 그랜 토리노..

P.S.
 영화 초반에 월트의 손자 들이 옛날 전쟁 사진을 들고 '한국이 어디야?' 하는 그 어이없어 하는 어감에서 씁슬했었다.

 타오의 엄마와 누나인 수가 월트에게 일을 시키라고 데려왔을때, 그 둘이 타오에게 순간 구박하는 장면이 되게 재밌었다. 여자들의 기세가 장난아니어서 월트도 혀를 쯧쯧 찬다.

 수가 아일랜드 청년하고 걷다가 흑인 깡패를 만났을때, 아일랜드 청년이 흑인 흉내내는 말투와 행동이 어이없이 웃기다.

 


 아주 오랬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새 영화. 
 2차 대전 배경, 브래드 피트 주연, 그런 특징은 고사하고 딱. 전형적인 타란티노 표 영화였다. 말 많고. 폭력적이고, 재치넘치며, 음악 센스가 탁월한 그런 영화였다. 중간중간에 수다가 길어지면 잠깐잠깐 졸기도 하고, 엽기적인 폭력씬에선 귓속의 모든 솜털이 바짝 슬 정도로 긴장을 하며, 간만에 극장에서의 영화관람을 다채로운 오감을 느끼며 왔다. 폭력의 수위가. 너무 사실적이다. 킬빌에서처럼 만화적인 귀여운 끔찍함이 아니라, 너무나 진짜같다. 머리가죽을 칼로 벗겨내는 장면에서 그 서걱서걱 칼질하는 소리에 아주 오금이 저렸다. 마지막 장면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고.. 생긴지 얼마안된 영등포 타임스퀘어 안의 CGV 여서 소리가 장난 아니었다. 총소리의 음압감이 너무 강렬해서 총소리조차 긴장되었다.  

 대학교 1학년때 타란티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을 보던 기억이 난다. 첫번째 씬에서 갱들이 원형 테이블에 모여서 꽤 긴 대화를 하는데.. 무슨 심오한 의미,메타포를 파악하려고 엄청 집중해서 봤는데..결국 느낀건 정말 쓰잘데 없는 대화였다. 그냥 수다에 지나지 않는다..타란티노의 영화는 그런식이다. 미학적 접근으로 볼 필요가 전혀 없다. 그냥 싸구려 정신으로 보면 딱 좋다. 그 싼티 속에 재미와 위트가 있다. 그리고 영화적 통쾌함이랄까..현실에서 그런 폭력의 카타르시스를 느낄수 있나? 영화관람 잠시나마 상식을 넘어서는, 인간 내면의 폭력성을 대리만족 시켜준다. 살짝 맛이 간듯한 감독의 또라이 기질이 맘에 든다. 예술 매체는 도덕적 잣대에서 어느정도 벗어날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식의 전환과. 확장. 혹은 파괴. 그것이 좋은 예술의 가치이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아무 생각없이 즐겨라..인간은 원래 그리 고상하지 못하다.

 타임스퀘어의 건물은 정말 거대하고 세련됐다. 모든 명품브랜드들이 으리으리하게 입점해있다. 바로옆, 앑으막한 담벼락 넘어론 원래 이지역의 원주민인 사창가 거리가 쭉 뻗어있다. 참 포스트모던한 풍경이다. 앏은 유리막 너머의 여인들이 거대자본의 마지막 마지노선인양 위태롭게 성형가슴을 매만진다. 어쨋거나 돈이 지배하는 욕망사회. 구경할만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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