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성격이 운명이 되고
당신의 삶을 결정 짓습니다.


내 생각과 내 말이 
내 삶을 결정합니다.
진정 이러한 것을 안다면
생각과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했던 불평 불만의 마음,
부정적인 말들 
오늘, 
깨끗하게 다 지워버립니다.


축복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 
상대를 세워주는 말을
함으로써
삶의 주름이 점점 펼쳦는
아름다운 축복을 경험해 
보시지 않으실런지요?


분명히 패배할 상황에서
승리를 고백하세요
분명히 모자란 상황에서
풍부함을 고백하세요
자기가 말한 대로 됩니다.
자기가 말한 대로 이루어 집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가득찬 말들이
사랑으로 충만한 말들이
당신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당신의 소망대로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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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있다. 강좌의 절반이 지난 이 시점, 어젠 숙제검사를 받다가 선생님이 내가 대한민국이라도 된 양, '총체적 난국'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인정한다. 아직 감도 못 잡고, 그냥 평소의 악필 습관대로 휘날리는 필치를 끄적댈 뿐이다. 근데, 오히려 점점. 오기도 생기고, 붓과 화선지와의 마찰과 먹물의 스며듬을 몸이 조금씩 터득하고 있다는 걸 안다. 아직은 밑바닥을 헤매지만 내 안에 명필의 가능성이 꿈틀댄다는 걸, 아니 그것이 있다는 것 만은 확실히 안다. 


 캘리그래피를 배우게 된 계기는 표면적으론 우연인데, 이게 따지고 보면 필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디자이너인 친한 선배가 어느날 내가 뚝딱 만든 어떤 쪽지를 보게 됐고, 너가 캘리그래피를 배우면 되게 도움이 될 것이다. 란 말을 했다. 이때까지 내 마음속엔 캘리그래피가 조금의 감각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분야로 보였다. 그래서, 뭐 한번 배워나 볼까.란 마음이 처음엔 앞섰다. 내가 이 분야를 얕본 이유를 생각해보니, 어릴적 서예를 따로 배운적은 없지만, 학교에서 배운만큼만 붓을 잘 다루긴 했다. 먹물로 대나무나 국화 같은것도 곧 잘 그렸다. 평소 글씨는 악필이지만 그래도 붓글씨는 자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바로 무참히 깨졌고, 지금은 이 분야에 대한 탐구 정신에 설레이기도 한다. 


 캘리그래피는 영어로는 서예로 통칭되는데, 현대적인, 실용적인 서예로 말할 수 있다. 문자 정보를 읽는 것에서 이미지화(연상)시켜 보여질 수 있도록 하는 현대 조형 예술의 하나다. 선생님께 서예와 캘리그래피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했는데, 클래식과 가요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고 하셨다. 서예는 확고한 법(칙)이 존재하지만 캘리그래피는 법칙 보다는 용도에 맞는 컨셉트가 중요한,, 

 내가 선생님을 믿고 좋아하는건 기본 뿌리가 확실하고, 기본기를 강조하는데 있다. 무려 서예학 박사이시고, 캘리그래피 초창기를 이끈 1세대 캘리그래퍼다. 그러니까 서예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캘리그래피가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일상에 파고드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강좌가 진행되면서 느끼는 건, 글씨라는게 자신의 인성,인품의 반영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좋아야(져야) 좋은 글씨가 나온다는 것, 서예를 통해 수신,수성하는 옛 선비들의 덕목을 엿 볼 수 있었다.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소년 문장은 있어도, 소년 명필은 없다.". 사람하고 글씨는 같이 늙어간다고 한다. 


 캘리그래피를 배우는데 있어서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고히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취미냐, 작품이냐, 실전이냐, 처음의 그냥 호기심이 아닌 어떤 목적의식이 뚜렷해지고 있다. 


 캘리그래피는 과학이다. 공간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한글자,한글자 마다의 조형성 뿐만 아니라. 전체 문장의 조형도 중요하다. 한글은 상형문자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원리와 법칙이 있는 체계를 무너뜨리면 안된다. 물론 컨셉이 그러하다면 어쩔수 없지만. 그리고 전통 서예의 도제식 교육으로 스승과 제자의 글씨가 똑같아 지는걸 매우 우려하고 경계하셨다. 배우는 입장에서 스승의 글씨에 영향받는건 어쩔 수 없는데, 자신의 글씨를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캘리그래피에서도 어느 학원, 어느 선생의 글씨만 보인다고 했다. 


 여기서 핵심을 정리해 보자면.

1. 글씨 공간 똑같이. 

2. 실획, 허획의 구분

3. 먹물이 뭉치는것, 가시나무 처럼 날리는것 조심

4. 예각 조심

5. 가로획 짧게

6. ㄴ,ㄷ,ㄹ 중성 ㅡ 가 올때 짧게

7. 글씨 엮기

8. 착시현상 (막힌공간 크게 열린공간) ㅂ,ㅕ,ㅛ,ㅠ

9. 초성보다 중성 짧게 

10. 받침 끼워넣기. 

 무엇보다 글씨의 정성과 자신감 있는 필치가 중요하다. 



 숙제 검사 하면서 수강생들이 써온 문구를 다시 써주면서 설명. 내 인생의 봄날~ 의 봄날을 쓸 때 필치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어느 삼십대 여자분의 보고싶어요 원빈.. 솔직하고 귀여움에 우린 잠시 뿜었다. 


 붓이 먼저 가는게 아니라, 이미 글씨의 형상, 위치를 다 머릿속에 만들어 놓고 붓을 움직여라. 

 천천히..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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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디 최 선생님의 주옥같은 칼럼이다.

 

나의 버킷리스트

 

버킷리스트는 죽음을 앞 둔 남자가 바쁜 일 상 속에서 평소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인생의 마지막에 해보기 위해 리스트를 만들고 실행하는 어느 외국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듯하다. 하지만 그 영화의 주제는 버킷리스트 자체에 의미가 없다.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는 가운데 진실한 친구를 만났다는 결론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그렇다, 이 영화 속에 감동은 버킷리스트가 아니고, ‘진실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갓난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지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는 것으로 시작해서 부모, 친구, 사회의 동료들을 통해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자기를 인식하고 성장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모습을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거울의 욕망이 우리의 삶을 인도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나는 항상 남을 의식 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은 남에 의해 비춰진 내가 아니라 나 자신의진실에 목마르다. 따라서 나의 버킷리스트는 설령 찾지 못한다 해도 나의진실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진실을 찾아보는 구체적 방법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해오던 일들의 삶 속에서 그 길이 있지 않을 까 생각한다.

 

교수와 작가 그리고 문화이론가라는 직업으로 살아왔기에, 첫 번째 버킷리스트는 아마도 구체적인 작품정리를 할 것 같다. 없애야 할 작품과 간직해야 할 작품 그리고 가족에게 물려줘야 할 작품과 사회에 환원 시켜야 할 작품을 분류하는 일. 아마도 그리하다보면 내가 보지 못했던 내 작품의 진실이 다시 보이지 않겠는가. 두 번째 버킷리스트는 함께 수학했던 제자들 중에 진정 훌륭한 작가와 학자가 나와 주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나의 가르침에 진실한 면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 번째 버킷리스트는 나 자신의 삶을 글로써 정리해 보는 것이다. 결단코 이 글은 남에게 보여 진 내 모습을 정리하기 위함이 아니며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에서 쓰는 자전적 글이 될 수 없다. 스스로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내 속에 나의 진실은 무엇이었는가를 알기위해 가족, 친구, , 사랑, 기쁨, 슬픔, 미움, 욕망, 좌절 그리고 못남과 괴로움까지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들을 정리해 보고 싶다.

 

아마도 이러한 일들을 해 나가다보면 사회와 남들이 규정한 도덕과 규범 그리고 평가 속에서 나 자신도 견디기 힘든 추함이 들어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진실을 찾고자하는 힘없는 늙은이가 감당하기 힘든 후회가 밀려 올 지도모르겠다. 그렇기에 노년의 나에게는 남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괴리로부터 위로가 필요하며, 그 위로를 받기위해 종교에 몰입하려한다. 라캉이 말했듯이 남들에 의해 만들어진거울의 욕망을 벗어나는 길은 종교이다. 종교는 남들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고, 절대 주 을 의식하기에 그것이 가능하다.

코디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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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기.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시간 속의 뭔가를 도려내 다른 형태로 지속될 수 있도록
전이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으로부터 도려낸 그 무엇이
카메라 '앞'에 놓여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
사진 찍기는 양방향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하나는 앞에서, 또 하나는 뒤에서.
그렇다. '뒤'와도 상관이 있다.
이러한 비유는 그렇게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마치 사냥꾼이 눈'앞'의 맹수를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듯,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반동으로 몸이 '뒤'로 밀려나듯,
사진을 찍는 사람 역시 셔터를 누르는 순간, '뒤'로 튕겨 나간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말이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은 언제나 이중적인 상을 갖게 된다.
사진은 찍히는 피사체를 보여주게 마련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뒤에 있는 것'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대립상'이다.
촬영하는 순간 사진을 찍는 사람 즉, 자신의 상 말이다.
모든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이 대립상은 렌즈로 포착할 수 없다.
사냥꾼은 자신이 쏜 총알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반동의 충격을 느낀다
그렇다면 사진을 찍는 행위에서 이 '반동'이란 무엇일까?
반동을 어떻게 느끼고, 사진 속에 묘사할 수 있을까?
사진 속의 반동은 어떻게 투영될까?

독일어에는 이런 상황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
매우 다양한 관계 속에서 터득할 수 있는 단어,
'태도 혹은 관점' 이다.
이 단어는 심리적, 도덕적으로 '어떤 대상을 대하는 고정된 상태'를 말한다.
또한 뭔가를 위해 준비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사진이나 영화에선 영상의 배치, 세팅
(뷰파인더의 테두리 안 알맞은 위치에 피사체를 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사진가가 피사체를 '받아들이는'
순간의 노출값과 셔터 속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의 단어가 '태도'를 뜻하면서
한편으론 태도에 의해 생산된 상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태도'(즉,모든 영상)는 실제로
이러한 영상이 '받아들여지도록' 만든 관점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냥꾼이 느끼는 반동은 사진에서,
셔터를 누른 뒤 어느 정도 가시화되는
사진가의 자화상에 해당한다.
사진가의 얼굴 표정이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관점,
눈앞의 피사체에 대한 사진가의 태도가 반영되는 것이다.

 카메라는 일종의 눈이다.
그것도 앞뒤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눈.
앞으로는 사진을 찍고,
뒤로는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그림자 같은 윤곽을 그려낸다.
그렇다. 앞으로는 피사체를 바라보면서,
뒤로는 이 피사체를 포착해야 하는 근거를 바라본다.
카메라는 사물들과 동시에 그 사물들을 향한 (사진가의) 바람을
보여주는 셈이다. 

 매순간, 이 세상 어딘가에선
누군가 셔터를 누르며
뭔가를 포착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누군가는
특정한 빛에,
어떤 얼굴에,
어떤 제스처에,
어떤 풍경에,
어떤 기분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혹은 그저 단순히 어떤 상황을 잡아두고 싶기 때문이다.
사진의 피사체는 명백하게 드러나 있고, 수없이 널려 있다.
매순간 끊임없이 늘어난다.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 사진을 찍을 때,
그 순간은 모두 일회적이며 고유하다.
시간이, 멈추지 않는 시간이 그 일회성과 고유성을 보장한다.
심지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찍어대는 스냅샷 역시
그들 각자에게는 고유하고 유일무이한 것이다.
관광객들이 흔하디 흔한 스냅샷을 찍는
가장 진부하고 단순한 그 순간들 역시
유일무이하고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다.
이때 정말 놀라운 것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
'시간을 붙잡았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진을 통해 매번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흐른다는 점이
새로이 증명된다는 데 있다.
모든 사진은 우리 자신의 유한함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기억이다.
모든 사진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포착된 모든 영상은 고귀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고,
사진을 찍는 이의 시선 그 이상의 것이며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다.
말하자면, 모든 사진은 시간의 저편에서, 신의 시야 밖에서
이루어지는 창조행위다.
또한, 점점 잊혀 가는 신의 계명을 떠올리게 한다.
" 너의 우상을 만들지 말지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사진을 찍어도 되는 것은,
'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아름답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진실한 행위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또한 언제나 교만하고 무례한 행위다.
그래서 사진 찍기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무절제함을 가르치고 겸손함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도 혹은 관점'이란 말을 겸손함보다 허풍으로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카메라를 양쪽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앞으로, 뒤로.
그러면 카메라는 두 개의 상을 하나로 융합시킨다.
그러면 '뒤'가 '앞'에서 사라진다.
그러면 카메라는 촬영을 하는 그 순간 비로소,
사진가가 피사체와 분리되지 않는 것을 허락한다.
이때 사진가는 '뷰파인더'를 관통하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세상의 '다른 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잘 기억하고,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물론, 유감스럽지만 더 많은 경멸을 담게 될 수도 있다. '악한 시선'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상의 모든 사진, 시간 속의 모든 '한 번은(once)',
한 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모든 사진은 한 편의 영화를 시작하는 첫 장면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 찾아오고,
두 번째 셔터를 누르는 순간 몇 걸음 더 나아가고,
다음 사진이 이어지면서,
고유한 공간, 고유한 시간을 가진 이야기로 발전한다.

 사진은 이 단 한 번에서 영원을 만들어낸다.
사진을 통해 시간이 비로소 가시화되는 것이다.
첫 번째 사진과 두 번째 사진 사이에서,
만약 이 두 장의 사진이 없었다면 영원히 잊힐 수도 있던
한 편의 이야기가 태어난다.

 사진을 찍는 순간 우리가
세상 속으로 사물들 속으로
사라지려 할 때,
세상과 사물들은 사진에서 빠져나와
사진을 바라보는 관찰자를 파고들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바로 관찰자의 두 눈 속에서 말이다.

 " 사진에 있어서 한 번이란, 정말로 오직 단 한 번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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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비밀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 앤드류 매튜스

1. 자신이 느끼는 Reality에 관한 그리고 구조에 대한 입장이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 아니면 모호한 지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할 듯하고,

2. 누구의 이론을 끌고 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자들의 관점과 너의 관점의 차이를 발견하고,

3. 학자들의 개념을 끌고온다 해도 너의 관점을 말하기 위한 근거로 비교 분석 또는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4. 어느 학자의 이론을 보니,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였더라가 아니라, 그는 그렇게 보지만 나는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로 연결 해야 한다.

5. 작품 속에 공부하고 이론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결국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며, 자신의 얘기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 이란다.

네 작품의 고민은 페르소나로 접근 할 수 도 있으며, Panopticon으로 접근 할 수 도 있으며, 프로이트의 강박으로, 유교적 전통의 계율주의로, 또 라캉의 상징계와 리얼리티 속에서 이동하는 거짓 자아로 접근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너의 고민들 중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선별하는 것(가면?구조?강박?전통?사회?가족? 기타 등등...)이 큰 과제이며, 그 다음은  과제를 풀어가기위해 학자들의 이론들을 활용하는 것이란다....

이론 속에서 너를 찾지 말고 네 속에서 너를 찾기 위해 이론을 탐구하며 필요에 따라 인용 또는 활용하거라.

 코디최 선생님의 답변..

이승훈 _ 한양대 교수/시인


데리다(J. Derrida)는 1930년 알제리에서 태어난다. 그는 1959년부터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파리고등사범학교 교수를 역임한 유대계 학자로 1965년 역사와 글쓰기를 다룬 책에 대한 장문의 서평을 발표하면서 대중의 시선을 끈다.

그는 1967년 세 권의 저서 《문자학(of grammat-ology)》, 《목소리와 현상(speech and phenomena)》, 《글쓰기와 차이(writing and differenc)》를 동시에 출판하면서 소쉬르, 후설,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통해 이른바 해체적 읽기 혹은 해체적 접근을 철학에 도입한다. 특히 1969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놀이》를 발표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이른바 해체주의 선풍을 일으킨다.


말과 글을 초월하는 글쓰기


위의 세 저서 가운데 《문자학》은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강조하고 그것은 크게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을 대상으로 한다. 물론 루소, 레비-스트로스, 하이데거, 니체 등도 대상으로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주로 소쉬르의 언어 개념을 해체하는 그의 글쓰기 개념을 간단히 살피고 그가 강조하는 글쓰기와 장자의 언어 혹은 글쓰기를 비교하기로 한다.

그는 세 가지 수준에서 소쉬르를 비판한다. 첫째는 언어에는 차이만 존재한다는 소쉬르의 명제이고, 둘째는 언어 기호를 구성하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ie)가 자의적 관계에 있지만 소쉬르의 경우 궁극적으로 기의, 그것도 초월적 기의를 강조함으로써 이성중심주의를 지향한다는 것. 셋째는 문자 체계의 2차성이다. 소쉬르에 의하면 문자 체계의 기능은 언어를 표기하는 2차적 기능이고 언어는 음성 언어를 대상으로 하고 문자 체계는 배제한다. 따라서 소쉬르는 문자 체계, 글쓰기보다 음성 체계를 강조하고 결국 음성중심주의를 지향한다.

첫째로 언어의 본질이 차이에 있다는 소쉬르의 주장. 그에 의하면 언어 속에는 오직 차이만 존재하고 이 차이는 실체적 항목들의 차이가 아니라 이런 항목들이 존재하지 않는 차이이다. 말하자면 기표든 기의든 언어는 언어 체계 이전에 존재하는 관념이나 소리를 소유하는 게 아리나 오직 체계가 환기하는 개념적 차이와 음성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F. D. Saussure, Course in General Linguistic, trans. w. Baskin, Philosophical Library, New York, 1959, 120).

이런 주장은 요컨대 언어는 체계이고 체계는 요소들의 관계, 곧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띠라서 기표와 기의가 의미를 소유하는 것도 체계 밖의 사물과는 관계없고 오직 체계에 의해, 그러니까 각 요소들의 차이에 의해 의미를 생산한다. 예컨대 ‘나’라는 낱말은 실체를 지시하거나 그런 실체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칭 체계 곧 ‘나/너’의 차이에 의해 의미를 생산한다. ‘나’라는 낱말이 기표의 수준에서 그렇다면 ‘산’이라는 낱말은 기의의 수준에서 ‘산/들’의 차이가 의미를 생산한다.

그러나 데리다에 의하면 이렇게 구조적 차이로만 존재하는 요소들 역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차이에 의해 각 요소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차이에 앞서 존재하는 혹은 차이를 가능케 하는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컨대 음성적 요소가 감각적인 것은 이 요소에 형식을 부여하는 차이 혹은 대립을 전제로 한다. 쉽게 말하면 차이에 앞서는 순수한 차이, 운동이 있다는 것. 한 요소가 음성적 실체로 환원되는 것은 이런 차이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기원적 종합을 전제로 하고 이런 종합을 기원적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적 경험의 최소 단위 속에는 언제나 과거 파지(retention)가 있고 이렇게 타자를 보유하는 흔적이 없다면 차이도 없고 의미도 나타날 수 없다. 따라서 문제는 구성적 차이가 아니라 오히려 내용이 결정되기 전에 순수한 운동이 차이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순수한 흔적이 차연(differance)이다. 차연은 감각과 지성을 초월하며 기호의 분절을 허용하고 기표와 기의, 표현과 내용, 말과 글의 분절을 허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이미 글쓰기(ecriture)이다. 한 마디로 차연은 형식을 형성한다(J. Derrida, Of Grammatology, trans. G. C. Spibak, The Johns Hopkins Univ. Press, 1974, 62~63).

이런 주장을 통해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소쉬르가 말하는 언어에는 차이만 있다는 주장을 해체한다. 그는 소쉬르에 기대 소쉬르를 뚫고 새로운 개념/비개념에 도달한다. 소쉬르는 차이를 강조하고 데리다는 이 차이 너머 있는 것, 이런 차이를 형성하는 것, 곧 차연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차연은 순수한 운동이고 순수한 흔적이고 그가 말하는 광의의 글쓰기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글쓰기는 협의의 글쓰기가 아니고 그가 애용하는 차연, 흔적, 텍스트 등과 비슷한 개념이다. 우리는 흔히 말과 글, 말하기와 글쓰기를 구분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구분, 차이, 형식을 가능케 하는 글쓰기이고 그런 점에서 광의의 글쓰기이고 원-글쓰기(arch-ecriture, arch-writing)이다.

이런 글쓰기는 기원적 흔적이고 차연이고 협의의 말과 글을 초월하고 협의의 말과 글 이전에 있다. 차연은 시간/공간의 2항 대립이 해체되는, 그런 점에서 존재·사물·언어는 자기동일성이 없고 있는 건 오직 시간적 지연과 공간적 차이이다. 앞에서 낱말의 의미는 절대적으로 현존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과거의 의미를 파지한다고 했거니와 이제 좀더 자세히 데리다가 말하는 글쓰기, 곧 광의의 글쓰기가 협의의 말/글 속에 어떻게 기원적 흔적으로 드러나는가를 살피기로 한다.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어버려라


일본 철학자 도시히코는 데리다의 에크리튀르를 다음처럼 분석한 바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먼저 협의의 글쓰기, 소쉬르의 용어로는 문자 체계의 경우 공간성은 존재하고 시간성은 완전히 부정되지 않는다. 예컨대 a-b-c-d의 순서로 글을 쓰는 경우 공간성은 그대로 존재하고 시간성, 곧 계기적 질서 역기 완전히 소멸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a를 적고 다음에 b를 적을 때 a는  앞에 존속하고 c를 적을 때도 앞에 b가 존속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협의의 글쓰기는 전통적으로 인식된 것처럼 공간성만을 특성으로 하는 게 아니다.

한편 말, 소쉬르의 용어로는 발화(parole)의 경우 공간성은 소멸하고 시간성의 지배를 받는다. a를 말하고 다음 b를 말할 때 a는 소멸하고 c를 말할 때 다시 b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소멸은 기표의 경우에 해당하고 기의의 경우에는 a를 말하고 다음 b를 말한다고 해서 a의 의미가 완전히 소멸하는 게 아니라 b는 a의 의미의 흔적을 거느리고 c를 말할 때 역시 c는 b의 의미의 흔적을 거느린다. 그러므로 말에도 공간성이 있다. 요컨대 글은 공간적이고 말은 시간적이라는 2항 대립은 해체된다. 왜냐하면 글에는 시간의 흔적(기표)이 남고 말에는 공간의 흔적(기의)이 남기 때문이다.

도시히코가 강조하는 것은 말의 경우 기표의 계열 a-b-c-d는 시간적 순서를 유지하지만 기의 a,b,c,d는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것. 그것은 고정성이 없고 이런 가동성, 흔적이 데리다의 원-글쓰기에 해당한다(이즈쓰 도시히코[井筒俊彦], 《데리다의 에크리튀르론에 대해》, 의미의 깊이, 이종철 옮김, 민음사, 2004, 128~132).

그런 점에서 원-글쓰기는 협의의 글과 말의 경계를 해체한다. 데리다의 원-글쓰기, 기원적 흔적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말에도 있고 글에도 있다. 그리고 말과 글을 초월한다. 요컨대 원-글쓰기는 말과 글을 가능케 하고 밀과 글을 구분한다. 글의 시간적 흔적(기표)이 차연이고 말의 공간적 흔적(기의) 역시 차연이다. 이런 흔적은 실체가 없지만 실체가 없는 것도 아니고 모든 구분·차이·대립 이전에 있으며 구분·차이·대립을 가능케 하고 생산한다. 그러므로 이런 글쓰기는 글을 생략한 글쓰기이고 따라서 언어뿐만 아니라 존재·세계·사물의 흔적으로 존재한다.

소쉬르는 차이를 강조하고 데리다는 이런 차이를 가능케 하는 차연, 흔적, 말/글의 차이를 가능케 하는 원-글쓰기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장자는 무엇을 강조하는가? 장자는 외물(外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통발(筌)은 고기를 잡는 것으로 고기를 잡으면 그 발은 잊어버리고 토끼올무(蹄)는 토끼를 잡는 것으로 토끼만 잡으면 잊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이란 사람의 생각을 상대편에게 전달하는 것이므로 생각할 줄을 알면 말은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찌 저 말을 잊은 사람과 더불어 말을 할 수가 있을까?(《장자》, 이석호 역, 삼성출판사, 1976, 448)


장자에 의하면 말, 언어는 통발에 비유되고 토끼올무에 비유된다.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고 토끼를 잡으면 토끼올무는 잊어야 한다. 말도 생각을 전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전하면 잊어야 하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말을 잊는다는 것. 부처는 말을 뗏목에 비유하고(‘금강경’) 비트겐슈타인은 말을 사다리에 비유한다(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옮김, 천지, 1991, 143). 뗏목은 강을 건너면 버려야 하고 사다리도 목표물에 도달하면 버려야 한다. 장자 역시 사용한 다음엔 잊고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생각할 줄을 알면 말은 잊어버리고 마는 것(得意而忘言)’이다. 뜻을 알면 말을 잊고 거꾸로 말을 잊으면 뜻을 얻는다. 선불교에서는 이심전심·교외별전·불립문자(以心傳心 敎外別傳 不立文字)를 강조하고 장자가 말하는 것 역시 크게 보면 비슷하다. 요컨대 그의 주장은 말을 잊으라는 것. 말을 잊기 때문에 글도 잊으라는 것. 아니 내가 읽은 바로는 장자의 경우 말과 글에 대해 별도로 말한 바는 별로 없고 따라서 글에 대한 장자의 생각는 말에 대한 그의 사유에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은 “그러나 나는 어찌 저 말을 잊은 사람과 더불어 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장자의 질문과 관련되는 바 뒤에 가서 살피기로 한다.


텍스트 바깥엔 아무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장자가 말하는 잊기, 망각의 의미이다. 앞에서 나는 데리다의 소쉬르 비판을 세 가지로 요약한 바 있고, 그 둘째는 언어 기호를 구성하는 기표와 기의는 자의적 관계에 있지만 암암리에 소쉬르는 기의, 그것도 초월적 기의를 강조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먼저 기표와 기의는 자의성의 원리에 따라 결합된다. 예컨대 ‘산’이라는 기표(말소리)는 ‘산’이라는 기의(개념)와 결합할, 이 개념을 지시할 아무 필연성이 없다. 자의적으로 제멋대로 결합된다. 왜냐하면 같은 ‘산’이라는 기의가 영어에서는 mountain, 불어에서는 mont이라는 기표와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쉬르는 이런 자의성을 강조하면서도 도형으로는 기의를 위에 놓고 기표를 아래 놓는다(소쉬르, 위의 책, 66). 

이런 도형이 암시하는 것은 기의가 기표보다 우위에 있고 기표를 지배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라캉은 이런 도형을 거꾸로 그려 기표의 우위를 주장한 바 있다. 결국 표면상으로는 기표와 기의가 상호의존적 관계로 나타나지만 그 심층에는 기의가 강조되고 이런 기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기표를 지배하고 기표를 끌고 간다. 결국 그는 암암리에 초월적 기의를 지향하고 이런 기의는 서양 형이상학을 지배한 이성중심주의와 통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소쉬르는 은연중에 초월적 기의, 이성을 강조하고 따라서 이성중심주의를 지향하고 아무튼 언어에 무슨 중심이 있다는 사유를, 사유의 흔적을 드러낸다. 데리다의 경우 언어는 차연이고 흔적이고 원-글쓰기이고 이런 언어는 시작도 끝도 없고 물론 중심도 없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텍스트이다. 텍스트는 책이 아니다. 책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중심이 있지만 흔적, 차연, 원-글쓰기, 텍스트에는 시작도 끝도 중심도 없다.

그의 텍스트 개념을 요약하자. 그에 의하면 흔적은 경험의 시간화(temporalization), 그러니까 경험이 시간을 매개로 형성될 때 나타나고, 그런 점에서 경험은 세계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빛도 소리도 아니고 시간 속에도 없고 공간 속에도 없다. 이 경험의 시간화에 의해 차이들은 요소들 사이에 나타나고 아니 요소들을 생산하고 요소들을 나타나게 만든다. 이 차이들이 텍스트들, 연쇄들, 흔적의 체계들을 구성하고 이런 연쇄와 체계들은 흔적의 조직 속에서만 그 윤곽을 그릴 수 있다. 나타남(appearing)과 나타난 것(appearance)의 차이, 세계와 경험의 차이는 다른 모든 차이들의 조건이고 다른 모든 흔적들의 조건이고 이미 하나의 흔적이다. 이 흔적이 의미의 절대적 기원이고 다시 말하면 의미의 절대적 기원은 없다(데리다, 위의 책, 65).

데리다의 문장이 난해한 것은 그만큼 그의 주장이 기존의 논리나 사유로는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직역을 피하고 가능한 의역을 하면서 다시 요약한 그의 텍스트 개념은 ‘우리는 오직 기호에 의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데리다, 같은 책, 50)는 그의 명제를 발전시킨 것. 기호를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소쉬르가 강조하는 초월적 기의는 존재하지 않고 나아가 객관적 현실, 사물, 지시물,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기호이고 이 기호는 그의 경우 시작도 끝도 없고 중심도 없는 흔적이고 놀이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 곧 이성중심주의를 부정하고, 존재-신학과 현전의 형이상학을 전복한다.

살아 있는 경험은 세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시간적 질서 속에 있고, 시간적 질서는 예컨대 1분-2분-3분의 순서로 전개되지만 살아 있는 경험은 이 질서 어디에 있는가? 결국 경험의 시간화에 의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1분과 2분의 차이이고 1분, 2분 3분의 차이들이고 이 차이들이 1분, 2분이라는 요소들을 생산하고 텍스트, 연쇄, 흔적들을 구성한다. 이 흔적이 의미의 절대적 기원이고 그런 점에서 의미의 절대적 기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텍스트들, 흔적들의 체계이다. 세계 역시 흔적이고 놀이이다.

그러므로 텍스트 바깥엔 아무것도 없다. 텍스트 바깥이 텍스트 안이고 안이 아니다. 텍스트는 언어의 기원이고 기원 없음이고 또한 텍스트는 직물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 세계에 산다는 것은 텍스트 속에 살면서 텍스트를 짠다는 의미이고 존재는 글쓰기이고 글쓰기는 텍스트 짜기이다. 요컨대 텍스트, 세계, 존재, 쓰기, 짜기, 흔적은 등가 관계에 있다. 이런 글쓰기가 원-글쓰기이다.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그렇다면 시작도 끝도 없고 중심도 목표도 없는,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만 있는 이런 글쓰기-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객관적 현실, 지시물, 세계가 소멸한 다음의 기호들의 놀이? 기표와 기의의 순수한 놀이? 이 놀이의 의미는 무엇일까?

 

장자의 꿈인가, 나비의 꿈인가


도시히코는 이 놀이를 마르소(M. Marceau)의 팬터마임에 비유하면서 다음처럼 말한다. 어두운 무대. 마르소의 손이 조명을 받으며 암흑의 저 밑에서 떠오른다. 손가락이 섬세하게 떨리면서 나비가 갑자기 춤을 추며 날아오른다. 마르소의 손가락이 나비의 꿈을 꾼다. 관객은 이 나비가 손가락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나비라는 것도 알고 있다. 손가락은 나비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비는 손가락이라는 기호의 지시물이 아니다. 나비는 현전하지 않고 현전하는 나비는 나비의 환상일 뿐이다. 지시물, 현실, 세계가 소멸한 뒤에는 기표와 기의만 남고 현실에서 해방된 기표와 기의의 놀이, 상호 얽힘이 존재라는 이름의 텍스트를 계속 짜고 있다는 것. 중요한 것은 데리다의 경우 나비를 환상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마르소의 손가락까지 환상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도시히코, 위의 책, 118~121).

손가락이 나비의 꿈을 꾼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손가락은 기호이고 따라서 기호의 꿈이다. 문제는 데리다의 경우 나비는 환상이지만 손가락까지 환상은 아니라는 지적이고, 이런 지적 후에 도시히코는 데리다의 차연, 장자의 꿈, 나가라주나의 공(空), 선불교의 무(無)一물(物)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다.

도시히코의 이런 지적은 암시하는 게 많고 내 생각을 말하면 디음과 같다. 데리다의 경우 나비는 환상이지만 손가락은 환상이 아니고 장자의 경우에는 나비도 환상이고 손가락도 환상이라는 것. 데리다가 목적은 없지만 텍스트를 계속 쓰고 짠다면 장자는 이런 행위도 버리라고 말한다. 다 같이 현실, 초월적 기의, 세계를 부정하지만 데리다는 텍스트를 쓰고 짜는 주체, 쓰고 짜면서 태어나는 주체, 곧 텍스트적 주체를 인정하고 장자는 이런 자아마저 잊으라고 말한다(데리다의 텍스트적 주체에 대해서는 이승훈, 《탈근대주체이론-과정으로서의 나》, 푸른 사상, 2003 참고 바람). 다음은 장자의 말.


전에 장주(莊周)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것이 분명히 나비였다. 스스로 줄겁고 장주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금 뒤에 문득 깨어보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정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니 이를 물화(物化)라고 한다(장자, 위의 책, 208).


마르소의 팬터마임에서는 손가락과 나비의 경계가 해체된다. 이때 해체란 손가락과 나비, 현실과 환상의 2항 대립이 깨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손가락은 나비이고 나비가 아니고 나비 역시 손가락이고 손가락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손가락이 나비가 되는 것이지 나비가 손가락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을 강조하자. 물론 손가락은 나비가 되면서 손가락도 아니고 손가락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장자의 나비 꿈은 다르다. 무엇보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중요하다. 과연 이 꿈은 누가 꾸었는가? 물론 장자가 꾸었다. 그러나 장자가 강조하는 것은 꿈의 주체가 누구냐는 문제. 장자의 꿈인가? 나비의 꿈인가? 손가락과 나비의 경우는 주체가 손가락이고 장자의 경우는 이런 주체 문제가 소멸한다. 이른바 물화는 주체를 망각하고 객체를 따라 변화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물화는 말 그대로 주체, 자아, 나를 잊고 대상, 객체, 사물이 되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른바 망아(忘我)가 물화이다. 한편 자아를 잊고 사물이 된다는 것은 자아를 망각했기 때문에 사물도 망각하는 경지이다. 왜냐하면 자아, 곧 의식이 없기 때문에 사물이 된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화는 물망(物忘)이다. 사물이 되면서 사물을 잊는 경지. 그러므로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지 장자 자신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물화는 물아양망(物我兩忘)이다.

장자는 언어를 고기 잡는 통발에 비유하면서 통발은 고기를 잡으면 잊어야 한다고 말하고 나는 앞에서 이 잊음, 망각이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강조하는 잊음은 망아이고 결국은 물아양망이고 이런 경지는 ‘스스로 즐겁고 뜻대로’인 삶을 지향한다.

요컨대 물아양망은 물아해체이면서 해체 이상이고 망아는 차연이면서 차연 이상이다. 무슨 말인가? 물아해체는 주체와 객체의 2항 대립을 해체하고 이른바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인 이성중심주의를 전복한다. 물아양망 역시 이런 2항 대립을 해체하고 이성중심주의를 전복한다. 그러나 물아양망은 해체가 아니라 망각이다. 주체도 객체도 망각하라는 것. 차연은 절대적 자아, 현존을 부정하고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만 강조한다. 망아 역시 절대적 자아, 현존을 부정한다. 그러나 망아, 곧 자아를 망각하는 것은 물화, 곧 사물이되는 것이고 이 사물 역시 망각하는 것, 곧 물망과 통한다. 그러므로 차연도 초월하는 경지이다. 이 경지가 유(遊)이고(소요유) 심제좌망(心齊坐忘, 제물론)이다.

데리다가 텍스트, 원-글쓰기를 강조한다면 장자는 텍스트 너머를 추구하고 말, 언어, 문자, 글쓰기를 버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찌 저 말을 잊은 사람과 더불어 말을 할 수 있을까 ?


글쓰기의 모험은 놀이의 모험이다


데리다의 소쉬르 비판 세 항목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겨둔 것은 문자체계와 언어의 관계이다. 다음은 소쉬르의 말.


언어와 문자체계(글쓰기)는 구별되는 두 개의 기호체계이며 글쓰기의 유일한 목적은 언어를 재현함에 있다. 언어적 대상은 쓰여진 낱말과 발음된 낱말의 결합이 아니다. 언어적 대상을 구성하는 것은 발음된 낱말이다. 그러나 발음된 낱말은 쓰여진 낱말의 이미지와 밀접히 결합되기 때문에 쓰여진 낱말이 중심 역할을 빼앗고 따라서 우리는 기호 자체보다 음성 기호의 쓰여진 이미지에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런 실수는 마치 사람을 직접 보는 것보다 그의 사진을 볼 때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소쉬르, 위의 책, 23~24).

 

요컨대 소쉬르가 강조하는 것은 발음된 낱말과 쓰여진 낱말 가운데 발음된 낱말이 중요하다는 것. 언어는 개별적인 발화의 심층에 존재하는 법칙을 의미하고 따라서 발음, 음성을 토대로 하고 이 발음을 옮겨 적는, 재현하는 문자체계, 글쓰기는 2차적이라는 것. 그러나 데리다의 글쓰기는 이렇게 발음된 낱말을 옮겨 적는 글쓰기가 아니다. 말하자면 데리다의 글쓰기는 언어적 대상이 아니고 언어적 실체가 아니고 문자로 재현되는 그런 글쓰기가 아니고 흔적, 텍스트, 원-글쓰기이고 언어로 생산된 것이 아니라 언어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글쓰기는 소쉬르가 말하는 문제체계가 아니다. 그의 글쓰기는 소쉬르기 말하는 언어/문자체계, 발음된 낱말/쓰여진 낱말의 경계를 해체하고 나아가 이런 경계가 나올 수 있는 근거로서의 글쓰기를 강조한다. 다음은 데리다의 말.


지각되는 것은 아니지만 간신히 지각된다고 가정하면 글쓰기는 일반적으로 언어의 특수한, 파생적, 보조적 형식(의사소통, 관계, 표현, 의미작용, 사고나 의미의 구성으로 이해되는)을 지시하는 게 아니고, 주요 기표의 비실체적 이중성, 곧 기표의 기표를 지시하는 게 아니고 그것은 언어의 외연을 넘어 발생하기 시작하며 언어를 포괄한다. 글쓰기라는 낱말은 기표의 기표를 지시하며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기표의 기표가 우연한 이중성, 전락한 2차성으로 정의되지 않는 상태로 나타난다. 이와 반대로 기표의 기표는 언어의 운동을 기술한다. 그 기원에 있어서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구조가 기표의 기표로 표현될 수 있는 기원은 자신을 생산하면서 자신을 은폐하고 지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기의는 언제나 기표로서의 기능들이다. 글쓰기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2차성은 모든 기의들에 영향을 주고 기의들을 이미 있게 하고 순간적으로 기의들을 놀이에 참여케 한다. 도망가고 다시 잡히는 단일한 기의는 없다. 언어를 구성하는 것은 의미작용의 놀이이다. 따라서 글쓰기의 모험은 놀이의 모험이다(데리다, 위의 책, 6~7).


데리다는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명확한 판단을 보류하면서 계속 망설이면서 계속되는 그의 주장은 명확한 논리, 이성, 개념을 거부하는 논리이고 이성이고 개념이다. 그가 말하는 글쓰기는 언어 너머 있지만 언어를 포괄한다. 그것은 언어의 기원이지만 자신을 은폐하고 지우는 기원이다. 말하자면 글쓰기는 흔적이다. 글쓰기는 기표의 기표로 나타나고 기표의 기표가 언어의 운동이다. 그가 기표의 기표를 강조하는 것은 기표/기의의 관계가 소쉬르처럼 1 대 1로 고정되지 않고 한 기표의 기의는 다시 다른 기표가 되고 이런 기표의 기표가 언어의 운동이라는 것. 그러므로 기표의 기표는 언어의 기원이지만 언제나 흔적, 차이로만 존재/부재한다.

결국 글쓰기는 기표의 기표이고그러므로 단일 기의는 없고 기의들의 놀이가 있고 글쓰기의 모험은 놀이의 모험이다.

예컨대 낱말 놀이를 생각해 보자. 낱말 놀이는 낱말이 지시하는 사물이나 지시물과는 관계없이 이런 지시물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러니까 기호 자체만을 강조하면서 수행된다. 어떻게 수행되는가?

‘연못’을 보기로 들면 다음과 같다. ‘연못’이라는 기표(1)의 기의(1)는 ‘연을 심은 못’이다. 그러나 이 기의(1)는 다시 기표(2)가 된다. 왜냐하면 ‘연’의 기의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표(1)는 기의(1)를 매개로 기표(2)가 되고 그러므로 기표의 기표가 되고 기표의 기표의 기표로 발전한다. 어디 그뿐인가? 기의(1)는 다시 ‘심다’라는 기표(3), ‘못’이라는 기표(4)로 분열된다. 또한 ‘연못’은 순수한 기표의 수준에서는 ‘날아가는 연이 있는 못’이고 ‘날아가는 연과 벽에 박는 못’이고 이런 기표의 연쇄는 한이 없고 이런 식의 글쓰기가 놀이와 통한다.

 

말을 잊은 사람과 더불어 말하기 


그렇다면 장자는? 장자는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버리듯 말도 쓰고 나면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말을 잊은 사람과 더불어 어찌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가 말을 잊으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이른바 물아양망(物我兩忘)을 목표로 한다. 이런 경지는 데리다가 말하는 놀이의 경지이면서 그런 놀이를 초월한다. 장자가 말하는 물아양망은 이른바 ‘소요유’의 유(遊)와 통하고 이 유는 놀이이면서 놀이를 초월한다. 물론 유는 놀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말하는 놀이(play)와는 다른 의미이다. 아니 같으며 다르고 이런 놀이 개념을 수용하며 초월한다. 다음은 장자의 말.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가죽 나무라고 부르네. 그 밑둥은 혹투성이라 먹줄을 댈 수 없고, 그 작은 가지들도 꼬불꼬불해서 규구(規矩, 자)에 맞지 않네. 그것이 길가에 서 있으나 목수가 돌아보지도 않네. 지금 그대의 말은 이 나무와 같아 커도 소용이 없네.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돌보지도 않을 것이네.” 장자는 이에 대답했다. “이제 자네는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쓸 데가 없는 것이 걱정이지만 왜 그것을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인 광막한 들에다 심어 놓고 그 곁을 방황하면서 무위(無爲)로 날을 보내고 소요하다가 그 밑에 드러눕지를 않는가? 그러면 그 나무는 도끼에 베어지지도 않을 것이고 아무에게도 해를 입을 염려가 없네. 쓰일 데가 없으니 또 무슨 괴로움이 있겠는가?”(장자, 위의 책, 192)


그 유명한 무용의 용이라는 명제. 쓸모가 없기 때문에 쓸모가 있다는 이 명제에서 장자가 강조하는 것은 참 쓸모는 세속의 쓸모를 초월하는 것. 세속적 가치를 잊는 것. 참된 유용성은 세속의 가치를 벗어나는 것이고 이렇게 참된 유용성을 발견하여 홀로 즐기고 홀로 소요하라는 것. 무하유지향은 어디에도 없는 고향, 인공을 가하지 않은 낙토(樂土), 말하자면 유토피아이다.

장자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이상향에서의 소요(逍遙), 곧 슬슬 거닐며 한가로이 돌아다니는 것. 이런 소요가 놀이와 통한다. 데리다의 글쓰기가 놀이, 무용성을 강조한다면 장자는 이 놀이, 무용성의 유용성을 강조하고 그런 점에서 데리다가 예술을 강조한다면 장자는 예술과 삶이 하나가 되는 그런 경지를 지향한다. 말을 잊은 사람과 더불어 말한다는 것은 결국 밝힐 수 없는 것은 밝힐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세속적 가치를 지탱하고 세속적 가치를 생산하는 언어를 버리는 일과 통한다.

 

요컨대 데리다의 경우 텍스트가 세계이고 산다는 것은 쓰기이고 텍스트 짜기이고 이 텍스트는 시작도 끝도 중심도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세계라는 텍스트를 쓰고 짜며 산다. 이렇게 글이 생략된 글쓰기, 원-글쓰기가 데리다의 글쓰기라면 장자는 이런 텍스트로서의 세계를 인정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런 텍스트도 잊으라고 주장한다. 장자의 물아양망은 주체/객체의 2항 대립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데리다와 비슷하지만 중요한 것은 장자의 경우 이 망각도 망각하라는 것. 왜냐하면 망각의 망각이 깨달음, 도(道)와 통하기 때문이다. 장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도 망각하자.


대저 큰 도(道)는 이름 부를 수가 없고 위대한 변증은 말하지 않으며 위대한 인(仁)은 인자하지 않고 크게 청렴함은 사양하지 않으며 크게 용감함은 남을 해치지 않는다. 도가 밝혀지면 도가 아니고 말로 변증되면 도달하지 못하고 인이 계속되면 이루어지지 못하고 청렴이 결백해지면 미덥지 못하며 용기가 해치면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 다섯 가지는 원래 원만한 것인데 지금은 거의 모난 데 가깝다. 그러므로 앎이 그 알지 못하는 데서 그치면 최고다(장자, 위의 책, 202).


출처 :니체와 모더니즘 원문보기

과골삼천(踝骨三穿)


과골삼천(踝骨三穿)이란 말을 한동안 화두로 들고 지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강진 유배시절 제자인 황상(黃裳)의 글 속에 나오는 말이다. 70이 넘어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메모해 가며 책을 읽는 황상을 보고 사람들이 그 나이에 어디다 쓰려고 그리 열심히 공부를 하느냐고 비웃었다. 그가 대답했다.

 

“우리 선생님은 귀양지에서 20년을 계시면서 날마다 저술에만 힘써 과골, 즉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 났다. 선생님께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친히 가르쳐 주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런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처음 이 글을 읽고 어안이 벙벙했다. 책상다리로 앉아 20년 세월이 가는 동안 바닥에 닿은 복사뼈 자리에 구멍이 세 번 뚫렸다는 것이다.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는 말을 들었고, 추사가 벼루 여러 개를 먹을 갈아 밑창을 냈다는 말도 들었지만,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렸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다산은 40대 초반 한창 뜻을 펼칠 나이에 급전직하의 나락으로 떨어져 강진으로 유배 왔다. 그 절망의 20년 세월 동안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했다. 나중에는 뼈가 시어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벽에 시렁을 매어 놓고 서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떠올리며 《다산시문선》을 수 십 번 통독하다 보니 도대체 우리네 공부란 것이 그 앞에 서면 초라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산의 그 초인적인 노력도 대단하지만, 10대에 들었던 스승의 가르침을 70이 넘은 나이에도 마음에 되새겨 잊지 않은 제자의 도타운 마음도 참 고맙다. 그래서 지난 번 강진 답사 때는 일부러 황상이 살던 천개산 아래 일속산방(一粟山房) 터를 물어물어 찾아갔었다. 25년 전 저수지가 생겨 집터가 있던 자리 바로 아래턱까지 물이 차 있어 건너갈 수 없었지만, 건네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뭉클했다.


15살 난 소년은 아전의 자식이었다. 다산이 유배 초기 강진 읍내 주막집 한 켠에 열었던 서당에 쭈볏쭈볏 나아가 “저 같이 머리 나쁜 아이도 공부할 수 있나요?”하고 물었다. 스승은 오로지 부지런히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며 저 유명한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을 글로 적어 소년의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소년은 스승의 격려에 크게 고무되었다. 말씀에 따라 평생을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스승이 귀양이 풀려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그는 세상에 눈길을 주지 않고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책을 읽었다. 그렇게 다시 몇 십 년이 지났다. 제주도에 귀양 가 있던 추사가 우연히 그의 시를 보았다. 추사는 그 시의 높은 경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귀양이 풀려 뭍으로 오르자마자 추사는 황상의 집부터 찾았다. 스승 다산은 이미 세상을 뜬 뒤의 일이다.


이후 시골 아전의 자식은 평생 농투성이 농사꾼으로만 살다가 일약 세상이 알아주는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 형제와 추사 형제 등이 다투어 그의 시를 칭송하고, 그의 시집에 서문을 써주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우쭐대지 않았다. 추사 형제와 정학연 형제가 차례로 세상을 뜨자 그는 또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진솔투박한 그의 인간과 시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75세 나던 해에 쓴 〈임술기(壬戌記)〉는 스승에게 첫 가르침을 받은지 60년이 되던 해에 쓴 글이다. 이 글에서 그는 스승이 15세 때 자신에게 준 글을 옮겨 적고 나서, 평생 이룬 것은 보잘 것 없지만 생각해 보면 스승이 남기신 가르침을 지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삶의 끝 자리에서 그가 남긴 이 말을 나는 오래 잊지 못한다.


다산이 강진에 내려와서 거둔 것이 단지 학문의 성취뿐이었다면 우리의 외경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는 역경의 세월을 자신과 싸워 이겼을 뿐 아니라 자신감 없던 시골 소년의 삶을 송두리 째 바꿔 놓았다. 학문의 위대함은 인간의 위대함에서 나온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얄팍한 세상에서 이 아름다운 사제간의 만남은 늘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정민교수의 홈피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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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몸 안에 있는 의사인 자연치유력은 자신이 믿는 만큼 활동한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은 내부의 의사 역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몸을 치유한다. 병원과 화학약제는 응급처치를 하는 것이고, 한약, 보약, 영양제, 건강식품, 건강치료기들은 건강을 보조하는 것이며, 실제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매일 먹는 음식과 마음일 뿐이다. 따라서 긍정적인 마음과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식품만 먹는다면 어떤 질병도 자기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 야생동물들은 사람과 같은 질병이 없다. 왜냐하면 산과 들에는 병원도 없고 제약회사도 없으며 약국도 없고 한약, 보약, 영양제, 건강식품 같은 것들이 없어도 자연의 질서와 이치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 건강하고 풍요롭게 살고 싶다면 자연의 법인 섭리, 사리, 도리를 이유와 핑계 없이, 그리고 조건 없이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심보가 고와져서 경혈이 뚫리고 온몸에 기가 순조롭게 조화를 이루어 건강을 지킬 수 있다. 

  • 권력, 재력, 학력, 능력은 부모, 자식, 형제, 이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그들을 위해서 베풀지 않는 고약한 심보를 갖게 되면 경혈이 막혀 소화가 안 되고, 그로 인해 생긴 독소가 온몸을 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질병이다. 다시 말해 자연의 법대로 살면 건강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데 죽을 때 가져갈 수 없는 권력, 재력, 학력, 능력의 노예가 되어 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 결국 만병의 원인 심보에 있는 것이다. 더욱이 심보는 웬만큼 노력해서는 고치기 어렵다. 그러나 심보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인생의 큰 목표를 세워 부모, 자식, 형제, 이웃을 위해 바쁘게 산다면 결국 경혈이 뚫려 얼굴에는 화기, 가슴에는 패기, 눈에는 생기, 몸에는 활기가 넘쳐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즐겁고 신나는 삶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어느 누구도 자신을 위해 대신 자거나 먹거나 일해줄 수가 없고 병을 치유해줄 수도 없다. 모든 건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그 결과의 원인을 마음가짐에서 찾아 참회하게 되면 불안, 초조, 근심이 없어지게 되어 어떤 고질적인 난치병이라도 기적처럼 나을 수가 있다. 

  • 가정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사회 분위기가 병든 분위기처럼 될 수밖에 없다. 또 자식을 효자로 만들고 싶으면 자기 자신이 먼저 효자가 되어 자식 앞에서 모범을 보이면 자연히 따라하게 되어 있다. 잘살고 못살고, 건강하고 병들고는 하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일 뿐이다. 

  • 기를 뚫는 방법도 침, 뜸, 안마, 지압, 단전호흡 등 무수히 많다. 모두가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며 또한 경제적이다. 일에 몰두한다는 것은 이름만 바꾸어 명상, 요가, 참선, 기도, 염불, 기공, 마인드 컨트롤, 최면 등으로 불리는 것이지 모두가 같은 원리일 뿐 별다른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이웃을 위해 하루하루 몰두하는 것이 바로 도이며 사명이다. 

  • 자가용 가진 팔자 좋은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계단을 걸어다녀야 운동부족을 해소할 수 있다. 사무실에서도 꼭 앉아 있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서 일하는 것이 기순환에 좋다. 손발은 제2의 심장이라서 많이 움직이면 정맥의 나쁜 피가 심장으로 올라가서 깨끗한 피가 되어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손발을 움직이지 않으면 손과 발에 어혈이 고여 기순환이 안 되므로 손발이 차가워진다. 

  • 우리는 평생 오늘만 살고 있을 뿐이다. 영원히 오늘 하루만 살고 있는 하루살이일 뿐이다. 하루만 잘 살면 평생을 잘 살 수 있는 것을 깨달을 때 삶이 진지해지고 충실해져 삶은 건강하고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 일을 한다는 것은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랑의 실천 행위이다. 그리고 아무리 반복하고 반복해도 지겹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무조건 주는 것이다. 이타심으로 화를 내면 놀아드레날린이 인체에 적당한 스트레스를 주어서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이기심에 의한 분노는 놀아드레날린이 인체에 거부감을 주는 스트레스가 되어 기가 막히게 된다. 즉 아무리 나쁜 것을 먹어도 기분이 좋으면 기가 뚫려 인체의 해독기능을 활발하게 해주므로 건강을 해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류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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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 5가 어느 허름한 건물에서 IMF 실직자를 위한 사진 강좌를 맡고 있을 때였다. 직장을 잃은 약 서른 명 남짓의 사람들이 사진 분야의 취업을 위한 재교육을 받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 들었다. 10대에서 60대까지 저마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다 뜻하지 않는 경제 위기에 실직자가 되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매우 난감했다.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직업전선으로 나아갈 사진을 가르쳐야 하는지, 아니면 사진이란 무엇인가부터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할지, 아니면 고급스런 사진 테크닉을 통해서 순수 및 예술사진을 가르쳐야 할지 참 막막했다. 그래서 우선 이들이 왜 이곳을 오게 되었는지, 그 많은 노동부 실직자 프로그램 가운데서 사진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에게A4 용지 한 장씩을 건네면서 이곳을 찾은 이유를 쓰도록 했다.

     

     한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스무 명 정도가 제출을 했다. 이것들을 단숨에 읽어내려 가다가 가슴을 적시는 한 장의 이유서와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다 싶어 그들에게 읽어주면서 짧은 시간동안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방향을 잡게 되었다. 사연의 주인공은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 1년이 채 안되어 실직을 당한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사연은 대략 이러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는데 단짝 네 명이 놀러왔습니다. 졸업하면 서로 만나기도 어렵다고 해서 기념사진이라도 찍자고 했습니다. 마침 카메라도 있고 필름도 있었습니다. 우린 마당으로 나가 서로 번갈아가며 추억을 위해, 우정을 위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다가 장독대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기로 했습니다. 삼각대를 가지고와 막 카메라를 막 올릴 때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막내 여동생이 보고 있다가 자기도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달려왔습니다. 일단 우리끼리 찍고 싶어서 ”안돼“하고 밀쳐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셔터가 눌러져 ”찰칵“소리를 냈습니다. 다시 찍으러 갔는데 그것이 마지막 필름이었습니다. 그 막내 여동생은 이틀 후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마지막 사진에 밀쳐진 동생의 빨간 바지 한 짝이 찍혀있었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릅니다. 함께 찍을 걸, 그렇게 같이 찍고 싶어 했는데 못 찍게 밀쳐낸 것이 가슴에 못이 박히고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이라도 배워 제 동생 같은 아이들을 찍어주고 싶어서 찾았습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 4개월 동안 실직자들에게 가르쳤던 사진의 모습은 이것들을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사진의 본질과 사진술의 활용, 그것은 사진의 존재 이유에 관한 것이었고, 또 예술로서 사진의 활용에 관한 것이었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은 왜 이 땅에 왔는가. 지난 160 여년 동안 사진의 한 일은 무엇이었으며, 세상은 사진에 의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학습시켰다. 그리고 또 빛을 통해 구현되는 사진술이 어떤 수단과 도구로서 현실과 만나 촬영, 현상, 인화를 통해서 표현되는가를 가르쳤다. 돌이켜 보면 그때, 사진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과 만나고자 했던 실직자들에게 강조했던 학습의 내용은 이것이 전부였고 모두였다. 테크닉보다 사진의 의미, 즉 의미로서의 사진, 특히 존재증명, 부재증명으로서 사진의 의미를 일깨웠고, 또 그것들이 어떻게 찰나의 미학으로서 자리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사진은 1839년 8월 19일 프랑스에서 다게르라는 사람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명된 다. 그러나 역사에서 누가 발명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진이 왜 세상에 나타나야 했는지, 나타난 사진이 어느 곳에 어떻게 이용되었는지가 더 중요했다. 때문에 사진만큼 분명한 탄생 이유와 분명한 쓰임새가 있는 표현매체는 없다. 사진에는 다른 예술 장르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출생신고서를 갖고 있다. 왜 발명되게 되었는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밝히는 출생신고서가 사진에는 있다.

     

     사진이 지난 165년 동안 걸어왔던 모습, 이 땅에서 수행했던 모습들은 출생신고서의 내용이다. 바로 존재증명과 부재증명이었다. 사진은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잘 찍고 못 찍고에 앞서 사라진 부재를 이야기한다. 세상의 모든 사진은 어떤 이유로 찍혀졌건 간에,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찍혀졌던 간에 숙명적으로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를 말한다. 그때 거기, 그 자리에 존재했으나,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없다는 존재증명과 부재증명이 사진의 본질이고, 사진의 시작점이자 끝점이다. 사진예술은 이것들을 형상화 하는데 있다. 그래서 회화나 음악, 시와 소설과 달리 미적 감각과 쾌락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여느 표현매체와 달리 목숨보다 소중한 인간 존재의 자국과 정체성을 위해서 존재한다.

     

    세상의 모든 사진은 존재에 대한 상처이고, 눈물이고, 그리움이다. 위대한 인물 사진과 위대한 다큐멘터리 사진이 말하듯이 사진은 사라진 존재 앞에서 그 존재가 저렇게, 저런 모습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 아픈 시간의 상처를 안긴다. 이것이 사진예술의 토대이다. 먼 훗날 그때 이런 모습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 하려 했던 예술의 모습, 다시는 올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영원히 기억하고자, 영원히 기념하고자 순간을 붙잡아두려는 순간성이 예술의 모습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많이 찍혀진 사진이 인물사진이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찍혀진 장소가 집이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찍혀진 순간이 기념의 순간이다.

     

    한 장의 사진 속에는 인물이든, 풍경이든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를 지시한다. 시간의 변화이고, 철학적으로는 생성과 소멸의 순간이다. 사진예술은 순간을 겨냥한다. 생의 한 순간을 날카롭게 잘라 영원이 정지시키는 순간을 늘 노린다. 그리하여 찍혀진 주인공들이 사라지는 순간 생의 한 때를 의미화 한다. 수많은 가족사진이, 수많은 증명사진이, 수많은 기념사진이, 수많은 인물사진이 이러한 의미 속에 있다. “저게 나였다는 사실을”... 그렇게 사진예술은 시간이 예술의 토대가 되었고, 테크닉은 시간 이미지를 극화하는데 기여해왔다. 19세기 위대한 초상사진가 나다르의 사진에서부터 영국의 카메론 여사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사진에서 다이안 아버스 사진까지, 수많은 사진들은 여기에 봉사했다.

     

    사진을 “찰나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정적 순간이란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을 의미하고, 생의 한 순간을 정지시켜 영원히 그때의 순간으로 남게 하는 결정성을 의미한다. 전자가 사진술에 관한 이야기라면, 후자는 사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다. 훌륭한 사진이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을 찰나적으로 포착하는데 있고, 그 대상들을 영원히 정지시키는 시간 속에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의 사진으로 말해지는 까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도 순간에 의해 태어나고, 순간에 의해 역사화 되었던 사진이다. 기념사진과 가족사진이 의미부여 되고, 인물사진이 각별한 애정을 받았던 것도 찰나의 미학 속에 있는 순간성이다. 사진예술의 절정은 삶의 한 때를, 다시는 못 올 시간을, 결코 재생될 수 사건을, 결코 두 번 다시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을 담는데 있다. 사진에서 결정적 순간이중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셔터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 시간과 공간이 하나가 된 순간,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그때 그 순간이 결정적으로 박힐 때이다.

     

    사진은 세상이 날아와 박히는 모습이다. 찍히는 순간 세상의 모습이 축소되어 필름에 앉는 모습이다. 이것이 화학약품에 의해 현상되고 인화지에 의해 인화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해서 “사진(寫眞)”이라고 부른다. 사진에는 존재했던 세상, 존재했던 시간, 존재했던 공간이 고스란히 박혀있다. 그래서 이 부분이 오늘날 디카나 폰카에 의해서 찍혀지는 디지털 사진과 다른 모습이다. 디지털 카메라에는 세상이 날아와 박힌 모습이 아니다. 0과 1이라는 수치만 있다. 그래서 필카가 마치 지문처럼 세상이 묻어나는 색인영상이라면, 디카는 이미지 없이 오로지 0과 1만 있는 수치영상이다. 뿐만 아니라 필카가 시간의 순서를 바꿀 수도 없고 삭제할 수 없는 반면에 디카는 마음대로 시간의 순서를 거역하고 마음에 안 들면 지운다. 필카와 디카의 또 다른 차이점이다. 거스를 수 없는 것과 거스를 수 있는 것, 지울 수 없는 것과 지울 수 있는 것의 차이가 양자의 차이다.

     

     

    세계의 역사 속에서 사진이 수행했던 업적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은 진실을 찾는 업적이었고, 증명하는 업적이었다. 전쟁터에서, 사건 현장에서, 가난과 질병 앞에서 그리고 평범한 삶의 한 가운데서 사진기는 포착하고 사진은 말해왔다. 진실을... 그래서 사진은 진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국 공통어처럼 사진을 통해서 진실을 보았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참인지 깨달았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에드워드 웨스톤, 로버트 프랭크, 로버트 메이플소프 등 위대한 사진가들은 진실을 말했던 사진가들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디지털이 세상을 지배한다 해도 인류가 여전히 진실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 사진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언제나 영원한 찰나의 미학 속에서 숨쉴 것이다.

    찰나의 미학으로서의 사진. 글 진동선님.

    '문장을 이루는 법' 




      변지의(邊知意)군이 천리의 먼 곳에서 나를 찾아왔다. 그의 뜻
    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더니 문장(文章)에 있다고 하였다. 그날
    집 아이 학유(學游)가 나무를 심었다. 심어놓은 나무를 가리키면
    서 비유하여 설명해주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문장은 풀이나 나무로 보면 아름다운 꽃과
    같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나무를 심을 때 그 뿌리를 북돋아주어
    나무의 줄기가 안정되게만 해줄 뿐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나무
    에 진액이 오르고 가지와 잎사귀가 돋아나면 그때에야 꽃도 피
    어난다.


    꽃을 급히 피어나게 할 수는 없다. 정성스러운 뜻과 바른 마음으
    로 그 뿌리를 북돋아주고, 독실하게 행하고 몸을 잘 닦듯이 줄기
    를 안정되게 해주어야 한다. 경전과 예(禮)를 궁리하고 연구하여
    진액이 올도록 하고, 넓게 배우고 들으며 예능에 노닐어 가지나
    잎이 돋아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그 깨달은 것을 유추하여 쌓아두고 그 쌓아둔 것
    을 펼쳐내면 글이 이루어진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문장이 되
    었다고 인정하게 되니, 이것을 문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문장이란 급하게 완성될 수는 없다. 그대는 이것을 가지고 집으
    로 돌아가 구해보게나. 여러가지 배울 점이 있을 것이네.


    - 정약용 저, 박석무 편역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비, pp.329~330

     

    "사람들은 감각적 미술에 질려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표피적인 자극이 아니다.

     

    오늘날 미술은 머리로 구사하는 수사학은 지극히 발달해 있지만,

     

    몸과 몸의 인간적 관계는 사라져 가고 있다.

     

    해로운 미술에서 요구 되는 것은 친밀성의 소통 이다."

     



    "나의 작품은 사실 밖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자아의 상태이다.

     

    상실감에 멍하니 빠져 있거나 무력감에 압도되어 넋을 놓고 잇는 모습이

    내 조각이 가진 특징이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당당하게 주체를 강조하던

    인체 조각의 암묵적 전통을 뒤집는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미적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까지의 미술에서 추구하던 나와 타인의 관계를

    다르게 인식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요청해서 된 것이 아니다.

     

    '던져진 존재(thrown being)'로서의 나인 셈이다.

     

    이것을 깊이 새기면 그러한  존재가 갖는 남과의 관계 또한 말이나 의식을 넘어

    신체적이고 보다 본질적인 관계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 미술은 이러한 소통의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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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예술이

    인간 정신의 가장 고귀한 표현이라고 믿는다.
    나는 우리가 단지 유한하고 덧없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문화'라고 불리는 신비롭고 공동체적인 것에
    참여하려고 열망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열망은 종족 보존의 열망만큼이나 강하다고 믿는다.
    지역적이거나 세부적인 것을 통해,
    우리의 개별적인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일한다.
    바로 우리 서로 간의 모호성 속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친밀성이 태어난다.
    개별적인 목소리는 공동의 목소리이다.
    지역적인 목소리는 보편적인 목소리이다.

     예술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가설

    1. 예술은 놀이, 즉 즉흥적인 행위, 실험, 환상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예술은 가장 뿌리 깊은 본능적인 면에서 영원히 유희적이고 충동적이며, 무아경의 발산 외에는 아무 목적도 없는 육체의 활동과 유사한 상상력의 활동이다.

    2. 예술의 연료는 반역성이다. 즉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기존의 것에 반기를 들고자 하는 욕구이자, 추방을 당할 정도로 나이든 사람들에게 반항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자기 자신을, 좀 더 확장하면 자신의 세대를 새롭고 신기하고 제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하려는 욕구이다. 실제로 모든 예술가들은 어린아이나 사춘기 때부터 재능을 보인다. 과거와 절연하고자 하는 사춘기 때의 욕구는 종족 재생산의 충동만큼이나 강렬한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 월든 '의 첫 장에서 그 특유의 겸손한 태도로 말한다. " 나는 이 행성에서 30년 정도 살았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가치 있거나 진지한 충고를 한 음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내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선언의 불공평함과 부정확성이 바로 청년의 반항에 반드시 필요한 화음을 울린다.

    3. 예술은 과거의 기념 수단이다. 빠르게 사라져가는 세계의 기록이다. 최소한 일시적으로나마 향수의 파괴라는 악령을 추방하는 수단이다. 영속성을 보증하기 위하여 '지나간 것, 지나가고 있는 것, 앞으로 올 것,'을 가장 정확한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가르칠 이들, 우리가 뒤를 이어야 할 이들에게 영예를 돌리는 것이다. 어떤 풍경이나 삶의 방식, 일단의 사람들을 가장 예리하고 다양하게 재현할 수 있는 작가는 자신이 타고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쫓겨난 사람일 것이다. 조만간 그의 반역조차 씁쓸하면서도 담콤한 상실감으로 바뀐다. 상처, 노여움, 억울함조차 젊음의 에너지와 밀접하게 얽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감정이 된다.

    4. 예술가는 지독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 평생토록 예술을 통해 손에서 빠져 달아나는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투쟁한다. 불완전성이나 부정확성에 대한 감각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확장이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창조의 본능에 연료를 제공한다. 시각 예술은 문자 그대로 볼 수 있는 예술을 만든다. 이런 물리적인 문제는 예술가의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기도나 선행을 통해 은총을 불러올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신의 은총을 추측할 수도 없기 때문에 신에게서 형벌을 받는 것을 청교도들이 두려워했듯이, 예술가는 영적인 견지이자 미적인 견지에서 그 자신을 재창조하는 방식을 찾는 것 같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처럼 예술가는 자신의 영혼을 만들고 파괴한다. 그의 예술 작품은 어떤 사상이나 시각에 종속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개별 작품을 오직 소급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게 구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예술이란 공동체적 문화에 대한 참여의 열망이 표출되는 방식 중 하나이며, 이 참여의 열망은 종족 보존의 열망만큼이나 강한 것이다. 예술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으로 출발하지만 위대한 예술은 인류 공동의 상상으로 수렴되며, 그 상상의 지평을 더욱 넓히고 더 고귀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특히 이제 막 예술의 길에 들어선 젊은 작가는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정열을 글로 풀어내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글쓰기는 절망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세계가 당신을 정당하게 대우하거나 자비롭게 다루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말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포착해낸다는 이율배반적인 목표에 가 닿으려는 것이 작가가 글을 쓰는 목적이기도 하거니와, 작가가 진정 그 목표를 이루어낸다면 더 이상 그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에게는 시간이 가면서 쉬워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글쓰기는 실패의 예감을 품고 시작하는, 그러나 작가의 가슴 속에는 이글이글 타고 있는 불덩이가 꼭 가야만 한다고 몰아치는 좁은 길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척도는 결국 자기 자신이 될 수밖에 없고, 버지니아 울프의 말마따나 " 죽기 전에 무엇인가 쓰고자 하는 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우리를 나락에 빠뜨리지만 동시에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전해 준다.



     3장. 인간 존재는 인정받고자 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인되기를 원한다. 인간 존재는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때로 자신을 부인하기도 하는 타자를 향해 나아간다. 그 결과 인간 존재는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즉 자기 또는 분리된 개인으로서는 존속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의식하게 만드는. 상실의 체험 속에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인간 존재는 자신을 항상 미리 주어진 외재성으로, 여기저기 갈라진 실존으로 체험하게 된다. _ 블랑쇼. '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타자의 발견은 항상 자신의 선입견이 좌절되는 경험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자신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타자와 마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타자란 자신이 속한 시스템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존재이다. 이 말은 결국 타자가 자신의 선입견으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p.104

     유아론이란 타자가 배제된 담론 일반을 가리킨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유아론적 사유에서도 타자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아론 속에서의 타자란 진정한 타자, 즉 타자성을 가진 우연한 타자가 아니다. 오히려 이때 타자란 주체의 생각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관조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에게서 '꿈' 이란 자신이 특정한 시스템에 제한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그 시스템을 모든 것에 적용시키려는 환상을 의미한다. 그에게 꿈은 하나의 성심을 통해 모든 타자와 관계하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착각'을 상징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꿈을 꾸고 있는 유아론자라고 해서 그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더 자주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을 생각하곤 한다. 장자의 말을 빌리자면 유아론자는 "꿈을 꿀 때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꿈꾸고 있으면서 꿈속에서 꾼 어떤 꿈을 해석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는 오히려 꿈을 꾸면서도 꿈속의 다른 꿈을 해석할 정도로 과도하게 사유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결국 그의 사유는 또 다른 환상의 한 종류일 뿐이다. 
     마침내 꿈에서 깨어나야만 한다는 장자의 주장은, 타자를 관조의 대상으로 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따라서 어떤 타자와도 직대면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다름 아니다. 관조의 세계와는 달리 삶의 세계에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무수한 타자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p.125

     철학적 문제들의 해결은 마술의 성에서 마술적으로 출현하는,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것을 대낮에 밖에서 보게 된다면 단지 보통의 철조각(또는 그런 어떤 것)일 뿐인 동화 속의 선물과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_ 비트겐슈타인, ' 문화와 가치 '

     이상(ideal)이 우리의 생각 속에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당신은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당신은 언제나 되돌아와야만 한다. 바깥은 없다. 바깥에서는 숨을 쉴 수 없다. - 이러한 생각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그것은 마치 코 위에 있는 안경과도 같아서, 우리는 무엇을 볼 때 그것을 통해서만 본다. 우리는 그것을 벗어 버리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_ 비트겐슈타인, ' 철학적 탐구 '

     나의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삶으로 한계가 없는 앎을 따른다면 위태로울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앎을 추구한다면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다. _ ' 양생주 '장자.

     6장.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저지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지만, 이 동물은 이제 그 반대 능력, 즉 기억의 도움을 받아 어떤 경우, 말하자면 약속해야 하는 경우에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을 길렀던 것이다. _ 니체 ' 도덕의 계보 '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니던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선,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했던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_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남곽자기가 탁자에 의지하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짝을 잃어버린 것과 같아 보였다. 안성자유는 그 앞에서 시중을 들면서 서 있다가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어찌된 일입니까? 몸은 진실로 시든 나무처럼, 마음은 꺼진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오늘 탁자에 기대고 앉은 사람은 어제 탁자에 기대고 앉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자, 남곽자기가 대답했다." 자유야, 현명하게도 너는 그것을 질문하는구나! 지금 나는 내 자신을 잃었는데 너는 그것을 아느냐? _ '제물론' 장자.

     사람은 누구나 흐르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고요한 물을 거울로 삼는다. 단지 고요한 것만이 고요해지려는 모든 것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 _ '덕충부' 장자.

     마음으로 하여금 타자를 자신의 수레로 삼아 그것과 노닐 수 있도록 하고,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것에 의존해서 중심을 기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_ '인간세' 장자.






    바보와 사기꾼

     

    올해로 17년째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며, 항상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가슴 속에 있어왔다. 그간 미국에서 강의 하던 10여 년과 한국에서의 강의는 어떤 차이가 있었다. 그 가운데 예술가 혹은 작가를 희망하는 한국의 어린 학생들을 보며, 깊은 한숨과 가슴의 아픔을 느껴오곤 했다. 뛰어난 예술성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젊은이들이 자본과 권력의 미묘한 관계라는 미술 시장 논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사회의 성공과 예술가의 성공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며,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 젊은 작가들은 현실 앞에 좌절하고 고통 받고, 때로는 스스로 나르시시즘에 빠지기도 하며 타락해 가는 것을 보았고, 사회에서 성공한 작가들은 그 성공이 예술가의 성공인 냥 옌예계의 스타 흉내를 내며 천박한 인간상으로 전락 해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의 성공이란 반드시 예술가의 성공 될 수 없으며, 예술가의 내용이나 예술의 본질과도 일치 하지는 않는다. 종종 예술가가 정치와 시장 논리 속에서 자본주의 권력과의 결탁 과정을 통해 사회적 성공에 오르면, 예술가 자신도 모르고 있던 내용이 훌륭한 가치로 변하기도하고, 성공했다는 결과를 포장하기 위해 난해한 이론적 논리가 생겨나기도 하면서 그 예술가의 내용은 사기극의 주인공이 되고 예술의 본질은 타락하기도 한다. 이때에 이러한 관계설정에 관여하는 장사꾼들은 보통 문화와 예술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동시에 장사의 영역을 떠나지 못하며 정치적 행위를 계속한다.

    이러한 현상이 가능 할 수 있는 이유는 난해하고 깊이 있는 문화의 실체에 대한 이해가 없기에 사회에서의 성공을 위한 무지한 정치적인 행위가 예술가의 성공의 길로 승격화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화의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바보와 사기꾼 사이의 역학적 상호작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바보와 사기꾼 사이의 역학 관계를 파악하고 사회의 성공과 예술의 성공 그리고 내용과 본질의 불일치가 흔히 일어 날수밖에 없는 것이 문화의 실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출처 http://cafe.daum.net/codychoi

     이 공부 카테고리를 만든건. 내가 듣는 강의.강좌들을. 귀로 듣고, 머리를 끄덕이지만. 돌아서면 쉬이 잊혀지는. 폐단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강의를 들은 그날 그날 정리 하고자 햇다. 기억을 더듬어. 내 마음에 자리잡은 배움의 씨앗을 발판으로 나의 사유는 자랄것이며, 아주 조금씩. 내 행동은 발전할 것이다. 삶은 관념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다. 라는 명제를 마음에 두고,인문학적 견지에서 나는 부단히 '이론'이라는 왼쪽 다리와. '실천' 이라는 오른쪽 다리를. 교차로 움직이며..끊임없이 걸을 것이다. 그 걸음이 멈추는 순간. 지행합일은 이루어 질 수 있으나. 그것이 목적이 되면 안된다. 시간은 멈추지 않으며. 살아있는한 끝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걸어가야 한다. 때론 뛸수도 천천히 걸을 수도 있겠지만... 이론 과 실천의 부단한 전진으로 삶은 이루어진다. 실천이 없는 이론 혹은. 이론 없는 실천은. 실은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이다. 제자리 걸음 조차 되지 않은 꼴이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강의를 듣자 마자..정리를 못했다. 금요일 밤마다. 사랑에 관한 철학 수업은. 나의 과거와 현재를 일깨웠고. 간혹 희망이 쌓이기도 했지만..거의 회한에 가까운, 심정이었다. 젊음의 열기가 태동하는 홍대앞 거리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한강의 자전거길을 달리며, 나는 타인속으로 들어 가야한다고 다짐했다. 
     이 글은 마지막 강의가 끝나는 날 쓰기 시작했다. 이 강의를 들었던 처음과 끝. 나는 무엇이 바뀌었는지. 사랑의 바이러스에 맞서 어떤 백신을 가지게 되었는지. 뒤돌아 볼 일이다. 제대로 걷기 위해서..

     한 주 한 주, 강의의 텍스트 인 이성복 시인의 시와..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중요 부분을 읽고. 선생님의 강의가 이어졌다. 이 수업을 듣게 된 인연은 우연히 만난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 라는 자본주의 삶에서 상처받지 않을 것에 대한 인문학적 치유에 관한 책. _ 강신주. > 을 읽은 그날 저녁. 우연히 길에서 책속의 저자 사진과 같은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 수업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책들과 생각을 읽으며 사랑과 소통의 길의 사유에 접어들게 되었다.
     아마 또다른 이유는 짐작하겠듯이 내안의 사건?들 때문 이었다. 특정 타자와 마주쳤을때, 이상한 소용돌이가 무엇인지..그 의미를 흘려버리지 않는 것이 내겐 필요했다. 분명 그것은 그 이전엔 상대를 대상화 해 자발적으로 빠져드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충격이었다. 나는 이제서야. 내 마음의 그림자를 보고 흔들리는게 아니라. 나와는 전혀 다른 타자를 보고 제대로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20세기 인문학의 키워드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탐구라 한다. 거의 모든 문학과 예술 장르는 이 지나간 흔적에 대한, 성찰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결국..나를 찾고. 세계를 찾는 과정..현재 까지도 문학에서..조이스.카프카.프루스트. 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한다. 시에서 김수영을 넘지 못하듯이..그만큼.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사실. 카프카의 '변신'외에 읽어본적이 없어..그런가 보다 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랑에 빠졌을 때 자신의 내면 풍경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는 화자의 아름답고 예리한 묘사들이 가득 차 있다고 한다..하지만 이 책은. 방대하고..글이 만연체로 쓰여져 있어..독해하기가 무척 어렵다는데 있다. 전권이 열 몇권이라는데. 학자들도 왠만해선 이것을 완독한 경우가 많지 않다고 한다. 수업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성복 시인과.발터 벤야민,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이 작품에 심취한 사람들로써..그에 관련된 책을 냈고. 벤야민의 경우 번역을 했다. 예전에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전기를 읽으면서도..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걸작이라고 많이 언급했던 기억도 나고,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에서도 많이 인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의 완독에는 관심이 없다. 사랑의 심리에 관한 이런 집요한 묘사는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구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집착에서 내가 깨달을 수 있는건. 모든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를 일깨운다. 타자에 대한 의미부여. 타자와 나 사이에 어떤 매개가 없는 직접적인 들여봄.이 사랑의 관건인것 같다. 아마도. 1년동안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있어야 한다면..이 책을 완독할 수 있으리라..프루스트를 독해하고 나면. 우리에게 사랑이 좀 더 쉽게 다가올까. 다가설까. 그건 아닐 것이다. 인간은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일어나는 기쁨. 즉 사랑에 의해서 일희일비하는 존재 이다. 그 감정의 파고에서 프루스트의 다양하고 깊은 사랑에 관한 모든 성찰은. 참고서가 되어. 우리의 감정을 위로해 줄 뿐일 것이다. 사랑은 인간 수 만큼 있다. 다 다른 방식의 사랑이다. 핵심은. 타인을 나같이 사랑할 수 있느냐 이다. '나' 라는 자아의 인칭적 마음을 비우는 일. 상대를 먼저 위하는 마음이..결국. 사랑의 본질이다.  
     계속.~

     쓰다보니.. 9번의 강의를 어떻게 정리할까..생각해봤는데..그냥 편하게 내 맘대로 정리해야겠다. 어쩌면 사랑에 관한 테마는 정리가 아니라.. 더욱 잘게 쪼개는 해체가 될 수 도 있겠다.

     동시대 문화 연구 도 정리해야하는데..너무 방대해서 쉽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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