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너무나 정리를 안하고 살았다. 독후감과 발췌의 음미가 없다면 그냥 지식의 향기를 맡을뿐, 지혜의 여운은 이내 사라진다. 다시금 이 블로그의 역할을 가늠해보자. 



   이 책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오길래, (왜냐면 책 표지가 누런 황갈색의 재생지에 제목이 입에 착 감기기에. 러브노리지) 집어 들었다. " 우리 삶이 허무한 것은 너무 자기 자신에게만 몰입해 있기 때문.. " 책 표지에 있는 이 문구 맞는 말이다. 번역서지만, 문장이 좋다. 짧고 간결해 철학의 질문들을 차분히 음미해 볼 수 있었다.  후반부 푸코와 데리다 쪽으로 갈수록, 내용문제인지, 번역문제인지, 아님 나의 집중력이 흩어졌는지, 책의 초중반에 비해 헤맨 느낌이다. 


   6명의 철학자의 대표책을 저자가 다시 읽으면서 핵심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아니 질문을 공유한다가 맞겠다. 그 중에서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대단히 흥미가 생겼다. 물론 다른 책들도 다 읽어봐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 학자들은 거의 다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삶의 문제에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했고 나름 그 부스러기와도 같은 글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비움과 경이와 의심의 대변자였다. 그는 하나의 물음표였다.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을 비롯해 스피노자, 루소, 니체, 푸코, 데리다에 이르는 소크라테스 이후 세대의 철학자들은 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이러한 비움의 철학과 동거했다. 그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로 하여금 질문을 던지게 하고, 지식에 대한 사랑과 동의어인 경기감을 새롭게 불러일으키며 살아가도록 촉구한다. _ p14


  철학의 고유한 특성은 가장 명백하고 평범한 것을 검토하는 것이다. 철학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의 특질, 자연스럽게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관점과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철학은 세계나 다른 존재의 실재 같은, 우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제기하지 않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아무 의심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오래된 편견이라 부르는 질서와 신념을 검토나 검증의 과정 없이 받아들이고 이미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 30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삶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긴장과 갈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58

   삶의 우여곡절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조건에 적응하여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안정성을 추구하려는 욕망이다. 안정은 끊임없는 변화와 재창조를 통해 이룰수 있다. 59


 자기 이해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자기 이전의 자아를 초월하는 것이다. 인간은 정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전의 자아를 극복하고 재형성함으로써 영원을 성취한다. 66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이며, 진실로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이 세상이라는 직물 속에 짜여 들어간 존재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 자유로운 인간은 다름 아닌 죽음을 생각하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해 명상하는 것" _스피노자 106


  "이제 나는 이 지상에서 혼자이다." _ 루소  이 책의 첫 문장이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쓰기와 읽기는 소외의 경험인 동시에 공유의 경험이다. 118

  "나는 두 사람이 연합함에 있어 최고의 임무는 서로가 상대방의 고독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가장 친밀한 인간 사이에도 무한한 거리가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각자 드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다른 전체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그 거리를 사랑하는 데 성공한다면, 두 사람은 서로 나란히 걸어가는 멋진 동반자로서 삶을 성숙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거리를 받아들이고 포용할 때 사랑과 우정이 가능해진다. 내가 너를 안다고 생각할 때, 나는 너를 오해하는 것이다. 또한 내가 너를 아는 것을 불가능한 일로 체념할 때, 나는 너를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갈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 관계의 토대로 삼을 때, 나는 "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다른 전체를 볼 수 있다." _라이너 마리아 릴케. 140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 어떻게 그리고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 알려고 노력하는 것" [쾌락의 활용] 미쉘 푸코. 187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대응 능력)은 나를 하나의 주체로 구성한다. 타자는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전에 나를 부르고, 이러한 부름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내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규정한다. ~ 타자에 대한 나의 행동과 반응은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나의 행동과 반응이다. 책임은 철학의 근간이다. 그것은 존재나 지식보다 선행된다. 224






  가슴이 뜨거워진다. 1920~30년대 격동의 동아시아. 나라 잃은 조선인 청년 김산(본명 장지락)의 삶은, 노래 아리랑의 감흥만큼이나 뭉클했다. 이 뜨거운 감동은 민족의 비애 속에서 체념하고 타협하는 삶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길에 투신한 자의 순수한 열정과 고난의 길에서 걷어올린 숭고함 이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독후감을 쓰려는 이 시점에서 내가 사진을 표면적인 이미지의 표상을 넘어서서 바라보게된 계기가 다시금 생각났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첨부된 어느 작고 조악한 화질의 독립군 사진들 이었는데, 멍하게 이 사진들에 빠져들었다. 그 사진은 역사속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종종 책을 펼칠때마다 그 독립투사의 초췌한 모습에 전율이 들며, 사진 찍기 이전과 이후의 삶을 상상해 보았다.(한편의 영화 같이) 그들이 처한 상황은 한장의 사진에 응축돼 있었다. 이것을 해제해 버리면 내 가슴속엔 나만의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이 경험은 백과사전 첨부 사진에서 보고 느꼈던 이국적인 공간,풍경, 이색적인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선, 타인의 삶을 내 안으로 체화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간혹 홍난파 선생이나 원효대사 초상에 낙서로 영구 이미지로 둔갑시켜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했지만, 역사 교과서 사진이야 말로 사진의 진수였다.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의 책 '희망'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일제시대 조선 혁명가의 이야기에 매혹당한 그의 소개는 이 책의 발견만으로도 마음을 떨리게 만들었다. 

 개정판 표지의 사진을 보면서 위에서 말했던 학창시절의 감흥이 떠올랐다. 한장의 사진은 그 삶에 대한 호기심을 낳게 만든다. 

 김산의 삶의 이야기는 미국인 여성 작가 님 웨일즈 (본명: 헬렌 포스터 스노)에 의해 1941년에 아리랑의 노래란 제목으로 첫 출판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이 책은 이념 대립의 매카시즘으로 대변되는 반공 열풍에 쉽쌓여 공공 도서관에서 폐기되고 개인 소장 자체도 탄압을 받게 됐다고 한다. 이 책으로 인해 미지의 나라 조선이 알려지고 서구의 정치인들에게도 조선 문제를 이해시키는 단초가 됐다고 한다. 일본의 탄압이 알려지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혁명과 항일 투쟁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통해 역사적 자료의 가치도 있다. 또한 혁명가의 치열한 삶은 광풍의 역사속 한 인물의 인간적 면모를 통해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하지 않는 신념과 실패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정신의 감동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은 헬렌 포스터 스노가 김산을 수십차례 인터뷰한 구술을 바탕으로 엮어낸 전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김산을 만났을 때는 30대 초반의 그였지만 여러차례의 죽을 고비와 고문으로 인해 몸이 망가져 있었고, 실제로 얼마후 처형 되었다. 34살로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삶은 막을 내렸지만, 그의 이야기를 통해 암울했던 우리의 역사와 아리랑 노래의 한맺힌 구슬픔을 상기해 볼 수 있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던 조선의 민중은 만주, 사할린, 일본, 미국, 남미 까지 살기 위해 떠나야 했다. 김산 또한 11살에 집을 나온 이후로, 격동의 동아시아 한복판에 있었다. 그의 입을 통해서 1923년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의 전모를 알 수 있었고, 중국의 공산당 혁명의 얼레를 알 수 있었다. 그 소용돌이가 근대화된 서구 열강의 식민지화 광풍이 대외적인 요인 이었다면 어느 나라건 계급 투쟁과 토지의 분배 문제를 둘러싼 이념 싸움이 더 큰 불씨 였다. 중국 혁명에 투신한 김산의 삶을 통해 중국의 파란만장한 근대사에 흥미가 생겼다. 리영희 선생의 글을 통해 대만의 역사와 문제를 알았듯이, 젊은 모택동과 장개석의 활동에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역할은 민족문제를 넘어선 부조리한 계급, 노동자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인류애적 행동 이었다. 

 이 책을 읽고 든 의문과 나의 추측은 1919년 3.1운동 이후에 한반도에서 항일 투쟁이든, 좌.우의 이념 대립이든 유혈 투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만주나 상하이에서 독립 운동을 했고, 한반도 에선 왜놈을 몰아내기 위한 적극적 항쟁이 없었다. 민중을 이끌 수장들은 김산처럼 중국을 떠돌다 죽어갔고, 민중들은 1800년대 이래 수많은 농민운동. 전란을 통해 제 일신 하나 보위하자는 마음이 앞서지 않았을까. 우리의 자원이 고스란히 수탈당하면서도 바라만 보거나 동조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국과 마찬가지로 1910~1945,49 년 사이 내부적으로 계급 투쟁과 토지의 분배 문제의 이념 전쟁이 점진적으로 벌어지며, 항일 유혈 투쟁을 했더라면, 6.25 같은 타의에 의해 총동원된 이념 전쟁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6.25는 어짜피 거쳐야 할 과정이 터지지 않고 크게 곪아 터진 경우가 아닐까 싶다. 양반과 노예가 존재하는 뿌리 깊은 계급 사회에 마르크스 주의는 너무나 혁명적이었고 나라가 망하고 급변하면서 억압되었던 계급의식의 표출이 식민지된 현실에 봉쇄되고, 타의적으로 독립을 당하게 되자, 그제서야 터지게 된 본노의 폭발 같다. 이 계급 투쟁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역사가 말해 준다. 중국의 문화혁명. 스탈린 정권의 대숙청. 크메르 루즈의 학살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죽어갔는가. 인간의 평등과 분배의 문제가 얼마나 큰 폭력을 야기할 수 있는지 숙고해 보아야 한다. 


 다시한번, 이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문제가 얼마나 우리나라를 좀먹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친일파의 아들놈이 국회의원으로 뽑히고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를 만들게 하고 국민을 농간케 하는 이 현실. 이념을 넘어서 왜놈과 왜놈의 동조자를 처단하는 의열단이 중국땅이 아닌 이 땅에 활동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민족은 너무 착한 걸까. 그동안 하도 수탈을 당하니 그냥 체념 했던 것일까?. 왠지 반도 나라의 숙명 같기도 하다. 

 다시 아리랑으로 돌아가서 책의 중 후반부를 넘어가면서, 혁명가의 내면적 고충이 인간적으로 와 닿았다. 젊은 남자로서 이성 문제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은 너무 순수하고 귀엽기까지 하다. 혁명가에게도 사랑이 찾아오고 먹고 살아갈 당면한 경제적 고뇌에, 시대를 막론하고 가정을 꾸리는 생존의 문제는 인간의 가장 큰 관건이다. 뭘 믿든 먹고 사는 문제를 벗어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김산은 젊음을 다해 투쟁했지만 그만큼 일찍 생명을 담보잡혔다. 그가 처형 당하지 않았더라도, 고문으로 인한 건강의 훼손은 치명적으로 보인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운명을 자각이라도 했을까.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 헬렌 포스터 스노 와의 대화는 우리에게 큰 선물같은 결과로 남겨졌다.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고향을 떠나 죽어갔는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마도 임진왜란,병자호란 때의 부끄럽고 참혹한 왕실의 행태와 그 이후로 가진자들의 횡포에 대한 민중의 한맺힌 예언이 아닐까. 잊지말고 분노하자. 

 아리랑의 기원의 이야기는 이 책 60~61페이지 참조,

 김산은 우리 시대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고, 가장 추악하고, 가장 혼란스러운 대변동 속으로 내던져진 한 명의 민감한 지식인이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상주의적인 시인이요, 작가였다. 그는 아무런 환상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냉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했지만 또한 변화와 진보를 확신하였다. 고통과 패배는 그의 꿈을 없애버리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사상이 한층 깊은 의미를 지니고 타오르도록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그는 객관적인 사실의 주인공이었지 주관적인 언어의 노예가 아니었다. 육체는 빵으로 살찌지만 정신은 기아와 고통으로 살찐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에 의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만 비로소 지식인은 행동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된다. 김산은 이 약점을 극복하였으며, 그래서 지식인적 패배주의라는 질병에 희생되지 않았던 것이다. 48

 인간은 자기 욕망을 통제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욕망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나는 판단하였다. 인간은 지적의지와 사상을 가질 때에만 인간으로서 존재한다. 그 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자연에 대한 통제력뿐만 아니라 자기 육체도 통제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성에 반대되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에까지 도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183

 오류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오류란 심지어는 진리를 드러내는 데 유익하기도 하다. 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 아닐까? 왜 회의나 걱정 따위로 자신을 괴롭혀야만 하는가? 세상에는 자기에게 괴로움을 주는 적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어차피 인생은 생명을 내놓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 애태워서는 안 된다. 역사는 언제나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승리를 얻는 것이다. 396

 꿈꾸지 않고 자는 것은 행복하다. 자기 먹을 궁리나 하고 타인의 생활방식이나 삶의 목적을 묻지 말 것. 지켜보기만 하고 호기심을 품지 말 것. 

 너무나 진리에 가까운 질문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 질문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자신에게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가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신념과 오류를 지닌 채 행복하게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어라. 근본적인 질문으로 타인의 영혼을 괴롭히지 말라. 자기가 원하는 문제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답을 찾도록 내버려두어라. 397

 나는 내 과거의 경험을 분석하고 가혹한 자기성찰을 철저히 하였다. 401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내 앞에 있는 문제들의 경우를 비교하면서 나 자신의 삶과 오류와 지혜를 음미해 보는 동안 나는 자신에 대하여 강력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느꼈다. 그 때 이후 나는 한 번도 이 신념을 잃어본 적이 없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꺾인 일이 없는 용기와 힘을 지녀왔다.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내 의견과 능력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 일단 어떤 과제에 마음을 쏟기만 하면 그 일을 반드시 해낼 수가 있다. 나는 내 결정이 올바르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할 수 있게 해주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추리를 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리저리 동요한다든지 방향을 잃는 일이 절대로 없다. 결단력도 가지고 있다. 당면한 것과 역사적인 운동을 구별할 수도 있다.  

 무엇이 올바르고 참된가 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한 뒤에는 어떤 외부적인 바람도 그것을 흔들어 놓을 수가 없다. 403


 인류 역사의 전통은 민주주의적이요, 이 전통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천부의 권리이다. 그러나 이 천부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한테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는 자도 있다. 물은 사람을 빠뜨려 죽이기도 하고 구해주기도 한다. 오늘날 인간사회는 고요한 마을 연못이 아니라 성난 홍수이다. 사람은 반드시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14살 때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는 결코 물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 나는 몇 차례나 스스로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파괴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민중과의 계급관계를 유지하는 것.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중은 깊고 어두우며 행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단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소곤거리는 소리와 침묵의 웅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개개인과 집단들은 큰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그리하여 그 때문에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진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지 큰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민중들이 이 작은 목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손에 총을 잡는다. 마을 노파 한 사람의 긴박한 속삭임만으로도 충분하다. 진정한 지도력은 날카로운 귀와 신중한 입을 필요로 한다. 민중의 의지에 따르는 것만이 승리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466




 암흑의 시대. 언제쯤 여명이 밝을지 모르는, 아니 태양(진실,진리)은 있어도 깜깜한 터널속에 갇힌 암울한 시대에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존재로 어둠에 맞선 지식인이 있으니 우리는 나름 희망을 희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패하고 무자비한 독재 권력에 기대거나 타협하지 않고 옳은 말을 소신대로 한 그의 삶은 우여곡절의 풍파가 있을지언정 그의 글을 통해, 진실을 직시하고 사람들이 폭압에 맞서 행동하게 한 사상의 근거를 이룰수 있었다. 


 그는 진정 참된 지식인의 모범이자 표상이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실로 인간정신의 위대함이라고 본다. 실존적 육체 고문의 고통과 영혼까지 파탄나는 공포에도 불구하고 그의 올곧은 시대정신과 역사인식은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정말 이 시대의 어르신 이었고 진정한 선생님 이었다. 


 여기저기 지면에 발표했던 여러 글을 모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우리의 슬픈 역사, 현실의 문제들을 상기시키고 성찰과 분노를 할 수 있었다. 우리의 훼손된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고 조금이나마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수호하는데 있어 마음가짐을 다잡게 한다. 또한 학생들의 역사공부와 글쓰기 공부는 리영희 선생님의 글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진실되다. 바른 생각의 비롯과 바른 문장의 도출은 이 책의 글을 통해 배울수 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체는 노신에게 배워온다. 


 - 노신이 그 시대의 중국사회에서 해야 할 일은 전통과 지배계급의 허위를 까밝히는 일이었다. 몽매한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는 작업이었다. 그러자면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쉬운 말을 가지고 알기 쉽게 써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물.관계를 평이하게 풀어 써야 한다. 추상적 용어를 덜 쓰고. 구체적 낱말로 표현해야 한다. 이론으로 해명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 증거와 자료를 풍부히 동원해서 제시해야 한다. 학자.전문가.교수.박사 따위의 자화자찬의 높은 자리에서 '가르쳐준다'는 교만한 자세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친절함이 원바탕이어야 한다.   ...이것이 노신이었다. 그가 글을 쓴 시대의 상황은 70년대 오늘의 우리나라 상황과 비슷하다. 정면으로 글을 쓰지 못하는 '반지성'의 시대였기 때문에 역설.해학.완곡.비유....등으로 뜻을 전한 것이 많다. 그 기법을 그에게서 배우려고 했다. [{우상과 이성} 일대기] -


 -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우상과 이성]에서 -



  아직은 독후감을 쓰기에도 벅차다. 너무나 많은 촌철살인의 글귀들은 깨침의 연속이었고,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의 진실 이었다. 그 당연한 논리의 귀결은 우리의 참된 민족정기의 회복이고 나아가 자기 완성의 길이다. 여전히 진실을 왜곡하는 지배체제의 언설에 혹하지 말고 진정한 마음으로 무엇이 옳은 말이고 참된 길인지 숙고해 보자. 


 - 남베트남의 사실을 통해서도 역사는 '과거지사'가 아니라 현재를 규정하며 내일에 영향을 미친다는 평범함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다. 이 같은 역사의식은 거꾸로, '오늘'(현재)을 바로잡고 '내일'(미래)에 착오가 없기를 바란다면 과거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과거는 묻지 마세요"가 아니라 "반드시 과거를 물어야 한다"는 말이다. - [해방 40년의 반성과 민족의 내일] 389


 리영희 선생은 2010년 12월에 돌아가셨다. 생전에도 많은 이들이 선생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갈구하고 나아갔듯이 지금의 우리에겐 더더욱 절실하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본 책이지만, 새로 구입하고 틈틈히 읽고 또 읽어야 겠다. 그리고 한번의 감상문이 아닌 수시로 독후감을 써야할 책이라고 여겨진다. 진실한 마음과 이상을 가진 친구에게도 자주 이 책을 선물 해야겠다. 김수영의 산문집도 그렇고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발견은 삶을 단순한 유희를 넘어 엄숙하게 보게 한다. 그것은 개인의 영달만이 아닌 것에서 오는 반성이자 '무엇을 위해서'란 실존적 행동 추구의 용기이다. 나는 정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참으로 당찬 제목이다. 삶의 아나키적인 저 문구와 이미지는 경각심을 일으킨다. 유한한 우리 삶에 임하는 태도는 제목의 추가 설명대로 인생이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_ 그럴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를 참 인상깊게 읽었었다. 

2011/07/24 - [책] - 소설가의 각오 _ 마루야마 겐지 산문집


 작가로서의 줏대, 아니 한 사람으로서의 주체적인 인생 철학이 너무나 강렬했었다. 


 이 책은 더하다. 마치 작정하고 회초리를 들어 젊은이들에게 매질을 하고 있는 듯하다. 

 70이 넘은 꼬장한 노인의 말들은 살아있다 못해 독기가 느껴진다. 

 그만큼 현재의 나약한 청춘 군상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적잖이 당혹스럽지만, 내 삶을 돌이켜보고 삶의 태도와 정신을 바짝 추스리는데는 이런 독설이 응급약이다. 

 흔한 힐링 이나 다정다감한 멘토의 위로로 무엇이 개선되겠는가. 다 장사꾼 일 뿐. 백권의 자기계발서 보다 이 책 한 권이 내겐 유효해 보인다.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이 책으로 처음 접하는 사람은 거부감이 많이 들 것이다. 니가 뭔데 극단적인 인생론을 지껄일까 라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삶의 경험으로 온전히 들어가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카프카의 다음 문장은 여러 모로 이 책과 닮아 있다. 

나는 오로지 꽉 물거나 쿡쿡 찌르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하러 책을 읽겠는가?........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카프카.












 삶의 혁명을 꿈꾼다면 사심없이 이 책을 읽고 행동 하자. 망각의 늪에 빠질 때마다 이 책으로 정수리를 갈겨 보자. 



 이제서야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처음으로 집어든 것이 이 책이다. 도서관의 장기 휴관으로 한 보따리의 책들이 몇달간 방에 있었는데 반납이 코앞에 들이닥쳐 재빨리 읽게 된 책이다. 그래서 이 글도 맛뵈기 정도이고, 그의 다른 대표작을 섭렵하고 다시 읽어보려 한다. 왜냐면 그의 작품세계의 시발점, 열쇠가 되는 작품이란다. 대문호라 칭해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이렇게 시간에 쫒겨 얼렁뚱당 읽어댔지만 이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졌으니 어쨌거나 좋은 효과다. 


 왠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되게 고루하게 느껴지고 지레 부담을 느끼게 마련인 것은 나만 그런 것인가? 우연하게 이 책을 접하고 소설 문학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그들의 문턱에 다다러 이제 문을 열어 보고자 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예전에 강신주 철학박사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접하는 것은 시절인연이 중요하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 자칫 너무 어린 나이에 접하면 안 좋을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이제야 대문호라 일컬어지는 그의 소설을 읽을 정신의 근기가 되었나?.


 원래는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인상깊게 읽고 거기서 소개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어봐야지 머리에 저장해 두었다가,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고 그 책인지 착각하고 빌리게 된 것이었다. 


 여하튼 이 책의 첫장 첫 문장을 읽는데, 어라! 되게 현대적인 것이었다. 마흔의 남자가 되는 대로 지껄이는 문체인데, 이 사람의 20년째 찌질한 루저의 삶을 살고 있는 넑두리를 듣게 된다. 그의 과잉된 푸념은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다가도 조장된 분열을 일으킨다. 문체는 속도감이 있지만 간혹 1인칭 관념의 시점이라 철학적 고민도 있고 어떤 부분은 병적인 자의식의 과잉으로 버거운 부분도 있다. _그는 살아 있는 삶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채 오직 이념(관념)만, 즉 '말'만으로 존재한다._역자 해설 부분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세계에서 전환점이 된 소설이며 최초의 실존주의 소설이라 일컬어진다. _ 책 뒷 표 지

 


1부 마지막 챕터 부분에서


" - 당신이 정말로 고통 받았던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자신의 고통을 조금도 존경하지 않소. 당신의 내면에 진실은 있지만, 그 내면에 순결함은 없소. 당신은 아주 시시껄렁한 허영에 사로잡힌 나머지 괜히 과시하기 위해 당신의 진실을 시장바닥에 내놓고 치욕을 자처하는 거요...... 당신은 정말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서도 겁을 집어먹은 까닭에 최후의 한마디를 감추는데, 이는 당신이 그걸 입 밖에 낼 결단력은 없고 오직 겁을 집어먹은 채 시건방지게 굴 줄만 알기 때문이오. 당신은 그놈의 의식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지만 실은 그저 망설이고 있을 뿐인데, 이는 당신의 머리는 작동하고 있으되 당신의 마음은 방탕으로 인해 어둠침침해졌기 때문이오. 깨끗한 마음이 없으면 완전하고 올바른 의식도 없는 법이라오. 당신은 또 남한테 어찌나 끈덕지게 달라붙는지, 또 남을 어찌나 귀찮게 하는지, 또 어찌나 오만상을 찌푸리는지! 허위, 허위, 허위올시다! "

 물론 여러분의 이 모든 말은 지금 나 자신이 지어낸 것이다. 이것도 역시 지하의 산물이다. 나는 거기서 사십 년 동안 계속 여러분의 이런 말을 문틈으로 엿들어 왔다. 이것도 다 나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이지만, 실상 오직 이런 것만 생각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딱히 놀랄 것도 없지, 달달 외울 정도가 되다 보니 자연스레 문학적 형식을 띠게 된걸....... 



2부 소설의 결말


 이 '수기'는 여기서 끝내야 되지 않을까? 내 생각으론 이런 걸 쓰기 시작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적어도 나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부끄러웠다. 다시 말해, 이것은 문학이 아니라 교도 감화를 위한 징벌이다. 사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령 내가 지하의 구석방에서 정신적인 부패에 시달리고 환경의 결핍을 맛보며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유리되어 허영심 가득한 분노나 키우고 그럼으로써 정작 삶을 놓쳐 버린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것은 맹세코 재미없는 일이다. 소설에는 주인공이 필요한 법인데, 여기서는 일부러 반 주인공에게나 걸맞은 특성만 몽땅 모아 놓았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불쾌한 느낌을 준다는 점인, 이는 우리 모두 삶으로부터 유리된 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너나할 것 없이 다 절뚝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나 많이 유리되었는지 진짜 '살아 있는 삶'에 대해서는 때때로 어떤 혐오감마저 느끼고, 또 이 때문에 누가 우리에게 이걸 상기시키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다. 실상 우리는 '살아 있는 삶'을 노동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거의 업무로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다들 속으론 책에 따라 사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는 쪽에 동의한다. 왜 우리는 이따금씩 옥신각신하는 걸까, 왜 변덕을 부리는 걸까, 대체 왜 뭘 요구하는 걸까? 우리 자신도 왜인지는 모른다. 어떻든 우리의 변덕스러운 요구를 들어준다면 우리는 오히려 더 나빠질 것이다. 자, 시험 삼아 우리에게 가령 자립성을 좀 더 많이 주고, 우리 중 아무나의 손을 풀어 활동 범위를 좀 더 넓혀 주고, 보호의 강도를 좀 더 낮춰보라,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말하지만, 당장에 우리를 다시 원래대로 보호해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자, 여러분은 나한테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면서 두 발을 쾅쾅 구를 것이다. 나도 잘 안다. "당신 자신의 얘기만, 당신의 비참한 지하 생활 얘기만 할 것이지, 감히 우리 모두라고 둘러대진 말라." 라면서. 죄송하지만, 여러분, 이 모두란 말로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 자신으로 말 할 것 같으면, 나는 실상 여러분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에서 극단까지 밀고 나갔을 뿐인데, 여러분은 자신의 비겁함을 분별이라 생각하고 이로써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생기로운' 셈이다. 그럼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보라! 실상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한다. 지금 대체 어디에 살아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또 그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를 단 한 권의 책도 없이 홀로 남겨 둬 보라, 그럼 우리는 당장에 갈팡질팡하고 어리둥절해질 것이며, 어디에 합류해야 하고 무엇에 따라야 할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할지, 무엇을 존경해야 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할지 통 모를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조차, 자신만의 진짜 육체와 피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한다. 이것이 너무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나머지, 지금까지는 존재한 적도 없는 무슨 보편 인간이 되려고 안달복달한다. 우리는 사산아, 더욱이 이미 오래전부터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아버지에게서 태어나는 존재이며, 또 이것이 우리는 점점 더 마음에 든다. 취향에 맞는 모양이다. 조만간 우리는 어떻게든 관념으로부터 태어날 궁리를 할 것이다. 하지만 됐다. 더 이상 '지하에서' 이렇게 쓰고 싶지 않다.....


 

 이 책 무척 훌륭하고 유익하게 읽었다. 고미숙씨가 대장으로 있는 공부 커뮤니티에서 나온 결과물이래서인지 주장하는 바도 비슷하고 전체적인 문체도 흡사한 일관성이 있다. 그 영향아래 있지만 언어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지식과 생각해 보게 함은 언어적 존재인 우리의 근본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영감을 이끌어내는 면이 좋았다. 

읽은지 몇달이 지나서 자세한 감흥이 흐릿하지만 나중에 꼭 다시 읽어 볼 책이다. 몇달 묵혀두었다 반납이 코앞이라 마킹해 두었던 부분을 다시 읽어 본다. 



 파동 상태의 물질이 우리가 관찰하는 순간 입자의 형태로 포착되듯이, 언어는 유동적인 사건의 세계를 하나로 고정하고, 뒤섞인 채 존재하는 사물들을 독립적 실체로 분절한다. 원래부터 나는 '나'로, 너는 '너'로 존재했던 게 아니라 '나'와 '너'라는 명명을 통해 나와 너가 분리되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다. 강조하건대, 언어는 사물과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중립적 도구가 아니다. 인간은 명명을 통해 세계를 격자화하고, 사물들을 특정한 좌표계에 고정시킨다. 

 언어는 힘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행위와 사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기도 하다. 고등학생, 남자, 여자,장남,모범생 등의 '꼬리표'를 떼고, 그 말들의 용법을 무한히 확대시키면서 새로운 언어게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새로운 것을 행하는 것이고, 새로운 신체를 갖게 되는 것이며, 새로운 세계-새로운 삶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43-44


 언어를 새롭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수많은 '나들'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단 하나의 '나'를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여기저기를 넘나들면서 때론 사슴이 되고, 때론 나뭇잎이 되고, 때론 바람이 되기. 그렇게 무수히 많은 존재들과 교감하면서 '변신의 왕'이 되기.  58


102-103,  122 


 물론 기존의 것을 단지 부정한다고 해서 '위험한 책'이 되는 건 아니다. 정말 위험한 건 사람들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변하게 하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게 만드는 책들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위험함'은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 못지않게 새로운 가치의 창조에서 감지되는 힘이다. 


 나는 오로지 꽉 물거나 쿡쿡 찌르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하러 책을 읽겠는가?........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카프카.262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부정하는 용기다. 무엇을? 예전의 나를, 변하지 않는 나를, 반복되는 명령을, 날 가두는 감옥을, 획일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꿈을. 어떤 작가가 예전의 명성에 갇혀 변화하려 들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예술가들이 당대의 예술적 관습을 충실히 따르기만 했다면 새로운 예술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옛사랑의 추억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부정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부정 없는 긍정은 대단히 무력하다. 카프카 소설의 힘은 '되기'를 통한 부정의 힘이다. 348


 달리는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돼


"어휴-" 하고 쥐가 말했다. 

" 세상은 매일같이 좁아지고 있어. 처음에는 너무나 넓어서 두려웠지. 한없이 달리며, 좌우로 멀리까지 담장이 펼쳐져 행복해했었지. 그러나 그 긴 담장들이 어찌나 빠른 속도로 마주 달려오는지, 어느덧 나는 막다른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구석에는 내가 달려들 덫이 놓여 있어."

" 너는 달리는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돼." 하고 말하며 고양이는 쥐를 잡아 먹었다. 


카프카의 [작은 우화] 전문.



 


사진. 구글검색 


 잿빛 하늘이다. 하늘엔 11월의 비가 내리고, 겨울과 가을의 구분은 사라졌다. 회색 도시는 주말의 적막을 우중충한 비로 적셨다.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은 후, 이러한 생기없는 주말조차도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를 마음의 저 밑바닥에선 깨닫고 있었다. 


 사실 너무 좋은 책을 읽으면 그리 할 말이 없다. 머리로 생각하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스며들어 그것을 걷어올리기가 여간 수월치 않다. 쉽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의 감동은 자신의 근간을 이룰 것이다. 뭔가를 정말 좋아하면 그것의 개별적 구체성은 사라져 하나의 빛으로 폐부를 찌르듯 상흔이 생긴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기억에 담으려해도 도통 생각나지 않는 건, 빛과 공기 같이 모호한 추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한점의 바람속에서 미소를 느끼고, 존재의 의미와 생의 의지를 북돋는다. 


 이 책의 저자가 직접 경험한 유대인 학살 강제수용소에서의 삶은 인간의 존엄이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에서의 체념을 생의 의미로 승화시킨다. 감정적이고 드라마틱하지 않게, 그저 덤덤히 지난 시련을 객관적으로 기술한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 보다 더, 이런 글의 힘은 강하다. 쉰들러 리스트의 휴머니즘 보다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가 좀 더 여운이 남듯이, 실제 경험의 진술만으로도 충격 여파가 만만치 않다. 

 

 저자가 신경정신과 의사여서 이런 고통을 통해 객관성을 담보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건 아닌것 같다. 저자가 말했듯, 인간이 그런 환경에 처하면 짐승이나 성인의 본성으로 드러나듯이, 순간 선과 악의 선택이 내 앞에 도래했을때, 어떤 본성을 발휘하느냐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다. 자신의 똥오줌 위에서 삶을 포기하고, 한치의 희망도 없이 짐승처럼 혹사당하다 죽을 날만 남은 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말하는건 가혹하지만, 저자는 자기가 보고 겪은 참상을 통해, 자아의 본성, 인간의 존엄, 정신의 자유에 대해 깨닫는다. 우리가 직접 경험할수 없는 극한의 시련속에서 피어 올린 성인의 말 들이다.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그후로 대다수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분석치료의 한 분파인 로고테라피(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창시하고, 허무한 삶에 고통받는 현대인들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책의 후반부는 로고테라피의 핵심을 약식 기술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그러니까 내 삶의 의미를 견고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됐고, 끊임없이 이런 질문과, 행동을 통해 삶에 내포된 고독과 허무를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허무한 영혼들을 위한 강력한 치료제이다. 



 "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_ 니체.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49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용소 안에서 행해지는 예술 행위는 어떤 종류의 예술 행위든 어느 정도 기괴한 측면을 띠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예술과 관련된 행위에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는 것은 음울한 현실과 예술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85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87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120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122


 도처에서 인간은 운명과, 그리고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나게 된다. 123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129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132


 "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 스피노자<윤리학> 133


 미래 - 그 자신의 미래 -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133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 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 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139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40


 행동을 통해 즉각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대개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인 법이다. 143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존재방식인지도 모른다. 147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161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기보다는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174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176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도이라고 생각하라." 182


 화가는 자기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안과 의사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해주려고 노력한다. 로고테라피 치료사의 역할은 환자의 시야를 넓히고 확장하는 일이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취해야 할 의미일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183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의미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이런 잠재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85


시련은 그것의 의미 - 희생의 의미 같은 - 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할 수 있다. 187


본질적으로 일회적인 이런 잠재 가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실현시키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수많은 현재의 가능성 중에서 끊임없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  198


 






 

소설가 최인호 님이 작고 했다. 몇일전, 서점에서 최인호의 유작인 '인생'을 읽었다. 되게 많이 아파보였고,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는데, 우연찮게도 그 다음날 뉴스에서 그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유명인사의  부고 소식에 이렇게 헛헛한 기분이 드는건 실로 오랜만이다. 노무현 대통령 때의 참담함과는 다른 종류의 엄숙함 이었다. 노년에 접어든 예전의 어느 에세이에서 그가 우울증과 당뇨병을 앓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침샘암이라니, 마지막 책. '인생'은 죽음앞에 선 한 인간의 절박함을 토로했다. 이전의 글과는 매우 다른 느낌은 이승과 저승의 심판대에 선 인간의 선한 나약함 때문이었다. 그는 천주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받들어 인생의 소박한 통찰을 말해준다. 그런 성인의 말씀들은 다른 책에서 많이 들어봤어도, 투병 생활을 하던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글귀들은 더욱 심지 깊었다. 



 _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은 소화 테레사의 말처럼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과거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집착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며, 미래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또한 현재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사리분별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불교의 골수인 [금강경]에는 이런 명구가 나온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선승 황벽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는 감이 없고, 현재는 머무름이 없고, 미래는 옴이 없다."

 주님도 이에 대해 분명하게 못 박고 계시지 않는가.

 "...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

 내가 내일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빵을 달라는데 아버지께서 돌을 주시겠는가. 아들인 내가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시겠는가. 내가 두려워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믿기보다 내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더 믿어 교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고 계신 아버지께서 내 날개를 꺾어 땅에 떨어뜨리겠는가.

 백척간두에서 유일하게 사는 방법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일이며, 성난 파도를 잠재우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인당수의 깊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길이다. 36-37


 프랑스의 시인 아폴리네르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두렵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과거를 걱정하고 내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벼랑 끝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날개를 가진 거룩한 천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8-39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저를 붙드신 목적은 제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향해 달음질치게 하려는 것에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안에 있는 하느님으로서의 '말씀'능력과 예술로서의 '행동'능력과 성령으로서의 '생각'능력, 즉 '지언행'을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렌즈로 햇볕을 모아 초점을 맞추면 불꽃이 일어나 종이를 태울 수 있듯이 분열된 제 생각과 말과 행위를 오직 '사랑'의 초점으로 집중되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저의 말이 곧 저의 생각이며, 저의 생각이 곧 저의 행동이며, 저의 행동이 저의 말임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달려갈 수 있도록 주님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 아멘. 170-171




 젊은 나이에 데뷔 후, 베스트셀러 작가로 승승장구 했고, 대다수의 작품들이 영화화되며 대중작가로 인기를 누렸으나, 문학 작품 으로의 평가는 야박했다고 한다. 항상 그래왔듯, 잘 팔리는 대중작가에게 아티스트 대접은 언감생심 일까. 하지만 나는 '별들의 고향'은 안 읽어봤지만, 소설집. '타인의 방' 과 여타 에세이글들.. 그리고 '길 없는 길'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다. 글의 리듬이 매끈하여 술술 잘 읽히며 몰입 뿐 아니라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묵직함도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는 실로 진정한 작가라고 느낄 것이다. 대중적 인기와 작품성, 작가의 열정과 인내를 두루 갖춘. 


 유림 2권 까지 읽다가 말고, 잊고 있었는데, 몇몇 주요한 작품들은 읽고 싶어진다.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아직 못 읽고 있지만..


 오늘 오전에 명동성당에서 추모 미사가 열렸단다. 가고 싶었으나 못갔다. 비오는 밤. 마음으로나마 명복을 빕니다. 천주교인 이면서 재가 불자였던, 고인을 위해. 나무아미타불~ 아멘..


 좀 실망인걸. 김영하의 글은 단편집과. 수필들만 접했더라도, 와 대단히 글을 잘 쓰는군. 하며 그의 재능에 놀라워 했다. 그래서일까. 기대에 만족하지 못한 뭔가 설익은 이 뒤끝은 뭐지.  


 약속시간이 남아돌아 서점에 들어갔고, 신간 코너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김영하 였으니까. 앞뒤 재보지도 않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40~150 페이지 정도에서 끝이 났고, 어떤이의 해설글이 시작되었다. 


 짧은 단문들이 수월수월 읽히고 책을 잘 안 읽는 요즘 세대들을 위한 스타일인지 짧게 단락으로 나뉜 미니멀한 문장들은 더더욱 빨리 읽히게 되어있다. 


 그런데 불조절 실패한 코펠의 설익고 푸석한 밥 같은 이 느낌. 책 끝에 작가의 말을 들어보니, 이 소설을 쓸때, 순탄하지 않았단 일들을 고백한다. 어떤날은 하루에 두 문장 쓰기도 힘겨웠다고, 그렇게 수얼수얼 읽히는 글들을 쓰던 작가가.. 


 작가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져, 심란했던듯, 습작시절 밤늦게 자고 정오에 일어나는 아들의 수북한 재떨이를 묵묵히 치워주던 아버지의 자상함을 상념한다. 


 소설의 내용은 서서히 기억을 잃어버리는 치매(알츠하이머)에 걸린 왕년의 연쇄살인범 노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딸.(사실은 예전에 자신이 죽인 부부의 딸) 을 또다른 살인자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억하기 위해 분투하는 내면을 보여주는데 나중엔,,그 뒤죽박죽된..치매걸린 노년의 살인자의 영혼은 당연하게도 뒤끝이 깔끔하지 못하다. 상황의 공감이나 영혼의 스릴러도 찾기 어려움. 뭔가 불교 경전의 문구로 묵직한 주제의식을 말하는 것 같긴 하지만, 좀 와닿지 않는다.. 해설을 읽으니 좀 더 파악이 되긴 해도, 대중성과 작품성..이도저도 아닌 느낌이다. 


 그래도 뭔가 아쉬어. 김영하의 다른 장편소설도 읽어봐야겠단 욕구가 생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란 책인가..암튼. 대표작이니 와우~ 하겠지..




 문화센터에 다닐 때, 강사가 미당의 시를 가지고 수업을 했다. '신부'라는 시였다. 첫날밤 뒷간에 가는 신랑의 옷이 문고리에 걸렸는데, 신랑은 신부가 음탕해서 그러는 줄 알고 달아났다가 40년인가50년 후에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들러보니, 신부가 첫날밤 모습 그대로 앉아 있더라는. 그래서 툭 건드렸더니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더라는 얘기. 강사부터 수강생들까지 정말 아름다운 시라며 난리를 피웠었다.

 나는 그 시를, 첫날밤에 신부를 살해하고 도주한 신랑 이야기로 읽었다.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그리고 시체. 그걸 어떻게 달리 읽겠는가.?


 나의 이름은 김병수. 올해 일흔이 되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집을 읽고 나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구입했다. 동화와 희곡을 주로 썼던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동성애 혐의로 옥살이를 하고 나와 곧 변변치 않게 죽었으니, 비운의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옥중기'문고판도 함께,


 펭귄클래식 책을 사려고 했는데, 더클래식이란 출판사에선. 원서와 번역서를 합본으로 절반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예술지상주의, 탐미주의를 대표하는 오스카 와일드의 원문을 번역과 비교할 수 있으니 당연히 선택은 이쪽. 하지만 글의 형식적인 측면보다, 내용적인면에서 탐미주의란 것이지. 

 어쨌든  책의 서문 부터 강렬한 예감이 왔다. 이 책은 천천히 정독을 해야겠다는. 

 대부분 야외에서 책을 읽었는데, 수시로 모서리를 접어 놓은 페이지가 촘촘해졌다. 


 예술에 관한 자신의 입장표명인 서문의 글은 촌철살인의 비수를 드러내면서 마지막 문장의 반전은 결국 이 작품 전체의 주제와. 동시에 오스카 와일드 삶 자체의 비극을 유추하게 한다. 


 내가 원빈이나 젊은날의 정우성 처럼 생겼다면, 내 삶은 어땠을까. 상상만해도 즐겁구나. 껍데기의 아름다움 때문에 인생이 평탄치 않을지라도, 내가 저렇게 생겼더라면 이란 상상은 외모 지상주의의 시대에 강렬한 욕망을 대리하게 한다. 


 내가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지한 경험은 초등학교 저학년때, 학교 근처 화장품 가게에 붙은 광고 사진이었다. 멍하게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고 있으니 같은반 여자아이 둘이 웃으며 뭐라고 말하고 지나갔는데,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여성의 미모에 대한 첫인상을 그렇게 시작했고, 


 

남자의 미모에 대한 첫인상은 배우 리버 피닉스(1970~1993)가 효시다. 당시 로드쇼나. 스크린 같은 화보 많은 영화 잡지에 실린 그의 사진은 너무나 이상적인 아름다움 이었다. 사춘기의 방황과 반항을 살아있는 조각으로 현현한 그의 얼굴을 보며, 미를 터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출연한 수작 영화들인 '스탠드 바이 미''모스키토 코스트''허공에의 질주''아이다호''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등은 여전히 청춘의 아름다움을 봉인한 아련한 작품들인 것이다. 제2의 제임스 딘으로 불렸고, 그가 살아있었다면. 디카프리오, 조니뎁, 브래드 피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텐데..하지만 이런 아름다움 이면엔 마약으로 길거리에서 요절한 시대의 아픔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최고의 영화 '아이다호'처럼..

 이 소설을 읽으며, 상상하게 된 도리언 그레이의 이미지는 리버 피닉스 였다. 

 검색해보니 영화도 있었는데, 주연배우는 벤 반스다. 이전에 영화 벨아미를 보고나서, 주인공이 벤 반스 였으면 하는 아쉬음을 토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도리언 그레이 역을 했었군.




 리버 피닉스 이 후 내가 빠지게 된 남자 이미지는 커트 코베인 이었다. 음악도 그렇지만 그의 초상 사진에 오랜 기간 감동을 하게 된 것이다. 27살 최고의 명성과 부를 가졌고, 갓난아이의 아빠였던 그가 자신의 얼굴을 엽총으로 날려버렸단 슬픈 사실. 


 20대 청춘의 나이에 죽어버린 그들의 초상 이미지는 아련하게도 부서지지 않는 청춘의 화석이 되버렸다. 세월에 의해 늙어간다는것, 인생의 풍파에 시달린 초췌한 얼굴을 삶의 나이테처럼 고스란히 간직한 얼굴을 우리는 대표적으로 에단 호크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리버 피닉스와 함께 아역 배우로 출연한 것 부터.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의 뽀송한 얼굴을 거쳐, 지금까지. 그는 있는 그대로 삶의 아름다움을 간직했고, 리버 피닉스는 멈춰버린 청춘의 아름다움을 영원한 상징으로 간직했다. 


 이런 청춘의 아름다움을 유예시키고픈 욕망. 내 삶의 도화지로써의 얼굴이 아니라 그냥 아름다움(쾌락) 그 자체에 대한 감각적 탐미를 도리언 그레이의 욕망을 통해서 보여준다. 


( 이 책은 도서관서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커트 코베인 박물관 같은 책이다. 팝업북 형식으로 다양한 자료와 아이템들이 수두룩, 수록된 사진들도..이제까지 못 봤던 희기한 사진이 많다. 표지 사진은 생전에 커트 코베인이 좋아했던 사진이라고 한다. 이 책을 생일선물로 받으면 상당히 기쁠듯, 소장가치 만땅인 특이한 책. 이전엔 못봤던 사진을 좀 더 보자면.)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와서, 너무나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화가 바질 홀워드의 애정 아래, 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통해서 자신의 치명적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런 과정중엔 화가의 친구인 헨리 경의 젊음을 찬미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사상에서 깨닫게 되어. 이러한 욕망을 발원한다. 

' 나는 항상 젊은 채로 있고 이 그림이 나 대신 늙어 가면 좋을 텐데.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 다 바칠 수 있는데,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줄 수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팔더라도, 영원한 젊음을 가지고 싶다는, 자신이 저지르는 부도덕함이나, 매정함등이 얼굴에 쓰여지고, 또 자연스런 노쇠화의 추한 흔적은 초상화 그림의 변화로 투영된다. 그러나 자신의 젊음은 변함없이 유지된다는 쾌락 속에서 그는 점점, 양심의 가책도 없는, 뻔뻔한 탐욕을 행하게 된다. 그 세 인물들의 대화는 희곡처럼 진행되는데, 한마디 한마디가 대단히 예리하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내면은 이 세 인물의 정신에 투영되어 드러나는데, 백여년전 세기말 도적적 위기나 지금의 외모지상주의, 감각, 쾌락주의에 대한 알레고리의 딜레마는 인간의 삶의 가치, 아름다움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의 본질적 질문을 이끌게 한다. 화가를 통해 예술의 본질이 뭔지, 도리언 그레이와 헨리 경을 통해선  쾌락주의 유미를 일갈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가 자신이 그토록 되고 싶어 하던 존재이며, 헨리 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고, 화가 바질 홀워드는 실제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했다고 한다.304 


 에피쿠로스 학파의 정신적인 자유의 쾌락 보다는 젊음을 온전히 향유하는 감각적 쾌락을 찬미하는 헨리 경의 말들엔 이건 아니다라고 완벽히 반박할수 없는 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선과 악을 다루는 뻔한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시각과 감각적 쾌락에 대한 피상적 욕망을 솔직히 고민해 볼 수 있게 된다. 결국. 마무리는 어쩌면 교훈적 반전으로 끝나긴 해도, 헨리 경의 이론과. 그것에 동조되는 도리언 그레이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은 반추하게 된다. 누구나 젊어지고 싶은 욕망에 대해. 지나가 버린 젊음의 특권적 쾌락을 향수하며,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겉모습만을 중시하는 세태에 대한 냉소와 모호한 욕망은 오스카 와일드가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도덕성의 경계를 넘어서 예술이 무엇인지 한 발짝 더 나아간 느낌이다. 



뭔가 기묘한 표정의 저 얼굴. 80년대 영국의 명 밴드 스미스의 보컬이자 가사가 시 예술인. 모리세이가 그토록 추앙하는 오스카 와일드.  파리에 간다면. 같은 공동 묘지에 묻혀 있는 짐 모리슨 묘비와 함께. 꼭 들려보리라. 2년 동안 감옥에서 중노동을 하고 썼다는 옥중기는 또 어떤 생각을 보여줄지..심히 기대된다. 


 발췌할 양이 많아 나중에.. 대신 커트 코베인의 초상으로 마무리. 







 







 이 책을 통해 오스카 와일드를 처음 접해 보았다. 훌륭했다. 동화 였는데,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오스카 와일드의 대표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을 생각에 매우 설레인다. 이 단편집을 통해 그의 유미주의.탐미주의에 숨은 냉소의 유머,위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뭔가 교훈적으로 흘러가다가도 뒤통수 치는 반전이 흥미롭고, 여운이 남는다. 이 사람 자체가 시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비운의 삶을 살았는데, 그런 삶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아름다움을 통해 각박한 현실에 쓰고 달콤한 심상을 마련해 준다. 


 자연의 대상에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그의 문장들은 종종 한편의 아름다운 시의 구절 같다.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작은 미물에도 생명성을 부여하고 아름다움을 찾는 듯 하다. 자기의 삶은 고되었지만 그의 심성과 아름다운 시선은 독자들을 전염시킨다. 


 


 근래에 여기저기서 반값 할인 도서를 많이 사들였다. 그 시발은 11번가 도서 할인 행사 였는데, 할인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들이 수두룩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담다보니 36만원어치, 주문했다가, 곧 취소하고 엄선해서 10만원어치만 골라 담았다. 구입한 책은 바로 안 읽는것임에도 선별한 책들은 소장하거나 선물을 해도 좋은 것들이었다. 이 책 '나의 사랑, 백남준'은 용산의 대형 서점에서 반 값 할인코너에서 구입했다. 책을 고를때, 꽤 기뻐했었다. 사람과의 만남뿐이겠는가. 우연한 책과의 만남도 큰 행복이다. 더욱이 신간이 아닌 이런 구석진 특가 코너 같은데서의 만남은. 


 88올림픽을 기억하는 우리 세대에선 백남준은 너무나 유명한 예술가이다. 요즘 학생들은 그를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던데, 아마 예술을 공부하지 않는, 일반 젊은 대중들은 그런듯하다. 어쨌거나 그는 뉴욕과 유럽을 거점으로 예술 활동을 한 인물이고, 플럭서스 운동의 일원이자,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이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 인지는 이젠 개인의 판단의 몫이다. 우리 세대에선 미디어에서 과도하게 한국인으로써 세계적인 거장 하며, 대대적으로 그 위상?을 알렸다. 사실 태생만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호돌갑을 떤 감이 많은것 같다. 서구의 문화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어떤 열등감의 심한 발로 처럼 느껴진다. 문화 사대주의. 식민주의 와 속물근성까지 복잡하게 어우러져 박세리나, 김연아 등등에 너무 과도한 영웅을 부과하는게 아닌가. 국가의 척도가 문화의 다양성과 깊이에 있다면, 그런게 만무하니, 아주 간혹 몇몇 영웅들이 그렇게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리면, 그렇게 성화를 하는지도. 그들이 한국인으로써 자랑스럽다.? 국가 이미지가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올라가나 ? 어불성설이다. 싸이가 한국인이래서 자랑스럽나.? 모르겠다. 분명 국가 이미지는 그렇게 해서 올라가는게 아닐 것이다. 몇몇 유명인의 국적이 뭐 그리 대단한지...한국의 기상이 어쩌고 저쩌고...


 백남준은 현대 예술이 뭔지도 모르는 사라들에게 무작정,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라며 꽤나  조지 오웰이 염려한대로 알려졌다. 어릴적, TV에서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어렴풋 보았다. 열과 성을 다해 80년대의 굵직한 스포츠 행사를 발판으로 서양의 문화들이 들어오며, 백남준도 그렇게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다. 그는 마치 한국산 쇠고기 패티로 만든 맥도날드 햄버거 같은 꼴이었다. 뭣도 모르고 우리는 자랑스런 백남준을 얻게 되었다. 


 이 책은 그의 부인인 구보타 시게코 씨의 입으로 백남준의 삶과,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 해준다. 한국인 공동 저자를 통해서 인지, 문체가 매우 자연스럽고, 내용도 흥미로워 단숨에 읽힌다. 미디어에 의해 거대하게 부풀려진 위대한 예술가의 삶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백남준은 참 축복받은 인간이었다. 다른게 아니라, 너무나 부인을 잘 만났다. 처음 만남 부터 죽고 나서도, 그녀의 헌신적이고 한결같은 사랑은 이런 생각을 들게 했다. 한 여자에게 평생 이런 사랑을 받을 남자라면, 그는 정말 훌륭한 삶을 산 예술가 이다. 그녀 자신도 유명한 예술가여서, 당시 플럭서스 운동의 내막 같을걸 사심없이 들을수 있었다. 마키우나스와 소호 이야기도 재미있고, 백남준의 뇌졸증 투병중에, 아들같이 헌신적인 교류를 했던 이에게 싹 다 털린 이야기 등등등.. 미디어에 과대하게 부풀려진 한 예술가의 진짜 삶의 면면을 들려다 볼 수 있었다. 갑부집 도련님이었지만, 예술을 하면서 되게 가난하게 생활을 유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선택받은 자의 예술놀음 같은, 그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게 되었다. 


 용인에 백남준 아트센터가 있다던데, 조만간 거기나 가봐야겠다. 아무튼 대단한 예술가임에는 틀림없다. 

 역사는 치욕을 기록하지 않는다. 나라나 개개인이나..반쪽의 진실을 안고 살아간다. 온전한 삶과 역사는 그것을 인정하고 긍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는 그런 인과를 만들지 않겠노라고. 이상을 가지되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 김훈의 남한산성과 칼의노래를  속독하고..


 위 글은 책 카테고리를 시작하면서 쓴 첫 글 이었다. 김훈의 대표적인 역사소설 두권으로 김훈의 글을 읽기 시작 했다. 그 땐, 글이 잘 적응이  안 되었었다. 그래서 속독으로 읽었었는데, 그 후 그의 산문 모음집인 '밥벌이의 지겨움' 이나 ' 바다의 기별' 을 읽으면서 글. 그러니까 문장 하나하나의 엄정한 힘을 느꼈다. 

 특히나 '바다의 기별' 은 절판된 책이 싼값에 살 기회가 있길래 선물용으로 여러권 구입했다. 다시 정독하면서 글이 가진 힘을 여실히 느낄수 있었다. 그의 글에서 현재의 나의 문제. 고민의 조우가 절묘하게 타이밍이 맞았다고 할까. 아무튼 김훈의 글에서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그처럼 멋있게 늙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로 개정판이 나온 칼의 노래를 구입했다. 예전 책은 화가 오치균의 그림이 표지 였는데, 붉은색 표지로 바뀌었다. 이 책은 소설이지만 이순신의 난중일기의 감정이 배제된 사실에 입각한 엄정한 문장과 맞닿아있다. 행위의 사실에만 철저한 글이지만, 글 이란 것은 아무리 사실만 기록한다 해도 그 사람의 정서적 심미가 드러난다. 역사가 인정한 위대한 무인의 숭고한 내면을 그려내었다. 절박한 글의 힘이다. 절망의 시대에 이순신이 가진 내면의 엄정함은 현재의 우리에게 귀감이 되어준다. 수난의 풍경 속에서 또다시 꽃이 피고 살아가게 되는 그런 삶의 질박함을, 봄빛의 서늘한 바람같이 그려낸다. 

 

 울어지지 않는 울음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불덩어리가 내 몸 깊은 곳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물러설 자리 없는 자의 편안함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_ 책 속의 문장중.


 칼의 노래는 김훈을 대표하는 책이지만, 나는 그의 2004년 이상문학상 대상작인 단편 소설 '화장' 을 추천한다. 최고의 소설인것 같다. 



  마크 트웨인 이란 미국작가. 어릴적 만화영화나 어린이용 책으로 톰 소여의 모험을 접하고 최근에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고 있었다. 그런 와중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노작가의 죽기전 마지막 저술책. 70줄의 노인이 쓴 이 묵직한 의문에 절로 흥미와 감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노인은 독특한 관점과 사상을 말한다. 처음엔 파격적으로 느껴졌는데 어느새 노인의 주장에 어느정도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었다. 젊은이와 노인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 귀납적으로 자신의 논지를 설파한다. 주제가 무겁지만, 철학적으로 어렵거나 모호한게 아니라. 명확한 예시로 젊은이의(우리들의) 안이한 생각을 깨우치게 한다. 그가 인생을 살면서 깨달은 진실을 대담형식으로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한 책이다.


 1910년에 75세의 나이로 죽었으니까. 전근대의 시기를 살았고, 모더니즘과 세계대전의 직전의 인간의 암울함을 통찰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의 통찰은 지금의 우리 삶 조차 까지도..닿아있는것 같다. 인간은 기계와 같다는 그의 말은..  외부로부터의 힘(영향력), 교육과 훈련, 인간관계, 기질과 사고, 본능, 자기만족과 인정욕구, 충동(동기부여) 이라는 주제어로 설명되어진다.  

 이 책을 읽으며 곰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나와 우리들은 무엇이냐 말인가..좀 의아하지만 수긍이 되고, 끝까지 비관적이고 극단적이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니체의 주장과도 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꽤 흥미로운 관점의 책 이었다. 


 타고난 기질은 바꿀 수 없다.? 버지스와 애덤스의 예. 버지스는 언제나 활기차고 희망적이고 행복했지. 반면에 애덤스는 언제나 활기가 없으며 절망적이며 낙담을 했네. 젊은 동료로서 그 두 사람은 나라의 언론을 개혁하려고 했으나 실패했지. 버지스는 그런 실패를 마음에 둔 것 같지 않았네. 그러나 애덤스는 웃음을 잃게 되었지.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것에 대해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한탄하며서 만약 다르게 했었더라면 성공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부질없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괴롭혔네. 그들은 또 법을 개혁하려고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지. 버지스는 여전히 행복할 수 있었지. 왜냐하면 어쩔 수 없는 그의 기질 때문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애덤스는 참혹했네. 이것 역시 그 또한 어쩔 수가 없었지.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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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참 손이 안 가는 책이었다. 책 표지와 제목이 멋져 사다놓고는 이상하게 초반에 그의 글이 사변적이고 허세어려 보였다. 그 후로 두어번 시도해 보았지만, 타이밍이 안 좋았는지 차분히 글에 빠져들지 못했다. 그러다 몇달전에 읽게 되었는데. 뭐랄까. 아주 좋지도 아주 나쁘지도 않은. 보통다운 책이었다. 이 사람의 첫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너무 좋아서. 그 후의 책들은 고만고만하게 느껴진다. 적당한 통찰과 유머. 지식을 대중적으로 버무리는 기술, 예민함. 아무튼 발췌하고 스크랩하고 어딘가로 던져놔야겠다. 언젠가 여행을 앞두고 다시 읽으면 또다른 재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꿈을 꾸다 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집은 아니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정적 환경은 우리를 일상생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 계속 묶어두려 한다. 85


 콜리지는 워즈워스의 초기 시들을 돌아보면서, 그 시에 나타난 천재성을 이렇게 규정했다.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관습적인 무관심에서 벗어나 우리 앞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을 만났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맛보게 하는 것. 사실 우리 앞의 세계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보고 이지만,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 때문에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워즈워스에 따르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는 우리 내부의 선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냇물과 숲이 우거진 웅장한 골짜기를 굽어보면서 바위 가장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자연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도 의미심장하게 바꿀 수 있다. 207


 우리는 사막에 있지 않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우리 자신의 결함을 보고 스스로 작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 229


 욥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종교적이라고 해서 이 이야기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타당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장애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과 마주쳤을 때, 숭고한 풍경이 그 웅장함과 힘을 통해 우리가 원한을 품거나 탄식하지 않고 그 사건을 받아들이도록 상징적 역할을 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구약의 신이 알고 있었듯이, 물리적으로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의 요소들- 산,땅의 띠,사막-을 끌어들이는 것은 위축된 인간의 기운을 북돋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깍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우리를 부드럽게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한계에 부딪힐 때 불안과 분노를 느끼겠지만,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자연만이 아니다. 

 인간의 삶도 똑같이 압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꺠워주는 것은 아마 자연의 광대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드는 사건들, 필연적으로 우리를 먼지로 돌려보낼 그 크고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을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242~243


 사실 예술 단독으로 열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또 예술은 예술가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정서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단지 열광에 기여를 하고, 우리가 이전에는 모호하게만 또는 성급하게만 경험한 감정들을 좀 더 의식하도록 안내할 뿐이다. 288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 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292


 293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 존 러스킨의 데생법. 300~301   305  데생. 보는거, 사진 , 카메라의 생각들.. 참조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334


 귀중한 요소들은 현실보다는 예술과 기대속에서 더 쉽게 경험하게 된다.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들을 잘라내고, 우리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이렇게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미지 않아도 삶에 생동감과 일관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보푸라기로 가득한 현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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