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구글검색 


 잿빛 하늘이다. 하늘엔 11월의 비가 내리고, 겨울과 가을의 구분은 사라졌다. 회색 도시는 주말의 적막을 우중충한 비로 적셨다.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은 후, 이러한 생기없는 주말조차도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를 마음의 저 밑바닥에선 깨닫고 있었다. 


 사실 너무 좋은 책을 읽으면 그리 할 말이 없다. 머리로 생각하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스며들어 그것을 걷어올리기가 여간 수월치 않다. 쉽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의 감동은 자신의 근간을 이룰 것이다. 뭔가를 정말 좋아하면 그것의 개별적 구체성은 사라져 하나의 빛으로 폐부를 찌르듯 상흔이 생긴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기억에 담으려해도 도통 생각나지 않는 건, 빛과 공기 같이 모호한 추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한점의 바람속에서 미소를 느끼고, 존재의 의미와 생의 의지를 북돋는다. 


 이 책의 저자가 직접 경험한 유대인 학살 강제수용소에서의 삶은 인간의 존엄이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에서의 체념을 생의 의미로 승화시킨다. 감정적이고 드라마틱하지 않게, 그저 덤덤히 지난 시련을 객관적으로 기술한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 보다 더, 이런 글의 힘은 강하다. 쉰들러 리스트의 휴머니즘 보다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가 좀 더 여운이 남듯이, 실제 경험의 진술만으로도 충격 여파가 만만치 않다. 

 

 저자가 신경정신과 의사여서 이런 고통을 통해 객관성을 담보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건 아닌것 같다. 저자가 말했듯, 인간이 그런 환경에 처하면 짐승이나 성인의 본성으로 드러나듯이, 순간 선과 악의 선택이 내 앞에 도래했을때, 어떤 본성을 발휘하느냐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다. 자신의 똥오줌 위에서 삶을 포기하고, 한치의 희망도 없이 짐승처럼 혹사당하다 죽을 날만 남은 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말하는건 가혹하지만, 저자는 자기가 보고 겪은 참상을 통해, 자아의 본성, 인간의 존엄, 정신의 자유에 대해 깨닫는다. 우리가 직접 경험할수 없는 극한의 시련속에서 피어 올린 성인의 말 들이다.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그후로 대다수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분석치료의 한 분파인 로고테라피(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창시하고, 허무한 삶에 고통받는 현대인들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책의 후반부는 로고테라피의 핵심을 약식 기술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그러니까 내 삶의 의미를 견고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됐고, 끊임없이 이런 질문과, 행동을 통해 삶에 내포된 고독과 허무를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허무한 영혼들을 위한 강력한 치료제이다. 



 "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_ 니체.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49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용소 안에서 행해지는 예술 행위는 어떤 종류의 예술 행위든 어느 정도 기괴한 측면을 띠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예술과 관련된 행위에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는 것은 음울한 현실과 예술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85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87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120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122


 도처에서 인간은 운명과, 그리고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나게 된다. 123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129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132


 "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 스피노자<윤리학> 133


 미래 - 그 자신의 미래 -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133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 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 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139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40


 행동을 통해 즉각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대개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인 법이다. 143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존재방식인지도 모른다. 147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161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기보다는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174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176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도이라고 생각하라." 182


 화가는 자기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안과 의사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해주려고 노력한다. 로고테라피 치료사의 역할은 환자의 시야를 넓히고 확장하는 일이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취해야 할 의미일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183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의미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이런 잠재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85


시련은 그것의 의미 - 희생의 의미 같은 - 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할 수 있다. 187


본질적으로 일회적인 이런 잠재 가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실현시키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수많은 현재의 가능성 중에서 끊임없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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