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서야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처음으로 집어든 것이 이 책이다. 도서관의 장기 휴관으로 한 보따리의 책들이 몇달간 방에 있었는데 반납이 코앞에 들이닥쳐 재빨리 읽게 된 책이다. 그래서 이 글도 맛뵈기 정도이고, 그의 다른 대표작을 섭렵하고 다시 읽어보려 한다. 왜냐면 그의 작품세계의 시발점, 열쇠가 되는 작품이란다. 대문호라 칭해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이렇게 시간에 쫒겨 얼렁뚱당 읽어댔지만 이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졌으니 어쨌거나 좋은 효과다. 


 왠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되게 고루하게 느껴지고 지레 부담을 느끼게 마련인 것은 나만 그런 것인가? 우연하게 이 책을 접하고 소설 문학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그들의 문턱에 다다러 이제 문을 열어 보고자 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예전에 강신주 철학박사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접하는 것은 시절인연이 중요하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 자칫 너무 어린 나이에 접하면 안 좋을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이제야 대문호라 일컬어지는 그의 소설을 읽을 정신의 근기가 되었나?.


 원래는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인상깊게 읽고 거기서 소개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어봐야지 머리에 저장해 두었다가,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고 그 책인지 착각하고 빌리게 된 것이었다. 


 여하튼 이 책의 첫장 첫 문장을 읽는데, 어라! 되게 현대적인 것이었다. 마흔의 남자가 되는 대로 지껄이는 문체인데, 이 사람의 20년째 찌질한 루저의 삶을 살고 있는 넑두리를 듣게 된다. 그의 과잉된 푸념은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다가도 조장된 분열을 일으킨다. 문체는 속도감이 있지만 간혹 1인칭 관념의 시점이라 철학적 고민도 있고 어떤 부분은 병적인 자의식의 과잉으로 버거운 부분도 있다. _그는 살아 있는 삶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채 오직 이념(관념)만, 즉 '말'만으로 존재한다._역자 해설 부분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세계에서 전환점이 된 소설이며 최초의 실존주의 소설이라 일컬어진다. _ 책 뒷 표 지

 


1부 마지막 챕터 부분에서


" - 당신이 정말로 고통 받았던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자신의 고통을 조금도 존경하지 않소. 당신의 내면에 진실은 있지만, 그 내면에 순결함은 없소. 당신은 아주 시시껄렁한 허영에 사로잡힌 나머지 괜히 과시하기 위해 당신의 진실을 시장바닥에 내놓고 치욕을 자처하는 거요...... 당신은 정말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서도 겁을 집어먹은 까닭에 최후의 한마디를 감추는데, 이는 당신이 그걸 입 밖에 낼 결단력은 없고 오직 겁을 집어먹은 채 시건방지게 굴 줄만 알기 때문이오. 당신은 그놈의 의식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지만 실은 그저 망설이고 있을 뿐인데, 이는 당신의 머리는 작동하고 있으되 당신의 마음은 방탕으로 인해 어둠침침해졌기 때문이오. 깨끗한 마음이 없으면 완전하고 올바른 의식도 없는 법이라오. 당신은 또 남한테 어찌나 끈덕지게 달라붙는지, 또 남을 어찌나 귀찮게 하는지, 또 어찌나 오만상을 찌푸리는지! 허위, 허위, 허위올시다! "

 물론 여러분의 이 모든 말은 지금 나 자신이 지어낸 것이다. 이것도 역시 지하의 산물이다. 나는 거기서 사십 년 동안 계속 여러분의 이런 말을 문틈으로 엿들어 왔다. 이것도 다 나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이지만, 실상 오직 이런 것만 생각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딱히 놀랄 것도 없지, 달달 외울 정도가 되다 보니 자연스레 문학적 형식을 띠게 된걸....... 



2부 소설의 결말


 이 '수기'는 여기서 끝내야 되지 않을까? 내 생각으론 이런 걸 쓰기 시작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적어도 나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부끄러웠다. 다시 말해, 이것은 문학이 아니라 교도 감화를 위한 징벌이다. 사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령 내가 지하의 구석방에서 정신적인 부패에 시달리고 환경의 결핍을 맛보며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유리되어 허영심 가득한 분노나 키우고 그럼으로써 정작 삶을 놓쳐 버린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것은 맹세코 재미없는 일이다. 소설에는 주인공이 필요한 법인데, 여기서는 일부러 반 주인공에게나 걸맞은 특성만 몽땅 모아 놓았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불쾌한 느낌을 준다는 점인, 이는 우리 모두 삶으로부터 유리된 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너나할 것 없이 다 절뚝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나 많이 유리되었는지 진짜 '살아 있는 삶'에 대해서는 때때로 어떤 혐오감마저 느끼고, 또 이 때문에 누가 우리에게 이걸 상기시키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다. 실상 우리는 '살아 있는 삶'을 노동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거의 업무로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다들 속으론 책에 따라 사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는 쪽에 동의한다. 왜 우리는 이따금씩 옥신각신하는 걸까, 왜 변덕을 부리는 걸까, 대체 왜 뭘 요구하는 걸까? 우리 자신도 왜인지는 모른다. 어떻든 우리의 변덕스러운 요구를 들어준다면 우리는 오히려 더 나빠질 것이다. 자, 시험 삼아 우리에게 가령 자립성을 좀 더 많이 주고, 우리 중 아무나의 손을 풀어 활동 범위를 좀 더 넓혀 주고, 보호의 강도를 좀 더 낮춰보라,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말하지만, 당장에 우리를 다시 원래대로 보호해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자, 여러분은 나한테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면서 두 발을 쾅쾅 구를 것이다. 나도 잘 안다. "당신 자신의 얘기만, 당신의 비참한 지하 생활 얘기만 할 것이지, 감히 우리 모두라고 둘러대진 말라." 라면서. 죄송하지만, 여러분, 이 모두란 말로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 자신으로 말 할 것 같으면, 나는 실상 여러분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에서 극단까지 밀고 나갔을 뿐인데, 여러분은 자신의 비겁함을 분별이라 생각하고 이로써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생기로운' 셈이다. 그럼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보라! 실상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한다. 지금 대체 어디에 살아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또 그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를 단 한 권의 책도 없이 홀로 남겨 둬 보라, 그럼 우리는 당장에 갈팡질팡하고 어리둥절해질 것이며, 어디에 합류해야 하고 무엇에 따라야 할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할지, 무엇을 존경해야 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할지 통 모를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조차, 자신만의 진짜 육체와 피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한다. 이것이 너무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나머지, 지금까지는 존재한 적도 없는 무슨 보편 인간이 되려고 안달복달한다. 우리는 사산아, 더욱이 이미 오래전부터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아버지에게서 태어나는 존재이며, 또 이것이 우리는 점점 더 마음에 든다. 취향에 맞는 모양이다. 조만간 우리는 어떻게든 관념으로부터 태어날 궁리를 할 것이다. 하지만 됐다. 더 이상 '지하에서' 이렇게 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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