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Pavement 페이브먼트의 데뷔 앨범이 나왔을땐. 이미 소위 얼터너티브 록 이란 장르가 주류를 장악하고 있었다. 너바나와 펄잼..의 양대산맥이 왕좌를 차지하고 저 한참 밑에..마타도어란 인디 레이블 소속의 페이브먼트는 인디씬의 전설이 되가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엔. 로 파이.(HI-Fi 의 반대 Lo-Fi 저음질 의미) 의 대표기수로써.인디 레이블인 만큼 상업성이 배제된. 자기들만의 음악 색깔과 자유로움이 그들의 강점이었다. 그들의 매력은 물론 거의 모든 곡을 쓰는 보컬겸 기타리스트 스티븐 말크머스의 천재성에 기인한다.


 1999년. 페이브먼트가 총 5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내고 해체할때는 이미 인디씬의 전설, 황제로 불리어지고 있었다. 처음의 로 파이에 벗어나. 5집을 만들때는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를 맞이해 최고의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그들이었지만..여전히..그들은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 안 하고. 처음의 그 마타도어 레이블(인디음반사)과 함께한다. 덕분에 왠만큼 록 음악을 좋아하지 않고서는 페이브먼트란 전설적인 밴드를 사람들은 모르지만. 이들의 팬 입장에선..음악적 자유로운 태도와 록음악의 순수성과 함께. 천재성을 여실히 느낄수 있다. 

 밴드가 해체한 후. 곧 스티븐 말크머스의 솔로 1집이 2001년에 나왔다. 밴드가 해체한 이유는. 멤버들 각자가 결혼도 하고 그러면서..각기 다른 도시에 살게 되면서 모이기 힘들어서 였다고 한다. 물론 다른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사이 안 좋게 깨진건 아닌 것 같다. 

 스티븐 은 포틀랜드에 정착하고 직스 라는 로컬 밴드와 함께. 자신의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펼친다.거의 10여년간. 이 사람의 천재성은 여전했고. 끊임없이 좋은 음반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작년인가 페이브먼트가 다시 재결성해 공연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올해 록 페스티발 까지..페이브먼트 재결성을 유지한다면..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2002년에 스티븐 말크머스는 레이블 사장과 동료 뮤지션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대학로 극장에서 공연을 했고. 한국 문화를 제대로 체험하고 갔다고 한다. 개고기를 먹고..노래방을 경험하고..다양한 LP를 수집했다고 한다. 당시 공연 영상을 보면. 국내의 페이브먼트 카피 밴드가 반주를 하고. 자신의 솔로 곡은 MR을 틀고 했다고 하던데. 어쨌든 반주를 맡은 그 밴드는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음악적 우상의 곡을 그를 위해 무대에 같이 섰다는 그 환희.. 아래 영상 감상..

 혹자는 그들의 라이브 공연 모습을 보고..왜이리 성의 없이 노래를 못 부르냐고 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스티븐이 만들어내는. 곡의 기타 코드와 진행. 멜로디 감각은..가히 최상이다. 간혹 불협화음속..허를 찌르는듯. 공식에서 벗어난 그의 자유로운 영혼은 꽉 짜여진 음악과는 한참 다르다. 그냥 술렁술렁..부르는 데도..이상한 매력에 귀가 춤을 춘다. 그는 소닉 유스의 불협화음 과는. 다른 대중적인 코드가 있다. 스티븐의 보컬 또한..되게 편안하다. 저렇게 편하게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도 없을 것이다. 음색 자체가..일단 매력적이기 때문에..또 곡 자체를 워낙 잘 쓰기 때문에..대충 불러도,,끌림이 강하다. 대충 부르는 그 매력이 장난 아니다. 

 90년대 뮤지션들 중엔 많은 천재들과 재능있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이 스티븐 말크머스를 최고로 친다. 꾸준히 음악생활을 하는 그가 고맙기조차 하다.
 조금은 잘 생긴 전형적인 미국인의 모습은. 어릴때 AFKN에서 보던..가이딩 라이트의 배우 같아 보이기도 한다. 미국 백인의 표상 같아 보이는 외모와 스타일은. 소박해 보인다. 이 사람이 쓰는 기타와 기타의 톤은 나의 로망이다. 


  위 사진은 구글에서 퍼온건데..참 잘 찍었고 멋지다..저 기타와 음악에 몰두하는 모습..어찌 뿅 가지 않을수 있으랴.. 1966년생인 그도 이제 중년의 아저씨다. 키가 크고 말라서 아직도 외모가 쉬크해 보이지만. 최근의 페이브먼트의 재결성 공연을 보아하니..참 세월은 어쩔수 없다. 역설적으로..92년 그들의 초창기 시절..레딩 페스티발에서의 공연을 보자. 이 무대의 헤드라이너는 너바나 였다. 이 영상의 두번째 곡은 언젠가 차안에서 듣다가.눈물이 나왔던 곡이다. 그 단순한 후렴구..허밍에서..


 아래 사진은 마크 제이콥스 광고에서의 스티븐 말크머스 모습이다..이 시리즈 광고는 유겐 텔러 라는 작가가 찍었다. 유겐 텔러의 작품집에서 보았는데.. 이 사진이 가장 좋았다. 순간..찢고 싶은 욕망이 불쑥..ㅠ
 이 사람의 음악 세계에 대한 동경은 평생 지속될 듯 싶다. 이 사람 처럼 기타치고 곡을 만들어 보는게 소원이다.


 영국에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가 있었다면.. 미국LA엔. 비치 보이스와. 도어스 가 있었다. 천재들의 시대. 전쟁 이후..모던 에서 포스트 모던으로 옮겨가는 그 과도기에 서구 사회는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비트 세대 이후. 문화, 경제적 충족은. 젊은이들의 문화를 확장시켰으며,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억압에 반기를 들었다. 마약에 의한 환각 경험은. 의식의 해방을 추구했으며. 이것은 틀을 벗어나. 감각의 확장과 도취를 통한 자유에의 갈망을 이상화 했다. 그에 맞물려 이념전쟁의 명분없는 베트남 전쟁은 젊은이들의 의식 혁명에 부채질 하는 꼴이었다. 기성 세대의 모든 패악질에 맞서. 젊은이들은 사랑과 자유. 평화를 주창했다. 본격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독주에 젊은이들은 나름 마지막 정신적 순수성을 가지고. 브레이크를 건다. 지금 서구 사회가 어찌 되었건. 그들의 이런 경험은. 역사속에서 보이지 않은 공기 같이 작용한다. 

 청년 문화의 열기와 파급은. 사회의 지축을 흔들어 놓는다. 열정을 넘어. 광기로 까지의 극단은 문화 예술의 판을 넓혀 놓는다. 그 극단의 청년 문화의 중심엔 더 도어스의 리드 보컬. 짐 모리슨 이 있었다. 시인 이자 가수인. 그는 해군 제독인 아버지를 둔, 아마도 엄격한 가정에서 자란. UCLA 영화 학도 였다. 랭보와 오스카 와일드를 흠모하며. 시를 쓰고 영화를 습작하던 그에게 레이 만자렉.(키보디스트) 의 만남은. 위대한 싸이키델릭 밴드 도어스를 탄생하게 했다. 


 첫 무대에서 수줍어 하며. 관객에게 등을 돌리던 그가. 당시 시대정신과 맞물려.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면서. 무대에서의 그는 자유 영혼의 교주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그는 거침없이 활활 타올랐고. 어느 순간 그 열기는 급격히 소멸했다. 자신의 영혼을 짧은 기간동안 불살라 버린 그는 1971년 파리의 집. 욕조속에서 조용히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술과 마약의 힘?을 통해 억압에 그토록 저항했던. 그의 삶은 광기어린 청년 문화의 원형질로써 후대에 위대한 음악과 노스탤지어를 선사한다.

 이 영화는 도어스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밴드의 상징적 아이콘 짐 모리슨이 중심이지만. 다른 멤버들의 비중도. 심심하지 않다. 도어스의 음악이야. 짐 모리슨의 가사와 무대에서의 퍼포먼스가 우선 시선을 잡아 끌지만. 다른 멤버들이 만들어 내는 반주가..이 밴드의 독창성과. 환각적 몰입성에 크게 일조한다.
 드러머 존 덴스모어의 째즈 드러머 같은. 열린 비트와 함께. 기타리스트 로비 크리거의 동양적 신비주의적 텃치. 그리고. 키보디스트 레이 만자렉의..몽환적 오르간은 환각에 의한 경험과. 환각을 위한 경험으로써의 싸이키델릭 음악을 창조했다. 마약에 도취된 시대정신의 산물인 도어스의 음악은. 이국적인 느낌과 함께. 뛰어난 예술성을 들려준다. 째즈와 블루스를 기본으로. 제 3세계 음악의 수용과, LA의 혼재된 문화의 접근은. 경계 없는 음악의 자유로움을 드러내 준다. 특히나 짐 모리슨의 시적인 가사와 함께. 대중 음악을 넘어서 예술로 불려져도도 손색 없다.

 해군 제독인 짐의 아버지가 베트남을 무차별 폭격할때. 짐 모리슨은. 가족의 연을 끊고 청년들의 의식에 급진적으로 파고 들었다. 이 영화가 좋았던 점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짐 모리슨의 내면 상황들을. 비교적 잘 접목해 보여 주기 때문이다. 1991년 올리버 스톤의 도어스 가, 비록 좋은 영화 였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주관이 많이 연출되어 욕을 먹은 반면. 이 영화는. 실제 영상을 가지고. 짐 모리슨을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향수를 느끼게 한다. 한 뛰어난 예술가의 내면을 심도있게 파악하기에는 어떠한 매체라도. 탐탁치 않겠지만. 당시 영상속.. 짐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관객이 받는 감정의 수용은 다양할 것이다. 

 톰 디칠로 감독은 이 영상을 이용해. 단지 사실적 다큐 영상만을 가진 편집을 넘어서. 짐 모리슨의 내면의 불가사의함을 드러내 보인다. 시인의 고독과 열정은. 조니 뎁의 차분한 나레이션을 통해서 전달된다.
 짐 모리슨의 연인 팸 파멜라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짐 모리슨이 27에 죽은뒤 그녀도 짐을 따라 오래지 않아 죽었다. 그녀와의 사랑 이야기 같은게 별로 없어 아쉽지만. 이 다큐 영화는 오직 짐 모리슨을 위한 것이 아닌. 위대한 그룹 도어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밴드의 음악과 역사에 관해서 더욱 치중한다. 
 한 시대를 호홉하고. 열정적으로 발산했던. 천재적 뮤지션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향수 어린 아련한 심정을 만든다. 예전에 도어스의 음악을 들으며..위로하며 도취했던. 청춘의 방황 같은게 스멀스멀 다시 떠올랐다. 한 때 나도 시인이 되고 싶은 열정이 떠올랐다. 생일도 나랑 하 루 차이인. 사수자리의 짐 모리슨. 수줍었던 그가 발산하는 광기어린 리비도에 나는 대리만족을 느낀 듯 싶다. 내 억업은 어떻게 발산할까..우리 자신들의 억압들은 말이다. 


 도어스의 대표곡 하면. Light my fire 를 소개하겠지만. 이 노래도 들어보시기 바란다.


오늘같은 밤. 해는 너무 일찍 져. 밤은 하염없이 길고. 한파는 물러설 기미가 안 보이는. 겨울밤. 나즈막히 울리는 음악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한다. 이런 힘을 가진 음악은 흔치 않다. 대표적으로 조니 미첼의 블루 음반이 그렇다.
 숙연과 성찰의 감정. 굳이 가사 내용을 모르더라도. 그녀의 목소리와. 음악은. 감상자의 내면을 위로하는 힘이 있다. 

 영어에서 블루는 알다시피. 우울과 고독을 상징한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포크 음반이지만, 한없는 우울이 아니라. 우울의 끝에서 도약하는 희망과 용기가 느껴진다고 할까.

 포티쉬헤드의 싱어, 베쓰 깁슨 은 너무 처절한 우울이래서..듣기 무섭지만. 이 음반은. 아주 기분좋은 블루다. 듣자하니. 조니 미첼이. 남자 친구와 헤어진 뒤. 유럽 여행을 하면서 대부분의 곡을 썻다고 한다. 청초한 실연의 아픔이 젊음의 싱그러움 과 함께. 감상자에게 묘한 울림을 가져다 준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 에서. 조니 미첼의 음반이 나오는데. 남편의 바람을 눈치챈 부인이 그녀의 노래를 듣다가 우는 장면과. 남편이 그녀의 씨디를 선물하는.. 아마 이때. 조니 미첼에 관심이 많이 갔었지만. 나중에서야 듣게 되었다. 이 블루 음반은. 그녀의 대표작이자.. 여성 가수의 앨범으로 최고라 불리어지는 고전이다.  



 가슴을 시리게 하는 시원시원한 매력.. 겨울밤에 듣기 딱 좋은 음반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WM3vKiaKe_w&feature=related

사람들에겐. 베스트 브릿팝 음반인 The Verve 의 Urban Hymns 과 . 노래 Bitter Sweet Symphony 로 리챠드 애쉬크로프트 를 기억하겠지만. 그는 밴드가 해체된 후 꾸준한 솔로 활동으로 벌써 4개의 솔로 앨범을 낸. 이젠 중견 가수이다. 그 와중에 더 버브를 재결성에 버브의 네번째 음반을 만들기도 했지만. 리챠드의 솔로 네번째 음반을. RPA(리챠드 풀네임 약어)와 사운드의 국제 연합이란.( RPA & The United Nations of Sound ) 밴드의 타이틀로 새 앨범을 발표했다. 결국. 버브의 재결성은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난것 같다. 그래도. 다시 십년전. 전성기 때를 재현한 각종. 록 페스티발의 성대한 공연은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전성기 때, 리챠드 애쉬크로프트의 보컬은 명실상부 영국내 최고의 보컬로 손꼽혔다. 풍부한 저음의
  음색에. 삶의 고뇌와 우수가 아릿한 비음에 실려나왔다. 훌륭한 멜로디와 치명적인 매력의 보이스는 사람들의 감성에 녹아들기에 충분했다. 또한 엄청난 카리스마를 풍기는 그의 외모는. 록스타의 이상형 이었다. 이젠. 나이가 들어. 음색이 더욱 걸걸해지고 갈라지지만. 나름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진화하는 음악 세계를 보다보면..점점 더 삶을 긍정하고. 희망찬 기운을 내 뿜는 그의 음악이 감상자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그가 만든 음악을 듣다보면. 내 마음 깊숙한 곳에 흐르는 감성의 코드와 그의 음악이 동일시 되는 그런 체험을 한다. 고독하고 외로운 도시인의 삶을 위로한다. 예전 노래에 비해서 요즘 발표한 노래들은. 많이 기운차고 밝아진것 같다. 약에 취한듯 싸이키델릭한 음악에서 벗어나. 이젠. 소울,리듬앤블루스 와 웅장한 팝 까지 가미한 음악을 들려준다.
 
 행복한 가정을 둔 그에게도 한 때. 미친 리챠드라고 불리던. 까칠한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삶이 안정된 만큼 긍정성이 많이 느껴진다. 그가 어렸을때. 친부가 죽고..양부가 장미십자회 회원이래서. 특수한 명상법을 했다고 한다. 그런 정신 훈련을 하면서. 작곡의 재능을 깨우치고. 버브 초창기 부터 범상한 음악을 들려줬다. 첫 음반인 Verve EP 를 들어보면. 완벽한 아트록 음반으로써. 그의 보컬은 신령이 깃든듯하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소수의 아트록 매니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지향적인 것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본래 뛰어난 멜로디 감각을 소유한 록스타 였고. 이젠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이다. 

 몇년전 라이브 8 공연에서 콜드플레이 의 보컬 크리스 마틴은. 지구상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로 극찬하며. 관객에게 소개했다. 그들이 함께 연주한 비러스윗 심포니는. 선후배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국내에선. 이상은 씨가 이 사람의 왕팬으로 유명하다. 자기만의 확실한 음악 세계를 가진 뮤지션이 동시대 다른 뮤지션에게 매체를 통해 이렇게 극찬하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또 김C도..마찬가지로 리챠드의 팬이다. 

 최근에 연주한. 97년도.버브의 Urban Hymns 음반 두번째 곡인. 나는 비러스윗 심포니 보다 이 노래가 더 좋다.


 리챠드 솔로 3집의 곡. 자조적인 우울한 느낌이 일품이다.




 2001년에 조용한 비틀즈 조지 해리슨이 조금은 이른 나이에 병마로 죽고, 절친한 친구 에릭 클랩튼의 감독하에. 추모 공연이 펼쳐졌다. 이 공연은 대단한 감동을 자아낸다. 일단 조지가 쓴 비틀즈 최고의 곡이라 손꼽히는 Something 과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은 물론이고. 비틀즈 당시 존 과 폴에 억눌린 그의 작곡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금 느껴볼수 있는 공연이었다. 정말 젊은 조지 와 똑같이 생긴 그의 아들과. 절친인 에릭 클랩튼이 상주가 되어. 고인의 명복을 비는. 아주 따듯한. 뮤지션들의 장이었다. 물론. 나머지 비틀즈 멤버인.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도. 참여한다.

 분명 대중들에게 비틀즈란.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로 대표되는 이미지로 남는다. 비틀즈의 리드 기타리스트 였던 그는 그들의 작곡재능에 밀려. 많은 곡을 비틀즈 음반에 담지 못했지만. 정말. 팝음악 역사상 최고의 곡을 작곡했다. 비틀즈 시절. 이런 재능을 가슴에 품고. 존 과 폴에..무시 당하며, 얼마나 속상해 했을지.. 실제로. 조용하고 겸손한 성격의 그는 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인도의 종교 사상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비틀즈 멤버로써의 스트레스로 인해. 술,마약.여성편력이 심했지만. 60년대 중반. 종교에 빠지고 나서는. 평생. 종교적 가르침 속에서..살아갔다. 그가 만든 모든 음악의 메시지가..종교음악 일 정도로. 그는 영적 전도사 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비틀즈 곡중의 하나인.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은, 다른 멤버들의 무시가 조지의 설움을 얼마나 자아내게 했는지.. 이 곡을 녹음할때. 폴과 존은 자신들의 곡을 정리하느라고 신경도 안쓰고. 조지 혼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이렇게 멋진 곡을 써왔는데. 다른 멤버들은 전혀 신경도 안쓰고. 무시당하는 기분..얼마나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을까. 그러다가.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 이자 친구인 에릭 클랩튼과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드라이브 갔다가. 너가 기타 녹음좀 해줬으면 좋겠다 하며. 비틀즈 녹음 세션에 초대하니... 에릭이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 나타나자 그때서야 나머지 멤버들이. 이 곡의 녹음에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절친 에릭은. 친구 조지의 마음을 헤야렸는지. 이 노래속의 에릭 클랩튼 의 기타연주는. 정말 기타가 절절히 운다.

 특히 이 추모 라이브에선. 에릭 클랩튼의 완숙한 보컬 실력과. 블루스 필이 충만한 감성과 함께. 음반에서보다 더 절정의 기타 솔로를 보여준다. 정말 눈물 나올뻔 했다. 내 기타가 조용히 흐느낄 때. 이 얼마나. 의미 심장한 제목인가. 이 공연의 백미 중의 백미였다. 

 또한 폴 매카트니와 썸띵을 부를때. 에릭 클랩튼의 열창은 의미심장했다. 조지가 작곡한 썸띵은. 그 당시 그의 부인 패티 보이드한테 바치는 곡이었다. 알다시피. 에릭 클랩튼은 친구의 부인(패티 보이드)를 뺏은 인물이다. 레일라 라는 노래를 통해서. 그들의 삼각관계는 노래만큼 아름답지 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노년이 된 그들의 모습에선. 삶의 새옹지마를 느끼게 한다. 특히 비틀즈 자료 영상을 보면. 비틀즈 후반기. 멤버들 끼리 결속력이 와해됐을때. 폴이 조지에게 기타좀 잘 치라고 좀 구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지는.폴의 말에 크게 반항하지 못하고. 소심하게 불편한 감정을 어필하는데. 참 가슴아픈 장면이었다. 폴은 나중에 앨범에 의욕이 앞서서..잘 해보려는게 상처를 주게 됐다고 해명했지만. 이러한. 조지의 상처는 무수히 유추해볼수 있다. 



형들 밑에서. 자신의 재능을 못 펼치던 그는 비틀즈가 해체하자 마자. 비틀즈 시절 써 놓았던 곡들 포함해서. 무려 LP3장 짜리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All Things Must Pass(1970) 비틀즈 멤버가 낸 솔로 앨범중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이었다. 그의 억눌렸던 음악 재능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그의 첫 솔로 음반은. 팝의 영원한 고전이 되었다. 
 그는 비틀즈 시절. 인도를 방문한 이래. 인도의 사상과 음악에 빠져. 서양 음악 사상, 첫 인도 악기인 시타를 도입했고. 제3세계 음악을 수용했다. 당시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와 함께. 인도의 전통 음악의 수용은, 종교적인 도취 내지. 이국적 환각에 빠져들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는 뉴에이지 음악의 선구자 였다. 이 추모 공연 처음에도. 그의 친구인 종교 수행자. 라비 샹카와 그의 딸이.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서양음악과의 협연을 보여준다.
 그는 평생 음악을 통해 자신이 깨달은 인도의 사상과 정신을 알리려고 노력한 인물이었다. 젊은 영국인이 인도의 문화에 푹 빠져. 인도인 보다 더 인도의 문화를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만큼 인도는 서구 문명이 무시못할 역사와 전통과 사상을 가지고 있으니까..한 나라의 문화란건 그만큼 중요한 것일진데..

 아무튼 그는 위대한 작곡가 이자. 영적인 존재였다. 이 공연을 보면서.. 삶이 그래도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 음악을 통한 소통. 참 의미심장하다. 에릭 클랩튼 과의 평생 우정도. 훈훈하다. 그의 절정의 연주와 노래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감동적 이었다.

http://www.youtube.com/watch?v=vNBEiyGwGRc&feature=player_embedded


 



 올해가 존 레논의 탄생 70주년이자..그의 사후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0~1980 12월 8일. 마흔살에 죽었다. 그래서 국내외로. 존 레논 추모 열기가 있는 모양이다. 12월 9일 에는 존레논 비긴즈 : 노웨어 보이 란 영화가 개봉한단다.. 사진작가 겸 미술가 샘 테일러 우드가 이 영화의 감독이다. 2009년작 이지만. 영화 수입사에서 30주년, 그의 기일 다음날에 맞춰서 개봉하나 보다.


  예술은 상처받은 영혼에서 비롯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이 0~6살 가량에 부모로부터 어떤 보살핌 속에 자랐는지가 한 사람의 자아. 내면의 지도를 완성한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크고 자잘한 내면의 상처를 입게 된다. 억압과 결핍의 구조에 의한 욕망단계. 혹은 결핍으로 인한 상실등, 자기도 모르게 평생 무의식속에서 억누르는 갖가지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내가 왜 이런 성격과 정서를 가지게 되었는지, 이성적 가치관을 넘어선 그 이면의 천성엔, 부모의 유전적 특질도 있겠지만, 유아기때 받은 어떤 사랑의 결과가..평생의 인성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 정신분석의 요지다. 정신분석 치료는 그것을 끄집어냄 으로써, 자기 자신이 왜 그런 자아가 형성되었는지, 왜 내면의 상처에 평생 허덕이는지, 원인을 밝혀 나가는 것이지만. 보통 치료 단계에서 치료자가 극심한 거부 반응으로 중단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인정하기 힘든 원인의 뿌리. 무의식에 쌓인 인과를 헤집다 보면. 그것을 극복하고 인정하게 된다고 한다. 

 사람의 천성은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정신분석 치료를 온전히 받았다고 해도. 바뀌는건 대략 5%내외일 꺼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기에게 용서와 화해를 통한 긍정성이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데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대하게 한다고 한다. 아마 그것이 중요점일 것이다. 긍정하는 마음. 다음날부터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해서..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는 용기를 가짐이. 중요하다고 본다. 

 내가 이렇게 정신분석에 대해 주절되는 이유는 근래에 읽은 소설가 김형경의 심리 치료 에세이 세권( 좋은이별.사람풍경.천개의 공감 )과 정신분석 소설 (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 을 통해서, 나름 내 자신이 정신분석의 맛을 살짝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20세기 가장 뛰어난 예술가의 내면의 상처를 여성 감독 특유의 정신분석적 예리함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나 같은 원래 존의 팬이야 다 아는 이야기이고..다분히 짐작되는 영화이지만. 그냥 한 10대 소년의 성장기로써 영화를 봐도..꽤 훌륭하다. 존을 중심으로 인물들간의 심리 묘사가 첫 장편 영화 감독 답지 않은 섬세함이 있다. 자매 사이인 미미(이모)와 줄리아(어머니) 의 미묘한 관계도 그렇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존, 폴 매카트니를 보는 줄리아의 시선에서 질투하는 존의 표정이나. 밴드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기 싸움등.. 존의 좌충우돌하는 다양한 심리 묘사를 읽을 수 있다. 처음 존 과 폴이 만났을때. 폴이 존 앞에서 기타치는(오디션) 모습과. 그 뒤 존의 첫 자작곡 '헬로 리틀 걸' 을 폴 앞에서 부르는 모습은..서로 선의의 경쟁자로써..질투와 시기의 자극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매진한 결과가..비틀즈를 있게끔하는 단초로 보여진다. 


 존 레논의 평생의 고통이 어렸을때 (5살) 겪은 부모로부터의 버림과..이모 (미미) 에 맡겨져 살면서, 어머니 (줄리아) 에 대한 뿌리깊은 그리움, 그리고 그녀의 비극적 죽음이 평생 그를 내면의 고통속에 몸부림 치게 한 원인이었다. 영화는 존이 처음 기타를 잡기 시작해서 초기 비틀즈를 이끌고 함부르크로 연주 여행을 가기전 까지의 일들이 묘사된다. 키워준 이모에 대한 정과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불안정한 상태의 존의 심리를..여성 미술가 감독 특유의 섬세함으로 예리하게 펼쳐진다. 
 
 아버지의 부재에 의한 상실과. 이모에 의해 폭로되는 어머니의 과거의 사실등. 존은 크게 상처 받지만. 그 고통을 인정하고. 내면화해. 어머니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계기로 삼게 되는 와중에..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는 평생 치유하지 못한 상처를 입게 된다. 영화는 상처를 껴안고..비틀즈의 위대한 출발을 알리는 존의 걸음 걸이에서 끝나지만. 그 후 비틀즈로 성공한 존의 인터뷰를 보면 얼마나 버림 받은 상처가 컸는지 가슴이 아퍼온다. 그리고 이 영화를 함축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부모의 사랑에 목마른 그의 고통이 위대한 비틀즈를 낳았다.
 " 예술은 고통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일 뿐 입니다. 제가 스타가 된 유일한 이유는 제 억압이죠, 제가 '정상'이라면 그 어떤 것도 저를 그렇게 만들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 성공을 향해 돌진한 유일한 이유는 " 자 엄마 아빠 저를 사랑할 건가요?. "  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 _ 존 레논.

  

60년대 후반 존 이 연상인 오노 요코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것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갈구가. 부유한 동양인 예술가 여자 한테 전이 되어, 위안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70년 존의 솔로 앰범 첫 곡이 Mother 인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울려 퍼진다. 비틀즈를 갓 해체한 이 시기. 그는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며, 이 앨범을 만들었다. 아주 직설적인 내면의 소리였다. 
2010/03/14 - [음악] - John Lennon _ Plastic Ono Band (1970) 

 그 고통에서 건져올린 노래들이 시대를 초월해. 큰 울림을 준다. 대중음악에서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폴 매카트니의 솔로 앨범들이 그 당시에는 크게 히트를 쳤고, 시간이 지나 잊혀 지지만..존 레논의 음악들은..시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울림이 있다. 자신과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고자 했던..그의 재능과 노력에서..우리는 공감과 위안을 얻으며.. 고통이 낳은 천재를 그리워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 영화는. 굳이 음악팬이 아니더라도..존 레논을 잘 모르더라도..개개인 내면의 상처를 다루는 수작이다. 리버풀의 전원 풍경과. 50년대 로큰롤 음악의 앙증맞음도 즐기면서. 현재의 대중음악이 비틀즈를 통해서 얼마나 다양하게 발화하게 되었는지. 유추할수 있다. ( 비틀즈의 음악을 아는 입장에서.) 
 최근 비틀즈 음원이 아이튠스를 통해 온라인 발매 될라는 모양이다. 작년에 비틀즈 리마스터링 셋트가 나와..한창 팔리더니.. 이런 소식 때문에.. 아마존에서 100불 대로 반값 세일을 한 모양이다. 요즘 내가 만든 비틀즈 베스트를 듣고 있는데..13개의 앨범에서 대충 추려 뽑아서..무작정 트랙을 배열해도. 너무나도 훌륭한 음반이 완성된다. 무려 1시간 40분의 하모니의 진수.. 특히 존 레논의 몽환적인 목소리가 너무 좋다. 
 마음이 아프고 병든 사람만이 창조에 불을 지핀다..


 




 비운의 밴드. 스톤 로지스. 불후의 명작. 그들의 데뷔음반은 완벽에 가까운 것으로써, 영국 음악의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비록 밴드는 음반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자신들의 음악적 역량을 펼쳐보이지 못하고. 95년에 뒤늦은 2집을 내고. 사라지게 되었지만. 90년대의 영국 음악씬 (브릿팝) 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90년대 부터 불어닥친 브릿팝의 선구자들..블러.스웨이드,오아시스..등등이 활짝 발화 할수 있는 포문을 스톤 로지스가 열어 제낀것이었다. 스톤 로지스가 맨체스터를 벗어나 세계적으로 성공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맨체스터 씬 4인방의 음악은. 얼터너티브 모던 록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맨체스터씬. 혹은 매드체스터. 또다른 말로 배기씬. 이라고 불린 80년대 후반의 맨체스터 출신의 밴드 4인방 ( 스톤 로지스, 샬라탄스. 해피 먼데이스. 인스파이럴 카펫 ) 은 당시 맨체스터의 클럽 하시엔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 클럽은. 레이브 클럽으로. 이들은. 록 음악과 댄서블한 비트를 접목한 사운드로 맨체스터 사운드를 특징지웠다. 음악적으로 맨체스터의 전통은 70년대 후반 조이 디비전( 신스팝 밴드 뉴 오더의 전신) 으로 부터. 스미스 그리고 스톤 로지스 외..거쳐 오아시스 까지 이어진다.

 이들이 대단한 감각의 음악으로 전세계적으로 뜨지 못한 이유는 첫 째 자체적으로 음악 비지니스에 질식 당했던것에 있었고. 둘 째. 90년대 초반 시애틀에서 불어닥친. 너바나와 펄잼을 위시로한 그런지  열풍이었다. 시애틀 얼터너티브 음악은 전 세계적으로 대단한 위용을 떨쳤고. 그에 말미암아. 맨체스터씬은 영국만에 국한된. 명작이 되어 버렸다. 특히 선두격에 있었던. 스톤 로지스는 음악과 외모 모두 출중했던. 그들은 충분한 인기(대형 스타)로 발돋움 하기 전에 음반사와 심각한 갈등으로 그 에너지를 상실해 버렸다. ( 마이클 원터바텀 감독의 영화 24 파티 피플을 보면 그 당시 맨체스터씬의 내막을 알 수 있다.)


 90년대 초, 영국과 미국의 문화 주도권 전쟁은 당시 너바나와 펄잼을 앞세운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기운듯 하지만. 곧. 다양한 브릿팝 밴드들이..우후죽순 겪으로 쏟아져 나왔다. 분명 스톤 로지스를 위시로한 맨체스터씬은 80년대와 90년대를 넘어가는 훌륭한 가교 역활을 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영국적인 음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그들의 음악은 영향을 미쳤다. 장르간의 교합. 형식 실험들이..하이브리드, 퓨전 이란 이름으로 더욱 날개를 펼 수 있었다.

 아직도 영국인들의 스톤 로지스 사랑은 절대적이다. 오아시스 1,2 집과 함께. 영국인들이 실질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음반, 노래들이 이것이다. 그것은 음악 매체들의 여론(순위)조사에도 항상. 드러난다. 훌리건스란 영국 축구팬에 관한 영화를 보면 배경으로 들리는 음악이 이 들 음악인데..상당히 영국적이다. 란 느낌이 여실히 든다. 여전히 영국음악을 대표하는 반열에,올라있는 스톤 로지스는 항상 그들의 자부심 이다. 고작 데뷔 음반을 낸 젊은이들일텐데. 그들의 음악적 감각은 경이롭다. 비틀즈의 후예들이 아니랄까바 영국의 밴드들은 자주 놀라운 데뷔음반을 들려준다. 그러나 이들은 이 데뷔 음반 한장으로 전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들은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밴드가 해체한 후 멤버들은 각자 솔로 활동 내지 다른 팀을 만들고 활동을 계속 한다. 특히 팀의 주축인 보컬 이안 브라운 과 . 기타리스트 존 스콰이어의 활동이 두드러지는데. 이안 브라운은. 꾸준한 솔로 활동으로 스톤 로지스를 벗어나 독자적인 솔로 아티스트 로써의 입지를 굳혔다. 그의 그루브 감과 리드미컬한 창법은. 보컬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노래의 정확한 음정과 높이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악기 파트로써 기능하는 보컬이다. 그는 킹 몽키로 불리어 지며 여전히 후배 뮤지션들에게 대단한 찬사를 받고 있다.

 올해 펜타포트 마지막 날 헤드라이너로 한국에서도 공연을 했다. 영국 음악의 뿌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생소할 중년의 사내 이지만. 모던록 음악을 좀 아는 사람들은. 이안 브라운이나..스미스의 기타리스트 였던 조니 마 같은 뮤지션이 얼마나 역사적인 인물인지 알 것이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펜타포트 후기를 읽다가 꽤 웃었던 적이 있는데. 이안 브라운이 공연할때.. 어떤 관객이 " 쟤 음치 아냐? " 라고 수군거렸던 반응이 너무 웃겼다.

 킹 몽키..흐느적 거리며 술취한 마냥 주절데는 듯한 창법 속에..그가 창조한 그루브는 빛을 발한다.




 일요일 아침. 고요한 주택가의 정적을 뜨거운 블랙 커피와 비틀즈의 러버 소울.( 고무 영혼)을 골라 깨운다. 평화로운 고요 속에, 천상의 화음이 펼쳐진다. 완벽한 하모니는 나를 균형잡힌 인간으로 이끈다. 시간의 공간을 채우는 그들의 소리는, 형이상학 이데아의 세계로 내 현존을 각성하게 한다. 
 행복은 일요일 아침, 커피를 마시며 비틀즈 음악을 듣는 자에게 있었다. 

 비틀즈는 1963~1970년 앨범 발매 활동 기간중. 총 13장 의 앨범을 발매했다. 그 활동 기간중. 초.중.후기 비틀즈로 구분하게 되는데, 외모나 음악적으로 차이. 변화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초기의 비틀즈는 요즘으로 치자면 아이돌 밴드 였다. 똑같은 양복을 입고, 똑같은 더벅머리 스타일로. 사랑타령의 상큼한 노래들을 불렀다. 매니저 브라이언 앱스타인의 전략 이었고. 이런 젠틀한 매력은 대중들에 급속히 인기를 끌게 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이들은 원래 로큰롤 추종자 였고. 테디 보이 였다. 반항과 저항 의식은 리버풀 노동 계층의 자식들에겐 뿌리 깊은 것이었다. 

 이 앨범은 비틀즈 중기 를 대표하는 음반으로써. 그동안의 상큼하고 밝은 사운드와 소녀 취향의 사랑 노래를 부르던 비틀즈에서. 내면의 공허와..사회 의식을 표현하는 진득한 노랫말로 변모하는 비틀즈를 알리는 첫 신호탄 이었다. 외모 또한 앨범 사진에서 보듯. 깔끔한 양복 유니폼에서 벗어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앨범을 통해 음악 내.외적으로 변화를 가지게 된 계기는 1964년 대대적으로 미국에 진출한 이후. 포크계의 거장 밥 딜런을 만난 영향이 컷다고 한다. 아마 그때 처음으로 마리화나를 경험하게 됐고. 밥 딜런의 의식있는 가사가, 존 레논의 무의식적 상처를 자극했다. 환각의 경험은 그들의 의식을 확장하게 했고..더 이상 그들은 시스템에 길들여진 앵무새 들이 아니었다. 60년대 시대정신은 사랑과 평화. 환각과 도취..모던의 해체, 등등.. 기성.(모던)의 관념을 거부하는데 있었다. 

 이 음반은 대중음악이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첫 효시이자 단초였다. 
 60년대 활동했던 또다른 천재인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은 애비로드 라이브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버 소울은 브라이언 윌슨이 비치 보이스의 명반. 펫 사운드를 만들게 되는 자극을 줬고, 비치 보이스의 펫 사운드는. 팝음악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반 1위로 항상 뽑히는 비틀즈의 서전트 페퍼 로운리 하츠 클럽을 만들게 되는 결정적 역활을 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두 천재 그룹은 서로 자극을 받아가며. 팝 역사상 최고의 음반을 만들어 냈다. 그 들의 음악은 천상의 하모니로 영원한 고전이 되었다. 

 비틀즈의 모든 곡이 좋지만. 대중들이 듣기엔. 비틀즈의 유명한 히트곡 보단. 좀 덜 알려진 히트곡들이 있어서. 강한 매력을 못 느낄수 있다. 하지만. 다른 앨범보다 앨범으로써의 짜임새가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앨범 애비 로드와 함께.)  귀에 손쉽게 쏙 들어오는 곡들은 노르웨이 숲. 과 미쉘. 걸. 등이 있다. 

 싸늘한 가을 아침, 그들의 음악은. 시대를 초월해 가슴을 어루만져준다. 음악의 아름다움은 오늘 같은 날에 있었다.
 

 어릴때. 음악잡지에서 얼핏 줏어들은 이야기로는 기타의 3대 신이 있는데. 에릭 클랩튼과. 지미 페이지, 그리고 제프 벡 이란 거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말의 근원지는 일본의 어느 록음악 평론가가 했던 말이..절대 진리 처럼 우리나라 대중에게 각인된 것이었다. 그들의 위대성을 폄하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그 외의 좋은 기타리스트를 배제하는 일말의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는데 있어, 그런 구별짓기는 우려가 된다. 
 내가 좋아하는 록 장르 외에 째즈나 퓨전 계열 또는 클래식 기타.등에서의 기라성 같은 기타리스트 들이 즐비하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음악 예술이란 건 순위매기기가 아니니까..모든 열린 마음으로 시간속에 흐르는 음의 촉수를 느껴야 한다.

 60년대 하드록 음악의 태동기..에 위에 말한 기타의 3대신들은 차례로 야드버즈란 그룹의 기타리스트를 거쳐갔다. 처음엔 에릭 클랩튼이 가입했고. 중간엔 제프 벡..마지막엔 지미 페이지가..기타를 맡으면서..결국..야드버즈는 레드 제플린 이란 그룹으로 재탄생 하게 된다. 그들이 그 밴드에서 있던 시기, 둘씩 겹치거나..셋이 같이 연주한 음원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기타의 신 세명을 뽑자면. 1. 지미 헨드릭스. 2 에릭 클랩튼. 3. 제프 벡 이다. 28살에 요절한 지미 헨드릭스인 경우는 외계에서 떨어진 신이었다면. 제프 벡은..지구에서 태어나 외계로 뻗어나가는 신이 된 사람이다. 에릭 클랩튼의 경우는 삶 이라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자기 음악의 뿌리 (블루스) 로 회기하는 연어와도 같다. 

 지미 헨드릭스나 에릭 클랩튼에 비해..제프 벡에 대해선..관심이 많지 않았다. 처음 이 사람의 음악을 들어봐야 겠다고 생각했을때. 이 유명한 음반을 듣고 나서도..별로 감흥이 안 왔다. 일단..앨범 전체가 인스트루멘탈(연주곡) 이었기 때문에..비틀즈를 듣는 것처럼 완벽한 멜로디에 빠지는 감동은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안 듣고 있다가..언젠가..이 음반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아마도 오늘 같은 평온한 토요일 오후의 나른함을 채우는 배경음악으로 틀어놨다가.. 어느 순간..이 소리들이 내 몸의 감각을 두드렸다. 어떤 장르라고 구별짓기 어려운..록 보다는 째즈에 가까운 이 음반에 귀가 트이는 순간.. 독특한 리듬은 마음을 들썩이게 했고. 제프 벡의 기타 연주는 예리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뭔가 규정할 수 없는 음악의 오묘한 맛.이 있다. 아무리 들어도..하루 종일 연속으로 이 음반만을 틀어놔도..지루하지 않다. 집중해서 들을땐..아주 섬세한 터치의 기타 사운드를 즐길 수 있고.. 그냥 분위기용으로 틀어놔도.. 엇박의 흥겨운 리듬에 기분은 고양된다. 아마 연주곡이라서 더욱..감상자의 기분이나..공간의 정서에 따라..팔색조 처럼..음악은 변화무쌍하게 감상자에게 수용된다. 프리한 감성을 주면서도..예리한 비수가 숨겨진 아름다움이 있다.

 제프 벡은 일렉트릭 기타가 가지고 있는 극한의 한계를 추구한다. 기타가 노래의 반주로서만 기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기타만의 예술을 펼쳐 보였으며..그 새로운 한계를 밀어붙이는 것이 그의 음악 인생이었다..이 음반은 기타가 가진 음악 예술의 더 이상 다다를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준다. 이 음반에 실린 곡의 크레딧을 보니..스티비 원더의 곡과..존레논과 폴매카트니의 이름도 보인다. 음악 천재들의 밑바탕하에..제프 벡 이라는 미래로 가는 기타의 신은 70년대의 또다른 경이적인 명반을 만들어 냈다.

 P.S> 올해 초에 처음으로 내한공연을 했는데..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뮤지션들이나 음악 좀 듣는 다는 사람은 다, 제프 벡의 공연에 모였을 것이다. 60년대 영국 젊은이들의 대중 음악은 이제 고전 음악의 지위에 오른것 같다. 에릭 클랩튼 이나..제프 벡 등등 급의 뮤지션들은..어떠한 클래식 연주자 들 보다도..위엄이 있어 보인다..지금 우리가 듣는 대중 음악의 원류가 젊었을때 그들이 하던 음악에서 나온 것이니..노년의 그들의 음악 세계는..넓고 깊고..예리하다.. 대중음악의 클래식.. 그만큼 가격또한 높다.. 내년 초에 에릭 클랩튼이 세번째..내한 공연을 한다던데..또 꽤 고가겠지..
 

 이제는 록음악 역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른 건스 앤 로지스의 '파괴에의 욕망'(1987) 이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이들은 록음악씬에서 가장 강력한 마초성과. 쇼크를 몰고 다녔다. 스타디움급 공연과 함께. 화려한 리무진. 여자와 마약..폭력등..은 그들의 출중한 실력과 함께, 성공한 헤비메틀 밴드의 부록같이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아마 대중들은 음악은 물론이거니와..그들의 그러한 망나니적 행동에..자기를 투사하며 대리 만족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로큰롤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꽉짜여진 틀에 맞춘 삶에서 일탈을 꿈꾸는 그 무엇이..로큰롤의 방종에 점입가경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록의 생명은 욕구불만 과 저항정신에 있다. 씨발 다 깨부셔야해..아 좆같애 하는 심정이 자기 내면에서 용솟음 칠때..이 음반을 듣던가..담배하나 꼬나물고 디스토션 걸린 기타를..후려야 한다. 젊음의 반항과 열기..쇼크가 이 음반 안에 기념비 적으로 응축되어있다. 그 젊음의 망나니 정신은 이제 시대를 넘어 추억의 향수가 된다..그들은 20세기 마지막 진정한 하드록 그룹이었다.

  80년대의 헤비메탈 씬은 8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팝 메틀 혹은 헤어 메틀(이쁘게 생긴 백인 애들이 펑퍼짐한 미스코리아 파마 머리 하고 이쁘장하게 화장하고..말랑말랑한 록 발라드 부르는 것을 비꼬는 말) 밴드들이 득세 했다. 팝메틀 밴드인 본조비 나 포이즌. 파이어하우스 등등의 명곡은..지금 우연히 들어봐도..아..이 노래..하고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여기에 스콜피온스의 노래들도 포함하면..80년대의 주옥같은 록 발라드는 이젠 비틀즈의 곡들을 감상하는 것만큼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감이 든다.

 헤비메틀이 소녀 취향에 어필하는 말랑말랑한 것이 됐을때..이들 건스 앤 로지스는 거칠고 저돌적인..마초성이 다분한 하드록 음악을 들고 나왔다. 이 앨범의 첫 곡. Welcome to the jungle 의 육감적인 섹시성과 가공할 만한 보컬 액슬 로즈의 변화무쌍한 샤우트 창법은 전율 그 자체였다. 롤링 스톤스 이후 진정한 마초들이 돌아온 것이었다. 로큰롤의 원초성은 날것의 에너지 과포화 상태인 그들의 것이었다.
 

 나는 건스 앤 로지스의 음악을 헤비메탈 이라고 여기기 보단..하드록 밴드라 불리어 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들의 외모. 긴 파마머리나..가죽 옷..스판덱스..등등과..고음의 날까로운 보컬 보이스는 헤비메탈 특징의 전유물이나..사운드 자체의 질감..리듬이..헤비메탈 이라고 부르기에는..투박하고 복고적이다.. 대중들이 듣기에는 다 시끄러우니까..메탈이나..하드록이나 별반 차이 없는 것 같아도..그들의 음악을 헤비메탈 범주에 들기엔..뭔가 구수하다. 아마도. 70년대 펑크의 허무주의적 태도와 60년대 로큰롤의 반항적 향취와 더불어 80년대 헤비메탈의 과시성,쇼맨쉽 영향을 받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리드 기타리스트인 슬래쉬의 깁슨 레스폴 기타의 톤(음색) 또한 무시 못할 것이다. 레스폴 기타 자체가 빈티지한 색깔이 다분하기 때문에..아무튼 메탈이던 하드록 이던..시끄럽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소음으로 들리던 것들이..젊음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음악이 되고. 예술이 된다. 백인 마이너리티. 속칭. 화이트 트래쉬 인 그들의 과도한 공격성은 쇼 비즈니스 하에 적당히 포장돼, 대중들의 환타지로써 소비된다. 우리의 원초적 욕망을 록 스타는 무대 위 또는 밖에서..대리 만족 시킨다. 로큰롤..록 이라는 용어 자체가..섹스를 은유하는 것이듯..그들의 음악은 다 섹스를 연상시킨다..첫곡은 그 느낌이 너무 다분하고..파라다이스 시티를 거쳐 마자막 곡 로켓 퀸을 듣고 나면..질퍽질퍽한 마초적 쾌감을 다분히 느낀다. 여자한테 잘 보이기 위한..섹스 어필이 아니라..윽박지르는 과도한 남성성 그 자체이다..


 그들이 이 앨범을 처음 발표했을때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당시 LA에는 이런 장르적 LA메탈 밴드들이 수백개나 되었다고 한다. 고만고만한 밴드들 사이에서..그들은 꾸준한 라이브 활동으로 그들만의 진수를 뽐내었다. 보컬의 고음의 독특한 창법과..리드 기타의 감미롭고..부드러운 솔로톤..인상적인 리프의 리듬기타..와 더불어 그들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에너지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서서히 그러한 에너지 과포화 공연을 하던중..앨범 발매 1년후 쯤..Sweet Child O'Mine 이 빌보드 차트 1위를 하면서, 곧 앨범 차트도 1위. 그들은 스타로 발돋음 하게 된다. 89년 리츠호텔 라이브를 보면..오리지널 멤버로 그들의 최 전성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가 되었고. 그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스스로 와해 되었다..1991년 그들은 두장짜리 Use your illusion 앨범을 발표하고...스타디움 급 전세계 라이브를 도는 동안 너바나와 펄잼을 위시로한 시애틀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이 시대를 장악하면서..타파해야할 80년대의 유산처럼 되버렸다. 이미 음악적 견해 차이로 멤버들은 와해 되었고..시대가 스스로 자멸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에도..이들의 음반 특히 이 데뷔 음반은 록 키드 들한테 영원한 고전으로 남아있다. 록 밴드의 정치성이나 태도를 배제하고, 순수한 음악성 만으로 이 음반을 들어도..다시는 록 역사상..이런 완벽한 에너지 충만함은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다소 보컬 액슬 로즈의 금속성 카랑카랑 거리는 고음에 거부감이나 악마성을 느끼는 선입견을 가질 수 도 있다. 그러나 이 독특한 음색의 매력에 빠지면, 그 현기증 나는 에너지가 자신의 삶을 불끈불끈 솓아나게 할 것이다. 


 여전히 기타 키드 들한테 슬래쉬의 연주와 톤은 영원한 숭배 대상으로 남는다. 이제는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 옹의 레스폴 보다..슬래쉬의 레스폴 사운드가..더 상징적인게 된 듯하다. 중학교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저 레스폴의 자태와 소리는 설레인다.

 교회가 이런 하드록 음악을 못 듣게 하는 이유가..메시지의 과격성 이라기 보다..음악 자체가 성적충동을 야기하기 때문일 것이라..유추해본다. 치사하게 비틀즈 존 레논의 예수 발언 파문 때문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확실히 이 음반은 거칠은 섹스와도 같다. 






 

  40이 되면 바흐를 들으려고 했다. 그 의미는 단지 클래식 음악을 들으려는 목표가 아니라, 그것에 수반된. 내적 성숙과. 최소한의 물질적 안정을 욕망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클래식 음악은 적어도. 청음공간이 필요하고. 진공관 앰프와. 해상도 높은 스피커 정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시간적 여유. 팝,록 음악이야. 적당한 기기로 어디서곤 감상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클래식은 경건한 대상으로 다가온다. 내적 성숙과. 외적 성공이 조화롭게 이뤘을때. 클래식을 들으려고 했고. 목표가 40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부터 팝,록 음악씬을 이끌었던 이 40대 중반의 아저씨들의 재결성 공연을 보고서. 나의 목표는 수정되었다. 40이 넘어도. 펑크로커를 해야겠다고. 클래식 감상 공간이 아니라. 합주실을 만들목표로 수정해야겠다. 배가 좀 나와도 턱살이 쪄도. 무슨 상관이랴. 저렇게 기타 치며 구르고. 방방 뛰며. Song 2 를 부르는 멋진 꽃중년의 모습이..소름돋는 감동을 자아냈다.


 아마도 이 공연은 대중 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공연이었다. 90년대 초 부터 활동한 밴드는 94년 그들의 3집 앨범인 parklife 가 대대적으로 뜨면서. 브릿팝 이란 장르,사조를 만들었으며, 90년대의 브릿팝./모던락 을 이끌었다. 98년의 앨범에선. 브릿팝은 죽었다 라고 선언하며. 미국의 인디록의 영향을 받아들이며. 새롭게 변모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 후 라디오헤드의 Kid A 에 필적하는 변화로..그들은 팝송과. 노이즈 사운드 아트의 진보적인 음악을 선보인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또 하나의 명반. Think Tank 로. 그들은 브릿팝을 예전에 벗어나. 선구적인 음악 세계에 한 발 더 나아간다. 이 음반 제작 과정에서 이 밴드의 주축인 보컬 데이먼 알반 과 기타리스트 그래함 콕슨의 의견 차이로.. (내가 유독 편애하는,내가 닮았단 소리를 들어서?ㅋ) 그래함 콕슨이 밴드에서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밴드들 처럼 인간적 불화.충돌이 아니라. 음악적 차이에서 만이었다. 그들의 우정과 존경은 여전하다. 유투브에 누가 그 둘의 사진만으로 편집한 영상은 감동을 자아낸다.

 그래함 콕슨은 자신의 레이블(음반사)를 차리고 꾸준히 솔로 앨범을 발표해 왔고. 솔로 5집에서..대중과 평단의 반응이 절정에 오른다. 브릿어워드 도 수상했었다. 그는 펑크, 개러지. 인디적 감성으로 스트레이트한 록 스피릿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면.(그의 매력은 전혀 록 밴드 기타리스트 스럽지 않은 학구적 외모에 있다.) 보컬인 데이먼 알반은. 록 음악의 범위를 넘어선. 힙합. 제 3세계음악 의 수용등. 좀 더 유니버설 하다. 그의 프로젝트 밴드 인 고릴라즈 (세계 최초의 3D 가상밴드.) 는 벌써 3번째 음반을 냈으며.이제 블러란 이름의 활동 보다는 고릴라즈의 리더로써 그의 입지는 더 확고해졌었다. 그렇게 각자 음악적 성공을 구가하던 그들이 다시 블러 란 이름으로 뭉쳤다. 그리고. 2009년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연3일 공연은 10만명씩 관중을 동원하며. 나처럼 90년대의 젊음을 블러의 음악과 함께 보낸 세대들의 갇동을 자아냈다. X세대의 화려한 귀한 같은 향수어린 성대한 축제 였다. 

 런던에서 제일 크다는 공원 하이드 파크에서 이런 공연을 할 수 있는 뮤지션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에릭 클랩튼과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하이드 파크 공연이 유명하고. 블러의 라이벌 이었던. 오아시스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 만큼 영국 음악산업에서 블러의 위치는 브릿팝을 이끈 밴드로써, 영국의 음악적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 밴드로써. 출중하다. 비록 오아시스에 비해 미국 진출에 대대적인 성공을 이룬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비틀즈를 그대로 계승한 오아시스에 비해. 영국만의, 지극히 영국적인 전통을 가지고. 영국 음악의 미래를 개척해 나갔다고 평가한다.

 위 잡지 표지의 데이먼의 말(빨간블록) 처럼. 이 공연을 보면서. 나의 찌질한 90년대가 이제는 추억이란 포장지를 뒤집어쓰고 다시 당도했다. 아마도 20살 쯤. 여름의 오후를 만끽하던중. 라디오.(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아주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프랑스 샹송 느낌이 나는 팝송 이었는데. 라디오를 대충 흘려듣다가..그 노래가 나오자..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고..집중해서 듣게 되었다. 여름의 길고 나른한 햇살과 함께. 그 노래의 몽환적이고 감상적인 분위기는 하나의 사진 처럼 너무 선명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막연한. 허니문 생각이 들었고. 그 후 꽤 오랬동안 신혼여행 가면. 하루종일 호텔방에 그 노래를 틀어놔야겠단 망상에 사로잡혔었다. 노래가 끝나고. 바로. 배철수 아저씨가.." 블러의 투 디 엔드 였습니다." 라고 한 마디 남기고..광고가 나갔다. 블러란 밴드는 알았지만. CD는 한 장도 없었다. 나는 바로..영등포의 음반 가게를 찾아. 블러의 음반을 골랐다. 그 노래가 든 음반이 뭔지 몰라. 그냥 하나를 골랐는데. 그들의 그당시 최신작인 4집 Great Escape 였다.To the End 는 그들의 성공을 알린.3집 parklife 에 있었고. 대신 4집의 히트곡. Country House 와 Charmless Man 같은 주옥같은 곡들을 통해 그당시 블러 사운드의 핵심인 브라스가 많이 가미된 뿜빠 뿜빠 사운드에 중독되었다.

 이 공연에서 그들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부를때. 오아시스의 대표적 떼창곡 Don't Look back in anger 나 Wonderwall 보다도 더 자주. 더 크게 떼창을 부를때마다. 감격이 몰려왔다. 비록. 현장에 없고. DVD 도 아니고 다운받아 보는 주제에..이렇게 수시로..감동에 소름끼치다니..2번의 앵콜을 받고..마지막곡. 유니버살을 전 관객이 부를때는..정말..탄식이 흘러나왔다. 하나의 노래. 한 밴드가 만들어낸 노래들은 관객과 함께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4명의 밴드 멤버나..10만의 관객 모두..그리고 주구창창 비오는 날. 방구석에서 이렇게 혼자 감상하는 내게 모두. 마음에 어떤 점을 찍어 놓았다. 그 방점은. 음악은 영원하다. 록 음악은(록 정신은) 늙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Blur Live in Hyde Park Trailer






 

 8월 첫째날의 일요일. 오후 3시에서 4시사이 고요한 무더위는 주택가를 엄습하고 있었다.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소화를 시키느라고. 머리로 올라가는 피는 굼떠지고 피부의 호홉은 대기의 습기에 지쳐간다. 시간이 멈춘듯. 계속 이어질듯한 이 일요일 오후의 무료함. 이 평온이 감사하기도 하지만. 내심.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무서워 정적을 깨고 컴퓨터를 킨다. 가벼운 영화를 한 편 보려고 폴더를 뒤적이다가 너바나의 92년 레딩 페스티발의 공연 영상을 튼다. 커트 코베인의 열창. 너바나의 가장 화려했던, 성공의 정점에서의 꽤 괜찮은 공연 이었지 않나 싶다. 일요일 오후의 정적과 무료함을 깨우는 커트 코베인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은 이 인물에 대한 애정을 다시 뒤돌아 보게 한다. 

 
 해는 지글거리고. 커트의 윙윙대는 기타와 몸부림은 내 삶의 열정에 작은 씨를 뿌린다.
삶은 땅에 맞닿아 있는 거니까, 죽으려 몸부림 쳤던 옆 사진속 커트의 모습은 상징적이다. 발없는 새처럼. 부유하다 가버린..
 열반, 해탈 이라는 밴드명 처럼.. 펑크 로커 로써 그는 자신의 삶에 철저히 저항하다 열반에 들었다. 그렇게 믿고 싶다.

  이 영화는 커트의 음성 다큐멘터리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죽기 1년전 여러 차례의 인터뷰들을 그의 삶의 궤적에 따라 조합해서 들려주고, 영상은 다양한 공간들. 그가 자란. 애버딘.올림피아, 시애틀,,등등의 모습과. 학교 공간. 도서관, 기타샵, 등등의..보통 사람들의 편린들, 가끔 애니메이션도 섞여서 보여준다. 영상은 스틸사진을 감상하는듯한 아련함이 서려있다. 


 커트의 나즈막한 육성으로 들려주는 삶은 시적인 영상과 어울려 한 편의 인생 작품이 된다. 그는 록스타 역사상 가장 정점에서 화끈하게 자살한, 그래서 더욱 신비화 되고, 아이콘화 된 전설이 되어버린 인물이었다.

 외계인이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삶은 항상 우울하고. 화난 상태만은 아니었다. 보통의 인간들 처럼. 웃고, 유머스러운 점도 드러나지만,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그로 인한. 불행. (이집저집 떠돌아 다녔던 삶.노숙) 과. 수시로 찾아오는 극심한 복통으로 인한..마약 복용..중독의 결과가 삶의 질을 나락으로 빠트렸고, 차라리 죽는게 낮다는 말을 자주하게 된다.

 커트 코베인에 관한 책은 그동안 많았다. 그의 삶을 조망하는 평전부터. 일기장을 그대로 스캔한 책 까지. 그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는 많았지만. 그의 목소리로 듣는 이 영화의 감흥은 조금은 남달랐다. 인터뷰 말미에.. 그의 부인인 커트니 가 애기 젖병좀 가지고 오라는 일상의 대화..가 매우 묘한 울림을 준다. 이 인터뷰 1년후에 커트의 유서 마지막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 모두들 고맙다. 너무 불안정하고 침울한 나 자신에게 열정이란 더 이상 없는지 모르겠다.
기억해주기 바란다. 천천히 사라져 버리기 보다는 한꺼번에 타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현재 세계 최고의 밴드라 할 수 있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4인조 밴드 U2. 2009년 LA에서 공연한 이 영상을 보면서 U2의 음악과 공연에 대해서 회상해본다. 

 U2 라는 밴드명은 미국의 고공 정찰기 이름에서 따왔다. (옆사진속 비행기) 이 비행기는 적진 깊숙히 고공 비행으로 침투해 적 진영의 비밀스런 부분까지 캐내는 임무를 하는데, 록밴드 U2는 빈곤과 차별과 인권이 유린당하는 세계의 구석구석을 자신들의 음악으로써 세상에 알리고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이바지 하겠다는 포부와 발원으로 시작한다.
 데뷔한지 30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그들은 처음 밴드명을 지을때 그 정신으로 세계 빈곤 퇴치에 앞장서며, 세계 시민으로써의 정의에 앞장서고 있다.

 이 밴드의 보컬리스트 보노 Bono 는 매년 노벨 평화상에 노미네이트 되고 있으며, 역사상 어떤 뮤지션 보다 더 정치적 영향력이 강력하다. 존 레논이 개인적 사회 운동과. 좌파와 연계해 싸웠다면, 보노는 자본 시스템 내부로 들어가 G8 정상들과 담판하고 설득하는, 사회 사상가 이다. 특히 아프리카 빈곤 퇴치에 최우선의 역량을 집중하는듯 하다.

 이 360' 로즈 볼 공연 또한 9만 7천명의 관객이 입장했고, 이 투어로 이들이 일년 벌어들이는 돈이. 현대자동차 1년 매출과 비슷하다고 한다. 나는 이 공연과 (2001 년 엘레베이션 투어, 미국 보스턴 공연)을 보면서, 카메라에 비치는 대다수의 살찐? 백인 중.상류층 관객의 돈을 끌어 모아다가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에 뿌리겠구나 라는 상상에 희열을 느꼈다. 

 그들 자신의 나라인 아일랜드도, 매우 가난한 나라였었고, 아일리쉬는 유럽의 흑인이라 불릴 정도로 천대 받았던 아픔이 있어서였는지, 그들은 종교에 입각한 자유, 평등 정신은 음악과 공연에서도 드러난다. 이 공연의 컨셉이 360' 인 것도. 축구장 한 가운데에 무대를 만들고. 거대한 PA 스피커가 무대 바로 밑이나 관객석 맨 뒤나 사운드의 질적 차이가 별로 안나게 설계한 게 위 사진에서도 보일것이다. 그리고 유투브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중계를 했고, 천만명이 동시에 이 공연을 즐겼다고 한다.

 U2의 미국 공연 티켓 가격은 매우 비싸기로 유명한데 U2의 공연을 올만한, 한마디로 먹고 살 여유가 되는 사람들의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며, 그들의 사랑과 평화의 가치관을 전달하며, 한쪽으로 쏠린 돈의 일부를 공연 수익으로 가져다가, 아프리카의 빈곤퇴치에 쓰는 그들의 행보는 너무 멋진 일이다. 그들이 영어를 쓰는 백인 이어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음악은 대단하다. 음악만으로도 그들은 아일랜드의 국보가 되었다.

1976 년에 더블린에서 결성한 밴드는 드러머 래리 물린 주니어(왼쪽에서 2번째)의 밴드 모집 공고에 모였다고 한다. 1980년 데뷔음반 BOY 가 발매될때까지 수련기간을 쌓은셈인데. 이 시절의 U2를 상상해보면,  알란 파커 감독의 80년대 영화 '커미트먼트' 가 생각난다. 이 영화도. 아일랜드의 가난한 청춘군상들이 밴드를 하며 우여곡절속에 사는 이야기 이다.
 이 당시 보컬 보노(왼쪽 세번째)는 목소리만 좋았지. 노래는 못 불렀다고 한다. (상상이 안 가지만) 친구들이 너는 매니저나 해라 라고 했지만. 그의 타고난 노력인지. 현재 나이가 들었음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최고의 보컬리스트 이다. 그리고 오른쪽의 기타리스트 엣지 Edge 출중한 기타실력과 외모상 첫인상이 날카로워서 보노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푸근한 백인 중년 아저씨 인상인데..지금은 절대 비니를 벗은 모습을 볼 수 없다. 

 화려한 기교없이 탄탄한 기본으로 드럼과 베이스가 리듬을 받치면 엣지의 공간계 ( 딜레이. 코러스. 리버브 ) 이펙터 걸린 기타가 사운드를 충만히 채우고 호소력 깊은 보노의 보컬이 전율케 한다. U2의 음악을 특징짓는 엣지의 기타 사운드는 록 음악 역사에서도 획기적 이었다. 딜레이 이펙터의 귀재인데, 기타리스트 한명이 2~3명이 연주하는듯한 효과를 낸다. 특별히 키보드를 많이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세컨트 기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들 네명의 사운드 만으로도 충만하다. 특히 현재 대중 음악의 특징중에 하나가 1절과 2절 사이 기타 솔로나 다른 솔로 부분이 없이 가는게 특징인데. 이런 점이 U2가 이끈 음악의 특색이자 영향이다.
 U2가 활동하기 시작한 1980년은 펑크의 충격이 살짝 지나고, 뉴웨이브를 기반한. 신스팝. 디스코. 아니면 극단적인 헤비메탈이 득세를 이루던 시기인데, 이들은 정통 스트레이트한 로큰롤에 호소력있는 좋은 멜로디로써 점차 인기를 끌다가 1987년 마침내 The Joshua Tree 앨범으로 세계를 제패한다. 미국 그래미 어워드를 석권했고,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밴드 자리를 지금까지 이어간다. 어떠한 멤버간의 불화나, 구설수. 없이. 내 놓는 앨범마다. 대중과 평론의 찬사를 받아오고 있다. 

내가 U2를 처음 알았던 것은 중학교 때 도서관에서 본 뉴스위크 한국판 기사에서 였다. 93년 쯔음..그때도 세계 최고의 밴드였고, ZOO TV LIVE란 거대한 공연을 하는 기사였었다. 특이한 메이크업을 한 보노의 사진과, 또  미국의 영화배우 리버 피닉스 사망 소식등이 떠오른다. 그 당시 들었던. U2 의 With or Without You 와 One 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최고의 노래로 감동을 자아낸다. 특히 기타를 좋아하는 내게 곡마다 다양한 일렉트릭 기타를 바꿔가면서 연주하는 엣지의 모습은 너무나 감사할 정도다. 에피폰 카지노 기타도 나오고, 리켄베커 기타도 나오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U2의 사운드에는 펜더 텔레캐스터나 스트라토캐스터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한국에서 상징적인 공연을 한다면 한반도의 평화 정착에 기여할수 있을까. 주한미군의 U2 정찰기는 뻔질나게 북한을 감시하는데. 이 음악으로의 평화 수호자 U2는 언제 한반도를 방문할지 참 요원하다. Radiohead 도 안 왔는데 너무 무리한 욕구일까..

 가장 아름답고 럭셔리한 공연이었지만. 요즘 나의 취향은 좀 마이너 적인 것에 있어서, 화려한 정찬을 먹은 기분보다는 소박한 소반을 추구한다. 그리고 2001년 엘레베이션 투어 보다는 보노의 보컬이 좀 무뎌진것 같다. 뭐 당연히 더 나이를 들어서 였지만.. 그리고 Stay를 안 불렀던것 같다. (2시간 공연이래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또 워낙 히트곡들이 많으니..)  다시한번, 유투의 ' 함께 혹은 너없이 ' 를 읊조리며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해 본다. 또 One 을 들으니 빔 벤더스의 ' 베를린 천사의 시' 도 다시 보고 싶다... 역시 문화의 힘은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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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watch?v=CxplKNc2GaY&feature=related

영화처럼 로맨틱한 영원한 봄의 음악. [예스맨], [500일의 썸머]의 히로인 주이 디샤넬(Zooey Deschanel)과 인디 포크/얼트 컨트리 히어로 M 워드(M. Ward)가 엮어낸 쉬 앤 힘(She & Him)의 두 번째 러브 어페어 [Volume Two]

2008년, 인디 뮤지션과 여배우가 만나 앨범을 발표했다. 평범한 경우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또 놀라운 뉴스 또한 아니었다. 인디 뮤지션이라는 자는 이 바닥에서 한칼하는 사람이었고, 여배우는 영민한 작품선정을 토대로 이제 막 궤도에 진입한 패션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였다. 처음 그녀가 가수를 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여배우가 노래한번 해보고 싶었나 보다 하고 비웃었지만 -나를 비롯한-그런 자들은 부클릿의 크레딧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의 작사/작곡이 바로 그 여배우 혼자 이뤄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여배우’ 주이 디샤넬(Zooey Deschanel)의 작곡에 대한 재능은 바로 여기서 입증됐다. ‘인디 뮤지션’ M 워드(M. Ward)가 프로듀서 및 연주자, 혹은 동반자로서의 건실한 버팀목이 되어주면서 이 재능을 더욱 돋보이게끔 만들어줬다. 그는 단순한 연주나 서포트 뿐만 아니라 그녀가 만들어온 곡을 음악적으로 구체화 시켜주면서 훌륭한 사운드 프로덕션을 이뤄냈다. 인터뷰에 의하면 서로의 다른 감성을 채워주었다고 한다.

M 워드는 고독하고 블루지한 감성의 탁월한 트랙들을 만들면서 인디 포크 팬들의 지지를 얻었는데 노라 존스(Norah Jones)가 자신의 두 번째 정규작 [Not Too Late]에 직접 모셔 오면서부터 일반 팝 팬들의 관심 또한 받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아는 어느 형의 MSN 대화명이 일년 내내 그의 앨범 제목인 [End of Amnesia]였던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열혈 팬들을 무척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머지(Merge) 레코드의 쟁쟁한 아티스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승승장구했는데 초기의 앨범들이 리이슈 되기도 하면서 다시 한번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주이 디샤넬은 영화를 할 수밖에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타이타닉(Titanic)]부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등의 촬영 감독, 그리고 [트윈 픽스(Twin Peaks)]의 몇몇 에피소드를 연출한 것으로 유명한 칼랩 디샤넬(Caleb Deschanel)이고 어머니 역시 영화배우인 메리 조 디샤넬(Mary Jo Deschanel)이다. 주이의 언니 에밀리 디샤넬(Emily Deschanel) 역시 배우인데, 주이 디샤넬 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주이 디샤넬의 경우 작품 선택능력을 비롯한 기존의 커리어도 물론 성실했지만 앞으로의 진로 또한 주목되는 배우임에 틀림없다.

She & Him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영화 [The Go-Getter]에서부터 였다. 주이 디샤넬과 M 워드는 이 영화에 함께 출연하게 됐다. 감독 마틴 하인즈(Martin Hynes)가 둘이 엔드 크레딧에 들어갈 노래를 듀엣으로 불러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둘은 리차드 톰슨(Richard Tompson)과 린다 톰슨(Linda Thompson)의 곡 [When I Get to the Border]를 녹음하게 된다. 사실 주이 디샤넬은 윌 패럴(will ferrell)의 크리스마스용 영화인 [엘프 (elf)]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는데 M 워드는 그 당시부터 그녀의 목소리를 눈 여겨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주이 디샤넬과의 대화 도중 그녀가 이미 혼자서 수많은 곡들을 써왔고 자신의 집에 데모 음원 또한 쌓아놓고 있다는 색다른 사실을 알게된다. M 워드는 그것들을 들어보고 싶어했고 주이 디샤넬은 처음에는 좀 빼보다가 나중에는 결국에는 그 음원들을 보냈다고 한다. 이 데모를 듣고 넋이나간 M 워드는 황급히 앨범을 제작해보지 않겠냐고 찔러보게 된다.

이들의 초반 작업은 이메일을 통해 진행됐다고 한다. M 워드는 포틀랜드에 거주하고 있었고 주이 디샤넬은 캘리포니아에 있었기 때문에 파일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결국 디샤넬이 포틀랜드의 스튜디오로 직접 찾아와 작업을 마쳤다. 이 첫번째 앨범의 레코딩은 포틀랜드에서 2006년 12월부터 2007년 3월까지 이어졌다. 친구들의 스튜디오와 여러 장소를 오가며 녹음과 믹싱이 계속되는데 M 워드가 투어 길에 오를 무렵 주이 디샤넬은 영화를 찍게된다.

그러는 와중 2008년 3월 18일에 인디명문 머지 레코드에서 첫번째 음반 [Volume One]이 발매됐다. 영화 [The Go-Getter]에서 둘이 함께 호흡을 맞춰본 이후 1년 2개월 만에 대중들에게 함께 노래한 작품을 선보이게 된 셈이었다. 앨범은 비교적 평단에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낸다. 앨범발매 이후 SXSW를 비롯한 각종 이벤트와 페스티발에서 공연을 하면서 투어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미 이때부터 [Volume Two]에 대한 계획은 진행 중이었다.

투어 때는 훌륭한 세션 멤버들과 함께 다녔다. 로라 바이어스(Laura Veirs)와 M 워드의 백밴드. 그리고 디셈버리스츠(The Decemberists)에서 드럼을 쳤던 여성 아티스트인 레이첼 브룸버그(Rachel Blumberg)가 드럼을 쳤으며 새들 크릭(Saddle Creek) 레이블의 엔지니어이자 프로듀서이면서 브라이트 아이즈(Bright Eyes), 릴로 카일리(Rilo Kiley), 커시브(Cursive) 등과 작업했던 마이크 모기스(Mike Mogis)가 페달 스틸 기타와 만돌린을, 그리고 브라이트 아이즈와 베쓰 오튼(Beth Orton)의 엔지니어였던 마이크 코이켄달(Mike Coykendall)이 베이스를 연주했는데 이 쟁쟁한 인물들이 그들의 공연 뒤에서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어주었으며 몇몇은 이미 녹음 때부터 참여하기도 했다.

쉬 앤 힘의 첫번째 앨범 이후 2년 동안 이들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일단 주이 디샤넬의 경우 2009년 9월에 데쓰 캡 포 큐티(Death Cab for Cutie)의 벤 기버드(Ben Gibbard)와 결혼했다. [예스맨(Yes Man)], 그리고 [500일의 썸머((500) Days of Summer)] 등에 출연하면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갔다. [500일의 썸머]에서는 리 헤이젤우드(Lee Hazlewood)의 곡 [Sugar Town]을 부르면서 인디-오타쿠를 포로로 만들기도 했는데, 쉬 앤 힘의 이름으로 스미스의 곡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를 커버하여 사운드트랙에 수록하기도 했다. M 워드는 그 사이에 자신의 다섯번째 정규 앨범인 [Hold Time]을 릴리즈했으며 빌보드 차트 15위를 기록했던 슈퍼그룹 몬스터즈 오브 포크(Monsters of Folk)의 한 축을 이루면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작년에 한가지 흥미로운 영상이 돌아다녔다. 바로 마이스페이스(Myspace) TV의 코너 [Artist on Artist]에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과 주이 디샤넬이 함께 할리우드 보울 앞에서 얘기를 주고 받는 비디오였다. 이 인터뷰 영상이 앞으로 펼쳐질 [Volume Two]에 상당한 단서를 주기 때문에 서로 오갔던 내용들을 몇 가지 적어볼까 한다. 주이 디샤넬은 브라이언 윌슨의 스마일(Smile) 투어 당시 공연을 직접 관람하기도 했는데 [Surfer Girl]이 연주될 무렵에는 눈물까지 흘렸다면서 무척 훌륭한 경험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주이 디샤넬의 경우 할리우드 보울에서 처음 본 공연이 질베르토 질(Gilberto Gil) 어르신이었다고 하며, 브라이언 윌슨의 경우 비틀즈(The Beatles)와 앤디 윌리암스(Andy Williams)를 할리우드 보울에서 처음 봤었다고 한다.

브라이언 윌슨은 [Volume One]을 들었다면서 필 스펙터를 떠올렸고 훌륭한 목소리를 가졌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 둘은 자신들의 훼이보릿 곡에 대해 얘기하기도 하는데, 읊어보자면 브라이언 윌슨은 로네츠(The Ronettes)의 [Be My Baby]와 조지 거쉬윈(George Gershwin)의 [Rapsody in Blue], 그리고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버전의 [Strangers in the Night]을 꼽았고 주이 디샤넬은 바로 앞에 앉아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비치 보이즈(Beach Boys)의 [Wouldn't it be Nice], 좀비스(The Zombies)의 [This Will Be Our Year], 그리고 스탠다드 넘버 [I Can't Give You Anything But Love] 등을 꼽기도 했다.

주이 디샤넬은 자신들이 레코딩을 했을 때 적은 예산만이 책정되어 빠른 기간 내에 레코딩을 마쳤다고 한다. [In the Sun] 7인치의 비사이드, 그리고 일본판의 보너스 트랙에는 비치 보이즈의 [I Can Hear Music]이 수록되기도 했는데, 사실 로네츠 역시 1966년도에 이 곡을 커버한 바 있었다. 비교적 교집합되는 부분이 많다.

무척 인상적인 대화가 하나 있었다. 주이 디샤넬이 음악을 혹시 계산하면서 머리로 듣느냐고 묻자 브라이언 윌슨은 이런 대답을 한다. "난 음악을 듣지 않아요. 멜로디만을 들을 뿐이죠." 정말 지독하다 싶다.

[Volume Two]
미국에서는 2010년 3월 23일에 발매되어 빌보드 종합차트 6위로 데뷔하는 기염을 토했다. 전작이 81위로 데뷔해 71위까지 올라갔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발전이다. 레코딩은 전작과는 약간 다르게 주이 디샤넬이 사는 캘리포니아와 M 워드가 사는 포틀랜드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선문답 같은 얘기를 하자면 전작 [Volume One]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기본적인 송 라이팅과 악곡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는 그대로 이지만 밴드 사운드가 중심이 되고 현악기를 다양하게 사용하면서 전체적으로 사운드를 확대시킨 점은 분명 다른 부분이다. 기본적으로는 밴드 편성으로 레코딩이 이뤄졌는데 스트링과 만돌린, 페달 스틸기타와 백킹 보컬 등을 적절히 삽입해 풍부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M 워드는 레트로한 취향을 바탕으로 탁월한 기타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몇몇 세세한 요소들이나 형식은 전작의 형태를 이어가는 듯 보인다.

스트링 얘기를 조금만 더 해볼라고 하는데 크레딧을 읽어보면 우리는 스트링 파트에서 정말 말도 안되는 이름 하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 물론 데보츠카(Devotchka)의 톰 해거먼(Tom Hagerman)도 충분히 그렇지만 전혀 다른 필드에서 봐왔던 1987년 생 피터 브로데릭(Peter Broderick)이 참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피터 브로데릭의 [Home] 또한 충분히 말랑말랑한 앨범이긴 했다만 어쨌든 자신들의 이미지면에서도 상당히 영민한 기용이었다 생각된다. 마침 이번 앨범에도 [Home]이라는 제목의 곡이 있기까지 하다.

커버곡 두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이 디샤넬이 만든 오리지날 곡이다. 전작보다 더욱 세련 된 어레인지와 송 라이팅의 묘미를 맛볼 수 있는, 여배우로서와는 별개의 매력으로 채워진 걸작으로 완성됐다. 차밍한 싱어 송라이터로서의 재능 또한 만개했다. 천사같은 하모니와 드라마틱한 현악기가 앨범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사실 그녀의 입지를 따져본다면 충분히 메이저 레코드사에서 나올 법도 한데, 이번에도 미국에서는 슈퍼청크(Superchunk)가 만든 인디명가 머지에서 발매됐다. 머지는 M 워드의 미국 레이블이기도 한데 물론 그런 연유도 있겠지만 뭔가 주이 디샤넬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작가적인 이미지를 계산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메이저 답지 않은 미묘한 풋풋함 또한 오히려 이런 행보에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런데 앨범 공개 이전에 발매된 [In the Sun]의 7인치는 마치 캐피탈(Capitol) 레코드의 올드 쥬크박스용 7인치 라벨 디자인을 그대로 패로디 해놓았다. 약간의 유머를 가진 디자인인데 올드스쿨 간지 또한 내고싶었던 모양이다.

역시나 대부분이 러브송이다. 좀 오버하자면 스스로가 쓴 각본으로 연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다. 보컬도 확신에 차있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르는 달콤한 가성은 달콤쌉쌀한 느낌을 적확하게 표현해낸다. 이것은 귀여운 여자어른만이 가능한 표현이다.

한편의 하이스쿨 뮤지컬과도 같은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In the Sun]은 틸리 앤 더 월(Tilly and the Wall)의 코러스가 곡을 더욱 싱그럽게 만들어주고 있다. 곡은 이미 1월 22일에 공개됐으며 뮤직비디오에도 등장하지만 쉬크한 M 워드의 마지막 기타 솔로가 긴 여운을 남긴다. 사실 이 곡은 맨 처음 클래식 재즈 코드로 이루어진 느린 곡으로 구상됐는데 M 워드가 여기에 비지스(Bee Gees)의 비트를 얹어보면 어떨까 하면서 제안을 했고 결국 우리가 듣는 버전으로 완성됐다. 참고로 뮤직비디오는 [브링 잇 온(Bring it on)], [다운 위드 러브(Down with Love)], 그리고 [예스맨(Yes Man)]의 감독 페이톤 리드(Peyton Reed)가 연출했다.

[Thieves]는 로이 오비슨(Roy Orbison)의 곡같이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직접 그렇게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그 당시의 리듬과 멜로디, 그리고 앰비언스를 체험할 수 있는데 앨범의 색깔에 대해 확실히 선전포고를 하는 인트로 트랙이라 하겠다. 풍부한 코러스와 고전적인 스트링으로 무장한 [Don't Look Back] 또한 놀라운 지점이다. 마치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를 구현해낸 듯한 훌륭한 마무리를 가지고 있는데 뭔가 기대하게끔 만드는 전진하는 스네어가 듣는 이들을 흥겹게 만든다. 아날로그 딜레이 톤의 올드한 기타플레이와 만돌린 소리가 돋보이는 컨트리 팝넘버 [Lingering Still]는 퍼커션과의 밸런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다. 전작에도 참여한 바 있는 배우 겸 뮤지션 제이슨 슈왈츠만(Jason Schwartzman)이 베이스라인의 아이디어를 줬다고 한다.

친숙한 멜로디의 포크넘버 [Me and You]는 중반부부터 깔리는 스트링이 감동을 선사하는데 듣다 보면 후렴구절의 허밍을 따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경쾌한 피아노로 시작하는 [Home]은 꿈결같은 사운드를 바탕으로 적절히 웅장하고 시네마틱한 무드 또한 간간히 담아내고 있다. M 워드가 피아노를 연주한 발랄하고 로맨틱한 [I'm Gonna Make It Better], 풋풋한 올겐소리와 차분한 무드로 일관하고 있는 [Sing], 마치 슈프림스(The Supremes)를 연상시키는 코러스를 들려주는 [Over It Over Again] 등의 화려한 멜로디들이 쉴새 없이 넘실댄다. 아름다운 저녁에 울려 퍼질 것만 같은 세 박자 어쿠스틱 넘버 [Brand New Shoes]는 앨범에서 가장 안타까운 감성을 표출해낸다.

개인적으로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곡은 바로 [If You Can't Sleep]이었다. 사실 전작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로만 이루어진 트랙이 엔딩을 장식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듯한 멀티트랙 보컬 하모니를 담으려 했다고 밝혔다. 아무런 악기도 없이 화음만으로 곡을 만들어냈는데 이건 정말 작정하고 브라이언 윌슨 들으라고 만든 것 같다. 멜로디의 전개는 오히려 가스펠, 혹은 트레디셔널 곡들에 더 닿아있다. 이 ‘자장가’는 근 몇 년 동안 들었던 앨범들의 마지막 곡 중에서는 최고인 것 같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커버 트랙들이 있다. NRBQ의 [Ridin' My Car]와 내쉬빌의 거물 여성 싱어 스키터 데이비스(Skeeter Davis), 그리고 트레이시 데이(Tracey Dey)의 '월 오브 사운드' 버전으로도 유명한 넘버 [Gonna Get Along Without You]의 12현 기타로 연주된 차분한 커버버전을 담고있다. 개인적으로는 페이션스 앤 프루던스(Patience & Prudence)의 버전을 정말 좋아한다. NRBQ의 버전보다는 약간 느리지만 거의 비슷한 기타연주와 어레인지로 주조해낸 [Ridin' My Car]는 듀엣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드디어 우리는 쉬 앤 힘의 앨범에서 M 워드의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들을 수 있게됐다. 하모니와 멜로디를 좀 더 강조하면서 곡들은 좀 뻔한 얘기지만 오리지날 이상의 빛을 발하고 있다.

"주이는 많은 캐릭터를 가지고 있고 어두움과 밝음 사이를 재빠르게 오가곤 했어요. 몇몇 훌륭한 옛날 노래들은 아주 밝은 메이저 코드임에도 정말로 슬픈 가사를 담곤 했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인생의 완벽한 사진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이런 요소들이 음반을 안정되게 만들어 줬어요. 왜냐하면 인생은 언제나 밝지만도, 또한 어둡지만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 두 가지 사이에 존재했죠." – M 워드

첫번째 앨범이 캐쥬얼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즐거운 분위기였다면 본 작은 더욱 견고해졌으며 뭔가 더욱 안정된 분위기로 완성됐다. 보다 세련되고 드라마틱한 스트링 어레인지를 통해 전작을 웃도는 완성도를 이뤄냈다. 영원할 것만 같은 꿈결같은 사운드와 허스키한 보이스가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그리움 비슷한 감정을 전달한다. 카펜터스(The Carpenters)나 비치 보이즈와 같이 곡들과 하모니의 아름다움으로 승부를 보려는 듯 하다.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나 슈프림스, 그리고 최근의 예를 들면 캐이트 내쉬(Kate Nash)나 릴리 알렌(Lily Allen)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단은 가수로서 주이 디샤넬의 성장이 현저하게 눈에 띈다. 고전적인 팝을 기조로 하면서도 크게 진부하지 않은 목소리를 내고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끔은 자유분방한 소녀같고, 가끔은 쓸쓸한 여인 같기도 한데, 좀 뻔한 표현을 빌리자면 목소리 그 자체로 연기를 하듯 여러 감정을 자유자재로 표현해내고 있다. 홈 어드밴티지일 수도 있겠고 재능이라면 재능이겠다.

성장과 사랑의 아픔을 담은 봄의 양지와 같이 따뜻한 앨범이다. 시대를 넘어 계속 사랑 받을 것이다. 주이 디샤넬은 이번 앨범을 "feel-good album"으로 정의 내리기도 했다. 생크림이 듬뿍 얹혀진 케익 같을 지경이다. 파워팝, 걸리팝, 프렌치 팝, 포크팝 등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가히 살아 숨쉬는 '팝스의 전당'이라 하겠다. 5, 60년대, 그리고 70년대의 다양한 공기가 2010년 적 감수성을 더해 완성됐다. 이들의 음악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혹은 시골에 가서 의외로 세련된 간지를 뽐내는 부모님의 오래된 사진들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왜 최신의 것을 일절 취하지 않은 채 굳이 이렇게까지 레트로함을 완벽하게 복원해내는 데에 주력했는가에 대한 생각을 앨범을 들으면서 해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이 취향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도 산출이 가능하지만, 송라이팅에 관심이 있다면, 특히 팝과 멜로디, 그리고 하모니가 주는 전율에 관심이 있다면 아마도 팝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의 요소들을 그대로 불러와야 그 멜로디들이 제대로 맞물려 굴러간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결국 이전에 브라이언 윌슨과의 대화에서 말했듯 이런 멜로디들을 일일이 살려내려면 지금 이들이 고집하는 방식을 채택할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음악적 고민을 전업가수들보다 더욱 성실히 치뤄낸 이 여배우에게 박수 좀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모 딱히 최근의 예를 들 필요도 없겠지만 국내/해외를 막론하고 여배우나 연예인들이 갑자기 지가 종합 예술인인냥 가수나 예술, 감독 같은걸 하겠다고 깝치는 사례들이 종종 있어왔다. 일차적으로 그들은 작품만으로 모든걸 얘기해야 할 것이고, 자신이 표현하려는 것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느냐 또한 관건일 것이다. 태진아님이 사랑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고 했는데, 확실히 음악 또한 아무나 하는게 아닌거 같다.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한상철 (불싸조 http://myspace.com/bulssazo) 출처 : 향뮤직.

첫 스크랩 글..좋은 음반 리뷰 글이래서 참고 좀 해야겠다. 비치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과 주이 디샤넬..의 만남..너무 좋다..

 친구의 부인을 사랑하게된 기타의 신이라 불리어지던 에릭 클랩튼은 이 앨범을 통하여 한 여인에 대한 애절한 짝사랑의 감정을 자신의 혼신을 다해 통속적 사랑에서 위대한 대중예술로 승화시켰다. 그 애걸복통한 절박한 심정이 세월을 넘어서 여전히 감동을 준다. 남자 여자가 존재하는한 이 영원한 테마는 우리의 심금을 울릴것이다. 굳이 가사의 내용을 모르더라도 그의 기타 연주에는 짝사랑의 블랙홀 속에 절망과 희망의 고통이 애끊게 몸부림친다. 마치 횃불에 달려드는 나방같이 에릭 클랩튼은 음악과 죽음 사이에서 사투를 벌인 것이다. 이 앨범을 만들 무렵 이미 마약 중독에 빠져들었고, 그 후 1974년 솔로 앨범으로 재기 할때까지 그는 사경을 넘나드는 마약중증 환자였다. 친구의 부인에 대한 사랑과 집념 그리고 상실이 이렇게 역사에 남는 위대한 대중예술을 만들었던 반면, 기타의 신이라 불리는 젊은이를 파멸의 지경 까지 몰고 갔던 것이었다.

 에릭 클랩튼이 사랑한 여인은 비틀즈의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의 부인 패티 보이드(Patti Boyd)였다. 이 앨범에서 레일라는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미모의 여성으로 패티 보이드를 비유한다.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여서 데이트시 음악을 주제로한 작업멘트로도 이미 식상한 이야기 이겠지만 이 앨범의 주제 자체이기 때문에 이 음반이 나오게 된 내막을 알면 더욱 느낌이 올 것이다.
 
 패티 보이드는 19살의 나이에 비틀즈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조지 해리슨의 마음을 빼았고 그녀와의 사랑을 통해 조용한 비틀즈로 불리는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의 명곡 Something을 만들게 된다. (레논&매카트니의 작곡 재능에 눌려 많은 곡을 쓰지 못한 조지 해리슨은 Something,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에릭 클랩튼은 10대 후반부터 야드버즈Yardbirds(에릭 이후 제프벡 그 다음으로 지미 페이지가 가입함으로써 레드 제플린의 전신이 됨) , 존 메이욜 앤 더 블루스 브레이커스(John Mayall & The Blues Breakers), 크림(Cream),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거치면서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의 위치에 오른다.  당대 최고의 인기밴드인 비틀즈와 교류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이 비슷한 조지 해리슨과 친해진다.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60년대 중반 인도의 동양 철학에 빠지게 된다. 조지에서 비롯한 동양 사상에의 관심은 66년 비틀즈 멤버들이 인도로 가 몇 달간 명상 수행을 하면서 심화된다. 패티 보이드와 결혼한 조지 해리슨이 비틀즈와 동양사상에 심취해 있자 패티는 남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한마디로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남편의 친구인 에릭 클랩튼에게 관심을 보이자 순진한 에릭은 그녀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조지 해리슨이 인도에서 돌아와 다시 가정에 충실하게 되자 에릭은 쉬핑 크림 걷어낸 식어빠진 카페라떼 처럼 상실과 공허의 구렁에 빠지게 된다. 히피 정신과 68 혁명의 자유의 공기 속에서 마약은 신문가판대에서 손쉽게 구할정도였고, 프리섹스는 만연했다. 당대의 음악을 선도하고 있는 재능 출중한 잘생긴 젊은 뮤지션인 그들의 여성편력은 당연했지만 패티 보이드에 대한 마음만은 각별했던 것이었다.

 크림과 블라인드 페이스를 거치면서 하드록의 창시자로써 그의 기타 연주는 정점에 올랐고 패티 보이드에 대한 짝사랑과 음악적 욕심은 데렉 앤 더 도미노스란 밴드를 결성하고 이 음반을 만듬으로써 그의 음악 인생에서 최고의 정점을 맞는다. 그녀의 마음을 빼았기 위해 그는 노래를 만들었고 마약으로 상실의 고통을 달래가며 자신의 모든걸 쏫아부었다. 나중에(요즘의 나이든) 에릭 클랩튼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을 갖춘 친구 조지 해리슨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다고. 그도 그럴것이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로써 명성.인기.최고의 여자. 명상에 의한 고결한 성품. 등등.. 젊은 에릭이 보기에도 배가 아플만 했다. 또 에릭의 자서전에서 보면 하나에 몰두하면 헤어나오질 못하는 천성 또한 친구의 부인에 대한 집착에 한 몫 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성장했겠지만. 반면 마약과 알콜 중독으로 오랜 고난의 인생을 걸었다. 


 이 앨범을 발표했을때, 에릭은 패티 보이드의 마음이 넘어오리라는 것을 기대했지만 그녀는 요지부동했고, 에릭은 이미 강력한 마약인 헤로인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헤로인을 할 꺼라고 하며 유치한 협박으로 사랑을 구걸했다. 그는 사랑의 실패와 친구 지미 헨드릭스의 죽음에 의한 상심속에서 마약의 구렁에 빠져 폐인이 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쉬어한 주변 지인의 도움으로 첫 솔로작품 (461  Ocean Boulevard. 1974.)으로 재기에 성공했지만, 이 레일라 음반 만의 정열과 애처러움 충만한 기운 등은 느끼기 어렵고 패배자의 씁쓸한 고독속의 읊조림 이었다.
 그는 라이브 공연시 계속 레일라 를 불렀고 77 년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과 이혼을 한다. 롤링 스톤스의 세컨 기타리스트 로니 우드 와 관계를 가지다 결국 79년 에릭 클랩튼과 결혼을 한다. 에릭 입장에선 끝까지 속 태우다 결혼에 골인 하게 된 것이다. 그 결혼 생활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지만 Wonderful Tonight 이란 명곡을 탄생하게 했다.
 상식으로 이해 하기 힘든 것이 에릭 클랩튼과 패티 보이드의 결혼식에 존을 제외한 비틀즈 멤버들이 참석해서 축가를 불러 주었다. 조지 해리슨은 자기 부인이었던 여인과 결혼하는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던 것이다. 2001년에 50대 후반의 나이로 숨진 조지 해리슨을 되돌아보면 평생 명상 수행과 동양 사상으로 충만했던 그 였기에 이해가 가기도 한다. 또 결혼 생활 10년(권태?) 하고 이혼한 상태였기에, 친구가 그렇게 오래 힘들어하는 모습에, 그는 마음을 비웠을 것이다.

(힘들게 얻은 사랑도 결국 오래가지 않았다. 여인은 늙어 버렸고 사진속의 에릭의 표정은 정말 인생무상이다.^^ 이혼 이후에도 그의 고난은 어린 아들의 추락사로 이어진다. 그래서 명곡 Tears in heaven 이 나오게 되고 마약과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후 그는 더욱 블루스 음악에 매진한다.)




 그런 아픔이 있고 절실했기 때문에 이 앨범이 주는 감동이 쎄다. 블루스 록의 진면목이다. 고상하게 현학적이지 않고 현실의 삶과 아픔을  진솔하게 토로하는 힘이 있다. 그는 솔직히 말한다. 제발 내게로 와 달라고.. 그의 목소리는 애절함으로 절규하며 진공관 앰프의 볼륨을 최고로 높여 오버 드라이브가 걸린 기타소리는 격정의 고음을 연주할때 그 음의 끝은 갈갈이 찢어지며 그의 마음을 보여준다. 올맨 브라더스 밴드에서 초빙한 듀안 올맨(Duane Allman)의 슬라이드 기타와의 앙상블은 천상의 기타 연주였다. 애타는 마음의 외줄타기 마냥 조마조마한 그 살떨림. 나는 그것을 2007년 에릭 클랩튼의 내한 공연때 몸으로 느꼈다. 황홀했던 기억은 현실에선 꿈과도 같다.
 또한 친구 지미 헨드릭스의 명곡 Little Wing 을 가슴 절절하게 커버했다. 앨범의 전체는 기승전결의 상승 그래프 처럼 채워졌다.  각각의 곡들은 감정의 절정(Layla)의 폭발을 위해 탄탄한 디딤돌이 되고 있다. 앨범의 후반 부 Little Wing 이 한번 터지고. 잠시 숨고르고 최후의 Layla가 터진다. 한편의 연극처럼 이 앨범 전체의 호홉을 같이 타보면 인간 정신이 만들어낸 음악의 위대함을 여실히 느낄것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보내는 구애의 애끓음속에 우리의 예술 정신을 생각해본다.  


Eric Clapton - Layla live. Shift 버튼을 누루고 클릭하세요. http://www.youtube.com/watch?v=fX5USg8_1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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