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자켓 사진 속, 존은 요코에 기대어, 요코는 나무에 기대어 같은 곳을 향해 관조하는 포근한 모습은 서로의 사랑과 평화를 느끼게도 하지만  현실인 세상과의 고립을 나타내기도 한다.

 60년대 20대의 젊은 혈기의 열정과 재능으로 비틀즈의 리더의 위치로 거침없이 달려왔던 존 레논은 거대했던 자신의 20대 삶의 한 챕터를 막 넘어온 와중이었다.  복잡 다단한 비틀즈 후기 상황은 그에겐 비틀즈 세계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여건을 주었다.

 비틀즈에겐 아버지와도 같았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 이후 비틀즈는 멤버들의 결속력이 점점 약해 지면서 해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여러가지 이유중 존과 오노 요코와의 사랑도 한 몫을 한다. 그는 요코를 통해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 특히 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한 상실감과 그녀의 충격적 죽음에 의한 트라우마를 요코와의 사랑을 통해 위로 받고 보상 받는다. 비틀즈에 있어서 오노 요코의 개입은 멤버들의 불화에 증폭제가 되었다. 균열의 틈에 쑤셔박힌 에폭시 같았다. 대신 그녀의 남자인 존 레논은 비틀즈를 벗어나 하나의 진정한 예술가로써 도약한다. 시대의 공기를 호홉하며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천착했다. 그는 연예인 이라는 철장에서 앵무새 같은 록스타의 아이콘을 벗어나 사회를 향해 진실을 노래하는 시인이자, 행동하는 민중투사로 변모한다.

 이 앨범은 비틀즈가 해체한 해(1970)에 발표되었다. *그가 비틀스 말기부터 드러내 온 급진적 사고를 사랑과 평화라는 모토 아래 노골적으로 실천에 옮기던 때였다. 전세계적인 68혁명의 큰 파장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무렵 이피(Yippie)라는 이름의 신좌익과 손잡고 일련의 정치적 이벤트에 적극 가담했다. 그를 이 같은 투사로 몰고 간 이념적 토대가 바로 이 앨범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하여 당시 닉슨 정부에게 위험인물로 인식되어 비자연기 신청이 기각되고 이후 치열한 법정투쟁이 전개되는 등 존의 계속된 고난을 예약하고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비틀즈 해체후 각 멤버들은 제 각각 솔로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솔로 앨범의 순위 차트는 다른 멤버들이 존에 비해서 월등히 앞선다. 그러나 록 음악 역사 뿐만 아니라 대중의 가슴에 이름이 남는건 존 레논의 솔로 앨범들 이다. 특히 이 솔로 데뷔 음반과 곧이어서 나오는 Imagine 앨범. 이 두 앨범은 비틀즈와는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삶과 철학. 예술로써 음유시인이자 실천하는 혁명가로써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노래 '신'(God)에서 말한다. *"난 예수를 믿지 않아! 난 케네디를 믿지 않아!.. 난 엘비스를 믿지 않아! 난 짐머만(밥 딜런)을 믿지 않아! 난 비틀스를 믿지 않아! 난 단지 나만을 믿어. 요코와 나만을. 그게 현실이야." 과거에 고하는 확실한 단절의 의지 표현이다. 신(神)과 현실사회의 우상도 과거의 얘기일 뿐 지금의 그에게는 무의미한 허상이다. 이 곡 '신'(God)에서 레논은 '신이란 우리의 고통을 측량하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못박는다. 그리고 '난 이제 다시 태어났다'고 선언한다. 존의 이런 변모된 '현재'는 바로 존재의 규명과 인식을 통해 획득된 것이다. 이 앨범에서 감상자들은 존의 자기성찰, 과거에 대한 깨우침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자각을 읽을 수 있다.
 당시 그의 사고는 서방체제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노동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에서 존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들추어내고 상황의 돌파를 위해 노동계급의 영웅이 될 것을 천명한다.

 "태어나자마자 사람들은 당신을 작게 느껴지게 만들어버려요.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주지 않아요. 결국 그 고통이 너무 커서 당신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죠. 노동 계급 영웅이란 꽤 멋진거예요 노동 계급 영웅이란 꽤 멋진거예요. 집에선 당신을 상처주고 학교에서는 때리죠. 똑똑한 애는 싫어하고 바보는 무시해요. 결국 당신은 미쳐버릴 것 같아 그들의 규칙을 지킬 수가 없죠. 당신을 20여년 간 고문하고 겁 주고 나면, 그들은 당신이 일자릴 구하길 바래요. 근데 정작 당신은 너무 무서워서 아무 기능도 할 수가 없죠. 당신은 종교와, 섹스, 그리고 TV란 마약에 잠식당해요. 그러면서 자신이 꽤 똑똑하고 계급도 없고 자유로운 줄 알죠. 하지만 내 생각엔 아직도 빌어먹을 농노에 불과해요. 그들이 얘기하길 아직 상류층엔 당신이 낄 자리가 좀 있대요. 하지만 먼저 사람을 죽이면서 웃는 법을 배워야 하죠. 베버리힐즈에 사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면 말이예요. 만약 영웅이 되고 싶다면 절 따라오세요. 만약 영웅이 되고 싶다면 절 따라오세요."
[출처] 네이버 블로그 작성자 펑고

 존은 자신이 부모없이 이모 에게 맡겨 자란 유년기의 불행도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왜곡이 가져온 결과로 인식했다. 종소리로 시작하는 앨범의 첫곡 "mother" 에서 그는 유년의 고통에서 광기어린 작별을 고한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며 절절하게 외친다. 앨범 녹음 이전에 존과 요코는 아서 야노프 박사로부터 정신 치료 요법의 하나인 '원시적 외침 요법'을 받고 있었다. '원시적 외침'은 인간 심리의 깊은 곳에 잠복하는 고통을 상기시켜 유소년기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 모든 것을 토해내는 것이다. '원시적 외침'을 체험한 존은 다시 어머니와 살기 시작한 얼마 후  그녀를 자동차 사고로 잃은 기억 등이 소생해 큰 소리로 질러대며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경험이 이 앨범의  처음 "mother"과 마지막인 "My Mummy's dead" 로 장식한다.

 너무도 유명한 곡 'Love'에선 요코와의 사랑을 통해 그 진정한 의미를 탐구한다.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그의 사랑은 사랑의 통속적인 면을 걷어차고 진실한 자각을 토대로 사랑의 진정한 완결편을 보여준다. 존 레논의 다큐 영화 'Imagine'에서 존과 요코가 하얀 방의 침대에서 올 누드로 누워 애무하며 장난치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어느 순간 그들의 표정과 눈길에서 사랑이란 추상의 관념이 구상으로 진정으로 절절하게 흐르고 있다는걸 보았다. 'Love'의 가사 그 자체였다. 결국 사랑은 레논에게 '우리가 무언가 될 수 있음을 아는 것'(Love is knowing we can be)을 의미했다.

 이 앨범에선 비틀즈 시절때의 귀에 쏙 박히는 멜로디 보다는 사운드와 메시지에 더 귀 기울이게 된다. '사랑'과 '노동계급의 영웅' 이 가장 귀에 들어오는 선율을 가졌다. 웰 웰 웰'(Well well well) 에선 퍼즈 이펙트 걸린 기타소리의 독특한 리듬을 들려준다. 존의 아들 숀이 언급했듯이 그것은 팝의 달콤한 하모니 세계와는 갈라서 있는 펑크 이전의 펑크였다. 그의 태도와 행동은 진정한 펑크 였다. 자신을 넘어서고 이 세상의 부조리를 타파하려는 존 레논의 첫 솔로 앨범은 우리에게 있어서 역사와 도덕 시간에 배운 위인들의 어떤 저서보다도 진실을 전해주는 다시없는 소중한 작품이다. 지구상 가장 위대한 밴드에서 가장 위대한 뮤지션이자 운동가로 서게 되는 순간 이었다. 그는 5년간의 침묵을 깨고 1980년 다시 활동하려 했을때 괴한의 총탄에 맞아 숨진다. 그의 대중적 파급력에 비춰 봤을때, 그것은 확실한 음모였다. 사랑과 평화, 혁명을 역설했던 그가 지금의 우리에겐 절실하다.

1. Mother    2. Hold On   3. I found out   4. Working Class Hero   5. Isolation                6. Remember    7. Love    8. Well Well Well    9. Look at Me     10. God                     11. My Mummy's dead
* 발췌. 임진모   







내년이면 발매 20년째가 되는 록음악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이 앨범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이 앨범은 내 삶에서 사춘기 시절을 정확히 관통한다. 예민한 감수성의 학창시절에 역사가 될 이 음반을 동시대에 실시간으로 누리게 되는 행운을 거머쥔다. 음악팬으로써 비틀즈의 음반들을 활동할 당시에 못 경험했거나, 77년 산울림이 '아니벌써'를 처음 TV에서 불렀을때 그 충격을 동시에 못느꼈음을 항상 아쉬어 했는데, 이 새로운 X세대 출현의 송가와 같은 이 앨범은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내게 변화의 혼돈에, 한 가운데로 밀어 넣는 강력한 마약 이었다. 거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폐부를 휑하니 관통해버렸다. 모든 젊은 영혼들에게..(이제는 시대를 막론하고..)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대책없이 지글거리는 시끄러움과 공허한 외침으로..90년대의 이정표가 되었다.


 90년대 초반 Nirvana(이하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이 울려퍼졌을때 역사는 급변하고 있었다. 이미 공산주의는 와해돼, 오랜 이념 대결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천안문 사태를 통해 중국은 서방에 빗장을 열었고, 그리고 이라크 전쟁 ( 걸프전 )을 필두로 테러리즘과 신자유주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80년대 냉전의 끝자락에서 공고히 했던 모든 가치들은 무너지고 있었다. 레이건이즘을 통해 더욱 억눌렸던 감정은 결국 LA폭동으로 폭발했고, 그 와중에 사회와 모든 문화 예술은 해체의 한가운데 있었다.
 대표적 마초 영웅주의 영화 록키와 람보로 대변되는 80년대 는 90 년대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과 저수지의 개들) 등장으로 새로운 의미, 패러디, 조합하기, 무정부적 해체로써 반형식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동시에 너바나의 등장은 음악 뿐만 아니라, 패션, 삶의 태도나 의식에 있어서 더욱 혁명적이었다.

 가죽 스판덱스 바지에 짙은 화장과 긴 파마머리 로 대변되는 80년대 수많은 마초적 헤비메탈 밴드들은 찢어진 청바지와 플란넬 셔츠, 스니커즈 운동화, 떡진 단발머리의 커트 코베인이 이끄는 너바나의 2번째 정규 앨범 'Nevermind (1991)' 등장으로 한 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 앨범은  'Nevermind' 에 1위 자리를 내 줬고, 순식간에 그것들은 고리타분한 것이 돼 버렸다. Smells like Teen Spirit 이 MTV를 통해 쉴새 없이 나오던 91-92년 사이 기존의 주류를 장식했던 LA메탈은 너무나 급격히 패기처분 되었다. Nevermind 를 통해 강제로 마침표를 찍은 셈이었고, 그 반대급부로 90년대 다양한 음악 장르가 촉발하게 되는 시발점 이었다. 해체라는 시대정신의 한 가운데서 너바나는 활화산 처럼 폭발했던 것이다.

Punk Rock 의 효시가 되는 Sex Pistols 의 단 한장의 앨범 (1977)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신경쓰지마 잡놈들아! 여기 섹스 피스톨스 가 있잖아!) 에서 이름을 따온 Nevermind 는 말그대로 극도로 개인주의화 된 신세대들의 냉소적인 가치관을 드러낸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득세하는 물질적 풍요속에서 변두리 하층민의 삶을 통해 펑크적 혁명을 꿈꾸었다. 결국 돈과 마약, 자괴감에 무너질 우울한 꿈을..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 ( 27에 요절함으로써 전설이 되어버린,) 은 워싱턴주 애버딘 ( 시애틀 외곽의 촌구석 ) 에서 벌목공의 아들로 태어나 8살에 부모가 이혼함으로써 그의 삶은 180도 뒤바뀌기 시작한다. 이리저리 친척집과.친구집, 심지어 강가 다리밑에 노숙하며 전전했던 그는 백인 안의 흑인처럼 불우하고 소외된 심정을 강력한 전복을 외치는 펑크락을 들으며 해소했다.

 펑크락은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전복시키는 태도이며, 음악의 한 형태이다. 파워코드 3~4개로 단순한 리듬과 비트 속에서 3분 안에 짧고 강렬하게 그리고  반복적인 가사의 구절이 특징이다. 70년대 영국의 극심한 경제불황에서 청년들은 분노하며 무정부주의를 외치며 극단적으로 표출한다. 레드 제플린 같은 기업화된 공룡같은 밴드들은 타파해야할 목표였다. 70년대 주류 밴드들 같이 고도의 테크닉적 연주력과 예술성은 그들에게서 30분만에 기타를 배우고 바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함과 자기 실천 정신 울부짖음과 퍼포먼스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충격적으로 전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위에 언급한 섹스 피스톨스가 펑크의 처음이자 그 자체였다.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Rock 이라는 큰 범주에서 항상 펑크 는 기성사회에 물들어가는 정신에 가하는 일침이다.

80년대 MTV의 등장과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의 팝스타들. 7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디스코의 열풍속에서 Rock 음악씬은 메탈리카 같이 더욱 거칠고 공격적이며 테크닉의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반면, 본 조비 같이 대중적인 팝 메탈 지향적인 밴드가 득세했다. 그들은 돈 방석에 올라 리무진을 타고 다니며 자본주의의 갖은 쾌락을 무제한으로 즐기는 위치에 섰다. 80년대 후반 LA에는 마약과 섹스에 점철된 그런 밴드들이 무수했다. 그런 와중에 언더그라운드 씬 에선 70년대 펑크, 섹스 피스톨스와 클래시의 영향을 이어받은 뉴 웨이브 밴드들이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고 있었다. 너바나가 펑크락으로써 직접적인 영향은 80년대의 소닉 유스와 픽시스 였다. 파워 코드 몇개로 이루어진 단순함과. 거친 기타 디스토션 사운드가 특징인 그들에서 너바나는 좀 더 훅(끌림)이 강한 멜로디와 리프(기타의 반복구절)로 묘한 매력을 이끌어냈다. 파워넘치는 드럼과, 시끄러운 기타 노이즈 속에서 몇 번 들으면 허밍할수 있는 흡인력 강한 멜로디의 노이즈 팝 이었다.
_ 너바나의 데뷔작 Bleach (1989)( 600달러의 제작비로 시애틀의 Subpop 이란 인디레이블에서 발매 ) 는 그에 비해 블랙 사바스( 70년대 헤비메탈 밴드 ) 의 펑크적 재해석으로 거칠지만 순수한 매력이 있었다._

너바나는 곧 메이저 회사인 게펜과 계약하고 명 프로듀서 부치 빅의 감독 아래 2번째 앨범이자 메이저에서 첫 앨범인 이 Nevermind 를 만든다. 게펜은 완벽한 상품으로, 가정이 파탄난 음지에서 자란 순진하지만 거친 그들을 팔아 먹었다. 커트 코베인의 평상시 복장인 찢어진 청바지, 스니커즈, 레이어드 룩, 은 너바나 사운드의 특징인 지저분한 기타 노이즈 와 함께. 그런지 Grunge Rock 이라 불리며, MTV를 통해 청년문화에 거침없이 팔려나갔다.
 너바나의 대중적 성공과 함께 동향의 씨애틀 밴드들인 펄잼, 사운드가든, 앨리스 인 체인스는 동시에 메이저로 급부상하게 되고, 그 시애틀 그런지 씬은 얼터너티브 록 Alternative (대안의 록) 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기존의 헤비메탈 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급변하는 역사와 마찬가지로 80년대와는 완전한 단절이었다. 음악, 패션, 가치관 모두 해체되었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세대 X 세대라 불리는 그들은 소외, 마이너리티 감성, 사회의 부조리에 거침없이 분노하며 희망없어 보이는 사회적 약자들인 청년들을 대변했다. 대책없이 지글거리는, 혼돈의 규정할 수 없는 시대정신을 그런지 음악으로 불살랐고, 메이저 음반사들은 그들을 순식간에 주류 락 스타로 만들어 놓고 짧은 시간에 전 세계를 그런지의 광풍으로 몰아 넣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들이 공격하고 타파해야 했던 주류 음악의 위치에 서자 혼란스러워졌다.  그 성공이 기대이상으로 너무 커서 그들은 곧 방향성을 잃고 점점 와해되기 시작한다. 펄잼은 뮤직비디오 제작을 거부하며 저항했지만 티겟마스터란 대기업과 싸우고, 에너지를 소진했고,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더욱 마약에 찌들어 갔다.

 결국 커트 코베인은 미국의 포스트 모더니즘에 입각한 문화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이용되었다 . 거대한 부는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파멸해갔다. 다음 스튜디오 앨범 In Utero (1993) 을 통해 펑크의 정신을 지키려 발버둥 쳐 보지만 이미 그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여러 차례의 자살 시도 끝에 다음해 1994년 4월 초에 27살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집에서 엽총으로 머리를 날려 버린다. 93년 11월 뉴욕에서의 MTV 언플러그드 공연은 자신이 준비한 장례식인 셈이었다. (커트가 요구해서 무대위에 많은 백합 꽃과 촛불을 배치했다고 한다.) ( Lylic 카테고리에 라이브 있음 )  (옆의 롤링스톤스 잡지 커버 속 커트의 티셔츠 문구는 기업화된 잡지는 여전히 역겹다 라고 씌어있다.)
 커트의 죽음은 이전 세대의 요절한 천재적 뮤지션들 (다들 27살에 죽은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 처럼 전설이 되어 앞으로도 계속 베스트 셀러 가 될 것이다. 

 작년에 코디최 선생님의 강의중  미국의 자본이 문화를 어떻게 팔아먹느냐란 실체를 자신의 경험에 비춰 이야기 해 주었을 때, 머리를 스친 생각이 커트 코베인도   그렇게 이용당하고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까지 마약에 중독됐을때, 음반회사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죽어서 전설이 되게끔 방치한 셈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잘생긴 인물에 좀 더 관심이 있다면 커트가 총을 쏘기전 바로 전 시간들을 묘사한 영화 The Last Days 를 보시길 바란다. 구스 반 산트 감독.)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때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습관적으로 AFKN 방송을 틀었다. 가이딩 라이트라는 미국 드라마를 내용도 모르면서 즐겨 보았는데. 단지 야한 장면이 많이 나와서 였다. 그리고 이어서 아메리칸 톱 텐 이란 음반 순위 프로그램에서 차트 1위를 한 Nevermind 앨범의 독특한 자켓을 보았고. Smells like Teen Spirit 을 뮤직 비디오를 통해 처음 듣게 되었다. 건스 앤 로지스를 통해 록 음악을 입문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 새로운 느낌은 충격이었고 강렬했다. 내 안에서 혁명의 기운이 씨앗을 품는 사건이었다. 내면의 고요함,먹먹함 그 순간에 내 삶의 펑크는 심어졌다. 

P.S.
Smells like Teen Spirit 가사 중 일부
 ‘난 내가 왜 맛보았는지 잊어버렸어. 아, 그래. 그것이 날 웃음 짓게 한다고 생각해. 난 그것이 어렵다는 걸 알아냈어. 그것은 알아내기가 어렵지. 아, 괜찮아. 무엇이든지 신경쓰지마... 그것은 덜 위험하지. 우리가 여기 있어. 우리를 즐겁게 해줘. 흰둥이, 모기, 나의 성욕, 부정, 부정, 부정, 부정…….’

 이 앨범 자켓 사진은 간결하게 많은걸 말해준다.
 저 사진속 애기는 성장해서 똑같이 다시 찍었다.

 미키루크가 주연한 영화 '더 레슬러' 에서 영화속 주인공은 커트 코베인이 다 망쳐 놓았다고 하면서 80년대의 마초적 헤비메탈 전성시대를 그리워한다. 나는 커트의 세대이지만 Guns N' Roses 만은 매우 인정한다.





브릿팝 Britpop 이라는 장르(음악사조) 를 촉발했던 블러 Blur 의 세번째 앨범 Parklife(1994) 이후, 90년대 중반의 팝 시장은 영국산, 소위 브릿팝 이라 불리우는 기타 연주중심의 록 밴드 들이 휘몰아 쳤다. 대표적으로 블러와 오아시스, 스웨이드와 펄프, 등등이 견고한 성좌 위에서, 그에 비견되는 출중한 밴드들이 수두룩히 쏟아져 나왔다. 블러의 보컬 데이먼 알반은 1997년 그들의 5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 브릿팝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고만고만한 기타팝 밴드의 춘추전국 시대에서 변화를 모색했고 그 진보적 발걸음은 성공이었다. 같은 해 브릿팝의 완성. 최후의 승자라고 불리어지는 버브의 대망의 세번째 앨범은 발표된다.

 앨범 제목 도시의 송가들은 데이먼의 발언이 무색할 정도로 감성을 자극하는 정통 브릿팝으로써 다음해 까지 영국 전역을 쉽쓸고, 첫번째 트랙 Bittersweet Symphony 는 미국 나이키의 CM송으로써 등을 업고 전세계에 울려퍼지게 된다.
그리하여 98년은 버브의 세상이었다.
 같은 해에 발표된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1997)도 버브와 함께 브릿팝의 대미를 장식했다. 브릿팝이 죽은것은 블러에 한해서 였다. 99년 버브의 해체 이후, 라디오헤드는 다음 앨범 KID A 를 통해 블러와 같이 브릿팝을 벗어나 새로운 음악으로 진보했어도. 트래비스, 스테레오포닉스, 콜드플레이 등등 기타팝을 추구하는 걸출한  밴드들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결국 브릿팝이란 용어는 60년대 비틀즈와 롤링스톤즈를 앞세운 미국 공략, 브리티쉬 인베이젼 (영국의 침략) 이라 불리던 것과 같이 영국 대중음악의 전면적인 미국 시장 진출에 앞서 꼬리표를 달아준 셈에 불과한 것이었다.

 맨체스터 옆 작은 위성도시 위건에서 결성된 버브는 보컬 Richard Ashcroft(이하 리챠드) 중심으로 동네 친구들이 모여서 만든 4인조 밴드이다. 1992년에 처음 발매된 EP (미니앨범) 은 완벽한 싸이키델릭 록 이었다. 정식 앨범을 발표하기 전에 5곡을 담은 이 앨범은 이미 그들의 음악적 비범함을 여실이 보여준다. 지금도 간혹 이 초기 음반을 듣다보면 정식 데뷔도 하지 않은 일개 인디 밴드의 음악이 이렇게 완벽한 예술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영국의 탄탄한 음악 저변에 탄복하게 된다.
 이 EP 이후 정규 1, 2 집 까지 버브는 대중 지향적이기 보다 아트록 지향이었다. 대중적 성공은 못 했지만 음악계에서 그들의 음악성은 인정되었고 비평은 항상 최고였다. 그들이 심오한 아트록을 하는 동안 옆동네 친구들인 오아시스는 데뷔앨범으로 어마어마한 성공 가도 를 달리기 시작한다. 버브의 보컬이자 리더. 리챠드는 이전 부터 ' 3장의 앨범 이후 우린 역사에 위치할 것이다.' ' 이제 왕관을 쓸 시간이다.' 란 자신만만한 발언으로 Mad 리챠드 란 별명도 얻게 되지만 그것은 곧 현실로 완벽히 이루어진다. 도시의 송가들 앨범을 통해서.. 그들은 정말로 역사를 만들었다.

 리챠드는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실이 자신의 재능을 믿고 의심하지 않고 밀어 붙였던 것이다. 그의 작곡 재능은 처음부터 록 스타를 갈구했었다. 밴드의 기타리스트 닉 맥케이브와의 갈등은 팝적인 성공을 꿈꾸는 리챠드와 항상 예견된 상황이었다. 2집을 만들고 리챠드에 의해 닉 맥케이브는 밴드에서 쫒겨난다. 본격적으로 대중적 음반을 만들려고 하는 리챠드는 동향의 사이먼 통 이라는 기타리스트를 영입 하지만 닉 맥케이브의 기타 실력을 메꾸기엔 역부족 이었다. 리챠드는 체면을 구기고 닉 맥케이브를 다시 불렀고, 닉 은 구차하게 다시 밴드로 돌아오게 된다. 5인조 밴드로써 우여곡절 끝에 이 역사적인 그들의 세번째 앨범은 완성했고, 20 세기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 앨범의 크레딧은 밴드 지향적인 기존 앨범들과는 다르게 2곡을 빼고 전부Song written by 리챠드 애쉬크로프트 였다. 그가 쓴 고농도의 감미로운 멜로디는 이 앨범의 대중적 성공에 큰 기여를 한다. 세번째와 마지막 트랙의 밴드 지향적인 이전 스타일 곡들은 다른 곡에 비해 시끄럽고 활기차게 앨범의 조화에 일조한다. 전체적으로 록 음악을 안 들어왔던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어필 할 수 있는 감성적인 노래들로 충만하다. 라디오헤드나 포티쉬헤드 처럼 대책없이 우울과 절망에 밀어놓지 않고, 적당히 지적인 우수에 젖어 도시를 고독하게 관조하는 느낌이다. Bittersweet Symphony 의 가사를 음미해보면 ( Lyric 카테고리에 라이브와 함께 올렸음 )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블루스 로써 쓰고 달콤하게 위로를 건넨다. 이 노래는 롤링스톤스의 더 라스트 타임 이란 노래의 몇 구절을 허락없이 차용한것이 소송에 휘말려 결국 패소한다.

외모에서 풍기는 강한 카리스마의 리챠드는 밴드 내에서 독선적 행동으로 밴드를 위태롭게 하더니 결국 앨범 투어 공연 도중 닉 맥케이브와의 불화가 커져 99년에 밴드는 해체된다. 자의식 강하고 재능있는 두 뮤지션이 한 밴드에서 공생하기에는 절대 민주적 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리챠드의 작곡의 힘이 이 명반을 만들어 냈지만 동시에 밴드의 운명을 단명 시켰다. 그들은 9년의 시간이 흐른뒤 다시 결합해서 네번째 앨범을 만들고 큰 록 페스티발을 통해 90년대의 영광을 재현했다.

 다시 도시의 송가들 앨범으로 돌아가서, 이 앨범은 수많은 나의 음반 콜렉션 중에서도 넘버 원 이고, 가장 힘들고 비싸게 구입한 음반이자, 내 젊은날, 감성의 8할 이상을 채운 소중한 음반이다. 90년대 나온 여럿 명반들 중에서도 하나만 선택하라면 이 것을 선택할 것이고, 60년 로큰롤 역사에서 나의 탑 쓰리 안에 항상 드는 음반이기도 하다. 내말 믿고 구입하셔도 후회 안 하실거다. 엠피삼 이라도 꼭 들어보시길 바란다.
 내가 이 음반을 거금 3만원을 들여서 여기저기 힘들게 발품팔아 남은 단 한장을 발견했을때, 꼭 큼지막한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영국 차트 1위를 한 명곡 4번 트랙 The Drugs don't work (마약도 듣지 않아요.) 가 드럭이란 말 때문에 심의에 걸려서 국내 라이센스가 안 되었고, 그 당시 우리나라가 IMF 여서 수입 자체가 거의 안돼 희기 음반 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하기 힘든 음반을 공들여 구입한 경험 때문에 현재의 엠피삼 시대에서도 음반에 대한 향수는 여전하다.

 The Drugs don't work 는 어릴때 리챠드의 아빠가 돌아가시고 그 슬픔이 너무 커 마약도 듣지 않는다고 강한 슬픔을 비유하는 아름다운 발라드 곡인데, 그 당시 심의위원은 숲은 보지 못하고 단지 드럭 이란 낙엽만 본 듯하다. 이 노래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 떠나보낸 ) 모든 이에게 강력한 위로를 건넨다. 다시는 절망하지 않겠노라고.. 앨범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마치 베스트 음반으로 편집한 듯이 듣기 좋은 부드러운 곡들로 달려나간다. 씁쓸하게 비음섞인 리챠드의 목소리에 꼭 그 순간 가사를 음미 하지 않더라도 감성이 전달된다.

 이 앨범은 하드코어와 테크노 음악이 판을 치던 데카당스한 세기말적 분위기에서 한 줄기 단비 처럼 도시인의 고독과 우울을 아름답게 그려낸 절대 감성의 산물이다.

 도시를 비추는 송가들은 그렇게 고독하게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었다.

P.S. 1993년 리챠드의 예언?

" 나는 당신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밴드들을 당장 50개를 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2년 후에는 잊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단지 올 여름의 티셔츠 같은 존재이다. 역사는 그들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들이 3개의 앨범을 냈을 때 우리는 역사 안에 있을 것이다. " 4년후 이 Urban Hymns 냈을때, 그의 말은 정확이 맞아 떨어졌다. 

인생은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the drugs don't work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기타리스트 존 프루시안테가 공식적으로 밴드에서 탈퇴했다. 그의 홈페이지에 http://johnfrusciante.com/ 공식적 입장 표명을 했다. 새로운 분야의 음악을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마디로 밴드 멤버에 구애받지 않은 자기 색깔의 음악을 하겠단 것이다. 작년에 나온 그의 솔로 앨범 The Empyrean 이 본인 의지의 일환인듯 싶다. 존 의 팬으로써 그의 솔로앨범은 훌륭한 아트이고,  솔로 활동에 성원을 보내는 바 이지만, 더 이상 존이 없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마치 크림 없는 케익인, 그저 카스테라 일 뿐이다. 그것은 이미 1995년 앨범 One Hot Minute 에서 어느정도 증명되었다. (존이 첫 번째로 탈퇴하고 제인스 어딕션의 기타리스트 데이브 나바로가 들어와 만든 음반) 이 앨범 전 후의 존이 참여한 앨범들과 많이 비교된다. 물론 데이브 나바로도 아주 출중한 기타리스트 이긴 해도,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기타리스트는 영원히 존 프루시안테 일 수 밖에 없다. 



 존 프루시안테는 7살 때부터 기타를 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미 LA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유명한, (1983 년 페어팩스 고등학교 동창생 보컬 앤쏘니 키디스, 베이시스트 플리 주축) 앨범 세개를 이미 발표한, 인기 밴드였던 레드 핫 칠리 페퍼스에 1988 년에 가입하게 된다. 기존 기타리스트 였던 하이렐 슬로벡 이 마약과용으로 사망하자, 절친했던 드러머 잭 아이언스도 동시에 탈퇴한다. 그후 잭 아이언스는 펄잼의 초기 드러머를 맡았다. 어쨋든 존은 십대 후반에 명성이 자자했던 밴드에 기타리스트로 가입하고. 곧 밴드는 1989 년에 Mother's Milk 발표해 첫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곧 대망의, 1991 년에 발표한 앨범 Blood Sugar Sex Magik 을 통해 세계적인 밴드로 도약하게 된다.

 성공한 앨범의 공연 투어가 한창이던 1993년에 존은 돌연 밴드를 탈퇴한다. 성공한 밴드의 유명세와, 살인적인 스케줄 등..음악 산업안에서 감수성 풍부한 20대 초반의 젊은 예술가가 버티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음악적 자유를 위해서 떠났지만, 돈 많은 혈기왕성한 락 기타리스트에겐 마약 중독이란 깊은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투브에서 그 당시 중독된 상태의 존의 모습을 보면, 정말. 처참해 보인다. 생각해 보면 존이 고맙기도 하다. 그 많은 재능있고 순수했던 뮤지션들이 마약으로 죽어갔다. 죽음의 조우를 극복하고 존은 재활치료에 성공했고, 보컬인 앤쏘니 키디스는 존이 마약 구입으로 팔아버린 기타를 대신해, 현재 존의 메인 기타인 (위 사진속) 1962년 오리지날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선물하며, 밴드의 재가입을 종용한다. 


 재가입후 1999년에 Californication 앨범을 발표하며 존의 성공적인 복귀를 이루어냈다. Scar Tissue, Otherside 등등 히트곡을 연발하며, 잦은 밴드 멤버 교체의 역경을 헤쳐나간 밴드나, 삶의 끝에서 허우적 되던 존 자신의 인간 승리라 할수 있었다.

 그리고 2002년
By the Way 범을 통해 더욱 성숙된 하모니를 보여주었다. 이 앨범의 투어로 유명한 공연이 2004년 아일랜드 에서의 Live At Slane Castle 이었다. 고풍스런 성이 옆에 있는 엄청난 관객 규모의 야외 공연 인데, 작년에 이 공연 영상을 인터넷서 다운 받으면서 급격히 레드 핫 칠리 페퍼스에 빠져들게 되었다. 보진 않았지만 같은 해에 영국 하이드 파크에서도 20만명 이상을 동원하며 그 해 한 장소 공연으로 최고의 흥행을 했다고 한다.꼭 DVD 로 사야겠다. 또 처음이자 마지막일듯한 한국에서도 공연을 했다. 뒤늦게 이들을 안 것이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다. 

 2006년에 그들의 역사적인 앨범, 이제는 존이 다시 탈퇴한 시점에서 더욱 역사적인 앨범이 될 대망의 더블 앨범인
Stadium Arcadium 을 발표한다. 작년 한해 이 앨범을 무수히 많이 들었는데, 내게 있어 이 앨범은 한 5년 전부터 시들어졌던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다시 찾게 해준 고마운 음반이다. 엄격히 말하면 존의 기타 연주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북돋아 주었다. 존의 스트라토캐스터 소리에 감동 받아, 내 생애 첫 펜더 어메리칸 스탠다드 스트라토캐스터도 구입했고, 심지어 어깨 팔뚝에 지미 헨드릭스 이미지의 문신을 하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이니, 또 영국보다 캘리포니아를 가보고 싶기도 하고, 영국산 우울한 음악을 좋아하던 내겐 대단한 변화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더블 앨범들, _비틀즈의 화이트앨범, 스매싱 펌킨스의 멜론콜리 인피니티 새드니스, 클래쉬의 런던 콜링_, 등등과 함께 존이 마지막으로 참여한 이 스타디움 아카디움 앨범은 대중 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40대의 완숙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이룩한  밴드 음악의 최상의 완성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의 라이브 공연을 보면 멤버들끼리의 자주 눈 맞추며 웃고, 음악의 하모니를 위해 서로 영혼으로 소통하는 것이 느껴진다. 드럼 앞에서 베이스 플리 와 존은 자주 서로 마주 보며 연주를 하는데 그들의 눈빛은 서로 한없이 존경을 표하고 있다. 실제로 인터뷰 등에서 보면 서로의 연주에 감탄한다고 한다. 93년에 존이 탈퇴할때도 존 보다 형인 플리에게 너와 연주 하는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하지만 ~ 이라고.. 속깊이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음악을 통해 최상의 예술, 완벽한 하모니의 예술을 보여준다. 혼신의 열정의 기운이 감상자에게도 전해진다. 그들을 통해 나는 캘리포니아의 투명하고 강렬한 태양을 꿈꾼다. 

 
마약 중독이라는 인생의 큰 암초에서 벗어나 가장 위대한 록 밴드의 역사를 만들어 갔던 그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30대 후반의 그에게 성공적인 솔로 아티스트 커리어를 이루기를 기원한다. 강인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 맑고 순수한 눈과. 어눌한 말투에서 보이는 천성적 여림이, 그의 연주와 함께 천재성을 엿보이게 한다. 다시는 마약에 빠질일은 없겠지만 오래살아서 꾸준히 좋은 음악, 연주를 들려주시기를..


 여담이지만 내가 존 프루시안테를 좋아하게 된 복선 같은 일이 있었는데, 반스앤노블 서점에서 애니 레보비츠의 뮤직 이란 사진집을 보다가 아래 사진을 보고 버팔로 66, 브라운 버니를 만든 감독겸 배우, 뮤지션이기도 한 '빈센트 갈로' 라고 알고 있었다. 그 사진집은 작업실 공간의 뮤지션들을 찍은 것이었는데 특히나 아래의 빈센트 갈로 라고 착각한 사진은 오래 보았던 기억이 있다. 팔의 흐릿한 문신 자국들과 우수에 찬 표정이 묘한 울림을 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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