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랬만에 선물용이 아닌 나를 위한 음반을 구입했다. 이장희의 베스트 음반 인데, 이것은 새롭게 연주하고 노래한 것으로 곡의 발표는 옛날이지만 현재의 이장희의 목소리와 최신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곡의 선별과 구성도 완벽하다. 첫곡 '그 애와 나랑은' 부터 마지막 곡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까지 50여분이 감동의 행복으로 가득하다. 


 설특집으로 MBC에서 방송한 공연 이장희 스페셜 '나는 누구인가'의 공연을 효시로 현재 전국 투어 공연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공연을 앞두고 새롭게 제작한 음반인 것이다. 기타는 최고의 세션 기타리스트 함춘호가 맡았다. 무엇보다 장년의 이장희의 목소리가 너무나 좋다. 영기가 충만한 지혜로운 노인에게서 풍겨나오는 청춘의 울림인 것이다. 


 대자연을 사랑한다는 그의 삶은 자유를 갈구했던것 같다. 자유는 믿음과 책임이 밑바탕을 이루어진 것일텐데 이것이 없다면 방종일 것이다. 조영남이 _~도사에 게스트로 나와 이장희는 남자중에 남자라고 했다. 그의 노래와. 방송을 통해 그의 삶을 엿들으니 내가 봐도 그는 정말 멋진 남자였다. 내가 앞으로 닮고 싶은 그 어떤 것을 느꼈다. 김훈의 글과 이장희의 노래는 최근에 내게 큰 영향을 준 것이었다. 자기회의에 빠져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해 왔을때, 큰 용기와 위로를 준 것이다. 


 사랑하고 이별했고, 자기 삶을 관조하고 자연을 찬양하며, 남겨진 꿈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그의 음악은 누구나 좌절과 상처는 있기 마련인, 오해와 미련의 늪에서 헤쳐나와 남자답게 저벅저벅 걸어나가라는 희망어린 찬가 같다. 적어도 내게는..


 모든 가사가 주옥이지만, 그 중. '불 꺼진 창' 과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가사를 적어본다. 


 지금 나는 우울해 왜냐고 묻진 말아요

 오늘밤 나는 우울해 그녀 집 갔다 온 후로

 오늘밥 나는 보았네 그녀의 불 꺼진 창을

 희미한 두 사람의 그림자를 오늘밤 나는 보았네


 누군지 행복할 거야 무척이나 행복할 거야

 그녀를 만난 그 사내가 한없이 부럽기만 하네

 불 꺼진 그대 창가에 오늘 난 서성대었네

 서성대는 내 모습이 서러워 말없이 돌아서 왔네

 

 말없이 돌아서 왔네 말없이 돌아서 왔네

 말없이 돌아서 왔 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나 드대에게 드릴 게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 할 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 말 있네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삼일절 휴일. 예상치않게 공연을 보게 되었다. 합정 메세나폴리스의 인터파크 아트홀에서 이승환과 아우들 공연이었다. 그 아우들은 밴드..(출연순서대로) 안녕바다. 갤럭시 익스프레스, 로맨틱 펀치, 트랜스픽션, 옐로우 몬스터즈 였다. 그리고 이승환.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밴드는 갤럭시 익스프레스 단 한 팀이었다. 트랜스픽션은 역시나 밥맛없음 이었고, 나머진 잘 모른다. 


 일단 생긴지 별로 안된 이 건물의 공연장은 작지만 사운드는 훌륭했다. 홍대앞 롤링홀이나..상상마당 라이브홀 보다..더 좋으니 라이브 음악을 감상하기에는 최적인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록 공연이지만 스탠딩 관람은 이제 좀 꺼려진다..나이가 들어서인지 록 공연이라도 앉아서 보는게 좋다. 무려 4시간 이상을 서서 감상하다 보니 허리가 천근만근..


 줄 설때 부터 보아하니 관객의 90퍼센트 이상은 여자들. 스탠딩 구역도 크지 않았고, 내앞에 키가 크지 않은 여자들이 대부분이라 관람 시각이 너무 쾌적했다. 최신의 공연장 이래서인지 공기도 먼지가 많지 않은듯했다. 나만 빼고 다들 이승환의 매니악한 팬들인 듯. 그들은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각각의 밴드들이 나올때마다, 너무나 열심히 호응해 주었다. 나는 보리밭의 고개숙인 벼 같은 느낌..


안녕 바다

갤럭시 익스프레스


 갤럭시 익스프레스는 역시나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록의 영웅들이 보여주었던 모든 액기스를 농축한 훌륭한 공연이었다. 지미 헨드릭스처럼 기타 물어뜯기 주법. 피드백..더 후 의 피트 타운젠트 같은 기타 돌려치기..던지는 퍼포먼스..지미 페이지 같은 모션. 짐 모리슨 같은 몰아일체..결국 피트 도허티 같은 젊은의 광기가 녹아있는 공연이었다. 


 그 뒤 나온 로맨틱 펀치란 팀도 잘했다. 탑밴드 2에 나와서. 프린스의 퍼플 레인을 멋지게 커버하며 유명해진 것 같던데, 꽉 찬 밴드 구성에 키작고 독특한 음색의 보컬이 무대를 장악하는 기이한 매력을 발휘하였다.  


로맨틱 펀치

트랜스픽션


 지루한 공연은 트랜스픽션, 자아도취, 이상외모중독?에 빠진 보컬의 록스타 병에 내심 왔더뻑이 외마디 비명처럼 연실...흘러 나왔다. 모든 눈빛, 표정 하나 음악이 아닌 80년대 록스타의 허세가 쩔은 그 보컬은 진솔한 열정의 노래가 아닌, 패션으로서뿐인 록 이었다. 지 멋 대로 사는게 욕먹을 짓은 아니나, 음악은 결국 소통과 교감..(정서의 공감과 반향) 이 중요한 것이니..더 이상 얘기 하면 프릭이나 패곳을 입에 달고다니는 꽉막힌 보수주의자처럼 보일테니.. 앞으로 나의 보수적인 면은 최소한의 상식이란 측면에서 기능하면 좋겠다.


옐로우 몬스터즈

이승환


 옐로우 몬스터즈는 메탈리카와 그린데이를 섞은듯한 막 달리는 음악. 바로전의 밴드인 트랜스픽션 때부터 몸이 힘들어졌다. 계속 과포화 상태의 사운드를 내세우는 밴드들의 음악을 듣다보니, 소음에 무감각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댐핑강한 킥 드럼과 베이스의 저음에 라이브 음악의 현장감을 느끼지만 세시간 넘게 듣다보니 내심 별 감흥이 없어졌다. 


 그렇게 지쳤을 무렵. 드디어 이승환이 나왔다. 역시 클래스가 다른 모습이었다. 낭랑한 목소리. 일단 마이크를 활용하는 모습이 노련했다. 자신의 음색, 음정에 맞게 마이크의 거리를 조절하는 모습이나, 발성처리가 뭐 잘은 모르지만 프로였다. 그리고 관객들의 호응과 참여도는 신기했다. 노래의 특정 부분에 맞춰 코러스 합창을 하거나,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는 퍼모먼스를 하는등. 이승환이 살짝 교주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의 회사 드림팩토리도. 그런 골수팬이 없었으면 가능도 못했겠지.

    

  어쨌거나 이 공연의 취지는 맘에 든다. 자신의 팬덤으로 이승환과 아우들이란 제목으로 실력있는 인디밴드들을 더 알리고. 지원하는 그런 모습..가요계에 선배라면 그렇게 해야 될 것이다. 나가수나 열린음악회에 나오는 록 가수들과는 급이 다른 모습이었다. 어쩜 진정한 프로. 그런데 진정한 프로는 내일의 공연을 위해 단 하나의 앵콜을 하지 않는다는거..ㅋ


 뭐 나야 상관없지만 그 많은 여자들의 마음은 아쉬움으로 눈이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진짜 프로 맞다...


 공연장 밖에는 팬클럽 회원이 마련한 다과와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단 대단)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뱅크시 다큐 영화 제목중) 가 미술 전시의 상업적 행태를 조롱하는 말이라면, 이건 정말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였다.그것도 형식치례가 아닌. 고급 떡과. 작은 호두 파이, 프로폴리스 치약을 가졌다. 공연비의 절반은 리베이트 한 느낌이다. 

 나는 앞으로의 문화가 이런 소규모의 팬덤 문화가 더욱 다양화 되리라 본다. 그 반대로 거대 미디어자본의 영향력도 더 커질 것이고 그 간극은 취향의 존중으로 메꾸어야 한다. 


 서양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하나로 공인되는 사람은 비치 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 이다. 현재 80의 나이에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60년대 이후 기나긴 침체기를 맞고,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가 그들의 신화를 차곡차곡 쌓아가 전설이 되고 있을때, 비운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는 형국이 되었다. 60년대 최고의 밴드 비틀즈가 활동할 때, 이 천재 집단을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밴드는 롤링 스톤스가 아닌.. 미국의 비치 보이스 였다. 


 세기의 라이벌 비틀즈와 비치 보이스는 리버풀과 캘리포니아의 환경에서 그들의 삶을 배경으로 노래를 썻다. 63년 비치 보이스의 서핀 USA는 서핑과 자동차로 대표되는 남부해안의 젊은이들의 문화를 대변했다. 브라이언 윌슨은 비틀즈의 1965년 앨범 '러버 소울'앨범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목표를 세운다. 당시 스튜디오 녹음 기술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드럼, 베이스, 기타의 단촐한 악기 구성에 의한 리듬과 멜로디를 벗어나, 다양한 악기..소리 자체의 질료를 가진 새로운 형식의 음반을 만들었다. 멀티트랙 레코딩에 의한 악기 파트별 분리 녹음, 오버더빙을 통한 소리의 중첩효과. 다양한 악기와 효과음의 사용 등등. 당시에는 없었던 소리의 패러다임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 기술의 획기적 전환을 넘어서 이 음반은 천상의 하모니로서 브라이언 윌슨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해준다. 보통 일요일 아침 비틀즈나 비치 보이스의 음악을 들으면 그 천재성으로 인해 삶이 고양되는 기분이다. 완벽한 하모니는 의식과 정신을 올바르게 가져다 놓는다. 




 맨 오른쪽 인물이 브라이언 윌슨 이다. 사진속 생김새를 잘 보면 나머지 두명의 동생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중성의 흥겨운 서프 뮤직에서 스튜디오에서 예술을 시도하던 그에겐 음반회사와의 갈등속에 신경쇠약을 겪고 당시 시대 분위기에 마약 중독까지 겪으며, 천재성은 더 발화하지 못하고 기나긴 침체의 늪에 빠져 지냈다. 그러다 브라이언 윌슨은 2000년대 이후에 되서야 70년대 초반 당시 구상했던 앨범 '스마일'을 뒤늦게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다. 늙은 그의 모습을 보면 비운의 천재의 인생무상이 참 슬프게 다가온다. 


 이 음반을 들은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는 또다른 충격을 받았고. 대중음악역사상 가장 훌륭한 음반으로 항시 뽑히는 비틀즈의 앨범 '서전트 페퍼스 론니 하츠 클럽'_1967 을 기획하게 된다. 그래서 그 두 앨범은 최고의 위대한 앨범 1,2을 차지한다.  아무리 그런 스튜디오 신 기술을 아낌없이 발휘했다해도 뛰어난 멜로디와 하모니의 향연이 없었다면, 이렇게 시간이 흘러 끊임없이 화자되지는 않을 것이다. 영원한 고전이 된 이 음반은 천재들의 라이벌 의식속에서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와 노력이 먼  후 세대들에게도 얼마나 큰 감동과 영감을 심어주는지를 확인시켜준다.  




연말과 새해초부터 이 앨범을 다시금 아주 감동깊게 듣고 있다. 대중적 멜로디 감각이 천재인 사람들이 있다. 위저의 리더, 리버스 쿼모는 그러한 천재군에 속한다. 대충 생각해봐도. 그린 데이의 빌리 조 암스트롱. 영국으로 넘어가서..노엘 갤러거. 트래비스의 프랜 할리. 스테레오포닉스의 켈리 존스 등이 즉각 떠오른다. 그중 리버스 쿼모가 쓰는 위저의 곡들은 뭔지 모를듯, 애잔한 향수감을 일으킨다. 이 앨범이 나온 스무살에 들어도 그랬고.. 지금 들어도 마찬가지다. 머나먼 고향의 근원적인 그리움이랄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노래는 이와같이, 뭔가 애잔한데, 지금은 잡을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무엇을 어렴풋 인지하게 하는 음악 인것 같다. 그럼으로서 인간의 선한 마음으로 회향하는 감정을 갖게 만드는 음악이랄까.


 너바나의 네버마인드(1991)가 제껴놓은 펑크, 얼터너티브 록의 물결에 가장 대중적이고, 그들만의 풋풋한 색깔을 유지한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너무나 훌륭한 앨범을 발표하고 있다. 로큰롤의 정신은 늙지 않는다란 말이 있듯이. 외모가 나이 들어가도 그들의 음악만은 여전히 청춘의 코어에 근접해 있다. 혈기 왕성.위트와 허세.에너지 과잉. 그리고 어떤 근원적 그리움.

 지금은 그들의 앨범이 몇집까지 나온지 모르지만. 1994년의 데뷔앨범(옆. 블루 앨범이라 부른다) 과 지금 소개하는 이 핑커톤(1996)앨범은 90년대의 젊은이의 감성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명작 중의 걸작이다. 


 사실 위저의 2집 핑커톤 앨범은 당시 흥행에 참패한 앨범이었다. 워낙 1집으로 혜성같이 나타나 그린 데이의 두키 앨범과 함께 얼터너티브 씬을 초토화 시킨 앨범의 후속작은 엄청난 기대를 하기 마련. 소포모어 징크스 라고 하나.. 옆의 데뷔앨범 자켓사진 만큼 그냥 동네 청년들의 풋풋한 모습의 그들이 메이저 록 씬에서 엄청난 성공가도를 달릴때, 분명 그들은 초심을 잃지 말자. 록의 본연의 자세를 놓치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2집을 준비한것 같다. 처음 들었을 때는 뭔가 1집의 잘 만들어진 팝,록 보다는 더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사운드로 당혹감을 주지만. 그 소란스러움 속엔 보컬 멜로디들이 보석같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너바나의 네버마인드와 인 유테로 앨범의 관계같이, 메이저 레이블 소속이지만 록 밴드 고유의 순수함은 잃지 말자라는 방향성이 느껴진다. 근데 듣다보면. 처음엔 당혹스럽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손이 가는 앨범은 핑커톤 앨범인 것이다. 이런거야 말로 진정한 걸작. 


 위저의 1,2집은 음악도 최고이고 또한 최고의 앨범 커버인것 같다. 파란 배경지앞의 치장하지 않은 인물 사진. 그리고 일본민화의 아기자기하고 오묘한 그림. 특히 일본민화의 사용은 모든곡을 작곡하고 노래하는 리버스 쿼모.(키 제일 작은 사람)의 영향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의 수재였다고 한다. (진짜 천재 맞는거 같음) 그의 아내는 일본인으로. 2집 앨범의 겉표지.안과 뒤의 이미지에는 한반도와 일본이 그려진 고 지도와..찢어진 눈의 일본 여인 사진이 어둡게 새겨져있다. 역시 천재 답게 여자 취향이 고급이다. 그리고 앨범의 후반부 노래 사이에 어느 여성의 한국말이 들린다. " 어느 회사 제품이죠? " 라고.. 앨범 북클릿의 레터링을 김경희란 한국사람이 했다고 써있다. 아마도 이 사람 목소리인듯..



 90년대의 날고 기었던 록밴드들은 이제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몇몇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위저의 최근 활동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그 위저만의 특질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다. 거친 록 음악속에 아련함을 일구어내게 하는 것. 여전히 풋풋하고 기성세대에 타락하지 않은 중년의 청춘을 만날수 있다. 그래도 오롯한 그들의 청춘의 앨범인 1집과 2집 핑커톤을 강추한다. 


 특히 5번 트랙 어크로스 더 씨 부터 마지막 까지.. 향수어린 멜로디의 향연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ㅋㅋ

 



 어슴푸레 느즈막히 동이 터오는 비오는 일요일 아침,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조심스레 마시며 씨디 플레이어에 런던 콜링을 집어넣는다. 정신이 번쩍 든다. 일말의 무의식의 파편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나는 명징해진다. 이 순간 나의 존재를 일깨우는 뭔가의 기운을 오롯히 느낀다. 창밖의 서늘함 속에서 귀의 솜털에까지 집중한다. 클래쉬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 조 스트러머의 외침은 그만의 외침이 아니었다. 공허와 자괴가 아닌 확신과 신념이 꽉 들어찬 울림이었다. 


 조 스트러머 1952~2002


 1970년대 영국의 펑크(Punk)록의 시작을 섹스 피스톨스가 열었다면 펑크록의 완성은 클래쉬가 이루었다. 그들은 단순하고 거칠기만 한 펑크록의 형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리듬을 접목했다. 쓰리코드 위주의 신나게 긁어대는 섹스 피스톨스의 원형질 펑크에서 레게,스카,팝,록,R&B 등등의 다채로운 리듬으로 자신들의 펑크적 태도와 정치적 성향을 내세웠다. 치기어린 허무주의자 섹스 피스톨스가 신선한 자극이고 충격이었다면 클래쉬는 프로테스터(protester)로써 대중속으로 파고들었다. 음악을 통해 적극적으로 현실참여적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인종차별, 실업 문제, 불공평한 법과 경찰, 미국의 세계 지배 등 현실에 대한 저항적 목소리를 첨부했다.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우리들에게 그들의 메시지를 통한 사상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음악적으로 이뤄낸 성과는 대단하고 끊임없이 화자된다. 그들은 저항의 메시지 전달이라는 목표를 유효하게 달성하기 위해 펑크의 세련화를 통해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굳이 언어의 논리를 떠나 음악으로 그들의 정신이 전달된다는 점이 음악의 위대한 점이 아닐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음반 중 하나이고, 가장 완벽한 이미지의 록 앨범 자켓으로도 유명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앰범 디자인을 패러디 했는데, 이것은 엘비스를 존경하려는게 아니고, 불멸의 로큰롤 이미지를 창조한 이름모를 디자이너를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90년대 중반 홍대앞의 허름한 클럽에서 펑크씬을 일구었던 크라잉 넛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동네 음반가게에서 크래쉬(안홍찬이 이끄는 헤비메탈 그룹)를 달라고 했더니, 클래쉬를 잘 못 주었고 그들은 펑크에 빠지게 되었노라고, 나도 비슷한 일이 있긴 했는데, REM을 달라고 했더니, Ref를 주던데, 이런..


 50의 나이에 고인이 된 조 스트러머를 기리며 비오는 날 런던 콜링을 듣는 이 기분. 

 그의 얼굴에서 왠지 카뮈와 브루스 스프링스턴 이 겹쳐진다. 



‘이 음악은 국가를 휘젓는 거지. 이 음악은 센세이션을 야기시키는 거야. 어머니에게 말해. 아버지에게 말해. 모든 게 잘될 거라고. 이것은 혁명의 록이지. 난 충격의 상태야.’ ‘혁명의 록(Revolution Rock)’



 RHCP 의 공연을 보다 보면, 이 곡을 연주할 때 그들은 어떤 화룡정점에 오른 영혼 혹은 어떤 정신의 끝에 다다른 느낌이다.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진짜. 록 스피릿의 발현이다. 특히 존 프루시안테의 기타 연주는 감성과 테크닉의 절묘한 조화다. 그는 마치 오선지 위의 예수님과도 같은. 정말 자유자재로 거침없고,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는듯 하다. 몰입의 경지는 4인조 밴드 음악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성을 보여준다. 인크레더블 존..


 레드핫의 여러 공연중. 가장 최고는 당연히 아일랜드 슬레인 캐슬 공연과.  위의 2006년 파리 공연인것 같다. 최근에 유투브에서 2007년 3월 폴란드에서 한 공연 풀 영상을 보았는데, 역시 존의 연주는 스타디움 아케디움 투어의 막바지, 밴드 탈퇴를 앞두고서 인지, 절정을 보여준다. 비오는 날 들으니 더더욱..


 페이브먼트와 스티븐 말크머스의 솔로 음반은 제깍제깍 CD로 다 소장하고 있지만, 이 음반의 발매는 뒤늦게 알았다. 더욱이 프로듀서가 벡 이라니, 이미 페이브먼트 5집과 솔로 1집에서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와 작업한 바 있으나 90년대의 음악 천재 아이콘인 벡 과의 조우는.. 심히 설레이지 않을수 없다. 벡은 오버와 인디를 넘나드는 뮤지션이니 말크머스와의 작업은 그리 이질적이진 않다. 암튼 두 천재의 만남은 더욱 좋은 노래와 연주로 화답한다. 말크머스의 천재적 작곡은 여전하고, 기타톤의 다양함은 흥겹다. 예전 읍반의 연주의 산만함과 개성은 좀 더 곡의 충실도에 있어서 집중적으로 변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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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을 본다는 것은 신기루를 본 것과 같다. 황홀했던 순간은 기억에 붙들고 싶어도 더욱 빠르게 휘발되어 버려 내가 그것을 정말 본 건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마치 첫눈에 반한 여자의 얼굴 생김새가 도통 기억이 안 나는 것처럼.. 그냥. 멋진 음악과 한여름의 분위기가 순간 지나갔다. 설명할 수 없는 이쁨이 왜 그렇게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지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없듯이 내가 좋아하는 록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감상하는 일은 그저 황홀했었다. 


 토요일의 헤드라이너 였던 북아일랜드 출신의 스노우 패트롤과 일요일 헤드라이너 였던 영국 웨일즈 출신의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는 정말 멋진 공연을 펼쳤다. 록페를 보러가는 이유는 이 헤드라이너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되어진다. 지산 록페 같은 경우. 라디오헤드와. 스톤 로지스 도 물론 영국 음악의 기라성 같은 거물급이지만, 교통편. 숙박. 터무니 없는 대기업의 횡포 같은게 신경이 쓰여, 집에서 가기도 편하고 좀 더 록페스티발의 원조인 펜타포트에 2일 가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밤 10시에 시작하는 헤드라이너 공연에 비해 그 이전의 공연은, 40~50분 공연하고 30~40 그 뒤 밴드가 장비 셋팅할 동안. 작은 스테이지에 펼쳐지는 공연을 보며 왔다갔다 하는데, 딱히 땡기는 밴드도 없고, 그다지 사운드도 좋지 못했다. 하지만 록페의 꽃인 헤드라이너 공연은 자기네 스태프들이  이미 완벽히 장비와 조명등등의 셋팅이 이루어져 바로 이전의 밴드 공연에 비해 소리도 매우 좋았고, 완벽했다. 그 차이가 생각보다 커서 역시 사운드 엔지니어링을 하는 사람의 힘이 큰거 같다. 어쩌면 기분상. 주인공의 공연은 더 기대감이 크고 마음의 비판을 완전히 내려놓아서 그럴 수 도 있겠다 생각할수 있지만, 소리가 객관적으로 차이 나는 것은 확실하다. 









 토요일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헤드라이너인 스노우 패트롤 이었다. 보컬인 게리 라이트보디 는 관객의 반응에 놀라고 감동하는 눈빛을 바로 뒤의 영상 패널에 고스란히 전해줬다. 한마디로 뮤지션과 관객이 서로 감동받아..열정의 공연을 내내 펼치는 멋진 광경. 이때 느낀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은 성공한 록 밴드 라는 것. 전세계를 공연 투어를 도는..록 밴드.. 지구 반대편의 동양의 작은 나라에 와서, 이렇게 관객이 거의 모든 노래를 같이 불러주고. 후렴구의 코러스 같은건 알아서 우렁차게 호응해 주는, 이런 관객앞에서 어떤 뮤지션 이라도 절정의 행복감을 느낄것이다. 


 스노우 패트롤은 비교적 뒤늦게 안 밴드임에도. 역시 음악은 훌륭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주 좋아할, 영국적인 감성 충만한 밴드였다. 프론트 맨인 게리 라이트보디의 음색과 노래 실력은 남자인 나 조차도 빠져들게 만들었다. 백인 남자 록 가수 치곤.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순박하고 진정성이 엿보이는 외모다. 키도 크고, 멋지다. 요즘 안 그래도 펜더 72텔레 디럭스에 꼿혔는데, 보컬과 기타리스트의 메인 기타가 그것이다. 


 이날 별로였던 공연은 일본 펑크록 밴드 팩트 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밴드인 칵스.. 일본 펑크록 밴드는 다 비슷한 노래들..막 달리는 곡들인데 다 똑같이 들림..그냥 소리질르고, 젊은 관객은 슬램 혹은 모싱이라 불리는 격렬함을 즐기고, 디스토션 걸린 일렉기타 3대의 소리는 다 뭉그려지고 섞여서 무슨 연주를 하는지도 모르겠는..한마디로 그냥 크렁크렁 대고 꽥꽥대는 소리만 줄창 함. 그 다음날 또다른 일본 펑크록 밴드도 똑같았음. 음악을 좋아하고. 많이 들으면 편견이 없다지만, 그건 적어도 내겐 맞지 않는말. 정말 병신 같은 밴드들도 수두룩함..


 칵스는 보컬이 한국말 노래를 하는데..무슨말인지 하나도 전달이 안됨. 소리도 안좋고. 노래를 만들때부터 가사 전달력이 약한듯하다. 내 생각엔 가사가 있는 경우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의 차이점은 가사가 잘 전달되는냐..그냥..대중 음악에 뭉게느냐의 차이인것 같음. 다음날 김씨의 뜨거운 감자 같은  경우. 어쨌거나 한국말 가사의 확실한 전달력이 있으니까. 음악의 공감. 소통이 되어 그냥 흥에 겨워 분위기만 취하는 음악과는 급이 다르게 느껴졌다. 뜨거운 감자의 기타리스트 도 매우 좋았다. 









 일요일날은 여지없이 비가 내렸고, 밤 10시 대망의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미친 거리의 전도사들/ 이하 매닉스라 부름)의 공연을 할 때는 비가 그쳤다. 매닉스의 공연 바론 전 팀이. 일렉트로닉 음악의 혼성 듀오 였는데,(아마도 크리스탈 캐슬 이었던 듯) 이 때 가장 짜증이 솟구쳤다. 어제의 스노우 패트롤 때 관객의 수준높은 취향과 매너가 급실망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된, 내 딴엔 지랄스런 공연이었다. 말초적인 전자 음악에 맞춰 이펙팅 잔뜩 걸린 귀신나올까말까한 이상한 소리의 괴성만 질러대는.. 사람들은 클럽에 온듯 피상적인 감각에..무아지경 재밌어 했다. 내가 일렉트로닉 음악을 싫어하는게 아니라, 음악이라 부르기엔 그 듀오의 수준이 저급이었다. 사람들은 페스티발이니까 그냥 즐기는 거고, 나는 나이들어서, 음악을 감상하러 온 것이고, 그건 내겐 포르노의 말초적 자극 같은 것이었다.

 

 어쨌거나, 시간과 비와의 인내를 감수하며, 드디어 매닉스가 등장했고, 90년대 밴드의 향수로 귀환이 시작됐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좌파의 메시지. 쿠바 의장 피델 카스트로가 최초로 초대한 서양 밴드로 쿠바에서 공연도 한 매닉스는 현재에도 꾸준히 좋은 음반들을 내고 있다. 보컬 제임스 딘 브래드필드의 트레이드 마크인 레스폴 커스텀 흰색 기타는, 그들의 연륜 만큼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되어가고 있었다. 나오자 마자. 그들의 명곡. 유독 이 노래를 언제쯤 부를까 기대했던 모토사이클 엠티네스 를 불렀다. 그 특유의 기타 리프가 울려퍼질때, 우와..참 신기하다..이 눈과 귀와 피부의 감각이,, 그건 진짜였지만, 마치 모니터로 공연 DVD감상하는 것과도 같은.. 보컬의 듬직한 체형과 중년의 마피아 같은 풍모 이지만 고음의 시원시원한 음색과 기타 솔로 실력은 진정한 록 스타였다.

 

 노래 한곡 한곡이 워낙 유명하고 좋은 곡이어서, 그만큼 활홀한 시간은 스피디하게 흘러갔다. 에버라스팅..쓰나미. 아 디자인 포 라이프 등등등. 어찌 저런 노래들은 만들었을까..혀를 내두르게 된다. 멋지고 멋지도다. 웨일즈의 영웅들은 한국에서의 첫 공연을 열정적으로 치뤘다. 일요일 밤이라 관객이 좀 적은듯 했으나, 공연 자체는 좋았다. 진정한 록음악을 느끼고 싶다면..매닉스의 베스트 음반의 필청을 권한다. 가사까지 이해하며 들으면 더 좋겠지만.. 음악 자체의 힘은. 메시지의 내용을 몰라도 그 본질의 감정은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내가 이 공연을 본게 맞나 하는 실감이 안난다. 그만큼 좋은 기억은 신기루와도 같은 것. 이 실제의 감각은 찰나의 마주침. 스쳐지나가는게 아쉽긴 하지만. 삶의 본질은 원래 그런것 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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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rock hero 는 잭 화이트 다. 누구나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빈사상태에 허덕이는 록 음악계에 그는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을 합쳐놓은 록의 메시아 처럼, 죽어가는 록의 열정과 상실을 대변했다.


 디트로이트 슬럼가에서 시작된 그의 음악 행보는 1997년 화이트 스트라입스 (White Stripes)  를 결성하면서 시작한다. 드럼과, 기타_보컬의 록 듀오인. 잭 화이트와 멕 화이트는 남매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결혼을 했었던 사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부부 밴드였는데. 어느 시점에서 이혼을 한 사이..  아마 밴드가 유명세를 타면서 점점 균열이 생기지 않았을까.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6장의 앨범 자켓 사진을 보면 그들의 심리적 관계가 순차적 으로 표현된 것도 같다.) 


 1999년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첫 앨범이 발표되면서. 잭 화이트의 천재성은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개러지 록 (garage rock) 리바이벌의 기수로써 그는 뉴욕의 스트록스와 함께, 2000년대의 록의 아이콘이 되었다. 90년대 초의 너바나와 펄잼의 양대산맥 처럼. 그런지가 아닌 개러지 열풍을 일구었다. 개러지 록은 말그대로 차고의 록음악 같은 아마추어리즘의 단순하고 날것의 에너지가 서려있는, 록큰롤의 원시성에 충실한 음악의 장르를 말한다. 평론가들이 말 갖다 붙이기에 불과하지만. 90년대 후반의 하드코어.핌프락..일렉트로닉이 난무하던 세기말적 분위기에서.. 다시 록의 원점 회기에 천착한 일련의 밴드중에서..화이트 스트라입스와 스트록스는 그 단순함의 매력이 발군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음악행보는 그 수준과 열정의 성실함이 상상을 초월한다. 천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2000년대에 활동하지 않고. 지난 세대에 활동했다면.. 어느 누구보다 시대의 전설이 될 인물이었다. 물론 지금도 대중과 평단의 찬사 뿐만 아니라 기라성 같은 선배 뮤지션들도 그를 인정한다. 롤링 스톤스의 라이브 영화, 샤인 어 라이트에 참여를 했고, 지미 페이지와 디 엣지와 함께한 기타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도 그의 존재를 엿 볼 수 있었다. 록의 시대를 관통한 평론가 로버트 힐번의 견해 또한 그러했고. 아마도 잭 화이트 음악의 뿌리는 블루스에 기반해,  로큰롤의 역사를 함축한 21세기형 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본다. 





 올해 잭 화이트의 첫 솔로 앨범이 발표되었다. 빌보드 1위를 했다는 소식이 최근에 들린다. 1999년 화이트 스트라입스로 데뷔해 2007년 까지 6장의 음반을 발표했고, 프로젝트 밴드로.. 라콘터스에서 2장.. 데드 웨더에서 드러머로 활약하며 2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기타. 건반. 드럼..보컬 다 엄청난 실력이다. 그리고 영화의 출연까지.. 음악적인 테크니션 이라기 보다,  그의 음악은 로큰롤의 코어에  가장 근접한 그 무언가가 느껴진다. 깊은 곳에 숨어있는 또다른 영혼을 일깨우는 삼매의 음악으로 내게 다가온다. 


 2003년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이 노래가 나왔을때.. 이미 그들은 거물이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그들의 인지도가 형편없지만..아마도.. 미국적인 블루스 전통이 다분해서 인지.. 처음 들으면 시끄럽게 들리기도 해서?  록의 단순함과 쏘울풀함을 느껴보시라..앞으로 잭 화이트의 솔로 활동의 행보가 기대된다. 그는 21세기 록의 구세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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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대앞을 다니다보면 일본인 여자들이 어느 카페나 레스토랑 앞에서 조금은 흥분하며 사진찍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동행인에게 물어보니 어느 드라마에 나왔던 장소라고 했다. 그들에게 그 장소들은 특별한 곳이다. 매일 별일 없이 반복되는 삶이 무료하고 따분할때, 그녀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후 드라마 속의 사랑으로 대리만족하며 자신만의 환상의 방을 가꾼다. 꿈에 그리던 주인공들이 있었던 실제의 장소에 와서 로맨틱한 환상을 되새김질한다. 나는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팬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전에 깨달았다.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순수한 팬의 입장에서 그들의 마음을 존중하게 되었다. 나 또한 리버풀에 가면 비틀즈의 흔적들을 쫒아 설레이고 흥분할 것이며, 시애틀에 가서는 지미 헨드릭스와 커트 코베인의 발차취를 걸을 것이다. 대중 문화의 힘은 그리 큰 것이다. 타인의 취향을 폄하하거나 잣대를 세우기 보단 그러한 마음을 헤야려보자. 
 앞으로의 여행은 그냥 구경이 아닌 테마가 있는 문화 여행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다음 영상은 당시 아이돌이랄수 있는.. 역사의 전설이 되어간 영국의 뮤지션들이다. 

비틀즈의 존 레논. 보컬
크림의 에릭 클랩튼 기타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인 키쓰 리차드가 베이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어런스의 드러머.. 



 
 이 글, 다시 읽어봐도 재밌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뮤지션이기도 하지만. 서양인의 개고기 시식과 노래방 탐사같은, 글을 통한 상상도 재미있다. 왠지 라이브한 노래방은 의심이 간다. 여성이 껴 있긴 하지만..
여하튼 말크머스의 음악은 천재적이다. 다시 페이브먼트를 재결성해 공연을 하던데..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스티븐 맬크머스, 메리 티모니 인터뷰,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4박 5일

최세희 nutshelter@hotmail.com | contributor
 
2002년 1월 5일 토요일 오후 5시 25분

인천 공항. 전방 3 미터 경에 회색 재킷 군청색 코듀로이 바지를 걸친, 회갈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한 백인 남자 등장. 1990년대 후반 [ATN(Addicted To Noise)]에서 본 사진과 똑같은 모습이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스티븐 맬크머스(Stephen Malkmus). [ATN] 화보를 빼면 "Shady Lane" 뮤직 비디오 클립이 그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비주얼 데이터의 전부였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다행이었다(그 뮤직 비디오에서마저 그는 '목 없는' 사나이로 출현하지 않는가). 반듯한 꽃미남형 얼굴에 꺽다리형 체구. 환호하는 그의 팬들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으며 그리로 발걸음을 옮기는 '우리의' 미스터 스티븐 맬크머스. 이어지는 꽃다발 증정식(?)과 사인 공세, 사진 촬영에 친절하고 익살맞게 포즈를 취해주는 것을 보니 긴장이 좀 풀렸다. 심하게 말해 외골수 '환자'가 전설이 되는 이 동네(?)에서 그런 민간인적(?) 온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접대하는 '진짜' 민간인 입장에서 반갑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쯤 해 가서 아는 척. 신심 어리고 얌전한 팬들은 조용히 물러가고. 악수를 한 후 공항 라운지의 한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의 있게 걷는 것은 귀찮다는 듯 발을 질질 끄는 그의 걸음걸이에 일순 '이것이야말로 슬래커(slacker)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팬 서비스용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불현듯... -.-;

불고기 정식을 메뉴에서 고른 그는 "기내식도 이걸 먹었는데 별로 맛이 없었는데, 여기는 맛있다"며 능숙한 젓가락질 솜씨를 보여주었다.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고. 두어 달 전 휴가차 하와이에 갔을 때도 잊지 않고 한국식당을 들렀었다고. 그러나 식성에 비해 상당한 소식가(한국 체류 내내 밥 반 공기 이상을 넘기는 그를 보지 못했다). 마타도어(Matador) 레이블의 공동사장인 크리스 롬바르디(Chris Lombardi)와 인터내셔널 마케팅 팀장인 제스퍼 에클로우(Jesper Eklow), 힐리엄(Helium)의 리더이자 이제는 마타도어 소속 솔로 뮤지션인 메리 티모니(Mary Timony)는 9시 55분 비행기로 도착 예정이기에 맬크머스만을 태운 채 서울로 향했다. 첫 방문객다운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인천 공항이 멋지다며 새로 지은 것 같다고.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사 관련 책을 읽었다는 그는 일본과의 정치적 문화적 관계가 여전히 민감하냐는 질문부터 한국 전쟁에 대한 것까지, 한때의 역사학도다운(?) 질문을 하기도 했다. 서울의 평균 인구는 물론 서울과 평양간의 거리 등을 묻기도 해서 그에 대한 수치적 정보가 미진한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으나 동행한 알레스 뮤직의 이응민씨 덕에 모면. 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배철수 목소리를 들으며 웃은 그는 "일본 사람 억양 같다"고 한 마디. 더불어 중국어도 들어 봤는데 한국어가 더 듣기 좋다는 이야기도 한다.

알레스 뮤직과 마타도어 레이블과의 전격 계약이 성사될 즈음, 맬크머스와 티모니의 중국 공연 소식이 들려오고 겸사겸사 해서 한국 공연도 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맬크머스 측에서 흘러나오게 된다. 예스 사인을 보낸 알레스 뮤직 측은 맬크머스와 티모니의 앨범 라이선스는 물론 마타도어와의 계약 체결 기념을 명목으로 한 공연 기획을 추진하지만 중국 정부의 공연 금지로 맬크머스 일행의 중국 행은 좌절되고 만다. 그래서 남은 것이 한국행. 공연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관광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그는 희망 관광 코스 중에 "크레이지"한 한국 음식 시식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예를 들면? 소의 내장이나 뇌. 그는 자신의 배와 머리를 번갈아 가리키며 씩 웃는다. 개고기는 어떤가? 불쑥 물었다. 요새 여긴 개고기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될 만큼 떠들썩한데. 정말인가? 전혀 몰랐다. (잠시 생각 후) 월드컵 때문인가? 그렇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개고기 식문화를 정말 몰랐나? 전혀 몰랐다. 그렇군. (잠시 또 생각하던 그) 넌 먹어봤니? 아뇨;;(*.*) 한 번 먹어보고 싶은데. 같이 가서 먹자. 헉!!! 농담이지? 설마아(...가 사람 잡은 이야기는 곧. 개봉박두!) 우여곡절 끝에 명동 R 호텔에 도착한 일행. 필요한 게 있으면 어쩌구 운을 떼는데 "난 잘해 나갈 수 있을 거야." 웃으며 손을 내민다. 내일 오전 9시에 로비에 픽업하러 오겠다고 말한 후 호텔을 나왔다.


1월 6일 일요일 오전 9시

명동 R 호텔 라운지 도착. 맬크머스 외 세 명의 백인 발견. 대륙형 체구의 맘 좋게 생긴 털보 아저씨 둘과 고딕 풍으로 화장시키면 멋지겠다 싶은 브루넷의 처녀. 크리스 롬바르디와 제스퍼 에클로우, 그리고 메리 티모니였다. 그들을 밴에 태운 후 삼청각 쪽 한식집에서 아침. 알레스 뮤직의 김효진씨는 한겨레신문에 나온 관련기사 ([링크]) 를 맬크머스에게 건네주었다. '미 인디 록의 전설'이란 타이틀을 통역해 주자 미소. 효진씨가 맬크머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자 에클로우는 익살맞게 "전설!"하며 환호한다. 맬크머스 역시 익살맞은 미소로 카메라 응시. 식사 후 '역사적 비감이 교차하는 곳' 삼청각과 경복궁을 들러 여의도로 간다.


오후 4시 30분

Stephen Malkmus Interview

최초의 인터뷰는 [weiv] 측과 이루어졌다. 신현준 형이 롬바르디와 에클로우를, 이용우와 내가 맬크머스와 티모니를 대상으로 각개 인터뷰를 벌이기 시작했다. 송창훈은 사진을 찍었다.

10년 간 함께 하며 미국 인디 록의 지형도를 바꾼 페이브먼트(Pavement)가 해산한지 1년 후인 2000년, 맬크머스는 포틀랜드로 거주지를 옮긴다. 밴드 생활에 있어서 음악적 열정의 공유 못지 않게 같은 지역 내에 거주하는 것이 결속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새로운 행보를 위해 평소 좋아하던 포틀랜드 출신의 밴드 직스(Jigs)와 손을 잡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솔로 앨범 [Stephen Malkmus](Matador, 2001)는 페이브먼트 시절 때와는 다른 매끈한 사운드 텍스처에 대한 논란과 함께 마타도어의 상업적 고려 때문에 솔로로 탈바꿈해 나온 결과물이라는 루머를 낳기도 했다.

사진: 스티븐 맬크머스
"그렇지 않다. 이것은 엄연히 나의 솔로 앨범이다. 페이브먼트의 업적에 대해서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10년 간 한 밴드에 있다보니 음악적으로는 진퇴양난이 되었다. 페이브먼트에서 시도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가장 컸던 건 멤버들이 전부 다른 지역에 떨어져 산다는 점이었다. 처음 4, 5년간은 열정만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그 후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직스는 그런 면에서 매우 만족스럽다. 페이브먼트와 달리 직스는 나의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닐 영의 백 밴드)'라 말할 수 있다. 뭐랄까, 페이브먼트 때가 멤버의 개념이었다면 직스는 보스의 개념으로 일한다고나 할까(웃음)."

반농담조로 [Swedish Reggae]라 이름했던 솔로 앨범의 타이틀은, 페이브먼트 때와는 차별 화된(=진중한?)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Stephen Malkmus]로 바뀌어 나오고 유럽과 미국 전역을 중심으로 투어를 시작한다. 향수에 차 공연장을 찾은 팬들은 그가 페이브먼트 시절을 완전히 잊은 듯 솔로 앨범 수록곡만으로 세트 리스트를 채운 것에 다소 실망하기도 하는데.

"페이브먼트 시절의 공연과는 사뭇 다른, 이상하기까지 한(even strange) 분위기를 맛봤다. 앞으로도 페이브먼트 시절의 노래는 연주하지 않을 예정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썰렁했던 건 아니었다. 할로윈을 맞아 일리노이에서 벌인 공연은 지난 1년 간 치른 공연 중에서 가장 재밌는 것이었다. 직스의 기타리스트가 헨리 롤린스처럼 짝 달라붙는 반바지에 온 몸에 문신을 그린 채 격렬하게 연주하는 진풍경을 연출했기 때문이다(웃음)."

그런데 이곳에서 페이브먼트 커버 밴드와 함께 페이브먼트 시절을 재현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처음 제안 받았을 때는 내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솔로가 되어서도 페이브먼트 시절의 노래를 공연 리스트에 올린다는 것은 옛 친구들에 대한 예우가 아닐 뿐만 아니라 내 솔로 활동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제안이 가령 뉴욕에서 온 것이었다면 당연히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의 한국 방문의 목적은 즐기는 것(have fun)이었고 공연도 그런 마음으로 치를 생각이었다. 팬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가급적 들어줄 의향으로 왔다. 내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행운이다(웃음)."

1992년 노이즈와 팝이란 씨실과 날실이 불협하게 얽힌 음역 위로 달콤하게 휘청대는 음색이 기이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던 [Slanted & Enchanted]가 나왔을 때 맬크머스는 가령 커트 코베인 같은 사람이 죽어라 추구하며 동시에 고민했던 모든 문제에 대해 처음부터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행복하게 절망하면서 가끔 신랄한 비판의 날도 내세울 수 있는. 유명담이 되어버린 스톤 템플 파일럿츠(Stone Temple Pilots)나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 등에 대한 실명 비판은 어떠한가?

"스톤 템플 파일럿츠 같은 경우는 물론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아냥거림에 가까웠지만 '공격'이라기보다는 '장난'이었다. 스매싱 펌킨스도 마찬가지고. 공격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대규모 레이블이나 빅 밴드의 반대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매싱 펌킨스의 경우 몇몇 곡은 좋아한다. 가령 "1979" 같은 곡."

"하지만 그 사람(빌리) 창법은 정말이지..."

"징징대는(whining)?"

"그렇다(미소). 그런 창법은... R.E.M.의 경우는 물론 좋아한 밴드였고. 그 노래("Unseen Power Of The Picket Fence" - [No Alternative](Arista, 1993))도 헌사보다는 장난에 가까웠지만."

창법! (에클로우의 코멘트에 의하면) '캘리포니아 특유의 느긋한 스타일(Californian laidback style)의 한 유형으로 넌피니토(non-finito)한 연주 스타일만큼이나 풀려있고 비틀거리는 창법은 어떠한가?

"캘리포니아적이다. 팔세토나 고음의 가창력에 신경 쓰지 않는. 루 리드나 로빈 윌리엄슨(Robin Williamson),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등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솔로 앨범의 경우 팔세토나 고음의 창법에 신경 쓰지 않고, 루 리드처럼 말하는 듯한 창법을 취했다."

그 모든 것과 함께 1990년대 로파이의 미학을 일구었다는 평가에 대해서, 다시 말해 로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더불어 사운드 텍스처나 가사 면에서 그것과는 많이 달라진 솔로 앨범에 대해서는.

"첫 앨범 [Slanted & Enchanted]는 로파이라는 말에 들어맞는 앨범이었다. 로파이는 기본적으로 DIY 정신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 면에서 [Terror Twilight]은 DIY가 아닌 레코딩, 프로듀싱에 보다 많은 신경을 썼다. [Stephen Malkmus]가 페이브먼트 시절 때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의도하지도 않았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함께 일하게 된 사람들, 세월, 그리고 음악적 취향이다. 페이브먼트 마지막 앨범과 솔로 앨범간의 시간차만 해도 2년이다. 여러모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기간이다."

페이브먼트 시절을 포함, 지금까지 마타도어나 드랙시티와 같은 인디 레이블이 아닌 대규모 레이블의 계약 제안을 받은 적은 없는지? 있었다면 그런 제안에도 불구하고 인디로 '남은' 이유는 무엇인가.

"인디 레이블은, 마타도어를 예로 들면, 소속 밴드에 대해 매우 충직하다. 사업적 관계 이전에 우정을 쌓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 음악적 이해에 있어서도 대규모 레이블의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 폭이 넓다. 예술을 우선으로 한다고 할까(Art First!). 그리고 내가 대규모 레이블로 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내 음악이 기본적으로 적은 수의 청중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힙합과 같은 음악에 비할 때 말이다."

그 말은 동시에 살만하다는 뜻도 될텐데. 이런 질문은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호의적인 인터뷰 분위기에 용기를 내 묻기로. 인디 뮤지션으로 다른 일 할 필요 없이 살만한가? 솔로 앨범의 경우 얼마나 팔렸는지?

"살만하다. 물론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살만하지 않았다면 아마 대규모 레이블의 빅 밴드를 꿈꿨을 것이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미국 밴드들에게 주요 수입원을 좌우하는 것은 투어다. 소닉 유쓰(Sonic Youth)가 대표적인 예다. 소닉 유쓰의 앨범 판매량은 실제로 보잘 것 없다. 5만 장이나 팔릴까. 하지만 공연장에서 그들을 찾는 관객들의 수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 솔로 앨범의 경우 매우 성공적이었다. (정확한 수치를 묻자) 십만 장 이상이 팔렸다. 물론 미국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 정도면 인디 뮤지션으로선 아주 성공적인 판매량이다. 그리고 나 또한 백 회가 넘는 공연을 했고. 아까도 말했지만 대규모 레이블의 빅 스타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재닛 잭슨(Janet Jackson)의 경우 제작비와 홍보비가 엄청나기 때문에 백만 장이 팔려 나가도 실패라고 여긴다."

어느 정도면 인디 뮤지션에게 엄청난 성공이라고 여겨지는지?

"한 오십만 장?(웃음) 그거면 충분하다. 쉽지는 않지만. 많이 안 팔려도 맥도널드에서 한 끼 때울 정도만 된다면 인디 뮤지션으로 사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다(웃음)."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맬크머스는 이곳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이 홈페이지에 직접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디지털 문화에 대해 무관심한 문외한으로 사는 몇몇 '인디' 뮤지션들과 조금 달라 보였다. 팬들과 채팅도 두어 번 해 봤다는 이야기가 인디 앨범 판매량 이야기와 겹치면서 MP3나 저작권 공유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상관없다. 얼마든지 들으라고 하지, 뭐. MP3가 나타났다고 해서 공연장으로 오는 사람들의 수가 줄진 않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실제 앨범 판매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줄어든다고 해도 한 만 장? 만 장 조금 더 될까? 그 정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수치다. 공연 티켓, 티셔츠 같은 것에 돈을 들이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물론 내 앨범을 사는 것이 좋은 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사진: 크리스 롬바르디, 메리 티모니, 제스퍼 에클로우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두 번째 취재팀이 왔을 때까지 티모니의 인터뷰는 시작도 못한 상태. 체류 기간동안 붙어 다니는 이점을 이용, 틈틈이 인터뷰하기로 티모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터뷰를 마쳤다. 인터뷰가 끝난 후 63 빌딩의 한식당에 도착, 갈비와 냉면으로 저녁을 마무리. 한식당 스피커에서 내내 흘러나오던 가야금 연주에 맬크머스, 에클로우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사운드 사이사이의 여백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고 한 마디. 맬크머스는 가야금 연주 앨범을, 에클로우는 가야금 구입을 쇼핑 리스트에 추가하며 안내를 부탁하기도.


1월 7일 월요일

일행을 태운 밴이 대학로 SH 클럽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경. 리허설 일정은 맬크머스 - 티모니 - 언니네 이발관 순으로 잡혀 있다. 그때까지도 셋 리스트는 확정되지 않은 상태. 이에 대한 맬크머스의 변명(?)은 "페이브먼트 넘버들은 커버 밴드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고 솔로 넘버의 경우도 마찬가지. 리허설동안 정하겠다"는 것. 기타 튜닝이나 이펙트 문제 등을 언급하기 위해 잠시 멈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제외하면 맬크머스와 커버 밴드의 호흡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제대로 맞아 들어갔다. 해체 이후 페이브먼트 노래는 흥얼거려본 적도 없다는 맬크머스는 커버 밴드가 준비해 온 모든 곡들의 가사를 막힘 없이 불러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Vague Space"와 같은 솔로 곡은 물론 "Shady Lane"이나 "Major League", "In The Mouth Of A Desert"와 같은 곡들을 부르는 것을 보다가 백스테이지로 가 어제 못한 티모니의 인터뷰를 시작했다.


Mary Timony Interview

목소리만 들었을 때와는 달리 실제 보니 얼굴이 귀엽게 보인다. 그런 소리 종종 듣나.

"(웃음) 모르겠다! 어쨌든 칭찬해 주어서 고맙다."

음악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

"1990년 워싱턴 DC 출신 오토클레이브(Autoclave)와 연주를 하면서 처음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그 후 1992년 힐리엄(Helium)을 결성했다. 8년 동안 힐리엄에서 두 어장의 앨범을 발매한 이후 그 다음부터는 쭉 솔로로 활동해 오고 있다."

그렇다면 힐리엄은 해체한 것인가?

"그렇다. 공식적으로 해체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힐리엄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이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워싱턴 DC에 있는 듀크 엘링턴 예술 학교(Duke Ellington School of the Arts)에서 비올라를 전공했다던데. 비올라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아마추어 펑크 밴드를 한 건가, 아니면 클래식을 전공하다 어떤 계기로 인해 펑크에 빠진 건가. 뮤지션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가까이 접해 있었고 음악 하는 것이 좋았다. 클래식 기타와 비올라 등 여러 종류의 악기 연주 교습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암튼 많은 악기들과 많은 음악들 속에 살다보니 나도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록 음악에 경도된 시기는 고등학교 때(1980년대).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펑크 씬이 형성되었다. 그들의 공연을 찾아보러 다니고 하면서 서서히 록 음악이 좋아졌다."

1980년대 펑크 씬이라면 라이엇 걸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힐리엄은 'radical feminism과 punk rock을 믹스했다'는 평이 있다. 동의하는가. 펑크 씬에서 혹은 인디 씬에서 여성 밴드로서 특별한 어려움이 있(었)는가. 혹시 이런 페미니즘 어쩌구 하는 질문들이 짜증나는가.

"그렇지 않다. 그 점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다. 당시 라이엇 걸은 굉장한 씬을 가지고 있었고, 대학 시절에 들은 페미니즘 강의나 책으로부터 얻은 것과 함께 나를 관련 문화에 깊이 빠져들게 했다. 초기 힐리엄의 가사들은 그런 것들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나온 것들이다. 짜증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다르다. 그런 식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보다 자연스럽게, 그때 그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더 좋다."

당신은 매우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타나 드럼은 물론 키보드 종류는 거의 다 섭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음악 교습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악기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는지?

"기타를 맨 처음 시작한지 얼마 안돼 키보드를 배우기 시작했다. 기타와는 다른 사운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매혹됐다. 지금은 키보드보다 피아노 쪽에 치중하는 편이지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는 모르겠다(웃음). 그냥 스튜디오에 있으면서 어떤 악기의 소리가 괜찮다 싶으면 그걸 집어들고... 그렇게 시작됐다(웃음)."

힐리엄의 음악 스타일에 대해서 스스로 정의하는 바는? 싸이키델릭 하드 록부터 심지어 프로그레시브까지 포괄하고 있는데?

"이것도 대답하기가 참 곤란한 질문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큰 영향을 받은 음악 스타일 중엔 1960년대 초반의 영국 포크 씬도 있는 반면 몇 백년 전의 클래식 음악도 무시할 수 없다."

당신의 음악에 대해 프로그레시브 록(prog-rock)적이라는 평이 있다. 그것을 당신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애정, 혹은 영향으로 읽어도 괜찮을지?

"물론(웃음)."

공식 사이트가 없는 것 같다. 힐리엄 팬 사이트도 현재는 운영이 안 되는 곳이 많고.. 스스로 자신의 사이트를 만들 생각은 없나.

"옛날에 한 번 들른 적은 있는데 그 이후로는 가본 적이 없다. 조만간 만들 계획이긴 하다."

이쯤해서 티모니의 리허설 차례가 왔다. 맬크머스와 다른 일행은 건너 편 카페로 쉬러 가고. 티모니의 리허설 시간은 예정보다 30분 가량 더 늘어났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키보드의 톤이나 음정이 문제인 듯.

지켜보는 관계자의 입장에선 무대 위의 공연에 비할 때 더디고 지루하기까지 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7시, SH 클럽은 관객들로 꽉꽉 들어 차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대하던 공연. 리허설을 거의 다 봐 버렸기 때문에 다소 김빠진 공연 관람이 되겠다 싶었던 것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공연이란 역시 뮤지션에게나 관객에게나 한 쪽이라도 부재하면 의미가 없는 '현장의 놀이' 아니겠는가. 티모니의 음울하게 가라앉은 첫 공연이 끝나고 흰 와이셔츠에 파란 코듀로이 바지 차림의 맬크머스가 무대에 올랐다. 진지하고 탐구적(?)이었던 리허설의 맬크머스는 즐겁게 재롱을 피우기까지. 솔로 넘버가 끝난 후 뒤에 선 페이브먼트 커버 밴드를 아우르며 "우리는 페이브먼트입니다. 무덤에서 돌아왔죠."라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은 1998년 여름, "AT&T"를 들으며 저토록 흥겹고 무심하게 '아무라도 와서 날 구원해 주겠지' 염원할 수 있는 마인드는 무엇인가 감탄했던 시절로 되돌아갔다. 이 많은 이야기들은 다른 웨이버의 공연 후기에 맡기자. 사인회를 위해 팬들에게 둘러싸인 그들을 뒤로하고 내일 일정을 위해 귀가했다.


1월 8일 화요일

아침 10시에 있는 인터뷰를 위해 로비에 도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피곤 때문에 눈도 뜨지 못하는 맬크머스가 좀비처럼 비틀 비틀 걸어 나왔다. 괜찮냐고 물으니 똑같이 물으며 등을 두들겨 준다. 그래도 눈은 여전히 못 뜬다. 아침에 잠깐 만난 에클로우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미국에서의 인터뷰도 잘 응하지 않는다고. 한 인터뷰는 자신이 아닌 드러머를 내보내는 바람에 작은 마찰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고.

"포틀랜드의 경우, 내가 하는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대개가 컨트리 음악을 듣는다. 인터뷰는커녕 거리에서 사인을 하는 경우도 없다. 스타 대접을 받고 싶으면 대도시로 나가면 되지만 그건 농담이고(웃음).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인터뷰(스케줄로 잡힌 것만 11건)를 하게될 줄은 몰랐다."

이만하면 관광치고는 좀 가혹하군.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그를 데리고 원음 방송국 인터뷰까지 강행했다. 방송국을 가는 도중, 용산 중간에서 그가 관심을 보이는 건물에 대해 미군기지라고 대답. 아직까지 미군이 주둔해 있는지 몰랐다고. 유감이라고. 그가 본 서울 시민들은 어딘가 조용하고 일면 침체돼 있는 듯해서 나름대로는 북한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는데. 음...

라디오 방송에서 맬크머스는 자신의 노래들을 직접 선곡했다. 노래가 나올 때마다 한 손을 이마에 짚고 신중하게 한 음절 한 음절 경청하는 '대가(?)'의 자세를 보이기도. 한 록 바에서 자신의 음악이 나오자 황망해 하며 일어나 화장실로 사라진 후 노래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았던 작년의 마크 코즐렉(Mark Kozelek)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밝혀진 이유는 힘 빠질 정도로 간단. "이 노래("Trojan Curfew")는 6개월만에 처음 듣기 때문이다(미소)."

인터뷰가 다 끝났다는 것을 알자 기사회생한 맬크머스는 자신을 버리고 회현동을 전전하며 자신이 차지해야할 바이닐들을 모조리 긁어모으고 있을 에클로우와 롬바르디를 저주하며 발을 굴렀다. 셋 모두 엄청난 바이닐 콜렉터들이라는 정보에 관광 일정에 회현동 및 (가능하다면) 황학동 쇼핑을 넣긴 했었다. 무엇을 사고 싶냐는 말에 "한국의 1960-70년대 싸이키델릭, 포크 록 앨범을 사야 한다"며 추천 리스트를 부탁한다. 호텔 로비에 내려준 후 일단 굿바이.

신촌에서 만두 전골을 저녁으로 한 일행은 8시가 다 되어 클럽 '빵'으로 갔다. 페이브먼트 커버 밴드의 일원이었던 '잠'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 소식을 듣고 몰려든 맬크머스 팬들과 클러버들이 조촐하게 모인 그 공연은 맬크머스, 티모니, 에클로우가 무대에 올라가 즉흥 연주를 하면서 더욱 흥겨워졌다. 싸이키델릭 임프로바이제이션으로 무궁무진하게 버전업한 "I'm Looking For My Man"을 필두로 티모니의 기타 버전 "Want U"까지, 어제로 끝이 난 줄 알았던 감동적인 여흥이 계속 되었다. 티모니의 솔로 긱(gig)이 펼쳐질 동안 맬크머스와 롬바르디는 클러버들과 함께 뉴욕 테러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에클로우와 잠의 기타리스트는 체스를 벌이는 등 '진정한 화합의 장(?)'을 연출하기도. 마지막 코스로 '벨 앤 세바스찬'에 들러 알레스 뮤직과 마타도어 레이블의 계약 성사를 축하하는 축배를 들고 끝.


1월 8일 수요일

어제 호텔 로비에서 헤어지기 전에 맬크머스와 롬바르디는 오늘 일정 중에서 반드시 확보해야할 것들을 부탁했다. 그것은 보신탕과 노래방, 그리고 레이브 바였다. 세 코스를 롬바르디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로 쏘겠다는 것이다! 저녁때마다 도합 소주 예닐 곱병을 비운 사람들의 호언장담을 믿어도 될지? 어쨌거나 밤이면 밤마다 맥주 집과 노래방을 전전했다는 그들이 원하는 노래방은 유형이 좀 다른 것이었다. 좀더 '라이브(?)'하고 술을 함께 마실 수 있는 곳. 이것은 세 남자의 월권에 가까운 선택이지 사실 티모니의 심중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 아닐까? 하며 티모니의 안색을 살피니 마냥 즐거워 보인다. -.-;

농담으로 "그렇다면 맬크머스와 티모니는 약속해라. 다음 번 앨범에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노래를 만들겠다고"라고 말하니 "긍정적인 가사로 꽉 채워주마!" 호언장담하는 맬크머스. 한때 채식주의자였다더니 저리 달라질 수 있을까 싶어 물으니 "옛날 여자 친구가 채식주의자여서 좀 따라했지만 관계가 끝나면서 채식주의 인생도 끝났다"고 멋쩍게 미소.

이미지: 티모니의 '강아지 그림'
해서... 이태원을 들른 후 강남의 커다란 보신탕 집으로 직행했다. 넓은 온돌 방 홀(?)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네 명의 건장한 백인 남녀들이 문에 들어서자 종업원 아줌마들의 표정이 일순 긴장한 것도 진풍경이라면 진풍경. 쭉 둘러앉아 수육과 전골을 시킨 후 서로의 몬도가네 경험담이 펼쳐지고. 마침내 수육부터 등장! 주저하지 않고 젓가락으로 수육을 집어든 그들은 역시 축배. 에클로우가 카메라를 꺼내 수육을 든 맬크머스와 티모니를 찍었다. 맬크머스는 미소 지으며 "이걸 브리짓 바르도에게 보내 주겠다"고 농담^^; 먹어보자마자 소고기보다 부드럽다며 탄성. 티모니는 "개고기 정말 맛좋아요(Dog Rules)"하며 즉석에서 강아지 그림을 그려 보였고 맬크머스는 롬바르디가 집어든 수육에 소금을 뿌려주는 다정다감함을 보여주기도 해서 걸작. 마냥 쳐다보고만 있는 나와 이태원, 황학동 관광을 위해 특별히 온 한 친구에게 그들은 곧 어서 먹어 보라고 강요(?)했다. 한 점 집어드는 순간 에클로우의 카메라 셔터가 찰칵하고. 친구와 나는 서로를 응시하다 "우리 몇 달 후 [쇼킹 아시아3] 에 얼굴 나오는 거 아니냐?"하고 공포에 떨기도. 마지막 날 밤이니 다 잊으라며 맬크머스는 한국인 일행들에게 계속해서 원샷을 요구했다. "이렇게 사람이 없는 건 보신탕이 국제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된 때문일까?"하며 의문하는 맬크머스. "아마도"라고 말했지만 틀렸다. 오후 5시라 저녁 시간치곤 일렀기 때문. 6시를 넘어서자마자 넓은 식당 안은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들어찼다. 더불어 벽안의 네 손님들이 계속해서 희한한 구경거리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기분이 좋아진 티모니가 "소주 정말 좋아"라며 따뜻한 온돌방에 벌렁 드러눕자 멀찍이 서 있던 아줌마 종업원 군단의 분위기는 험악해지기도. 하이트 로고가 박힌 유리컵을 가지고 싶다며 두 개씩 무료로 선물 받은 일행들은 곧장 '라이브'한 노래방으로 갔다.

넓은 룸형 노래방에 미디 사운드와 와이키키 브라더스 백밴드가 함께 하는 그런 곳. 낱말 맞추기 놀이를 열심히 하던 그들은 노래방 기계와 밴드(라곤 하지만 기타리스트 한 명)가 세팅되자마자 음주가무 돌입 준비. 스웨터를 훌러덩 벗어 던진 채 핑크와 갈색 셔츠 바람으로 나선 맬크머스의 첫 곡은 척 베리(Chuck Berry)의 "Johnny B. Goode". 한 다리 개 다리 떨기 율동과 함께 말 울음소리 애드립까지 일사천리, 전천후 DIY 공연(?)이 이어졌다. 티모니의 선곡은 신디 로퍼(Cyndi Lauper)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 뿐이랴. "Hotel California"부터 "Surfin' USA"까지 섭렵한 후 노래방을 나왔을 때는 열 시를 넘어섰다.

그 다음 일정은 홍대앞 '벨 앤 세바스찬' 카페. 그들을 보고 싶어하는 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맬크머스와 티모니는 각각 하회탈과 징과 같은 특산품을 선물 받았다. 보다 '리얼'한 코리아를 맛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 둘은 받은 선물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회탈은 우스우면서 어딘가 섬뜩하다고.

DJ 롬바르디 (레이브 바 타령을 하는 롬바르디에게 에클로우가 즉석에서 붙인 별명)의 재촉으로 홍대 부근의 한 레이브 바를 찾았다. 바 안은 한산. 네온 요요나 팔찌를 휘두르며 춤을 추는 레이버들 너머로 후드 재킷을 머리에 뒤집어 쓴 채 스피커 앞에서 노숙자처럼 건들거리던 맬크머스는 일정 내내 내가 목격한 것 중 최고의 진풍경이었다.


1월 9일 목요일

5일간의 빡빡하고 정신없는 일정을 끝으로 그들이 한국을 떠나는 날. 짐을 한가득 이고 나온 일행은 서로가 산 쇼핑 품목을 내보이고 있었다. 플라스틱 팩 소주를 두 병씩 선물. 자기가 산 바이닐들이 괜찮은지 봐 달라며 맬크머스는 가방을 풀었는데 거기엔 산울림, 양희은, 가야금 연주곡, 신중현 등의 바이닐들이 빼곡이 담겨 있었다. 한국의 밥 딜런(한대수)의 바이닐 값은 상상을 초월해서 포기했다고 한다. 복각 씨디가 있다고 했으나 역시 바이닐 콜렉터들에겐 무용지물인 듯. 양희은은 한국의 조운 바에즈란 소개에 샀단다. 티모니는 한국 전통 인형, 호랑이 민화, 모자 등등 최다 쇼퍼였음을 보여주고.

안개가 자욱하게 낀 영종도를 지나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맬크머스 티모니 둘다 다음 번 앨범 발매를 기념으로 한 번 더 찾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알 수가 없는 것을. 비행 일정은 온 것과 마찬가지로 맬크머스 따로, 롬바르디와 에클로우와 티모니는 함께. 오사카를 경유해 포틀랜드로 돌아간다며 가라데 포즈를 취해 보인 맬크머스는 힘차게 출국. 바이~

나머지 셋은 공항 뷔페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이 뭐냐는 물음에 통일되게 나온 답은 "Dog & Show" 노래 제목 같다고 하자 영감을 얻을 것 같다며 티모니가 미소.






작별의 순간은 맬크머스와의 그것만큼 짧고 명쾌했다. 재공연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다시 만나게 되면 뮤지션에게나 청중에게나 양자 모두에게 각별할 듯. 좋은 만남, 좋은 공연, 좋은 시간이었다. 20020114

 버나드 버틀러. 20대 초반 미국의 얼터너티브 음악에 심취해 있던 내게. 영국 음악의 길을 열어준 밴드는 Suede 였다. 그들의 데뷔 앨범(1993)의 첫 곡 So Young 을 들었을 때. 헉..이건 3분 짜리..예술이군..하는 강렬한 미학적 쾌감을 얻었었다. 수려한 기타의 라인과..피아노 선율은..보컬의 멜로디 이상으로 강한 끌림이 작용했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2번째 곡. Animal nitrate 를 듣고 나서 이미 중독을 만들어 냈다. 보컬의 주된 선율과..묘하게 어우러지며..배킹도 솔로도 아닌 기타리프는 끈적끈적하게 온몸의 감각에 들어붙었다. 

 스웨이드 란 밴드에 깊이 중독됐고..이 밴드의 기타리스트 버나드 버틀러는 나의 기타 히어로 가 되었다. 기타를 치고 싶다. 란 열망이 들끌었다. 그가 쓰는 기타와 흡사한. 그당시 거금 28만원에 빨간색 에피폰 335(The Dot) 기타를 샀다. 그렇게 버나드 버틀러는 나에게 기타의 열망을 심어준, 첫 기타를 사게 만든 장본인 이다.

 최근에 재결성된 스웨이드가 한국의 록 페스티발에 참가해 공연을 했다. 내게는 초기 기타리스트 였던 버나드 버틀러 가 없는 스웨이드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이제 곧 존 프루시안테가 없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신보가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그닥 관심이 안 간다. 스웨이드 1집 2집은 평범한 팝송을 넘어. 미학적인 차원의 예술로 승화 시켰다. 버나드 버틀러 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적인 데뷔를 했고. 2집의 녹음을 마치자 마자 버나드 버틀러는 밴드를 탈퇴한다. 성공한 밴드의 작곡가 이자 기타리스트 였지만. 그는 이당시. 인생의 위기에 봉착했다. 

 14살 때 부터 밴드를 만들어 노래를 만들었던 빼빼마른 소년은 밴드가 와해되고.. 별다른 친구도 없이 학교와 방구석만 오가며 음악과 기타에 빠져지내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 때 그의 우상은 the Smith 의 기타리스트 자니 마. 버나드도 에피폰 쉐라톤 모델을 첫 기타로 샀다..자니 마가 쓰는 체리 레드색. 깁슨 ES-355를 동경했을 터는 말할것도 없고..



 NME 잡지의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간 버나드는 스웨이드에 기타리스트로 가입하게 되고, 팝 역사상

 위대한 작곡 콤비들 처럼. ( 매카트니&레논, 믹 재거&키스 리차드. 모리씨&자니 마 ) 또 하나의 위대한 작곡 콤비가 된다. 브렛 앤더슨 & 버나드 버틀러. 

 그렇게 스웨이드 초기, 빅스비 암이 달린 체리 레드색 깁슨 ES-355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기타가 된다. 

 내가 처음 90년 초반의 스웨이드의 라이브 영상을 보았을 때. 보컬 브렛 앤더슨의 호모 필 가득한 의상과 쇼맨쉽은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밴드의 초기 전략은 모호한 성 정체성과 퇴폐미를 강조했다. 데이빗 보위의 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밴드가 성공해서 투어를 다니고..연일 파티를 벌이는 도중에도..버나드는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호텔방에 혼자 쳐박혔다고 한다. 뮤지션과 연예인의 다리에서 그는 고독한 뮤지션의 길로 올인했고. 그러한 음악에 대한 가치관 차이로. 브렛 앤더슨과 는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2집 녹음을 할때는 스튜디오에서 다른 멤버들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자기 녹음 파트가 끝나고 다음날 악기를 가지러 스튜디오에 갔을땐. 자기 장비가 문 밖에 내 놔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미 뮤직 비지니스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 아버지가 돌아갔을때. 스웨이드의 명 싱글곡. Stay together 를 녹음을 해야했다. 밴드를 탈퇴하고. 반년을 집에서 암중모색하다..다시 음악 활동을 재개한다. 맥알몬트 & 버틀러 듀엣으로 활동했고. 다른 뮤지션들의 피처링을 해오다..드디어 대망의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1998년에 발표한다. 바로 이 앨범.. 서두가 매우 길었다.  


 이 솔로 데뷔 무대를 보면 버나드 버틀러의 스타일이 여실히 보여진다. 기타에 게인을 많이 먹이고. 록킹하고 에너제틱한.. 기타 솔로 할때의 아밍과 함께. 화려한 모션은. 우아한 록 스타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가 싱어 송 라이터 면서 기타와 피아노..프로듀서 등 음반의 모든면에 혼신을 다한 흔적이 엿보인다. 유려하고 고혹적인 선율속에 내면의 침잠어린 고독이 스며있다. 하지만..그의 첫 발걸음은 기운차다. 나는 특히나. not alone 을 좋아하는데..오아시스의 whatever 이후로 일렉트릭 기타와 현악 세션이 이렇게 환상적으로 어울러 지는 곡도 드물다.



 버나드는 99년 본의 아니게 한국에서 깜짝 공연을 펼친다. 일본의 록페스티발을 가는 와중. 비자 문제 때문에 한국에 잠시 왔던. 그는. 홍대앞 스팽글 이란 클럽에서 포커 게임 내기에 져서. 그 벌칙으로 깜짝 공연을 했다. 이 때. 피씨통신 동호회에서 이메일이 왔었는데..나는 설마..장난이겠지 하고 넘겼었다. 그런데 나중에 사실을 알고 엄청 후회막심했다.  이 때 이 공연을 정말 보았더라면..나는 정말. 기타를 열심히 쳤을 것이다. 



 

 2005년이 되서야 버나드 버틀러의 연주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는데. 연세대 강당에서 Tears 의 공연에서 였다. 티어스는 10년만에 스웨이드의 보컬 브렛 앤더슨과 다시 결합해서 나온 밴드 였는데. 결국 단발에 그쳤다. 결코 화해 하지 않을것 같은 그들이지만. 결국 다시 뭉쳤고. 훌륭한 곡을 써냈다. 하지만. 스웨이드 시절의 명곡들은 단 한곡도 연주 하지 않았다. 그만큼 버나드는 그 시절을 기억하기 실은 모양이다. 요즘엔 세월의 간극만큼 꼭 그렇지 만도 않은것 같지만.

 

 솔로 활동과 다른 다양한 프로젝트를 했고. 현재는 프로듀서 로써 각광을 받고 있다. 대박난 뮤지션 더피의 음반을 프로듀스 했다. 이제는 세월의 뒤안길로, 그의 음악적 재능은 앞으로 드러나기 보단. 다른 뮤지션의 조력자로 더 치중해 보인다.
하지만. 버나드 버틀러의 퍼포먼스 가득한 기타 연주를 보고 듣다 보면..그렇게 섹시해 보일 수 없다.

 중년이 된 그가 이제 무대위에서 격렬한 기타 연주를 하기 힘들겠지만. 내 눈엔 선명하게 남아 있다. 수려한 선율과 화려한 기타 아밍질을..미려한 몸놀림을..

 버나드 버틀러의 첫 솔로 앨범은 진취적인 발걸음 이었다. 인생의 위기를 겪고 난 예술가의 진중한 독립선언 과도 같다. 나는 이 앨범을 들을 때마나 여러가지를 느낀다.




 

 


 먼저 1편에 이어. 2011/04/09 - [음악] - Smashing Pumpkins 스매싱 펌킨스 라는.. 이란 말에 대한 슬픔.

 내가 스매싱 펌킨스에 결정적으로 빠지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 신촌의 음악(뮤직비디오) 감상실 이었던. 백스테이지 에서 본. 이 SNL 라이브 영상 이었다. 이미 그 전 부터 많이 좋아하고 있었지만. 이 라이브를 본 이후론 매니아 가 되버렸다. 처음으로 빌리 코건이 삭발한 모습도 인상 깊었고..그 광폭한 디스토션 사운드가..엄청난 음량으로 전율케 했다. 90년대 중반 얼터너티브의 완결과. 밴드를 소개하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포스트모던한 영화의 환기. 그 추억이 정겹다.


 이 노래가 수록된 3집 멜론콜리와 무한한 슬픔 은..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렸고. 줄줄이..히트곡 들이 쏟아졌다. tonight tonight, 1979, zero, muzzle, thirty three 등등..더블 앨범으로 700만장을 팔았다.
 
 1996,97년 그들은 최고의 전성기로써. 세계 투어 공연이 한창이던때. 투어 키보디스트가..마약 과용으로 호텔에서 사망했고. 동시에..드러머 지미 챔벌린이..알콜 중독으로 밴드의 독재자 빌리 코건에 의해 짤리게 된다. 최고의 성공의 나날에 드리우진 검은 그림자 였다. 사실상 밴드는 3인조로 활동하던 이 때 부터 하강 곡선을 그리게 된다. 4번째 앨범인 'Ava Adore' 1998 년에 발표 되었지만. 전작의 크나큰 성공에 반푼어치 기대도 못 미치는 작품이 되 버렸다. 매니아 입장에선..이것도 좋은 음반 이었지만. 성공의 피로가 누적되었고. 빌리 코건의 엄마가 암으로 죽은 개인 적인 슬픔과. 밴드 사운드의 중축인 출중한 드러머가 낙오 된 상황에서..진이 빠진 앨범이 되었다.

 이 들이 98년에 다시 세계 투어를 돌 때, 유럽의 대 규모 야외 공연 등에선 여전히 많은 관중을 동원하고 있었지만.. 이미 오아시스와 버브 등의 브릿팝 밴드에 비해선 록의 열정의 많이 사그러졌다. 그들이 다시 유럽 투어를 돌 때. 전세계에선 버브의 비터 스윗 심포니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2000년에 5번째 음반인 마쉬나를 발표함과 동시에..밴드의 해체를 선언했다. 90년대 록 음악씬을 주름잡던 밴드가 10년의 활동 끝에 역사 속으로 희미 해져 갔다. 이 마쉬나 투어 에서 2000년 7월 4일? 에 우리나라 체조경기장에서 내한 공연을 펼쳤었다. 내한 공연 사상 전설의 공연으로 불리는.. 뮤지션과 관객이 혼연 일체가 되어..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은 공연 이었다. 관중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혼신을 다해 공연을 펼쳤고..뮤지션. 관객. 서로 감동했다. 빌리 코건은 공연 중에도 자신들이 했던 수많은 공연 중에서도..탑 5안에 드는 미친 관객이라고 그랬고..그 후 많은 인터뷰 에서도 한국 공연을 손꼽았었다. 이렇게 청춘은 스매싱 펌킨스의 해체와 더불어..아쉬움을 남기며 흘러가고 있었다. 
 한국 공연의 마지막 앵콜..어쿠스틱 1979

빌리 코건은 스매싱 펌킨스를 해체후, 새로운 밴드 즈완 Zwan 을 결성한다. 드러머는 역시 스매싱 펌킨스의 지미 챔벌린..나머지 멤버들은. 인디 밴드에서 활동하는 걸출한 뮤지션들 이란다. 그러나 이 역시 2003년 단 한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해체 되고 만다. 역시나 빌리 코건의 독재..모든 곡을 자기가 만들고 프로듀스 하고.. 기타가 세명임에도 불구하고..자기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모양새인.. 다음 라이브 모습을 봐도..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따로 없다.


 그 후. 솔로 앨범을 냈다가 실패를 맛보게 된다. 시집도 출간했고. 영화 음악 활동 등을 하다 2006년에 다시 스매싱 펌킨스를 재 결성 한다. 즈완 때와 마찬가지로. 드러머 만 함께 하고 나머진 새 인물들로..스매싱 펌킨스는 빌리 코건 자체 였기 때문에 어떤 밴드명을 갔다 대도. 빌리 코건의 밴드 였다.

 나는 새로 결성한 스매싱 펌킨스의 앨범을 좋아하지 않는다. 메탈에 가까운 하이 게인 사운드는..시대에 뒤쳐져 보인다. 그렇다고 빌리 코건이 개러지 락을 할 기대는 안 하지만. 뭔가 음악에 진한 향수가 없었다. 이미 성공할 만큼 성공한 뮤지션이어서 인지. 다작의 작곡 재능이 밑천이 드러났는지 모르겠지만. 90년 초 중반의 외줄타기 하면서 짓이기며 내뱉는 치열한 감성을 느끼기 힘들었다. 하지만 최근에 만든 곡들을 들어보니..어떤 완숙한 경지에 오른 것도 같다. 40대 중반에 이른 편안함이 음악에 흐른다. 낭랑한 목소리는 여전하고. 음악을 만드는 솜씨는 더욱 탄탄하다. 사진에서 보듯이, 커트 코베인 의 미망인. 커트니 러브와의 관계도 꾸준한 것 같다. 이제는 시카고를 대표하는 유명인사인 그는 또 어떠한 음악을 내 놓을지..귀추가 주목된다. 예전 만큼은 아니지만 열렬한 팬으로써..감사를 보낸다. 그가 늙어 가는 모습에..나의 청춘도 어느덧 흘러 갔다..

 작곡 하는 모습.


 


 


 최근에 내가 자주 가는 디지털 관련 동호회의 게시판에 스매싱 펌킨스 라는 밴드가 MP3를 배포합니다. 라는 제목으로 글이 올라왔다.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스매싱 펌킨스 라는.. 이라니.. 댓글이 무수히 달렸는데..아니나 다를까. 나같이 충격을 받은 같은 세대 들이 많았다. 다들..90년대의 청춘을 보냈던. 그들은, 실질적으로 90년대의 록 음악중 가장 성공적인 밴드 였던 스매싱 펌킨스가, 뭐뭐.. 라는 밴드로 치부되어 버린 작금의 현실에 세월의 무상함을 여실히 느꼈다. 

 데뷔 한지 20년 째가 되는 록 밴드 이고, 현재는 리더 빌리 코건 혼자 독수공방하는 모양새니, 모를수도 있겠지만. 나같이 90년대 얼터너티브 록 세대 에겐. 꽤 서글프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 내겐 스매싱 펌킨스가 청춘의 모든 분노와 슬픔을 대변했고. 어루만져 주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의 대학생들이 위 사진속 스매싱 펌킨스가 데뷔할 때 태어난 이들이다. 

 1991년에 데뷔 앨범을 발표한 이래. 1993년 부터 1998년 까지. 그들은 전세계 최고의 밴드중 하나였다. 2000년에 서울에서의 첫 공연이자 마지막 무대를 선사하고 해체했고. 지금은 다시 빌리 코건 혼자서 꾸려 나가고 있다. 어느덧 위 사진속 20대 초반의 그들은 40대 중반의 중년으로 변해 있었고. 그들은 역사속 레전드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스매싱 펌킨스의 통산 3집 앨범인 멜론 콜리 와 무한한 슬픔은 1995년 후반부에 발매 되었다. 이 앨범은 총 러닝 타임이 2시간 분량의 더블 앨범 이었다. 피아노 소품부터. 전형적인 얼터너티브 록. 헤비메탈, 데스메탈. 인더스트리얼. 동요와..자장가 같은 노래 까지. 28곡은 무슨 종합 선물 셋트와 같았다. 이런 방대한 양과 다채로운 형식. 예술관에도 불구하고. 한 뮤지션이 혼신을 다해 만든 이 음반은 대중적으로 700만장이 팔리는 큰 성공을 거뒀고. 1996년, 그래미 어워드를 비롯한 주요 세개의 시상식을 석권했다. 내가 대학생이 된 그해에는 스매싱 펌킨스가 지구상 최고의 록 밴드였다.


 

 고등학교 때 부터 이들의 데뷔 음반을 들어왔고. 이들의 성공을 알린 2집 사이미즈 드림 에서의 Today 란 곡은 너바나와 펄잼 이외로. 이들이 대중들에게 급속히 파급되는 효과를 낳았다. 

 스매싱 펌킨스의 시작은 사진속 아주 명민해 보이는 시카고 출신의 백인 청년에 의해 시작 되었다. 1967년 물고기자리 출생의 빌리 코건은 블루스 뮤지션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음악적 재능은 물려받았지만. 가정은 불안정 해 보인다. 유아적 자폐성이나 신경증적인 요소, 멜랑콜리함이 음악의 주요 성분이다.
 커트 코베인이나 에디 베더에 비해 가정사에 얽힌 개인사가 많이 들어나지 않았지만. 장애인 동생을 돌봤다는 미담과. 유투브에 보이는 청소년기에 찍은 홈 비디오에서 그의 기타 실력은 이미 대단한 인물이 될 싹수가 엿 보였다. 

 생긴것 만큼 고등학교 때 꽤 공부를 잘 했던 모양인데. 대학을 안 가고. 뮤지션의 꿈을 품고. 더 마크드 란 밴드를 만들어 플로리다에서 활동한다. 그 후. 시카고의 레코드 점에서 만난 일본계 제임스 이하와 의기 투합해 스매싱 펌킨스를 만든다. 아마 이 쯔음에 그의 여자친구가 나중에 커트 코베인의 부인이 될 커트니 러브 였다. 같은 67년 물고기좌의 커트 코베인 과의 악연은 이미 한 여자를 두고..싹트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스매싱 펌킨스의 데뷔 음반인 Gish (1991)는 너바나의 Nevermind (1991) 와 프로듀서가 같았다. 부치 빅 이란  사람인데 록음악계의 거물이다. 나중에 가비지란 밴드를 이끈다. 같은 해에 같은 프로듀서에 의해 만들어진 음반이지만 너바나의 음반은 역사에 남을 대대적인 반향을 얻어낸 반면. 스매싱 펌킨스의 음반은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성공에는 이르지 못한다. 
 
 자의식 강하기로 유명한 빌리 코건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여자친구였었던 커트니 러브도. 커트 코베인 에게로 갔다. 밴드내에선 다른 멤버들 끼리 연애질의 위태로움과 드러머는 알콜 과다 섭취등등..안밖으로 문제가 산 만했다. 밴드의 리더로써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가 상당했다고 한다. 그당시 그는 신경 쇠약에 걸려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머리 숱도 없어 보이고 그의 표정은 정말. 생의 긴장과. 부담속에 부서질듯 말듯한 모습이다. 


 그는 2번째 음반에서도 성공을 못하면 일반 직장인이 될 각오로 자신의 모든 음악적 역량을 쏟아 부었다. 그의 완벽주의적 성격은. 밴드의 모든 곡의 작사 작곡. 프로듀스 까지 맡은 것도 모자라 베이스와 세컨 기타 파트 까지 멤버들을 놔둔채 자신이 다 녹음 했다고 한다. 대단한 독재주의자다. 다른 멤버들의 분노와 상처가 컷음은 말 할 것도 없고. 밴드는 성공하기도 전에 풍지박살 날 뻔 했다. 그런 와중에 심기일전의 노래가 Today 였다. 최악의 상황에서 그는 Today is the greatest day I've ever known 이라고 부른다. 그리곤. 이 노래를 시점으로 대박이 난다. 

 http://www.youtube.com/watch?v=RHUd896Sur0

 이 뮤직 비디오의 마지막 홀로 남긴 빌리 코건의 모습은 우연찮게 현재의 스매싱 펌킨스를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곡이 수록된 2집 사이미즈 드림은 많은 곡들이 히트침으로써 3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다. 개개의 곡도 좋지만. 앨범의 완성도 면에서..빌리 코건의 완벽주의 성향이 느껴진다. 앨범의 첫 곡 Cherub Rock 의 겹겹이 쌓은 오버 더빙은. 묵직한 오버드라이브 기타의 감동을 자아낸다. 한 예술가가 역경을 거쳐 모든걸 다 쏟아부은 역작이다. disarm 과 mayonaise 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 다음에 계속..2011/05/07 - [음악] - Smashing Pumpkins 스매싱 펌킨스 라는 밴드 2




 
 

 2월 20일 일요일에 에릭 클랩튼의 세번째 한국 공연이 열렸었다. 난 못 갔지만. 들려오는 후기를 듣자하니 당연히도 매우 좋았던 모양이다.
 이번 공연을 못 본 것이 아쉽긴 해도 살아 생전 그의 공연을 한 번은 봤다는 성취감에 만족하련다.
 내가 봤었던 2007년 서울 공연의 감흥이 떠올랐다. 그 땐 운 좋게도 제일 싼 티켓을 그 구역에서 제일 좋은 위치에 잡았었다. 근데 요번엔 그런 노하우가 안 먹힐정도로 그 구역은 이미 매진되었다.

정말 애기들부터 노인까지..가지각색의 인종..사회 전 연령층.계층들이 몰린다. 만명의 꽉 찬 체조 경기장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의 나이 65세..기타의 신. 살아있는 로큰롤의 거장. 하드록의 창시자..이젠 블루스의 대가. 지미 헨드릭스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아니 어느 누구나 최고라 인정하는 그 둘.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활발히 활동하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

 이번 공연에서는 에릭 혼자 1 기타로..2명의 키보디스트가 배킹을 담당했다고 한다. 2007년 공연에선 키보디스트 외로 2명의 배킹 기타가 더 있어서. 레일라도 음반 버전 그대로 풀 편성으로 해줬는데 요번 공연에선 어쿠스틱 레일라 버전으로 연주한다. 어쩌면. 에릭 혼자 기타를 치는 것이 그의 기타 연주의 진면목을 오롯히 느낄수 있어서 좋겠단 생각이 든다.
 
 
위 영상은 스마트 폰으로 촬영했을텐데 녹음이 꽤 잘 되었다. 현장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원더풀 투나잇 에릭의 대표곡인데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워서 더욱 좋아하는듯 하다. 사실. 에릭이 이 곡을 만들때는. 노래 가사 처럼..아름다운 마음만 가지고 쓴게 아니라던데..파티를 가야하는데. 그의 부인 (패티 보이드./레일라/친구의 아내였던) 이 너무 치장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짜증을 달래는 심정으로 거실에서 기타 치며 만든곡이라 한다. 너 어떻게 꾸미든 너무 아름다우니까..이제 빨리 가자.. 라는 심정?

 처음에 이 노래를 접했을땐. 너무 심심하고..지루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이 노래의 편안함과. 진정성이? 다르게 다가온다. 가사 내용 또한. 거창한 수식이 아닌. 그냥 이야기 하듯. 귀에 쏙쏙 들어오고. 슬로우 핸드란 별명 답게. 기타 솔로 또한 절제된 감정을 보여준다. 이 노래의 관조적인 분위기는 당신 너무 아름다워요 하고 있지만..사실은.그 이면엔 결혼 생활의 현실에 직면해 관조섞인 푸념에 가깝게 들리기도 한다. 그렇게 어렵게 결혼했지만. 그다지 오래 유지하지도 못한. 사랑의 어떤 지점에서 만들어진.. 사랑노래인데.. 아름답고 달콤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매력이 있다. 에릭 클랩튼은 뭘 해도..영원한 블루스 맨 이니까..

 
레일라 어쿠스틱 버젼인데..일렉 기타로 연주하는 멋이 있다. 솔로 톤도 멋지고..
이번 공연에서 내가 부러웠던 점은..그의 또다른 명곡 Old Love 를 96년 하이드 파크 공연과 비슷하게 연주했다는데 있다. 내가 에릭 클랩튼에 결정적으로 빠지게 된..Old Love 의 퍼포먼스..


 곡이 끝나고 땡큐~만 말하는 그 간결함.. 너무 멋지다.. 뻐꾸기 남발하는 가수는 좀 본받아야 한다..만담하는 가수 제일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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