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무지쿠스 (부제는 문명의 사운드트랙을 찾아서) 다니엘 J 레비틴. 장호연 역.

이 책의 원제는 The World in Six Songs ( How the Musical Brain Created Human Nature ) 이다.

여섯가지 노래란, 우애, 기쁨, 위로, 지식, 종교, 사랑 의 카테고리로 나뉜다. 이 책의 각 장이 저렇게 여섯개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신경과학자. '뇌의 왈츠' 란 책으로 알려졌다. 이 사람이 다른 어떤 책에서 어떤 분야든 세계적인 수준에 오르려면 최소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주장한 신경과학자로 더욱 유명해졌다.

 진화생태학적 관점에서 인류와 음악의 공진화 과정을 저자의 추론과 가정, 뮤지션들의 인터뷰 등으로 엮어져 있다. 글은 딱딱하지 않고. 가볍고 읽기 편하다. 그러나. 상식 이상의 수준은 아니다. 음악을 좋아하신다면 유식한 교양을 위해 읽어볼만 하다. 
 발췌하려고 다시 부분 부분 읽어보니..꽤 괜찮은 책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 예술이 힘을 갖는 것은 형식과 구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좋은 음악은 언어의 장벽, 종교와 정치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 누군가의 절절한 마음에 닿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열어 일상적인 말로는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을 포용하게 하죠."_ 피트 시거
" 나는 물론 노래의 힘을 믿습니다. 하지만 노래 하나가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요. 그저 누군가의 머리에 씨앗을 뿌리는 정도죠. 언젠가 내 머릿속에 심어져서 나를 지금과 같은 정치적 동물로 만든 그런 씨앗처럼 말입니다. 당신이 어떤 젊은이의 마음에 어떤 생각을 담아 노래하면, 언젠가 그가 정치가나 권력자가 되었을 때 그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트 시거는 40~50년이 지나 이후 세대에 이르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런 씨앗을 여러 개 뿌렸었죠." _ 스팅. p.84.

 좋은 음악은 좋은 시가 그렇듯이 하나의 사연을 우리 자신의 문제보다 큰 보편성의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예술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까닭은 우리를 더 높은 진실, 전 세계 공동체의 일부라는 깨달음과 연결해 주기 때문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위로의 노래가 바로 그래서 있는 것이다. p.148.

 예술과 과학 모두 음악적 뇌의 세 가지 근본 요소인 관점 바꾸기, 표상, 재배열과 관련된다. 이런 세 가지가 서로 결합하여 은유(하나의 대상이나 개념이 다른 것)와 추상(계층적으로 상위 개념이 하위 요소를 나타내는 것) 이 만들어진다. 예술과 과학 모두 감각을 통한 지각적 관찰의 요소들을 가져다가 증류하여 본질을 추출하므로 은유와 추상에 의지한다. 우리는 정보를 날것 그대로 제시할 때 보다 단일한 정보로 가다듬어 제시할 때 더 많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예술과 과학은 바로 이렇게 세상의 지식을 추출하고 추상화해서 보다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형식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전체적인 관점을 갖고 주제를 통합하고, 적절한 자료와 그렇지 않은 자료를 판단해서 가리는 일이 예술과 과학의 공통점이다. 예술과 과학은 모든 것을 다 표상할 수는 없다. 대신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까다롭게 결정해야 한다. p.202.

 사랑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가 가진 근심과 실존보다 더 큰 것이 존재한다는 느낌에서 출발한다. 그 대상이 다른 사람이든 나라든 신이든 사상이든 사랑은 근본적으로 보면 우리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해 느끼는 강렬한 애착이다. 궁극적으로 사랑은 우애,위로,의식,지식,기쁨보다 더 크다. 비틀즈가 노래했듯이 사랑이야말로 정말 우리가 필요한 전부인지도 모른다.
 낭만적 사랑은 대개 맹목적이다. 서머싯 몸이 지적했다시피 우리는 실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이는 대단히 자기중심적 경향을 보인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내가 느끼는 감정 때문이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내가 즐겁기 때문이고, 내가 보기에 그녀가 아름답고 섹시하고 똑똑하고 재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보다 우위에 둘 때 한층 성숙한 사랑이 시작된다. 부모가 자식한테 보이는 이타적 사랑,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켜 자식이나 짝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사랑이다. 낭만적 사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우리를 몰아세운다. 성숙한 사랑은 설령 함께 있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이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한다. 스팅의 유명한 노래에도 나오듯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냥 자유롭게 내버려두시오." p.258.

 동굴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아마도 숯으로 벽에다 곰을 그리려 했을 것이다. 먼저 그는 그림이 실제 모습과 결코 똑같이 보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림은 사물을 추상화시킨것, 심상의 불완전한 근사치이다. 이렇게 생각하려면 관점 바꾸기 능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사고 과정, 자신의 한계,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되짚어 생각해 볼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예술가는 본질적이고 두드러진 세부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어떻게 그려야 할지 판단해야 한다. 이런 선택의 과정에는 추상적(혹은 상징적)사고가 필요하다. 몇 개의 선을 그린 다음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내가 원래 생각했던 것과 비슷해 보이나? 이어 심상에 맞게 그림의 일부를 계속해서 바꾸는 과정이 되풀이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자문한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곰을 그린 것이라고 알아볼까? 여기에도 관점 바꾸기 능력이 필요하다. 특히 다른 사람의 지식, 사고, 믿음이 자신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p.276.

 가장 고귀한 사랑은 바로 우리 존재에 대한 사랑이다. 결점 많고 파괴적이고 비겁한 두려움과 험담과 경쟁의식에 시달리는 인류에 대한 사랑 말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처했을 때 종종 내보이는 선함.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올바른 일을 행하는 의로움, 아무 소득이 없는데도 정직하게 구는것, 남들이 싫다고 외면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바로 이런 것들에 대한 사랑이, 그리고 이를 글로 짓고 노래로 만들어 찬양할 줄 아는 능력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p.313. end .


 이 책을 만나기 전, 이 책의 저자인 강신주 님의 근작인 ' 상처받지 않을 권리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라는 부제가 붙은) 를 우연히 읽었었다. 우연한 책의 인연이 이렇게 강렬할  줄이야 그 땐 몰랐었다. 그 책을 빌려놓고도 다른 책을 읽느라, 반납을 얼마 남기지 않고 펼쳐 들었는데, 오호라~ 노다지를 캐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서 강신주 님의 다른 저작물을 검색해서 두번째로 읽은 책이 이 책이었다. 

 이 책 역시 좋은 책의 모든 요소는 다 갖추고 있었다.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책의 구성 요소들도 완벽했다.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본문의 내용을 친절하게 꿰뚫고 있으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각 장마다 더 읽을 책들을 소개하는데,책의 핵심을 간략히 찔러준다. 공부의 의욕을 내심 불러 일으킨다. 또 본문의 주석 또한 이렇게 쉽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엔 완벽히 좋은 책 이어서, 앞으로 이런 책을 쓰고 싶단 욕망과 함께, 강신주 님의 글쓰기는 나의 롤 모델 이 되었다. 공부의 내공이 매우 높아야 하는 당위성이 따라야 하겠지만, 마음속에 목표가 생긴다는 것은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철학이 없는 삶과, 삶이 없는 철학은 말 자체만으로도 뭔가 불안하다. 저자는 한쪽이 부재한 현대사회의 병듬에 대해서 아쉬워하고, 절름발이 와 같은 마음의 불안은 삶과 철학이 만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 책의 목적은 철학과 삶의 만남을 주선하는,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을 더욱더 풍성하고 윤택하게 만드는것에 있다. 철학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으려면, 한때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삶에 대한 성찰이자 기록이어야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삶의 낯설게 보기를 통하여, 맹목적인 삶을 반성하고, 철학적 사유(거리두기)를 통해서 삶을 제대로 음미하자고 말한다.

 철학적 사유로 우리는 미리 삶에 낯설어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철학은 우리에게 ' 내가 나중에 알게 될 것을 지금 알 수 있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고 한다. 철학적 사유가 불편함과 당혹감을 준다고 해도, 삶의 현실에서 직면하게 될 그것에 비한다면 적다고 할 수 있다. * 그런 점에서 철학적 사유란, 다시 반복되지 않을 소중한 삶을 후회 없이 살겠다는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주옥 같은 본문의 글들은 빌려온 책의 한번 보기 로는 미흡하다. 이런 책 이야 말로 책장에 꼿아두고 두고두고 음미하고 사유해야 할 책이다. 좀 더 낳은 공부의 길에 친절한 Hub 로써 역할을 톡톡히 한다.
 많은 사유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사랑에 관한 바디우의 철학이 인상 깊었다. 사랑은 하나가 아니라 둘을 지향해야 한다는. 논리에 나도 쉽게 수긍되었다. 개별성의 존재를 존중하고 인정할때에 진정한 사랑은 가능하다는 말이었던 듯 싶다.

 산을 좋아하는 내게 p75의 글은 주옥같았다. _ 우리가 산에 오르는 이유도, 산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아주 보잘것없는 정도로 작게 조망할 수 있는 고도감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 자신이 사는 곳과 우리가 살 수 없는 곳 사이의 차이를 즐기는 것이기도 합니다._ 이런 예시로 참된 철학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지금 여기'와, '어디도 아닌곳' 사이에 있으려고 하는 의지를 통해 존재할수 있다고 한다. '어디도 아닌곳'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 여기' 를 반성하고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감, 혹은 낯섦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라고..

 공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저자의 책을 통해서, 철학과 삶이 부재한 우리의 일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편견과 생활만이 가득찬 이 사회에서 자살을 예방하는 길은 각자 삶의 철학을 이뤄, 철학이 있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여야 합니다. 하루에 자살하는 사람의 숫자가 절 깜짝 놀라게 해서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나','고통' 을 한 발 물러서 낯설게 보자고..

앞으로 글을 독백체에서 마지막 문단 처럼 대화체로 바꿔볼까 생각중입니다.. 

 이 책 또한 제목이 와 닿아서 뽑게 되었다. 역시나 글쓰기 실용서 와는 거리가 멀고, 글쓰기를 통한 삶의 통찰을 이끌어내는 꽤 괜찮은 책이다. 책의 형식은 대학생들에게 강의 하듯이 아주 친절한 문체로, 다른 책의 인용을 곁들이면서 저자의 서술이 이어진다. 가볍게 술술 읽히지만. 곳곳에 작가(예술가)의 삶에 대한 통찰들이 수시로 가슴을 친다. 저자는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를 ' 인생을 값지게 만드는 인류사적 행위 ' 로 파악 한다고 한다. 또한 잔재주가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일관된 '자세' 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9장에서 소개되는 아니 에르노란 소설가의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 중에. 그녀의 책 '칼 같은 글쓰기'와 '단순한 열정''부끄러움' 은 따로 찿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도 아주 많은 구절을 인용해서 실었는데. 아주 예리하게 핵심을 파고 드는 면이 좋았다. 다른 장에서 소개되는 작가나 책들의 인용 모두 좋았지만. 이 책의 백미는 이 부분 이었던 것 같다.
 작가는 말한다. 내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는가를/할 것인가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글쓰기가 도달할 가장 높은 경지 중 하나겠지요.. 사랑. 부끄러움, 증오를 객관화시켜 정확히 쓰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을 걸고 쓰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글쓰기는 자기 자신의 의지 문제 아니겠는가. 아무리 실용서 들이 난무해도. 자신의 글쓰기와는 별로 영향이 없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접근은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제목 그대도 삶속의 꾸준한 글쓰기의 의지와 따듯함이 녹아있다.

 이 책에서 거론되는 책 중에 내가 끌리는 다음의 책 들을 찾아 읽어볼것..

슈테판 츠바이크 '발자크 평전', 박지원 '연암집',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
아니 에르노..
 도서관의 서가를 재빠르게 훝는 나의 눈에 이 책의 제목이 안 들어올리가 없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라 불리는 연암 박지원. 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라니..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그냥 읽어봐야 하는 책이 아닌가. 사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긴 보았지만. 내가 제대로 본 것 인지 잘 모르겠다. 어느 지식인 처럼. 그의 글을 보고 삶의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거나. 글쓰기의 도약이 일어나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아마도 그런 류의 책을 별로 접해보지 않았거니와. 한문에 관한 나의 무지와, 청나라 문물에 대한 나의 관심밖이 내게 큰 감흥을 주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열하일기는 여러 학자들이 다양하게 번역. 원문, 해석, 변주 된 책들이 많아 보인다. 다행히도. 내가 열하일기. 아니 연암 박지원의 글에 감동받을 기회는 아직 무궁무진 하다.

 이 책은 다른 여타 글쓰기 실용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소설과. 실용(가르침)을 동시에, 연암 이라는 대 문장가를 불러내어 아우른다. 참신한 시도인것 같다. 역사 소설 형식에 연암의 글쓰기 가르침을 담았다. 소설적 재미와.(상상) 과 실제적 각성 ( 가르침 ) 이 공존한다. 저자는 이 책을 연암의 오마주 로써, '인문실용소설' 이라고 부른다.
 연암에게 가르침을 받는 소설속 주인공이 각각의 독자들에게 이입되어, 마지막 책 장을 덮을 때는, 다른 실용서와는 다른 감흥을 가져온다. 주인공이 연암에게 과제를 받아 쓰는 글들은, 쉽게 쓰여지는 글이 아니라, 몇 일, 몇 달을 사유하고 쓰는 깨달음의 글 들이다. 그것은 전혀 길지도 사변적이지도 않은, 핵심을 꿰뚫는 비수와 같은 글 들이다. 현재의 우리네 처럼 글을 그저 감정의 배설로. 쉽게 쓰이지 않는다. 라는 선조의 풍류적(자연의 통찰) 글쓰기의 가르침은 나의 글쓰기를 뒤돌아 보게 한다.

 연암 박지원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책은 왠지 저자의 소품같은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신한 시도는 좋은나. 진중한 깊이는 부족한듯 보인다. 이런 비슷한 형식의 역사 소설인 토정비결이나, 길없는 길의 몰입도에 미치치 못한다. 그래도 어느 글쓰기 실용서 보다는 여운이 많이 남는듯 하다. 좀 더 깊게 읽고 . 깊이 생각해서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이 가슴에 자리잡았으니..그리고 글의 무서움 또한 다시한번 자각했으니..

 너무나 단순한 진리여서 관심이 없었나. 이 책을 서점 에서 아이 서치 할 때, 너무 뻔한 자기 개발서 라고 생각했었다. 현대사회에서 몰입, 집중력, 마음 내려놓음 등 을 강조하는 무수히 많은 책 들중 하나일 뿐, 뭐 대단한 생각이 들어 있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200페이지 분량의 이 책을 후딱 읽어버리고 나서 든 생각은 맞다. 좀 뻔하긴 한데, 좀 가슴에 남는게 있었다. 단순한 진리 속에서 내면을 변화시키려는 자아의 욕망이 꿈틀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이 책을 읽는 몇 시간 동안은 이 책의 제목대로 몰입의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인 것이, 글(문장)이 술술 잘 읽혀진다는 데에 있다. 원래 저자도 리듬감 있게 잘 썻겠지만. 번역자 또한 이 책 내용대로, 몰입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번역작업을 하신 듯 하다.
 자신이 알고(느끼고) 있더라도, 책을 읽으면서 다시 환기 시키고, 의욕을 갖게 만드는 것은 글의 특출난 힘 인 것 같다. 점점 몰입하기 힘든 사회가 되버린 이 세계의 환경에서 이런 몰입의 강조는 두고두고 곱씹어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존 레논이 이런 말을 했다. ' 인생은 무언가 몰입할 때, 일어나는 무엇이라고.' 인간의 모든 창조는 몰입에, 자신의 내던짐 이었다. 행복 또한 그 과정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우리가 삶에서 그것을 자주 느낄때, 그것은 생활이 아니라 진짜 삶이 차곡차곡 쌓여 참된 인생을 만든다. 또한 가치관이나 삶의 목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잘한 일상에서의 몰입도 강조된다. 결국 삶이란 이 순간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이기 때문에,지금 내가 무었을 행할때 어떻냐라는 것이 삶의 질을 바꾼다. 

생각과 관념을 넘어선, 몰입의 상태야 말로 집착과 분별이 낳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 일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과정을 추구하고 지향점 삼아, 창조적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느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내 삶에 몰입하고, 좋은 친구들과, 맛있는 식사와 차 한잔의 여유와 따듯한 담소를 나눌 수 있을때, 그 순간의 감흥이다.

오늘의 시대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는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하여 알고 있는 내용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초월성을 가진 목표들의 새로운 터전을 발굴하는 것이다. 즉 삶에 의미를 주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신화는 고대의 신화들이 이미지와 비유와 사실을 통해 우리의 선조에게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가 현실을 가까운 미래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P.185. 

 양서란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 일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나의 읽고 싶은 도서 목록이 적힌 너덜너덜한 A4 용지의 작은 귀퉁이에 기약없는 소심함으로 적혀있었다. 제목의 힘 이었는지, 또는 글 잘쓰는 비법이라도 귀동냥할 막연한 심정이었는지 도서관을 나오는 내 가방에는 황홀한 책감옥으로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는 내내 지긋히 내 어깨를 눌렀다.

 이분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대하소설 자체에 별 관심이 없어서, <태백산맥><아리랑><한강>을 쓴 작가라는 사실만 알았을 뿐, 읽어보지도. 읽을 생각도 안 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안 사실은 엄청난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지금까지 몇 쇄를 찍었다더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마어마한 독자층을 거느린 대 작가이셨다. 박경리의 <토지>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대하소설 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긴 소설들은 별로 읽은 기억이 없다. 예전 학창 시절에 읽었던 <삼국지>와 <의천도령기> 라는 무협지 정도.. 그 동안 나의 무식의 소치가 여실히 드러난다. 이 책 <활홀한 글감옥>을 읽고 나서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부끄러움과 설레임이 교차한다.
 내가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전혀 안 보았다고 하니, 친구가 "넌 앞으로 무척 행복할꺼야.'라고 말하더라. 내게는 외국의 '반지의 제왕'이 아니라 앞으로 <태백산맥>을 필두로 조정래의 대하소설을 읽을 생각하니, 가슴이 벌써 서서히 달아오른다. 

 이 책은 70줄 나이의 노 작가의 자전적 인생이 담겨 있다. 강연회에서 젊은이들의 질문을 충분히 답변할 시간이 없어, 그 중에 질문들을 뽑아내어 작가의 삶과 인생에 대한 정수들을 모아 전해준다. 그의 40년 글쓰기 인생을 한마디로 축약한 말이 이 책의 제목이다. 황홀한 글감옥.  그는 매일 원고지 30매의 집필량을 유지하며, 철저한 자기관리를 한다. 글 쓰기를 고달픈 노동이라 말하며 그는 글감옥 속에서 문학의 성취감을 맛본다. 글을 쓰고자 한다면 언제나 막장에 있는 광부만이 석탄을 캘 수 있다고 일설한다. " 40,50년 글을 쓰는 작가도 한 문장을 쓸  때마다 한 번 곡괭이질하는 광부의 노동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p.253

 한 문장을 쓰기 위해서 세번씩 생각하고 원고지에 적는다고 한다. 원고지에 글을 쓴다는 것은 지금의 컴퓨터 세상에서는 매우 원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종이와 연필로 자신의 필체로 글을 적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숭고해 보인다. 세간에 최고의 문장가라 칭하는 김훈의 작업 방식도 그렇다. 한 문장, 한 구절 들이 살아 숨쉬며 한 단락은 감동의 상념으로 물든다. 그것이 꼭 글 쓰는 행위의 미디어적 차이에 비롯되기 보다 온 몸을 온전히 글쓰기에 내던지는 투철한 장인 정신과도 맞닿아있다. 한올 한올 뜨개질 하는 집중과 정성으로 또는 한 켜, 한 켜 짜는 손수 움직이는 방적기계의 수고 처럼 글 쓰기는 매일 쉬지 않는 노동이라고 한다. 조정래 작가는 소설의 감동을 위해서 남들 8시간 일하는 것보다. 두배인 16시간의 노동을 다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투철한 예술 정신. 직업 의식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모든 내용과 생각이 허투로 들리지 않는다. 비판적 책 읽기로..이건 내 생각과 다른데..하는 점이 전혀 안 보인다. 이 작가의 . 역사의식. 민족의식. 친일파에 대한 생각. 이념등. 나로썬 너무나 동의 된다. 특히 민족의식에 대한 나의 부정적 편견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 이란 단어에 따르는 수구,보수 우경화에 대한 무의식적 반감이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잊어버리는 필터 역활을 하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분명. 조정래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나의 편견은 여지 없이 깨지고 새로운 정체성의 자각에 몸둘바를 모를지도 모르겠다.

 책의 모든 부분이 귀감이 되서. 오히려 글 (독후감?)을 쓰기가 어렵다. 너무나 인상적인 구절들이 많아서 따로 발췌할 것이 없이. 나중에 다시 음미 하면서 읽어봐야 한다.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뿌리>에서 1억명의 인디언이 백인에게 학살 되었다는 사실.(논문으로 증명되었다고 함.) 이 깜짝 놀라게 했고, 부인 김초혜 시인 과의 사랑 이야기. 삶도 매우 부럽고도 귀감이 되었다. 포스코 명예 회장. 박태준씨의 놀라운 인품. 등 몰랐던 사실들도 기억에 남게 전해진다. 그리고 4-4-2.  축구 전술이 아니라. 작가가 권하는 책을 읽고..그것에 대해 생각하고.숙고해서...글을 쓰는 비중을 4-4-2의 비율로 해야 한다고 한다. 책을 읽은 시간만큼 자신의 생각을 정리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블로그의 글쓰기에 있어서 생각해 보아야 관점이다.

 자신이 현재 작가라면. 혹은 작가를 지망한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읽고 <태백산맥>을 읽어야 겠다는 소명의식이 생긴것 만으로도 감사한데, 너무나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이 시대의 참 좋은 어르신 이다.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평생 애처가로써 문학에 전념한 그의 삶이 마음속에 일렁인다. 

- 종교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p.36

- '현실 속에서 문학은 과연 무엇인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소설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고심은 진정성을 가진 문인이라면 누구나 하게 될 것입니다. 릴케는 자신의 시가 굶주려 죽어가는 소녀에게 주어야 할 한 조각 빵만도 못한 것을 탄식했고, 카뮈는 자신이 내세우는 실존주의가 몽마르트르 비탈길에서 얼어 죽어가는 노숙자를 살릴 담요 한 장만도 못하다는 것에 신음했습니다. p.38

- '돌은 단 두개. 뒷돌을 앞으로 옮겨놓아가며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강을 건너가야 한다. 그게 문학의 징검다리다.' p.46

 작고 두껍지 않은 책이라 도서관에서 마트에서 시리얼 고르는 기분으로 대출했다. 이 작가는 여자가 좋아라 하는 작가인것 같다. 노통브란 성이. 보통(알랭 드)을 생각나게 한다. 왠지 책도 비슷할 거 같은 느낌이 유추된다. 그냥 보통인..

 바누아투란 너무나 풍족해서 일도 안하고.. 삶의 만족도.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섬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리적 배고픔에 대해서 말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것은 마음의 배고픔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자기의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서..그녀는 책 읽기와 글 쓰기를 통해서 삶의 공허를 이겨내는 법을 배운듯 하다.

 초반에 배고픔에 관해서 중국인들은 인사로 식사하셨어요?..라고 한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문화권에선 너무나 자연스런 언행이다. 이제는 아니지만. 여전히 어른들에게 인사를 건넬때. 쓰인느것 같다.
 
 내가 뉴욕에 있을때. 이 지극한 한국적 인사를 촬영 스탭으로 만난 현지인(서양인) 에게 Did you have breakfast? 라고 인사 차원에서 건넸을때. 그들은 그런걸 왜 물어보냐는 식의 반응에서 나의 문화적 무지를 다시금 연상케 했다. 아침에 만나자 마자 밥 먹었니? 라고 물어보니..얼마나 이상했을까..

 이 책을 가볍고 빠르게 읽으면서, 비슷한 자전적 소설인.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 가 떠올랐다. 내가 남자여서 인지. 내 취향은 폴 오스터 쪽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본질적 공감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 위 두 책의 비교에서도 드러난다. 여자들이 공감할 부분이 충분히 수긍이 가나. 좀 가볍다는 생각이..계속 든다.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은 중간에 뉴욕에서의 가정부 잉게의 짝사랑 이야기 가 너무 좋았다. 마음에도 없는 "노" 라고 말함으로써. 그 짧은 순간 운명의 장난으로 인생이 뒤틀리는? 이야기.. 이런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 바람과는 정 반대의 행동들..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정말 후회되는 행동들. 나 조차 이해할 수 가 없으니..어떠한 설명도 자가당착이다. 이론적으론 자기방어기제의 작동이라 할 수 있는데. 사람의 마음, 감정을 이론으로써 언어로 푸는것도 어불성설이다.

<글쓰기는 무엇보다 육체적인 행위였다. 내 안에서 뭔가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이 세포 조직 비슷한 것을 이루어 내 몸이 되었다.> 이 부분이 가장 맘에 들었다. 육체가 건강할때. 글쓰기는 좋아진다.  글이 좋아진다는 것은 정신이 맑아진다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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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의 글, 문체가 온전히 내 안에 들어오기까지는 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도 톡특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만들어가고 있는 재능있는 작가의 글은 더욱 그렇다. 소설을 평소에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몇 년 전 부터 박민규란 소설가의 평판을 잘 알고 있었다. 차세대 문학의 기수란 거창한 수사가 자주 붙었고, 외모 또한 아주 독특한 사람이어서 흥미가 생겼다.(나도 그런 안경 써보고 싶다.ㅋ)
 도서관에서 빌린 박민규의 첫 책은 '핑퐁' 이었다. 읽기 힘들었다. 문체는 내 마음에 닿지 않고 겉으로만 맴돌았다. 평소에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 내 상상력이 죽었는지. 교과서를 읽는듯 종이와 검은 잉크로 찍힌 활자만이 내 눈에 떠돌아 그만 집어치웠다. 그러다 한 참 후 단편소설집 '카스테라'로 다시 시도해보았다. 오..엄청났다. 박민규의 독특함이 이런것이었구나, 나는 이 대단한 단편소설들에 푹 빠졌다. 왜 박민규의 이름이 그렇게 화자되는지 심히 공감되었다. '카스테라' 한 권으로 나는 새로운 세계를 얻은 기분이었다.

 다른 공부(책)을 읽을게 많다는 핑계로 소설은 항상 뒷주머니에 넣어둔 초컬릿 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맛있게 먹어야지 하고 꼼쳐둔, 하지만 그것은 뭉게지고 찐뜩해져서 먹기 불편할뿐만 아니라 딱딱한 것을 입에서 요리저리 돌려가며 먹는 다양한 맛을 느낄수 없다. 소설(책)과의 인연도, 사람과의 인연만큼 경이롭다. 그렇게 많은 책, 위대한 작품 속에서 내게 우연히 다가온 그 책을 외면하기는 비겁하다. 사람이던 책이든 시절인연은 존재한다. 그 마주침으로 인해 나는, 우리는 어떻게든 변화의 장에 놓인다.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깨닫게, 신호는 널려있고, 우리는 그것을 부단히 마음을 열고 봐야 한다.  신의 섭리는 항상 작용한다. 

  아무런 정보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이 환타지 소설일 것이라고 잠정짓고 있었다. 나는 환타지 장르를 안 좋아하는데, 이 책의 제목과 표지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더욱 그렇게 단순하게 인식했는지 모르겠다. 책의 표지는 일단 어둡고, 유쾌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이란 그림의 한 부분이라는데, 그림속의 못생긴 여자만이 칼라로 부각되었고. 나머지 그림부분은 단색과 저채도여서 무겁고 후퇴되어 보인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생각해보니. 이 표지는 첫인상은 안 좋았을지 몰라도. 책의 내용을 함축하는 탁월함이 엿보인다. 전체적으로 무겁고, 비호감.추, 시각적 인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책의 시작은 순정만화 소설같은 조금은 신파적인. 내용으로 시작한다. 기존 박민규의 단편에선 못 봤던 매우 여성스런 감성이다. 작가의 나이에 대략 맞는 80년대 19살의 회상으로 나와 그녀. 그리고 요한 이라는 제 3자가 소설의 중심이다. 첫 챕터를 읽기 까지는 그냥 뻔한 연애 소설이었다. 왜냐면 이 첫 부분의 이야기가 선형적 흐름속의 후반부 한 부분이 먼저 땡겨온 것이었다. (타란티노 감독의 '저수지의 개들'에서 처럼 은행 강도의 결과를 보여주고. 그 다음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방식. 이 옜날 영화에선 신선했지만 이제는 너무 흔한?) 
 둘 째 장 부터가 나(주인공)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녀.(첫 째 장에서 눈 속의 뮤직비됴 주인공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거라 상상한) 하지만 소설속의 그녀는 내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추녀로 묘사된다. 기존 소설속의 여주인공들의 아름다운 자태,외모를 상상하기는 껌씹기 였다. 못 생긴 여 주인공을 상상하기는 벅찼다. 그렇게 순수하게 외모적으로 못 생긴 사람이 있을까란 의문속에서 소설은 가족에 얽힌 상처와, 물질만능시대로 이미 진입한 80년대의 외모지상주의 세계에서 그녀와 나가 겪는 무겁고 씁슬한 연애담이 흐른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185쪽 요한의 말.)

 "아마도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겨울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해줄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그런 보잘것 없는 기억의 편린조차도 더없이 눈부신 순은의 반짝임으로 떠오른다. 인생에 주어진 사랑의 시간은 왜 그토록 짧기만 한 것인가. 왜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왜 인간은, 자신이 기르는 개나 고양이 만큼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왜 인간은 지금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망각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192쪽 나의 말.)

 이 책의 마지막에 작가의 말이 있는데 아주 탁월한 명문이다. 이 소설의 의도와 세계관을, 짧은 글에 다 함축하는데 역시 대단한 필력과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잘 드러나며, 소설가로써의 자신의 신념이 확고히 드러나고, 솔직하다.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 하지말자." 란 말로 현 세태를 꼬집고, 진단한다. 자본주의가 만개하며 우리를 보이지않게 욕망의 노예로 만들어가는 그러한 현실을 비판한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현대인은 점점 더 높아지는 사회적 가치의 평균에 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작가는 책에서 ‘삶’과 ‘생활’이라는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현대인이 속한 분야는 대부분 ‘생활’에 해당한다. 돈을 많이 벌고, 끊임없이 예뻐지려 하며 백화점 세일에 현혹되어 인생의 진정한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 ‘생활’이다. 따라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외모가 아니라 서로의 내면에 끌리고,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독자에게, 다시한번 말하자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말기”라는 말로 대표되는 내면의 당당함을 추구하기를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주어진 것을 고를 수 밖에 없는 소비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만들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생산자의 삶. 그것이 우리를 더이상 초조해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는 삶으로 만들어 주는 것임을 작가는 남자주인공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다.

 단 한번이라도 온전히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이 있는 자들은 자신의 삶을 타자의 시선에 의탁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바로 온전한 사랑했던, 사랑하려는 몸짓에서 시작된다. 시시해질 수밖에 없는 서로를 상상할 수 있는가.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상상과 희생으로 메울 수 있는가. 나는 당신 때문에 아직도 아프다며, 쿨하지 않게 다가설 수 있는가. 여기서 겪을 수 있는 초라함을 견딜 수 있는가. 소비를 위한 사랑이 넘치는 세계 속에서 외로운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속에 몰두해서 빨리 읽지 못했다. 어떤 문장이나 시퀀스 들에선 수시로 책에서 눈을 떼 창밖을 멍하게 보게 했다. 회상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의 19을 그리고 현재를. 무엇이 변했는지를..나는 잘 모르고 지금 이후로 어떻게 변할지 잘 모르는 일이다. 관념을 넘어선 그 무언가는 계속 그렇다.


<소설속>
삶이란 뭘까요?
내가 물었다. 그냥 이런 거지, 라며 요한이 중얼거렸다. 잠에서 깨어있는 거야. 잠에서 깨어나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시고... 또 오줌을 누는 거야. 잠을 삶의 일부라 생각하는 건 커다란 착각이야. 잠은 분명히 죽음의 영역이라구. 즉 죽어있는 인간들이 잠깐 잠깐 죽음이란 잠에서 깨어나곤 하는거야. 그게 삶이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라고 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삶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건 실은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꿈>이기 때문이야. 좋은 꿈을 꾸기 위해 이렇듯 맥주도 마시고... 오줌은 뭐 그렇다 치고 어쨌거나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거지, 안 그래?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꿈같은 일이란 실은 별다른 일은 아니야.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꿈 같은 사랑이란 것도 별다른 게 아니지. 그냥 살아가듯이 그냥 사랑하는 거야. 기적 같은 사랑이란 그런 거라구. 보잘것없는 인간이 보잘것없는 인간과 더불어... 누구에게도 보이지도, 보여줄 일도 없는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이쁘지도 않은 서로를, 잘난 것도 없는 서로를... 평생을 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릴 일 없는 사랑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지. 왜,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이 얘기야.

기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한 줌의 드라마도 없이... 어디 좋은 곳 한 번 가보지 못한 채... 어딜 가봐야 눈에 띄지도 않고 딱히 내세울 것도 없이... 이를테면 부인께서 참 미인이십니다 라든가, 그런 소리 한번 듣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서로를 버리지 않고, 버릴 수 없어 서로를 거두는... 여보 이제 어쩌지? 이런 걱정을 매일같이 하면서도... 제아무리 어떤 놈이 세금을 거두고 새마을 운동을 시키고 해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그런대로... 어쩌지 밥을 새로 해야하는데, 하면서... 말하자면 영화화 될리도, 될 일도 없으면서... 누구도 알아 주지 않고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데도... 근근이 놀러간 여행지에서 잇몸을 다 드러낸 사진 한 장 찍어가며... 그래도 남는 건 사진뿐이더라, 해가며... 가끔은 불쌍해서... 살아갈수록 자주 불쌍해서... 그렇다고 돈 한 푼 생길 일도 아니면서... 그래선지 이 웬수야 웬수야 해가며... 도대체 어쩌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냥 서로를 사랑하는... 신문과 방송이 외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야. 어때, 예수가 걸친 옷만큼이나 초라하지?

기적이란 그런 거야. 기적이 그런 거라면, 하고 내가 말했다. 왜 이렇듯 다들 불행한 거죠? 그게 인간이야, 하며 요한은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팡이로 바다를 갈라 보여준다 한들 내일 아침이면 또 다른 기적을 원하는 게 인간이지. (...) 왜 며칠 전에 매장에서 청바지 훔치다 잡힌 고등학생 있지? 남들도 다 입고 있어서... 너무 입고 싶었어요 하고 눈물 줄줄 흘리던. 그게 보편적 인간이야. 모두가 그 정도는 입고 있다 생각하는 거지. 또 그걸 입어야만 행복하다 느끼는 거야. 관념이지. 그리고 상상력이야.

 그래도 죠다쉬 점장이 점잖은 양반이잖아. 애를 앉혀놓고 그러더라고.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 대신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십 년이고 이십 년 후에 반드시 오늘 이 일을 되새겨봐라, 그럼 이 바지가 얼마나 시시한 건지 알 수 있을 거다... 뭐, 조언이라면 조언인 셈이지. 그런데 그 양반 요즘 남들 다 하는 주식인데 하며 정신 못 차리고 있거든. 그게 보편적인 인간관계야. 훔치지 않았을 뿐 결국 똑같은 관념에 갇혀있는 인간이지.

십 년이고 이십 년 후에 그 아이도 분명 어른이 될 거야. 그땐 왜 그랬을까, 나 참 하며 한참을 웃고 말겠지. 그리고 돌아서서 주택청약자로서 아직 1순위가 아님을 무척이나 괴로워할 거야. 전혀 달라진 인간이라 본인은 믿고 있지만, 실은 똑같은 관념을 가진 나이 든 인간일 뿐이지. 그게 보편적인 인간의 이른바 성장이야. 뭐야 바보잖아 싶겠지만 그게 인간이야. 현실적으로 살고 있다고 다들 생각하지만, 실은 관념 속에서 평생을 살 뿐이지. 현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 라는 말은 나는 그 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어-라는 말과 같은 것이야.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어.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돈다 거품을 물던 인간도, 아내의 사타구니에 무쇠팬티를 채우고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인간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했다며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맨 인간도... 모두가 당대의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를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옛날 사람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다들 낄낄거리지만, 그리고 돌아서서 대학을 못갈 바엔 죽는게 나아! 다들 괴로워 하는 거지. 돈이 최고야 무쇠 같은 신앙으로 무장하고, 예쁘면 그만이지 더 뭐가 있어- 당대의 상상력에 매몰되기 마련인거야. 맞아,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 지금의 인간은 그 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 <현실>은 언젠가 결국 아무도 입지 않는 시시한 청바지와 같은 것으로 변하게 될 거야. 늘 그랬듯 또 인간은 보편적인 성장을 할 수 밖에 없으니까. 말하자면 죠다쉬를 입은 고등학생의 <멋있어>와, 십자군 원정을 떠는 인간의 <정당해>와, 가진 건 돈 뿐이야 하는 인간의 <에헴>과, 어때 나 이쁘지 하는 인간의 <흥>은 시간만 다를 뿐 같은 성질의 관념이야. 그러니까 미리, 그 외의 것을 상상하지 않고선 인간은 절대 행복해 질 수 없어. 이를테면 그래도 지구는 돈다, 와 같은 상상이지. 모두가 현실을 직시해, 태양이 돌잖아? 해도 와와 하지 않고, 미리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져야 하는 거야. 그건 갈릴레이 정도나 가능한 일 아닌가요? 내가 물었다. 비벼 끈 꽁초의 연기를 바라보며 요한이 얘기했다.

그래서 신은 단 하나의 유일무이한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신 거야. 자신의 물컵 옆에 아직 따지 않은 새 캔을 세우며 요한이 말했다. 바로, 사랑이지.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그게 현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다니는 고린도 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약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진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작가의 말 중..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와와 하지 마시고 예예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곁에 있는 당신의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손길이 닿을 수 있고...그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빛을 밝혀가시기 바랍니다. 


 작가는 책에서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음에도 현실에서 자신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cut&paste&written by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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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진의 책은 제목도 그지같고 표지도 영 싼티 나지만 그녀의 생각은 싸구려는 아닌 듯 싶다. 그녀의 외모나 책의 외관은 비호감 이지만 이 문장에서 그녀가 보였다. P.164 인지 P.169 인지.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힐책하는 조물주에게 뭐라고 대답했던가? 아시다시피 그는 " 저 여자가 줘서 먹었어요." 하고 대답했던 것이다. 남자는 원래 그런 생물이라고 생각하면 여러 가지가 간단해진다.

 근데 내가 왜 저런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심정인지.. 후다닥 읽어버려서 기억은 안 나지만 저 문장만은 여전히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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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에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알았을때는 이미 주요 매체에서 이 책의 광고를 거부해서 더욱 이슈가 되었을 때였다. 김용철 변호사에게 작은 성원이라도 보내는 심정으로 책을 구입했었다.  얼마후 친구가 간염으로 입원해, 병문안으로 들고 갈만한 걸 생각하다가 이 책을 선물하고, 잊고 있었는데  이 책에 관한 좋은 글들이 많이 보인다. 이 책 지금 베스트셀러 이긴 하나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을 생각하니 벌써 흥분된다. B형 혈액형 특질이 벌써부터..

온당비에 올라온 원고인데 좋아서 퍼와봅니다.
원본주소는,
http://dangbi.tistory.com/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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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다 픽션입니다.”


지난 2월 9일 명동에서 열린 독자강연회에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김용철 변호사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이 책을 씁쓸한 표정으로 세 번도 넘게 부정했다. 대법원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진실이 아니다.” 라는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검사였다. 그것도 검찰이 다루기 힘든 검사였다. 친척이 잘못을 해도 잡아넣고, 검찰총장의 친구도 잡아넣고, 전두환과 마주앉아 비자금도 캐내던 이른바 ‘에이스’였다. 삼성비리 폭로사건은 결코 치기어린 충동에서 나온게 아니었다. 그는 법이 작동되는 방식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법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와 그것에서 기인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수사만 시작하면”, 또 “비자금이 1조 정도만 나오면” 이건희 일가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성특검의 ‘뼈를 깎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어버린 4조원이 넘는 차명재산에 대해 대한민국 사법계는 사실상의 무죄를 선고했다. 오히려 몰래 관리하던 재산들을 만천하에 이건희 회장의 재산으로 인정해주는 친절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최근 MB정부의 사면으로 인해 화룡점정이 되었다. 이제 이건희 일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공식화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의 말처럼 이 모든 것이 차라리 픽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난 삼성특검과 그 이후의 상황들에서 본 것은 마치 한 몸인 듯 육중하면서도 부드럽게 굴러가는 법조, 언론, 정치, 재계의 모습이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카프카가 묘사했던 바로 그 성(城)이 단단한 성곽을 두르고 존재하고 있다.


엘리트와 명예


우리에게 이 성의 실체를 드러내준 이는 사실상 김용철이라는 한 ‘개인’이다. 자칫 착각하기 쉬운 것이지만, 김용철 변호사는 ‘진보’나 ‘좌파’가 아니다. 오히려 굳이 분류를 해보자면 ‘엘리트 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한국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검찰조직에서 전직 대통령을 수사했던 에이스검사이고, 수십만의 임직원을 거느린 세계적인 기업 삼성을 사실상 지배하는 최상층부서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이력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인맥이나 학맥 혹은 로비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력을 통해서 이런 위치에 올라갔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정의에 불타는 (소)시민 쯤으로 오해하게 되면 해프닝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강연회도중 어느 젊은 청자가 만약 우리들도 이러저러한 유혹에 부딪힌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묻자, 그는 “만약 젊은 나이에 그런 유혹을 받을 수 있다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답했다. 다시 말해 일단 그런 위치에 가고 나서 유혹에 대해 논하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다. 또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동안 어쩔 수 없이 청렴하게 산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말에 웃음을 터트렸지만, 이것은 지나가는 농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떡줄 삼성은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삼성의 떡은 받지 않겠다며 굳은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강연 중에 그는 사람들의 이런 태도에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다른 엘리트들에게 등을 돌렸는가? 그것은 그가 명예와 자존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엘리트이기 때문이다. 그는 삼성의 방식 즉 그가 몸담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법조계를 ‘푼돈’으로 오염시키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삼성은 김용철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쉽게 말해 돈 몇 푼 쥐어주고, 윽박질러서 찍어 누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구조본의 임원들은 자신감과 타성에 젖어 ‘명예를 아는 실력 있는 엘리트’에 대해서 특별히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제단’과 함께 등장한 김용철이다.


대문자 A, 한국 자본주의의 말할 수 없는 그 이름


“구조본 공식 문서에서 ‘이건희’, ‘회장’ 등의 표현을 직접 쓰는 경우는 없었다. 이런 표현을 직접 쓰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이건희라는 말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는 대문자 ‘A'가 쓰였다.” 《삼성을 생각한다》p145


강연 내내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 = 이건희 일가”라는 공식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삼성그룹 전체에서 비리에 연루된 자들은 50~200명 정도라고 말한다.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것에는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배겨있지만, 그 과실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은 이건희 일가를 비롯한 몇몇 수뇌부들이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삼성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건희 일가와 그에 충성을 맹세하고 온갖 비리와 악행을 일삼는 수뇌부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건희 일가의 재산을 증식시키고 지키는 것, 그리고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경영권 승계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과정을 ‘세금내지 않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듯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수단들이다. 이들은 한국사회전체를 ‘돈’으로 관리하려고 했다. 법조인들에게 뇌물을 주고, 기자들에게 뇌물을 주고,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고,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말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낸 결과가 이른바 삼성특검에 대한 판결이다. 이 판결은 삼성의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한국사회 전체를 수렁에 빠뜨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법이란 최소한의 합의에 대한 것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모든 이가 동등하게 적용받으리라는 최소한의 믿음이라는 것이 있어야 공동체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삼성판결은 이미 취약하기 그지없는 이 믿음에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의 치명타를 입힌 셈이다. 삼성 판결이후 법조계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은 최근 두드러지는 검찰의 ‘정치적 결단’들과 맞물려 극단에 달하고 있다. 나아가 언론, 재계, 정치, 행정 등등 모든 공적인 분야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게 될 때 공동체는 더 이상 기능하기를 멈춘다.


이로서 공화국에는 이제 헌법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를 굽어보는 대문자A의 법이 성문화 되었다. 사실 이러한 결론이 삼성과 대문자 A에 좋은 것일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결국 이 대문자A의 법은 돈과 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외의 어떠한 근거도 갖지 못한 이 법은 이보다 더 큰 돈과 권력이 나타난다면 쉽게 뒤집어 질 수 밖에 없다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법의 영역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영역을 꿈꿨지만, 결론적으로는 스스도 벗어날 수 없는 더 잔혹한 법의 시대를 열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삼성은 한국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 부정적이다. 삼성은 한국사회라는 든든한 물적 토대가 없으면 지금의 구조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럼 삼성은 계속해서 한국사회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인가? 이건 알 수 없다. 그것이 삼성가의 총기가 흐려져서이든, 혹은 삼성보다 더 크고 악랄한 권력이 나타나서이든 간에 삼성이 관리할 수 있는 것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삼성의 무노조 원칙을 무너뜨릴 ‘복수노조 설립 허용’의 문제만 해도 삼성과 다른 재벌 및 대통령의 입장은 극명하게 갈린다. 또 삼성을 따라서 다른 재벌들 역시 ‘관리’를 시작한다면, 훗날 삼성과 다른 재벌들 간의 이해다툼이 벌어졌을 때 삼성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삼성보다 더 큰 어려움에 놓인 것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래도 역사가 거꾸로는 돌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려고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삼성은 절망을 안겨줬다. 또 고삐 풀린 듯이 힘없는 이들을 잡아들이고 윽박지르는 사법계와 공권력은 물론이고, 아주 작은 권력을 가진 이들까지 목에 힘을 주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못살게 구는 일이 자꾸 늘어가고 있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 일이 이른바 소시민적인 삶과는 큰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미 사람들의 일상에 걷잡을 수 없는 불신과 불만들이 자리잡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은 제2, 제3의 김용철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던 수많은 공범들을 목격했다. 더불어 이 사건으로 교훈과 면죄부를 얻어간 삼성은 더욱더 교묘하고 세련된 방식의 ‘관리’를 시도할 것이다. 이 망에서 빠져나와 또다시 ‘폭로’를 한다는 것은 이미 실패로 돌아간 사례를 봐서나, 실질적인 어려움을 봐서나 힘든 일이다. 또 김용철이라는 개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는 강연회의 마지막에서 자신은 이미 할 일을 다 했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한 개인으로서 잃을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잃었고, 이런 그에게 헌신을 강요할 근거도 명분도 없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엘리트주의자이고 이른바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사회’ 를 이상으로 삼는 사람이다. 물론 우리들에게는 이것마저도 머나먼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것이 우리의 이상이 될 수는 없다. 아니 그에 앞서 이미 공정한 경쟁이라는 개념자체가 환상에 가깝다는 결론이 난 이상, 저 정도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격해 보이는 평등적 조치들을 취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몇몇 엘리트들의 자비심에 기대야 하는 일이 아니라, 정말로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 공유되고 또 작동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강연회에 참석했던 심상정 후보는 “이 책이 1000만부 팔리면 세상이 좀 바뀌지 않겠느냐?”고 농담을 건넸다. 물론 책이 팔린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우리는 반드시 삼성을 생각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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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hhan.tistory.com/
*저는 최태섭 님과 함께 알라딘에서 주최한 김용철 변호사 강연에 다녀왔어요. 강연에서 나온 김용철 변호사의 발언들을 트위터에 한번 올려보았었는데, 최태섭 님 글 말미에 붙여서 현장감을 전달해 드리는 것도 좋은 일이 되겠네요.


첨부 : 알라딘 강연에서의 김용철 변호사의 발언들


"이 책은 픽션입니다. 공상과학 소설이에요. 대법원이 인정하지 않은 사실들로 쓰여진 거니까요. 삼성도 그렇게 이해해 줬으면 합니다. 설마 픽션으로 사람을 어찌 하기야 하겠습니까?" /


"저더러 정치를 하라구요? 몸 버린 김에 죽으라는 얘기로밖에 안 들립니다. 국회의사당이요? 거기 담벼락 하나 돌리고 몇 명 꺼내면 교도솝니다. (심상정을 쳐다보면서)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만 꺼내면..." 청중박수 (사실 노회찬과 심상정은 지금은 의원이 아니죠. ^^;; ) /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리적 선택을 할 처지에 놓이지 않습니다. 할 수없이 선량하게 살아요. (청중폭소) 선택할 지경까지 간다면 인생 성공한 겁니다." /


"저는 특검수사 이름이 '삼성특검'이 되는 것에도, 책제목을 '삼성을 생각한다'로 짓는 것도 반대했어요. 석박사급 수천 명에 20만 직원에 협력업체까지 합치면 100만 명인게 삼성입니다. 이건희를 보위하는 사람은 200명밖에 줄여 잡으면 50명 밖에 안돼요. 저는 그 사람들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겁니다." /


(미리 책을 썼다면 좋지 않았겠냐는 질문에) "저는 법조인입니다. 법정 안에서 논해지는 일을 법정 밖에서 떠들 수는 없습니다. 그게 예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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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드디어 이석원의 산문집 < 보통의 존재 > 를 읽었다. 그 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간략히 말하자면, 모던록 밴드 ' 언니네 이발관 ' 의 보컬리스트 이다. 
사실 이 밴드, 좋아하는 밴드도 아니고, 더더욱 이석원 이란 사람은 인상도 안좋고, 특히 그들의 음악은, 20년여를 록 음악에 심취해온 내겐 너무 평범하게 들렸다. 그러다 친구가 연말에 그들의 공연을 보고 와서, 어느 보통의 존재 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앨범의 주제이자, 보컬 이석원이 마흔 언저리에 자신이 보통의 존재 일 뿐이라는 섬뜩한 자각에서 출발 했다라고..

 그때까지는 보통의 존재 란 말 자체가 가지는 아련한 서글픔이 약간의 궁금증을 유발했었다. 내 마음에 우연히 던져진 그 말이 잔잔한 물위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 처럼 파동을 일으켰다. 짐작은 하지만 그가 말하는 보통의 존재에 대해서 듣고 싶었다. 마음의 작은 움직음은 스페이스 공감 라이브를 다시보기로 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말랑말랑한 록 음악은 내가 지향하는 록 스피릿 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전히 보통의 밴드로 느껴졌다. ( 내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긴 비평을 할 수 있지만, 이 글은 음악 리뷰가 아니라, 책을 읽고 나서 쓰게된 글 이므로 여기서 줄인다. )

 그렇게 관심에서 잊혀져 갈 무렵,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게 이석원이 쓴 '보통의 존재' 란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인터넷서 검색해 보니, 노란색 표지의 이쁘장한 책 이었다. 인터넷 서점의 독자 리뷰는 믿을수 없어, 블로그의 평을 보니, 다들 반응이 좋다. 분명 제목이 주는 힘이 있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중들의 '공감'. 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하지만 난 신중했다. 궁금증을 무릅쓰고, 이미 그런식의 구매에서 실망한적이 많기에 주문하기를 바로 눌러버리는 대신 내일 서점에서 좀 읽어 보고 사기로 결정했다.

 얄밉게도 그 책은 빤빤히 비닐 포장이 되어 나머지 보통의 책들 속에서 유별나 보였다. 그리 얇은 책도 아니고 영화 개봉작의 원작 소설도 아닌데 그렇게 비닐옷을 입고 있는게 영 어색해 보였다. 출판사의 처사가 참 치사하다. 내용이 부실하기 때문일까. 왜 보통의 존재란 이름을 단 이렇게 예쁜책은 특별한 존재에 처해 대중의 손길에 유리됐을까. 나처럼 에세이류는 서점에서 읽어버리는 사람이 많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해도 서점의 모든 책은 다른책들과 공정하게 속 알맹이를 공개해야 한다. 그것이 책의 기본 윤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국 출판사의 옹절한 처사에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로 반항했다.

 담담하고 진솔한 그의 이야기들은 나의 내면을 수시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자주 멈춰서서, 추억이 스멀스멀 꿈틀거리는 것을 음미했다. 한 사람의 내면 일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힘이 이 책에는 있었다. 어쩌면 보통이 아닌 저자 (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했었고, 이혼했고. 예민한 가수인 ) 가 세상의 모든 보통의 존재에게 건네는 위로 인 것 같다. 꿈과 희망에 대한 거품어린 수사가 아니라 무덤덤하게 자기 자신과 일상을 이야기 한다. 사랑과 이별, 가족, 건강, 그리고 삶의 진리 까지.. 공감하는 글 귀가 색다른 감성의 인식을 건드릴때마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삶은 지금 여기에 있었고, 마음의 언 땅은 나와의 낯선 대화를 통해 차츰 녹아내리고 있었다.

 지금 글을 쓰면서, 웨일즈가 낳은 영국의 국민밴드 Stereophonics 의 베스트 앨범을 들으며 록 음악은 '이런것이야.' 하면서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을 생각해본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뮤지션 이석원 으로써가 아니라 작가 이석원 씨를 좋아한다. 나 또한 글쓰기를 통해서 삶의 한 꼭지를 정리하고 새롭게 나아가기를 원한다. 보통의 존재로써가 아니라 내 삶의 주인공으로써, 결국 누구나 보통의 존재일 뿐이라는  평등과 겸손을 가지고..

 책속의, 맘에드는 짧은 아포리즘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결속
 
진정으로 굳은 결속은
대화가 끊기지 않는 사이가 아니라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사이를 말한다.

두려움

세상의 수많은 두려움 중에서
아주 일상적으로 언제나 마주치는 것.

거절당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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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  책,

내 생활 공간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책들을 보면 간혹, 애증의 심리가 솟구친다. 언젠가 읽었던 책들과 읽다 만 책들, 그리고 사 놓기만 한 책들이 불편한 모양새로 내게 불만을 토로하는듯 하다. 특히나 요즘은 도서관서 빌린 책들이나, 서점에서 원_나잇 스탠드 하는 책들 에게 밀려서, 먼지만 쌓이고 종이 들의 시체 처럼 보일 뿐 이다. 내 방에 안착한, 그러니까 내가 소유한 책 이란 명제 에서 오는 나태함과 허영심 어린 책들이 내게 묘한 압력을 주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레임과 지적인 탐구에 대한 부담이 동시에 작용한다. 언젠가는 먼지를 털고 콧 기름 발라가며 손 때 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소유되지 않은 책 과의 외도가 더욱 짜릿하다. 왜냐하면 서점에서 보는 책은 몸이 편하지 않으며, 빌린 책은 날짜의 한계가 있으므로 절박하게, 더욱 집중해서 한 숨에 읽기 때문이다.

 서점에서의 책 읽기는 편하지 않음에서 오는 긴장과 집중이, 삶에서 몰입의 희열을 깨닫게 해준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진리에 다가서기 어렵다는걸 비교 체험으로써 느끼게 해준다. 그렇다고 서점에서 쟝 보드리야르나 롤랑 바르트 등등의 학자들의 책을 읽진 않는다. 새로나온 에세이, 사회비평 등등이 서점에서 읽기가 딱 좋다. 최근에 장영희, 한비야, 홍세화 님의 새책을 읽었다. ( 제목은 적지 않겠다.) 책을 좋아하다 보면 책 고르는 안목이 좋아지는데, 역시 위 세 저자들의 책은 아주 뛰어난 문장과 함께, 탁월한 감수성과 통찰을 보여준다. 한비야 님의 책은 그동안 일부러 거부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베스트셀러 책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연히 뻔한 내용일꺼라 짐작한, 제목도 마음에 안 들었던,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 를 보고 편견이 사라졌다. 또 무릎팍 도사에 나온 그녀의 모습을 보고 글의 진정성이 더욱 느껴졌다. 문장을 읽으면서 상상한 저자의 어투와 호홉이 실제 모습(방송에서지만.) 과 대단히 비슷하단 느낌이 들었다. 한 마디로 솔직하고 경계에 얽매이지 않은 시원시원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배울점이 많은 분이라 생각한다.

 홍세화 님의 책은 두고 두고 곱씹어 볼 사회 비평서 인데, 개인적인 이유에서 책 구입은 망설여 진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소유에 대한 정체라고 할까.. 지식,비평은 흘러서 소통돼야 하는데 한 번 읽었던 책들이 결국, 방안의 책장에 종이들의 성전이 되가는 꼴이 이제는 싫어졌기 때문이다. 대학을 지식 혹은 지성의 상아탑 이라고 하는데, 공부는 쌓는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쳐가는 것이고 오히려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전에 전기류의 책들을 ( 브레송,만레이,트뤼포,헬뮤트 뉴튼 자서전 등등..) 개인 직거래로 팔았다. 다른 중고 거래와는 달리 책의 직거래는 묘한 정서적 희열이 있다. 내 정서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풀어 놓음으로써 오는 작은 해방감과, 책을 받은 사람의 얼굴에 퍼지는 설레임이 교차하면서 그 책은 사명을 다 한 것이다. 떠나보냄으로써 드디어 내 영혼에 각인 되었다.

 반면에 이외수 님의 ' 하악하악 ' 류의 책들은 딱 서점에서 읽을 용 이라 생각한다. 작가 이외수를 싫어하진 않는다. 그의 글 에서 성찰과 영감을 얻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상업적인 냄새가 난다. 고급 종이에 이쁜 칼라 일러스트와 짧고 농축된 문장들, 지면의 여백, 보기에 좋지만, 비싼 책 가격에, 한 시간 정도에 읽히는 분량은, 왠지 출판사 사장 배불려 주는 꼴 인 것 같다. 이외수 님 이름으로 이런 책들이 꽤 많다. 그러니 책의 좋음을 떠나서 펜시 상품으로써 밖에 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출판 시장이 불황이라면서, 왜 파주 교하의 출판단지의 출판사 사옥들은 그렇게 멋지고 으리으리 하게 지으셨는지, 화천 감성마을엔 그 멋대가리 없는 콘크리트 벙커의 집을 지으셨는지, 모를일이다. 자본주의 세계에선 돈이 공기와도 같은 것인데, 파주나 강원도 좋은 공기에서 돈 냄새 많이 맡으셨는데 뭐라 탓 할 일이 아니다. 선택은 내 몫 이니까.

  더 할 얘기가 많지만, 책 하나만 추천하고 마친다. 김중혁의 단편 소설집 ' 악기들의 도서관 ' 참 재밌게 읽었다. 젊은 작가의,  현대인의 감수성을 잘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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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너무나도 많기에 참 고민되지만, 순간 번뜩 일말의 주저도 없이 바로 말해지는 영화가 바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 지옥의 묵시록 ' 이다. ( Apocalypse Now. 1979 )
 대학교때. 편집수업에서. 이 영화에 대해서 발표도 하고 그랬었는데,부족한걸 많이 느꼇다. 강사의 강의나..내 발표나..ㅜㅜ 외국의 영화학교에서는 오프닝 씬만 가지고 세,네 시간 강의를 한다던데.. 어쨋든 이 영화의 처음과 끝에 흐르는 도어스의 'the end' 와 함께 말과 글로 설명할수 없는 내면의 본성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인 조셉 콘래드의 ' 어둠의 심연 ( Heart of Darkness ) 을 읽었다. 역시 묵직한 작품이다. 그리고 더욱 더 코폴라 감독이 위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모티브와 주제만 같고 배경은 다른 영화인데도, 소설을 읽는 내내 마틴 쉰과, 말론 브란도가 내 상상속에서 연기했다.
 최근에 네이버에서 영화평론 기자가 쓴 펄프픽션 리뷰를 읽었는데, 매우 잘 썻더라. 나 또한 이 지옥의 묵시록을 제대로 리뷰를 하고 싶지만. 워낙 주관적인 심오한 감정의 골을 얼마나 객관적인 글로 설명할지 막막하다. 시도는 해 봐야겠다.

사설이 길었는데. 도서관서 빌린 이 책을 반납하려다, 이 책속에 실린 ' 나르시서스호의 검둥이 ' 서문을 다시 읽어봤다. 조셉 콘래드의 예술관을 잘 드러낸 명문인데. 내게는 마치 신선한 혈액투석 과도 같았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리 미천하게라도 예술의 조건을 갖추기를 열망하는 작품이라면, 그것은 매 줄마다 정당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술 자체는 우주의 온갖 양상에 깃들어 있는, 하나이자 여러 형태인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실제 우주를 가장 공정하게 나타내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지닌 시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형태와 색상, 빛과 어둠, 물질의 양상과 삶의 사실들 각각에 있어, 근원적이고 항구적이며 본질적인 것을, 그것 모두의 존재의 진실을 발견하려는 시도입니다. 때문에 사상가와 과학자처럼 예술가도 진실을 찾으며 나름의 호소를 합니다. ~~ 이하생략

 어떤 책들은 맛만 보면 되고, 다른 책들은 삼켜야 하고, 몇몇 책은 꼭꼭 씹고 소화시켜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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