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커트 코베인 사후 20년이 된 해라 유투브에서 너바나의 공연을 틈틈히 감상하고 있었다. 유투브는 대단하다. 개인 소장의 비디오 테잎 영상이라도 전체를 감상할 수 있다. 역시 네버마인드 앨범이 뜨기 전과 바로 그 해 (1991)년 까지의 공연이 더 열정적이고 커트의 보컬 상태도 더 좋은 거 같다. 그 후로는 급격하게 마약으로 무너져 갔지만, 그래도 커트의 보컬은 경이롭다. 노래를 한다기 보다 온몸으로 절규한다가 맞다. 너바나의 곡을 카피하기는 쉽지만 절대 커트 코베인의 늬앙스를 흉내내기란 불가하다. 어찌 이렇게 순수하고 절박한 자의 영혼을 따라 할 수 있겠는가. 


 요즘 세월호 사건의 슬픔과 맞물려 너바나의 정규 3번째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인 유테로(자궁 속) 음반은 묘하게도 격정의 위로를 건넨다. 절규와 자조섞인 음률이 뒤섞인 이 앨범은 고등학생때 내내 꽉막힌 욕구의 분출구 였다. 커트의 처절한 외침은 대리 경험으로 기능했다. 불안한 자의 심리가 이 음반의 노래와 함께 상호 투영 되었다. 20년전. 이 음반이 나왔을때, 종로 3가의 YBM시사 영어사 지하층의 뮤직랜드란 대형 음반 가게에 너바나의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있던게 생각난다. 여전히 메탈리카의 엔터 샌드맨이 흘러 나왔지만, 내 마음은 송두리채 너바나의 모든 것에 쏠려 있었다. 


 한 동안 잊고 있었던 너바나의 음악은 또다시 슬픔과 불안의 자조에 뒤섞여 내게 말을 건넨다. 노랫말은 의미심장하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역설이 분명한 그의 노랫말은 삶에 대한 푸념과 분노가 뜨겁게 타오른다. 첫 번째 곡인 serve the servants (하인을 섬겨라) 부터 예사롭지 않은 정서가 흐른다. 역시나 미묘한 멜로디 진행은 싱글 히트곡은 아니었지만 이 앨범의 첫 노래로 딱이다. 히트곡 '하트 모양인 상자' 와 '날 강간해.' '멍청한.' '페니로얄 티.' '모든 사과' 의 가사는 충격적으로 요절한 커트와 세월호의 참혹함에 맞물려 감동을 자아냈다. 


 좌절감 속의 한낱의 위로로 슬픔을 집어 삼킨다. 볼륨을 높여 자궁속으로..


 


 93년 어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rape me (날 강간해)를 연주하려다 주최측의 반대로 처음 기타 부분만 연주하다가 리튬을 연주했던. 

 그러고 보니, 올해가 커트 코베인 사망 20주기이고, 4월 5일이 기일이었다. 1994년 4월 8일날 시신이 발견되었고, 사망 추정일이 3일전 이었다. 20년 이라니,, 커트가 죽었을 때, 중앙일보 사회 문화란, 한 페이지를 장식한 기사를 읽고 또 읽으며 안타까워 했던 개기름 번질번질 고등학생인 나. 20년은 정말 세월이란 걸 실감케 한다. 가지고 있는 너바나의 '네버마인드' 씨디도 20년을 훌쩍 넘은 물건이 됐네. 유투브에서 너바나나 커트 코베인 이름만 치면, 언제든 멋지고 잘생긴, 묘한 울림을 주는 스물 몇살의 커트를 만날 수 있다. 퍼블리싱 되지 않았던, 미공개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 있으면 미디어 세계에서 영원히 봉인된 젊은 커트는 영생하고 있는 듯 하다. 


 파라마운트 극장 공연이 디비디로 발매된걸 보았다. 여러대의 16미리 필름으로 촬영되었고, 사운드 녹음이 훌륭했다. 요즘에는 유투브에 풀 공연 영상이 통째로 다 올라와 있어, 그냥 이름만 치고 누르면 귀한 공연 영상들을 끊임없이 볼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크림 또는 블라인드 페이스나 롤링 스톤스의 60년대 후반 하이드 파크 공연 같은건 너무나 설레였다. 젊디 젊은 에릭 클랩튼, 믹 재거, 키스 리차드를 보는 즐거움. 지금의 할아버지와 왕년의 청년의 모습 그 사이를 빼곡히 채운 삶의 드라마와 음악, 지미 헨드릭스와 커트 코베인에게선 보질 못하는 살아있는 자의 향연 이었다. 


 폴 매카트니 경이 한국 공연을 한다던데, 그런 의미에서 반세기 대중 음악의 역사를 일구었던 마지막 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다시는 못 볼 공연이지만, 비틀즈 해산 이후 폴의 솔로 앨범, 노래를 거의 모르는 나로써는 그다지 갈 마음이 안 생긴다. 비틀즈 팬 이지만,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을 폴 보다는 더욱 좋아했다. 수려한 멜로디 이상의 어떤 아픔 같은 것들이 그들에게서 느끼는 감동 이었다. 

 폴 매카트니가 온다면, U2도 올 수 있지 않을까. 티켓 가격이 어마어마 하겠지..아마도 그들의 개런티가 엄청나서 불러올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 폴의 공연 성과가 어떠한지에 따라 가늠이 될 것이다. 라디오헤드와 블러가 왔으면 좋겠다. 보고 싶은 밴드야 많지만, 그래도 한번 다녀갔던 밴드니까, 현실적으로 더 가능하지 않을까.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집을 읽고 나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구입했다. 동화와 희곡을 주로 썼던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동성애 혐의로 옥살이를 하고 나와 곧 변변치 않게 죽었으니, 비운의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옥중기'문고판도 함께,


 펭귄클래식 책을 사려고 했는데, 더클래식이란 출판사에선. 원서와 번역서를 합본으로 절반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예술지상주의, 탐미주의를 대표하는 오스카 와일드의 원문을 번역과 비교할 수 있으니 당연히 선택은 이쪽. 하지만 글의 형식적인 측면보다, 내용적인면에서 탐미주의란 것이지. 

 어쨌든  책의 서문 부터 강렬한 예감이 왔다. 이 책은 천천히 정독을 해야겠다는. 

 대부분 야외에서 책을 읽었는데, 수시로 모서리를 접어 놓은 페이지가 촘촘해졌다. 


 예술에 관한 자신의 입장표명인 서문의 글은 촌철살인의 비수를 드러내면서 마지막 문장의 반전은 결국 이 작품 전체의 주제와. 동시에 오스카 와일드 삶 자체의 비극을 유추하게 한다. 


 내가 원빈이나 젊은날의 정우성 처럼 생겼다면, 내 삶은 어땠을까. 상상만해도 즐겁구나. 껍데기의 아름다움 때문에 인생이 평탄치 않을지라도, 내가 저렇게 생겼더라면 이란 상상은 외모 지상주의의 시대에 강렬한 욕망을 대리하게 한다. 


 내가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지한 경험은 초등학교 저학년때, 학교 근처 화장품 가게에 붙은 광고 사진이었다. 멍하게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고 있으니 같은반 여자아이 둘이 웃으며 뭐라고 말하고 지나갔는데,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여성의 미모에 대한 첫인상을 그렇게 시작했고, 


 

남자의 미모에 대한 첫인상은 배우 리버 피닉스(1970~1993)가 효시다. 당시 로드쇼나. 스크린 같은 화보 많은 영화 잡지에 실린 그의 사진은 너무나 이상적인 아름다움 이었다. 사춘기의 방황과 반항을 살아있는 조각으로 현현한 그의 얼굴을 보며, 미를 터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출연한 수작 영화들인 '스탠드 바이 미''모스키토 코스트''허공에의 질주''아이다호''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등은 여전히 청춘의 아름다움을 봉인한 아련한 작품들인 것이다. 제2의 제임스 딘으로 불렸고, 그가 살아있었다면. 디카프리오, 조니뎁, 브래드 피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텐데..하지만 이런 아름다움 이면엔 마약으로 길거리에서 요절한 시대의 아픔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최고의 영화 '아이다호'처럼..

 이 소설을 읽으며, 상상하게 된 도리언 그레이의 이미지는 리버 피닉스 였다. 

 검색해보니 영화도 있었는데, 주연배우는 벤 반스다. 이전에 영화 벨아미를 보고나서, 주인공이 벤 반스 였으면 하는 아쉬음을 토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도리언 그레이 역을 했었군.




 리버 피닉스 이 후 내가 빠지게 된 남자 이미지는 커트 코베인 이었다. 음악도 그렇지만 그의 초상 사진에 오랜 기간 감동을 하게 된 것이다. 27살 최고의 명성과 부를 가졌고, 갓난아이의 아빠였던 그가 자신의 얼굴을 엽총으로 날려버렸단 슬픈 사실. 


 20대 청춘의 나이에 죽어버린 그들의 초상 이미지는 아련하게도 부서지지 않는 청춘의 화석이 되버렸다. 세월에 의해 늙어간다는것, 인생의 풍파에 시달린 초췌한 얼굴을 삶의 나이테처럼 고스란히 간직한 얼굴을 우리는 대표적으로 에단 호크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리버 피닉스와 함께 아역 배우로 출연한 것 부터.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의 뽀송한 얼굴을 거쳐, 지금까지. 그는 있는 그대로 삶의 아름다움을 간직했고, 리버 피닉스는 멈춰버린 청춘의 아름다움을 영원한 상징으로 간직했다. 


 이런 청춘의 아름다움을 유예시키고픈 욕망. 내 삶의 도화지로써의 얼굴이 아니라 그냥 아름다움(쾌락) 그 자체에 대한 감각적 탐미를 도리언 그레이의 욕망을 통해서 보여준다. 


( 이 책은 도서관서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커트 코베인 박물관 같은 책이다. 팝업북 형식으로 다양한 자료와 아이템들이 수두룩, 수록된 사진들도..이제까지 못 봤던 희기한 사진이 많다. 표지 사진은 생전에 커트 코베인이 좋아했던 사진이라고 한다. 이 책을 생일선물로 받으면 상당히 기쁠듯, 소장가치 만땅인 특이한 책. 이전엔 못봤던 사진을 좀 더 보자면.)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와서, 너무나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화가 바질 홀워드의 애정 아래, 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통해서 자신의 치명적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런 과정중엔 화가의 친구인 헨리 경의 젊음을 찬미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사상에서 깨닫게 되어. 이러한 욕망을 발원한다. 

' 나는 항상 젊은 채로 있고 이 그림이 나 대신 늙어 가면 좋을 텐데.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 다 바칠 수 있는데,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줄 수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팔더라도, 영원한 젊음을 가지고 싶다는, 자신이 저지르는 부도덕함이나, 매정함등이 얼굴에 쓰여지고, 또 자연스런 노쇠화의 추한 흔적은 초상화 그림의 변화로 투영된다. 그러나 자신의 젊음은 변함없이 유지된다는 쾌락 속에서 그는 점점, 양심의 가책도 없는, 뻔뻔한 탐욕을 행하게 된다. 그 세 인물들의 대화는 희곡처럼 진행되는데, 한마디 한마디가 대단히 예리하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내면은 이 세 인물의 정신에 투영되어 드러나는데, 백여년전 세기말 도적적 위기나 지금의 외모지상주의, 감각, 쾌락주의에 대한 알레고리의 딜레마는 인간의 삶의 가치, 아름다움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의 본질적 질문을 이끌게 한다. 화가를 통해 예술의 본질이 뭔지, 도리언 그레이와 헨리 경을 통해선  쾌락주의 유미를 일갈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가 자신이 그토록 되고 싶어 하던 존재이며, 헨리 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고, 화가 바질 홀워드는 실제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했다고 한다.304 


 에피쿠로스 학파의 정신적인 자유의 쾌락 보다는 젊음을 온전히 향유하는 감각적 쾌락을 찬미하는 헨리 경의 말들엔 이건 아니다라고 완벽히 반박할수 없는 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선과 악을 다루는 뻔한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시각과 감각적 쾌락에 대한 피상적 욕망을 솔직히 고민해 볼 수 있게 된다. 결국. 마무리는 어쩌면 교훈적 반전으로 끝나긴 해도, 헨리 경의 이론과. 그것에 동조되는 도리언 그레이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은 반추하게 된다. 누구나 젊어지고 싶은 욕망에 대해. 지나가 버린 젊음의 특권적 쾌락을 향수하며,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겉모습만을 중시하는 세태에 대한 냉소와 모호한 욕망은 오스카 와일드가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도덕성의 경계를 넘어서 예술이 무엇인지 한 발짝 더 나아간 느낌이다. 



뭔가 기묘한 표정의 저 얼굴. 80년대 영국의 명 밴드 스미스의 보컬이자 가사가 시 예술인. 모리세이가 그토록 추앙하는 오스카 와일드.  파리에 간다면. 같은 공동 묘지에 묻혀 있는 짐 모리슨 묘비와 함께. 꼭 들려보리라. 2년 동안 감옥에서 중노동을 하고 썼다는 옥중기는 또 어떤 생각을 보여줄지..심히 기대된다. 


 발췌할 양이 많아 나중에.. 대신 커트 코베인의 초상으로 마무리. 







 






 이 영화는 94 년 4월 5일에 자택에서 엽총으로 자살한 시대의 아이콘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날들에 영감을 받아, 한 인간의 혼란스러운 내면의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의 연대기적 전기 영화와는 다르게 죽기 바로 직전의 몇 일 간의 모습들이다.
 내 삶에 있어서 커트 코베인의 영향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10 대 후반과 20 대 중반까지 젊음의 감수성이 활활 타오를 때 이 인물은 내 가슴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밴드 너바나의 음악이 내 자신의 억압된 분노와 고뇌의 감성을 어느 정도 해소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그와 그의 음악은 나의 우상이자 꿈 이었다. 싸구려 일렉트릭 기타를 사고, 그처럼 찢어진 청바지와 플란넬 셔츠를 입고 다니는 시절이었다. 그가 죽은지 한 참 이나 지난 지금도 내 마음에 살아있다.

 사후에 그와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나왔다. 그에 관한, 전기책, 평전. 그의 원본 일기. 죽기 전 몇 일간 의 행적들..등등. 나는 보통사람보다 더 그에 관해서 매니아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접하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말하는 몇일의 기록과 이야기를 더 잘 느끼고 공감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의 삶을 알고 이 영화를 본 것과, 커트 코베인을 모르고 본 것은 관객이 영화의 느낌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많은 차이를 느낄 것이다. 이 유명한, 시대의 아이콘의 마지막 모습을 그려서 인지, 아무 정보 없이 봤다면, 매우 불친절한 영화 일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잘 보여주는 단 한 가지는 혼란스럽고 황폐한 한 개인의 내면의 모습을 아주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블레이크(커트) 가, 초록이 짙푸른 숲속을 내려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연 속에서 마약과 유명세로 피폐한 한 인간이 유령처럼 중얼거리면서 숲속을 걷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사운드가 매우 큰 위치를 차지한다. 생생한 자연의 소리와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 그의 내면의 혼란스러운 소리인 듯한.. 기괴한 일상의 소리가 중첩되고. 소리로써 내면의 감정을 그리고 있다. 감독의 매우 큰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영화예술에 있어서 사운드의 효과를 극대화 시킨 매우 좋은 반증 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일한 시간의 다른 장면들을 보여주는 방식은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또 다른 작품들 [ 엘리펀트 ],[ 파라노이드 파크 ] 와 일맥상통한다. 이 세 영화가 감독이 실험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연작 이다.

 이 영화속 인물과 이야기가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날들의 단서에 의거해 감독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숲속을 거니는 한 남자를 보기 전에 이 인물의 과거 맥락을 알고 보는 것이 이 영화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애틀 외곽의 촌 동네에서 백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커트는 9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이곳저곳 친척네 집과 다리 밑에서 기거하며, 신경질적이고 사회에 반항심을 가진 청년으로 자라게 된다. 미국 가정의 가장 안 좋은 대표적인 단면들인데.. 부모의 이혼과 마약의 접근, 분노의 해탈구로써. 펑크 음악이 커트를 만들어 갔다. 본조비와 건스앤로지스가 주류음악에 활개치고 있을 때. 1991년. NIRVANA 의 nevermind 가 나왔는데. 이것은 음악 뿐 만 아니라, 시대정신을 바꾸는 큰 혁명이었다. 갑작스런 성공에 커트는 더욱 과도한 마약을 하게 되었고. 94년 초 유럽 공연을 하다가 죽음직전에 까지 가는 과도한 약물 복용에서 헤어나온 후, 그의 부인인 커트니 러브 가 재활센터에 집어넣었는데 몰래 탈출한 후. 혼자 시애틀에 있는 그의 저택으로 숨어 들어와 있던 것이었다. 그의 행방불명에 그의 부인은 사립탐정을 고용했고 멀지 않아, 케이블 티비 직원이 온실 속에서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쏜 커트를 발견하게 된다.

커트, 영화속 블레이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마약 중독은 매우 큰 중요점이다. 영화 속에서는 직접 마약을 하는 장면은 나오진 않지만, 거의 모든 장면들에서 마약에 쩔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당시 커트는 상용 마약 중독자들 조차도 치사량으로 판단되는 양의 헤로인을 투약해 왔다던데, 마약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한 마디로 영화속의 그는 제 정신이 아닌 것 이다. 뚜렷이 자아를 사유할 수 없이, 그저 마약에 취해 부유하는 영혼이었을 뿐이다. 마약이 그의 영혼을 파먹고 있다가 자살하기 전 영화 속 모습은 순수한 영혼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 마약중독의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온 그의 단 하나의 선택은 치사량의 마약을 투여하고 엽총으로 머리를 쏜 것이었다. 영화속에서는 다음날 온실에 누워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경찰이 옆에 서 있는 장면은, 실제 사건 사진과 너무 똑같다.

커트 코베인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이 영화는 매우 지루할 수 있는 영화이다. 마약에 찌든 한 인간의 모습을 전후 맥락없이 보여주고 있으니 꽤 불친절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선 모든 장면장면들이 하나의 시처럼 다가왔다. 자연의 색감들. 밤의 숲속의 소리와 모닥불 소리. 혼란스런 소리의 이미지들. 영확속의 벨벳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거의 마지막..블레이크가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장면은 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리고 온실속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블레이크의 마지막 모습. 아마도 커트 코베인도 정말로 그렇지 않았을까..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오랜만에 그의 MTV 언플러그드 공연을 다시 봐 본다. 금발머리와 큰 파란눈을 가진 그의 모습에 내 젊은 날의 감성과 안타까움에 대해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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