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시네큐브에 갔다. 옛날에는 썰렁한 곳 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사람들로 북적대는게 안심이 되고 기분이 좋다. 언제라도 아무 영화를 골라 보더라도 믿고 감상할 수 있는 수준작을 상영하는 이곳이야말로 감성의 안식처이자 내가 조금이라도 바뀌는 계기의, 성찰의 제공처였다. 발길 가는대로 계획에 없던, 시간되는대로의 영화 관람에서 이런 재미와 감동을 주는 영화의 발견은 완벽한 하루를 이루게 했다. 


 일본영화의 전형적인 특성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상영 시간이 길고 차분하게 진행되는 나릇한 연출 스타일은 요즘의 영상환경에 역행하지만, 일상에 기반한 삶의 이야기는 사소한 행동이나 의미없어 보이는 마주침에서도 현실을 이루어가는 퍼즐을 제공한다. 시간과 공간의 압축으로 일상의 소중한 의미부여는 우리가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쓰이는 단어에 상징적으로 녹아있는 것을 들춰낸다. 


 그렇게, 일상에 쓰이는 언어(단어)를 수집하고 그 뜻을 길어올려 정의하는 일을 하는 출판사의 사전 편집부서를 그리고 있다. 

 때는 1995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과도기에, 하나의 종이책 사전을 만들기 위해 장장 15년의 각고의 노력끝에 완성되는 과정은 투철한 장인정신이 뭔지를 보여 준다. 이런 점이 일본성.일본 문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의 계승. 남의 시선이나 시대의 유행을 넘어서, 오래 남을 가치있는 일에 투신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이전에 감명 깊게 보았던 장의사에 관한 일본 영화 '굿,바이'에서의 감동과 비슷했다. (히로시에 료코나 아오이 유우 나오는 영화는 이제 설레였던 추억이 아로새겨진 느낌이다.) 


 사람과의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주인공 하지메(성실)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켜켜히 책에 둘러쌓여 있는 하숙집 방과 흡사한 허름하고 옹기종기한 사전 편집부에 영입 되어 단어를 수집하고 정의하는 일을 한다. 처음 그를 영입할 때, 전임자와 오다기리 조가 오른쪽을 설명해 보라고 했는데, 그의 말과 행동은 다른이와 달랐다. 단어, 질문을 대하는 진지함과 사전을 찾는 행동은 묘하게도 인상 깊었다.  감정 표현에 서투른 그가 하숙집 할머니 손녀 에게 한눈에 반해, 어설프지만 몸소 실천하고 깨달아 가며 사랑을 정의하게 된다. 하나의 단어, 글자의 의미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유용되어 한 인간이 발전하는지를 침착하고 유머스럽게 그려낸다. 


 그런 과정에는 사무실 동료와 하숙집 할머니 등의 조연들의 활약이 주를 이룬다. 감초 연기의 핵심은 오다기리 조의 역할이었다. 그는 실로 대단한 배우같다. 주인공 비중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이루었다. 어깨의 힘을 쭉 뺀 능청스러움은 따듯한 동료애를 느끼게 한다. 그의 연인으로 출연하는 배우는 '조제 호랑이~ '에서 장애인 여주인공 이었던, 살짝 푼수 같은 연기가 참 좋았다. 그리고 계약직 사원 아줌마의 센스 작살. 하숙집 할머니의 밝은 웃음과 태도, 편집장의 올곧음과 그 부인의 온화한 미소, 나중에 합류하게 되는 신참 여직원의 새침한 외모와 태도 변화는 하나하나가 재미와 감동을 준다. (오다기리 조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이 웨이'는 치명적 인 것 같음. 히로카즈 감독의 '기적'과 이 영화에서의 연기가 딱 좋은거 같다.)




 일례로 하지메가 하숙집 손녀딸에게 사랑 고백 편지를 써서 오다기리 조한테 봐달라고 하는데, 아마 전부 한자로 쓴 붓글씨에 경끼 하는 장면에선, 요즘 내가 붓글씨를 연습하는 입장에서 너무 웃기고 히껍하는 마음이 와 닿았다. 그렇게 인간관계에 있어 도통 어설픈 하지메의 진심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어쩔 수 없는 영화적 비약으로 압축 되었지만, 당사자들의 상징적인 말들과 태도가 참 인상 깊었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니까..가능한 일. 소심한 캐릭터의 과장은 극적인 해결의 감동을 배가시키나 너무 비약된 감이 없지 않다. 

 그렇게 부부가 되고, 서로 무릎을 꿀어 앉아 밥먹는 모습에서 정중한 태도의 일본 문화를 엿 볼 수 있었다. 이런 일본적 태도는 영화 곳곳에서 뭍어난다. 시대의 흐름 만큼 신조어의 등장과 그것을 수렴하는 일은 현재에 충실하며 다른 한편으론 일본 전통의 가치를 역설하게 만든다.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들을 지금의 관점에서 재정의 하고, 그들 각자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정의는 한권의 사전에 인생을 담은 것이다. 


 선배와, 동료, 부부에 대한 예의를 보며 타인을 존중하는 몸에 배인 일상적 태도를 가늠해 보게 된다. 또, 종이를 고를때나 5번이나 교정작업을 하는 일 등에서 세심한 완벽주의는 자신의 일에 인생을 걸은 자의 열정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이렇게 사소한듯 삶의 중요한 가치들이 많이 녹아 있는 영화였다. 사실 극장의 맨앞에 보아서 인지 초반에 깜박 의식이 잃었으나 필름의 자글자글한 입자감이 아주 푸근하게 감싸 왔다. 다시 한번 섬세하게 본다면 새롭게 보일게 많은 영화였다. 일본 영화 중에서도 매우 수작인 아주 좋은 영화였다. 영화의 원작인 소설 '배를 엮다'도 읽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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