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이란 철학자를 처음 안 것은 영화 인문학 이란 책에서 였을 것이다. 글을 철학자 답게 쓰는 걸로 인상 깊었는데. 책 뒤에 단어를 철학적으로 풀이해 논 글들이 강렬했던 기억이 난다. 간결한 문장들이 바로 핵심을 찌르는 어떤 푼크툼 적 효과 라고 할까.. 그 부분을 따로 복사해 뒀었는데..못 찾겠다.

 요즘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다른 철학자 ( 강신주. 강유원 ) 에 비해. 이 저자의 글은 좀 더 학구적이다. 단어의 사용이 좀 어려워. 쉽게 휘리릭 읽히진 않으나..차분히 음미 할 수록..뜯어 보는 맛 이 있다. 전반적으론 시선 자체가..네가티브 하다. 비수처럼 찌르고 들어와 삶의 환상성을 깨부셔 버리는..철학의 본질에 맞닿아 있어.. 왠지..고독해진다.

 이 책의 초반은 아주 강렬했다. 그러나..중 후반부로 갈수록..관념놀이 하듯 좀 늘어졌다. 머리로 싸움하는 학자의 한계 같은게 느껴졌다. 구성 자체는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과도 흡사하지만. 그 정도의 구성엔 못 미친다. 대중이 쉽게 다가가기엔 부담스러운 문장들이 많으나. 이 철학자의 스타일 이라고 생각한다. 강신주나 강유원도..대중에 쉽게 다가서려는 스타일이 있는 만큼.. 그 반대의 스타일도..존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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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바로 이 스러짐의 환상극을 일러 나는 줄곧 '세속'이라고 불러왔다. 정녕 도달하고 싶은 대상은 이념으로 소실되어버리거나 현실이라는 알리바이 속에 봉인된 채, 내내 우리들은 우여찮게 곁에 있던 대상에 실없는 의미를 매겨 욕망하거나, 그 어떤 '무엇'을 닮은 것을 바로 그 닮았다는 사소하고 우연한 인연을 강조하며 과장스레 다시 욕망하는 것, 바로 이 욕망의 복합체를 일러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념과 욕망의 교착, 진정성과 모방성의 혼동, 생각과 실천의 소외에 따른 부족과 미달, 혹은 과장과 잉여를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좋아해서 어긋나고 미워해서 어긋나는 일, 빨라서 어긋나고 늦어서 어긋나는 일, 부족해서 어긋나고, 지나쳐서 어긋나는 일을 두고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7.

심리학은 어떤 경우에도 뺄 수 없는 탁월한 공부이지만, 심리학주의는 잘라 말해서 공부의 원수인데, 이를테면 심리학주의의 극점에서 드러나는 행태의 전형은 인식의 유아와 실천의 광인이다.

인식의 유아와 실천의 광인은, 그 자신의 상상적 체계 속에서 세속적 어긋남의 실제를 관념적으로 기피한다. 그 인식의 현실 적용력과 효율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정치적 프락시스가 불필요한 것이다. 그 광인은 '(타인과의) 만남' 이라는 공부의 현장에 내려서서 편의와 편차의 세속에 시시각각 시달리는 대신, 무대 위의 시적 고백과 연기에 만족한다. 가령 쿤데라가 " 인생의 어리석음은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갖는 것" 이라고 꼬집은 것이 그러하다. 세속이라는 어긋남의 현실에 단련되는 일은 싱거운 해답들을 물리치고 제대로 된 질문에 몰두하게 만든다. 그래서 쿤데라가 말하는 소설의 지혜도 "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을 갖는 것" 이다. 30

 결국 자신만의 것일 수밖에 없는 '생각'은 대게 지혜를 가린다. 실은 그것이 바로 자신만의 것이기 때문에 자신 속에서 지혜로 발효되지 못한다. 지혜라는 실천성은 이른바 '생각의 전능성' 이 균열되는 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혹은 지혜란,(라캉의 말처럼) 생각이 발견해 내는 것은 그 생각으로 하여금 발견하도록 촉발시킨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어긋남의 깨침을 태반으로 삼기 때문이다. 39

만남의 사건이 몰아오는 진리의 순간이란, 무엇보다도 '내 생각 속의 나'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지평이란 (오직) 타자를 위하여 남겨진 장' 이기에, 나와 상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건강한 거리를 얻기 위한 조건은 곧 '내 생각 속의 나' 즉 유아적 2차원의 상상적-연극적 대면관계가 무너져야 하는 것이다. 45

 타인을 향한 무능 속으로(에서) 급진 하는 인식에 겸허하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은 상상의 거울방을 찢고 나오는 일이며, 허영의 풍선을 터뜨리는 일이며, 생각과 의도와 결심의 관념적 순환으로부터 몸을 끄-을-고 살아가는(걸어가는) 길이다. 88

 왜 인간은 무대적 존재가 되었을까? 하버마스의 표현대로, 왜 우리들은 "서로에게 어떤 것을 연출하는 만남"의 형식으로 상호작용을 하게 되었을까? '불행한 의식'을 거칠 수밖에 없는 인간 현상의 당연한 결말에 불과한 것일까? 이 논의에 좀 더 적확한 형식으로 문제를 고치면, 왜 인간은 의식의 벽 이쪽저쪽으로 나뉜 채 자기가 자기에게 연출할 수밖에 없는 형식으로 상호작용의 기본 형식을 갖추게 되었을까? 물론 그것은 주로 환상 탓이다. 인간의 경우 의식이 곧 자의식이고 성찰이 곧 자기성찰이며, 성애조차 "메타-성적인 어떤 것의 육체적 표현" 이듯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욕망을 특수하고 조금은 기이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일은 곧 인간적이며 환상적이고, 이는 무대적 상호작용의 형식에 근접하게 된다. 지젝의 해석처럼 그것은 "우리들 각자가 상상적 시나리오를 수단으로 하여 일관성이 없는 타자인 상징적 질서의 근본적인 궁지를 해소시키고(시키거나) 은폐하는 방식"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이나 종교라는 가장 오래된 환상들도 결국 그(녀)라는, 그리고 신 이라는 "일관성이 없는 타자인 상징적 질서의 근본적인 궁지"를 내 욕망을 조절하고 유지하는 형식에 얹어놓고 있는 것이다.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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