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인 이 영화가 올해의 영화 감상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 감독의 주된 테마는 가족인데, 일관되게 각 작품마다 가족의 여러 양상을 다룬다. '아무도 모른다''걸어도 걸어도''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리고 이 영화까지, 이젠 세계적인 명품 영화 감독이고 정말 멋진 작가다.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극찬했다던데, 실로 그는 21세기의 오즈 야스지로가 된 것 같다. 일본 만의 영화적 전통과 뿌리가 내심 부럽다. 구로사와 아키라,오즈 야스지로,기타노 다케시 등등등..서양의 거장들이 찬탄해 마지않던 명맥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어가고 있다. 


 물론 나는 한국 영화의 자부심도 크다. 90년대 중반 이후로의 한국영화의 과정을 상기해 보면 참 대단한 것 같다. 영화의 질과 양적 다양성 면에서 그야말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 다만 그 전통의 맥의 중심에 임권택 감독만이 상징적으로 존재하는것이 못마땅하다. 군바리 놈들이 정권을 잡고, 모든 문화,예술계가 암흑기 였듯이, 그 단절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비롯한 그 이전 시대 여타 영화들에 전통의 끈이 닿아있질 않다. 이런 영화들을 발굴하고 계속 알리며 끈을 이어야 한다. 프랑스에선 누벨바그 작가들의 작품을 끊임없이 상영한다고 하던데, 그런점이 부럽다.


 102번째 작품이라는 멍청한 수사를 붙여가며 한명의 거장을 만들게 아니라 한 두 작품 이라도, 시대성을 잘 보여주는 것 이라면 끊임없이 연결고리로써 상기시켜야 한다.  참고로 최근에 임권택 감독의 1981년작 '만다라' 를 봤는데, 괜찮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옛날 영화에서 보여지는 도심의 배경과 벌판의 풍경은 그 자체로 아련해진다.




 이 영화는 성별이나 세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은근히 혹은 꽤 저릿한 마음으로 감상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아들.딸 들 이었고, 또 아빠나 엄마가 될 것이고, 됐을 것이며 그렇게 가족으로서 사랑의 정을 내리 받는 과정을 거치며 살아간다. 사람마다 가정마다 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뻔한 과정에서 내리사랑의 의미와 방법을 가슴아프게 전환하게 될 결정적 계기가 온다. 주인공 료타가 받게 되는 전화는 언뜻 삼류 드라마에나 나올듯한 신파의 전형적 소재이나, 그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에게 건네지는 여러 상념은 생각 외로 강렬하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우린 누군가의 자식들 이었고, 부모의 관점. 아이의 관점. 다른 경제적 기반의 환경은 사랑의 방법. 그러니까 부모와 자식의 소통에 대해서 많이 성찰하게 한다. 


 그것은 6년이나 키운 내 자식이, 내 아이가 아니라 남의 자식과 바뀌었다는 한통의 전화, 참 아침마당의 기구한 사연 같은 소식이다. 

 영화는 담담하고 차분하게 주인공 부부의 삶의 모습과 내면의 동요를 뒤따르고 관찰하며 감상자의 내면에 공감의 동요를 불러온다. 일본 영화, 아니 일본 국민성의 특징인, 감정의 북받친 표출이 아닌, 그걸 내면으로 삭이며 함구하듯한 타자와의 관계는 장단점이 있을것이나, 한국 영화. 한국성의 특질과는 참 비교가 많이 된다. 이런 경우 우리의 경우는 감정의 극단으로 치달아 뭘 어떻게 표현하든 격앙된 양상이 전개됐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국민성, 사회의 헤게모니의 밑바탕에는 먹는 음식의 영향이 크지 않나. 란 의문이 든다. 원래 자극적인 음식이 많은 한국음식문화인데 점점 현대로 올수록 매운맛에 대한 엽기적 추구는 삐뚤어진 사회성의 반영이고, 스트레스의 과잉이라고 보여진다. 이런 점이 드라마틱하게 상징적으로 표출되는 것이 현대 한국 영화라 본다. 

 최근에 본, 전혀 다른 가족이야기인 '화이'와 이 영화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무교동 낙지나 아구찜 같은 한국음식과 일본 가정식 백반의 차이 처럼, 영화의 전반적 스타일, 표현 방식에서도 드러난다고 본다. 박찬욱,김기덕,김지운 감독의 영화들은 위에 말한 한국 요리와 흡사한 반응이고 홍상수의 영화는 숙취 후 먹게 되는 시원한 북어국 같은 느낌이다. 고로 매운 음식에 대한 반응이 땀으로 범벅되는 나의 애증은 한국영화에도 투사된다. 


 그렇다.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들은 전통 일본 가정식 백반을 먹는 기분이다. 고전 명작 '도쿄이야기'에서 부터 이어지는 다다미 연출의 전통과 정서가 이어지고 있다. 고레에다 감독의 특장점은 감독의 주관이 연출에 개입되는 것 보다는 그저 사건의 정황을 자연스레 보여주고 배우의 내적 연기를 통해 그 상황의 의미들을 각자가 나름대로 반추하게 한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객관적 보기를 통해 더 많을걸 느끼게 한다. 함축된 의미의 '시'와 같은 일상의 장면들은 한장의 사진처럼 다가온다.  천천히 음미해서 보는 영화 감상의 즐거움을 가져온다. 한국영화의 우악함에 익숙하다면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매우 건조하고 지루하게 다가오겠지만 이런 영화를 통해 삶의 태도나 어떤 관점이 변화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면, 예술 감상의 가장 큰 미덕일 것이다. 판에 박힌 휴머니즘의 강요나 감상주의가 아닌, 예술의 그런 효용에 가장 근접한 영화 감독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아닐까 싶다. 


 남의 행복을 시기했던 간호사의 순간의 과오가 얼마나 두 가정의 당사자들에겐 큰 고통을 초래했는지, 모든 잘못된 선택과 행동은 그 파장의 여파를 가늠할 수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두 가정의 구성원들이지만 그래도 제일 큰 마음의 반향을 겪게 되는 료타와 그의 아들 케이타를 통해 큰 감동을 자아낸다. (마지막 료타 부부를 본 케이타가 도망가는 장면은 마음이 찢어짐) 분명 신파적인 연출이 아닌데도, 그런 상황을 묵묵히 억누른 감정은 관객에게 큰 여운을 남긴다. 상영 내내 곳곳에서 사람들이 훌쩍이는 소리가 계속됐다. 양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이고 파장이기 때문에 내적 긴장감이 대단했다.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굳이 아이를 바꾸지 않고, 양 가정이 키우던 대로  계속 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하다가 아이들이 20살이 됐을 때, 사실을 알리고 그 둘이 다 서로의 자식이 되는 걸로 하겠다. 어찌됐든 쉽지 않은 선택이고 영화의 포스터 카피문구마냥 내가 알던 모든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대기업의 잘나가는 직장인 료타, 좋은 집과 차, 전형적인 성공지향의 엘리트. 누구나 봤을 때  성공한 가장이라고 보이지만 그는 살가운 아버지는 아니다. 아버지 역할의 제스쳐만 취할뿐, 부인이나 아들과 진짜 대화나 사랑의 온기를 나누진 않는다. 반면 허름한 동네의 전파사를 하는 아버지는 세속에 욕심이 없어 가난하고 철들지 않아 보이지만 아이들에게 온몸으로 헌신하고 서로서로 부대끼며 산다. 같이 목욕하고 장난치며, 어른아이같은 그의 양육 방식은 일에 치여 료타와 같은 현대 생활의 많은 아버지들에게 자각의 귀감이 된다. "당신은 어떤 아버지의 모습으로 있는가?" 하지만 무엇이 옳다라기 보다 경제적으로 잘 살고 못 살고를 넘어서 가족이란 따듯한 가치가 뭔지를 질문하게 한다. 두 아버지는 조금씩 변화하는데 그 변화의 중심엔 료타의 아버지의 관계도 짧지만 중요한 점으로 유추된다. 자식사랑의 대물림 내지 정반향은 어찌됐든 대상이 받아들이는 상처를 최소화해야 한다. 


 아버지로서, 아들로서의 사랑의 방식을 추억하며 숙고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많은 아버지들이 이 영화를 보고 주인공 료타와 같이 자식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달라졌으면 좋겠다. 아들이 자신을 찍은 사진을 보는 료타의 충격에 어느 아버지든 뜨금할 것 같다. 낮에 죄다 자는 모습뿐인 아버지 료타. 

 정말 좋은 영화였다. 부부가 꼭 같이 봐야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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