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음 -


 상상이 (미래의) 현실에 바탕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회피기제로 환상에 빠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망상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월터 미티는 수시로 망상에 빠져든다. 20세기의 유명한 사진매체 잡지 '라이프'지에서 16년간이나 네가티브 필름 편집인으로 일한 그는 마흔 두살의 무기력하고 소심한 사내이다. 그가 일하는 공간은 어두컴컴한 필름 라이브러리. 사진작가들이 전세계의 다채로운 삶의 모습들을 찍은 필름을 현상,인화,관리하는 그의 삶은 현실의 굴레에 꽁꽁 갇혀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엄마와 여동생을 부양하는 그는 너무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다. 직장과 일이 여태 그의 삶의 전부였다. 특별한 삶의 경험이 전무하다. 여행조차도 만무하다. 그렇게 현실의 퍽퍽한 삶에 갇힌 순수한 그의 유일한 낙은 상상에 빠져드는 일. 병적인 망상은 이 영화의 주연이자 감독인 벤 스틸러의 장기대로 너무나 스펙타클하고 코미디스럽게 잘 연출되어 재미를 주지만 망상에서 돌아온 월터 미티는 대인관계에서 너무 자주 멍때리는 자로 위험해 보인다.

 

 좋아하는 여직원 앞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망상의 공상에 빠지는 그에게 현실의 위기가 닥치는데, 기존의 잡지책 '라이프'지는 폐간 되고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직장을 잃을 위기다. 구조조정을 위한 신출내기 CEO 앞에서도 멍때리다가 "그라운드 콘트롤, 메이저 톰" 이라고 (데이빗 보위의 명곡 'space oddity'의 가사중, 나중에 선택의 결정적 순간에 직접 이 노래가 감동적으로 흐른다) 조롱을 받는데, 정작 그는 상상속에서나 해소할 뿐이다. 그가 당면한 문제는 마지막 호 표지에 쓰일 사진 네가티브 원본의 행방을 모른다는 거다. 마지막호 인쇄를 2주 정도 앞두고 단서를 가지고 백방으로 뛰어보지만 모두 다 허사, 그는 직접 전설적 사진작가(숀 펜)를 찾아 나선다. 상상의 벽을 깨부셔, 실제적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그의 결단은 숭고해 보였다. 그는 비로서 '라이프' 잡지의 모토인 이 문구 대로의 삶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사진작가의 행방을 쫒아 그린란드-아이슬란드-히말라야(아프가니스탄)의 환상적인 풍경속에서 그는 다채로운 경험을 한다. 상어가 우글거리는 북해의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고, 화산 폭발을 만나기도 하며, 자신의 장기인 스케이트 보드를 정말 멋지게 탄다. 


(넥타이를 반으로 잘라 양손에 돌멩이를 묶고 곡선 주로에서 스케이트 보드의 중심을 잡고 달리는 이 장면이 내겐 어떤 스펙타클한 장면보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 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그린란드의 펍에서 술취한 헬기 조종사 때문에 포기하려 할 때, 상상으로 좋아하는 여직원(쉐릴)이 나타나 기타치며 '스페이스 오디티' 노래를 부르면서 용기를 북돋는데, 그가 헬기에 뛰어들며, 데이빗 보위의 오리지널 곡 '스페이스 오디티'가 흐른다. 이 노래를 몰랐던 사람도. 이 장면에서 노래가 너무 좋다는 걸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그런 행동의 용기는 상상속 사랑의 힘 이랄까. 이때 부터 상상을 압도하는 현실속에 빠져들면서 월터의 상상은 멈춘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의 망상 보다는 현실의 경험들이 영화를 아름답게 채우면서 월터 미티의 변화 만큼이나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희열을 느끼게 된다. 결국 전설의 사진작가(숀 펜)를 찾게 되고 그에게서 삶의 정수를 듣게 된다. 정말 아름다운 순간은 목적의 집착이 아닌, 순간순간 직접 뛰어들어 가슴 뛰는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바로 저기와 여기, 이 순간에 머무는 일 뿐이라고.이 장면에서 누구는 닭살스런 교훈 같이 허세어리게 보던데, 나는 이 작품의 핵심이 여기이고, 이런 진리를 이렇게 풀어내는게 좋았다. 


 라이프지 마지막호 커버 사진으로 쓰일, 삶의 정수가 담겼다는 한장의 필름을 찾지 못했고, 직장에서 해고되었지만 해보지 못했던 삶의 경험들이 그의 인생에 채워졌다는게 중요했다. 새로 쓰는 이력서에는 짝 매칭 사이트에서 공란으로 두었던, 해본 것, 가본 것, 특별한 것을 자신감있게 쓸 수 있었다. 상상속의 자신이 아니라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신을 찾은 것이다. 둘다 직장에서 짤렸지만 좋아하는 쉐릴과의 관계도 친밀해진다. 그리고 못 찾을 줄 알았던 삶의 정수가 담긴 문제의 25번 사진 컷이 자신이 지니고 있었으나 알아채지 못했던 지갑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처럼, 그 사진은 많은 울림을 자아내게 했다. 


 디지털 세상의 변혁에 못이겨 직장은 사라졌고 실직했지만, 일에 몰두하며 그 순간에 머물러 있는 월터의 사진이야말로 삶의 정수이고, 월터 같은 모든 현대인에게 바치는 헌사 같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결혼할때 엄마에게 선물했다는 그랜드 피아노를 처신 하는 자세나, 물성을 가진 작은 필름을 찾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게, 다 어쩜 디지털 세상의 시대착오적인 고독한 모습으로 볼수도 있지만, 벤 스틸러 감독은 이런 아날로그 감성의 가치에 향수어린 애정을 부여하고 있다. 

 녹록치 않은 경제적 현실속에서도 가족애를 잃지 않는 모습은 가슴 뭉클했다. 더불어 좋아하는 쉐릴과의 상큼한 결말도 상상이 일구어낸 희망이 현실의 위기를 돌파하는 듬듬한 버팀목이 될 것이라 믿는다. 


 마치 오손 웰즈 감독의 걸작 '시민 케인'에서 의문의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였던 것 과도 같았던, 그 문제의 사진 한장을 찾는 과정이 이렇게 감동적일줄이야. 극장 상영 끝물에 봐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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