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술이

인간 정신의 가장 고귀한 표현이라고 믿는다.
나는 우리가 단지 유한하고 덧없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문화'라고 불리는 신비롭고 공동체적인 것에
참여하려고 열망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열망은 종족 보존의 열망만큼이나 강하다고 믿는다.
지역적이거나 세부적인 것을 통해,
우리의 개별적인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일한다.
바로 우리 서로 간의 모호성 속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친밀성이 태어난다.
개별적인 목소리는 공동의 목소리이다.
지역적인 목소리는 보편적인 목소리이다.

 예술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가설

1. 예술은 놀이, 즉 즉흥적인 행위, 실험, 환상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예술은 가장 뿌리 깊은 본능적인 면에서 영원히 유희적이고 충동적이며, 무아경의 발산 외에는 아무 목적도 없는 육체의 활동과 유사한 상상력의 활동이다.

2. 예술의 연료는 반역성이다. 즉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기존의 것에 반기를 들고자 하는 욕구이자, 추방을 당할 정도로 나이든 사람들에게 반항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자기 자신을, 좀 더 확장하면 자신의 세대를 새롭고 신기하고 제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하려는 욕구이다. 실제로 모든 예술가들은 어린아이나 사춘기 때부터 재능을 보인다. 과거와 절연하고자 하는 사춘기 때의 욕구는 종족 재생산의 충동만큼이나 강렬한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 월든 '의 첫 장에서 그 특유의 겸손한 태도로 말한다. " 나는 이 행성에서 30년 정도 살았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가치 있거나 진지한 충고를 한 음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내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선언의 불공평함과 부정확성이 바로 청년의 반항에 반드시 필요한 화음을 울린다.

3. 예술은 과거의 기념 수단이다. 빠르게 사라져가는 세계의 기록이다. 최소한 일시적으로나마 향수의 파괴라는 악령을 추방하는 수단이다. 영속성을 보증하기 위하여 '지나간 것, 지나가고 있는 것, 앞으로 올 것,'을 가장 정확한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가르칠 이들, 우리가 뒤를 이어야 할 이들에게 영예를 돌리는 것이다. 어떤 풍경이나 삶의 방식, 일단의 사람들을 가장 예리하고 다양하게 재현할 수 있는 작가는 자신이 타고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쫓겨난 사람일 것이다. 조만간 그의 반역조차 씁쓸하면서도 담콤한 상실감으로 바뀐다. 상처, 노여움, 억울함조차 젊음의 에너지와 밀접하게 얽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감정이 된다.

4. 예술가는 지독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 평생토록 예술을 통해 손에서 빠져 달아나는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투쟁한다. 불완전성이나 부정확성에 대한 감각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확장이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창조의 본능에 연료를 제공한다. 시각 예술은 문자 그대로 볼 수 있는 예술을 만든다. 이런 물리적인 문제는 예술가의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기도나 선행을 통해 은총을 불러올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신의 은총을 추측할 수도 없기 때문에 신에게서 형벌을 받는 것을 청교도들이 두려워했듯이, 예술가는 영적인 견지이자 미적인 견지에서 그 자신을 재창조하는 방식을 찾는 것 같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처럼 예술가는 자신의 영혼을 만들고 파괴한다. 그의 예술 작품은 어떤 사상이나 시각에 종속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개별 작품을 오직 소급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게 구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예술이란 공동체적 문화에 대한 참여의 열망이 표출되는 방식 중 하나이며, 이 참여의 열망은 종족 보존의 열망만큼이나 강한 것이다. 예술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으로 출발하지만 위대한 예술은 인류 공동의 상상으로 수렴되며, 그 상상의 지평을 더욱 넓히고 더 고귀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특히 이제 막 예술의 길에 들어선 젊은 작가는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정열을 글로 풀어내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글쓰기는 절망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세계가 당신을 정당하게 대우하거나 자비롭게 다루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말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포착해낸다는 이율배반적인 목표에 가 닿으려는 것이 작가가 글을 쓰는 목적이기도 하거니와, 작가가 진정 그 목표를 이루어낸다면 더 이상 그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에게는 시간이 가면서 쉬워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글쓰기는 실패의 예감을 품고 시작하는, 그러나 작가의 가슴 속에는 이글이글 타고 있는 불덩이가 꼭 가야만 한다고 몰아치는 좁은 길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척도는 결국 자기 자신이 될 수밖에 없고, 버지니아 울프의 말마따나 " 죽기 전에 무엇인가 쓰고자 하는 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우리를 나락에 빠뜨리지만 동시에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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