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골삼천(踝骨三穿)


과골삼천(踝骨三穿)이란 말을 한동안 화두로 들고 지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강진 유배시절 제자인 황상(黃裳)의 글 속에 나오는 말이다. 70이 넘어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메모해 가며 책을 읽는 황상을 보고 사람들이 그 나이에 어디다 쓰려고 그리 열심히 공부를 하느냐고 비웃었다. 그가 대답했다.

 

“우리 선생님은 귀양지에서 20년을 계시면서 날마다 저술에만 힘써 과골, 즉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 났다. 선생님께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친히 가르쳐 주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런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처음 이 글을 읽고 어안이 벙벙했다. 책상다리로 앉아 20년 세월이 가는 동안 바닥에 닿은 복사뼈 자리에 구멍이 세 번 뚫렸다는 것이다.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는 말을 들었고, 추사가 벼루 여러 개를 먹을 갈아 밑창을 냈다는 말도 들었지만,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렸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다산은 40대 초반 한창 뜻을 펼칠 나이에 급전직하의 나락으로 떨어져 강진으로 유배 왔다. 그 절망의 20년 세월 동안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했다. 나중에는 뼈가 시어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벽에 시렁을 매어 놓고 서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떠올리며 《다산시문선》을 수 십 번 통독하다 보니 도대체 우리네 공부란 것이 그 앞에 서면 초라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산의 그 초인적인 노력도 대단하지만, 10대에 들었던 스승의 가르침을 70이 넘은 나이에도 마음에 되새겨 잊지 않은 제자의 도타운 마음도 참 고맙다. 그래서 지난 번 강진 답사 때는 일부러 황상이 살던 천개산 아래 일속산방(一粟山房) 터를 물어물어 찾아갔었다. 25년 전 저수지가 생겨 집터가 있던 자리 바로 아래턱까지 물이 차 있어 건너갈 수 없었지만, 건네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뭉클했다.


15살 난 소년은 아전의 자식이었다. 다산이 유배 초기 강진 읍내 주막집 한 켠에 열었던 서당에 쭈볏쭈볏 나아가 “저 같이 머리 나쁜 아이도 공부할 수 있나요?”하고 물었다. 스승은 오로지 부지런히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며 저 유명한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을 글로 적어 소년의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소년은 스승의 격려에 크게 고무되었다. 말씀에 따라 평생을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스승이 귀양이 풀려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그는 세상에 눈길을 주지 않고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책을 읽었다. 그렇게 다시 몇 십 년이 지났다. 제주도에 귀양 가 있던 추사가 우연히 그의 시를 보았다. 추사는 그 시의 높은 경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귀양이 풀려 뭍으로 오르자마자 추사는 황상의 집부터 찾았다. 스승 다산은 이미 세상을 뜬 뒤의 일이다.


이후 시골 아전의 자식은 평생 농투성이 농사꾼으로만 살다가 일약 세상이 알아주는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 형제와 추사 형제 등이 다투어 그의 시를 칭송하고, 그의 시집에 서문을 써주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우쭐대지 않았다. 추사 형제와 정학연 형제가 차례로 세상을 뜨자 그는 또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진솔투박한 그의 인간과 시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75세 나던 해에 쓴 〈임술기(壬戌記)〉는 스승에게 첫 가르침을 받은지 60년이 되던 해에 쓴 글이다. 이 글에서 그는 스승이 15세 때 자신에게 준 글을 옮겨 적고 나서, 평생 이룬 것은 보잘 것 없지만 생각해 보면 스승이 남기신 가르침을 지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삶의 끝 자리에서 그가 남긴 이 말을 나는 오래 잊지 못한다.


다산이 강진에 내려와서 거둔 것이 단지 학문의 성취뿐이었다면 우리의 외경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는 역경의 세월을 자신과 싸워 이겼을 뿐 아니라 자신감 없던 시골 소년의 삶을 송두리 째 바꿔 놓았다. 학문의 위대함은 인간의 위대함에서 나온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얄팍한 세상에서 이 아름다운 사제간의 만남은 늘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정민교수의 홈피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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