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다시 읽어봐도 재밌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뮤지션이기도 하지만. 서양인의 개고기 시식과 노래방 탐사같은, 글을 통한 상상도 재미있다. 왠지 라이브한 노래방은 의심이 간다. 여성이 껴 있긴 하지만..
여하튼 말크머스의 음악은 천재적이다. 다시 페이브먼트를 재결성해 공연을 하던데..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스티븐 맬크머스, 메리 티모니 인터뷰,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4박 5일

최세희 nutshelter@hotmail.com | contributor
 
2002년 1월 5일 토요일 오후 5시 25분

인천 공항. 전방 3 미터 경에 회색 재킷 군청색 코듀로이 바지를 걸친, 회갈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한 백인 남자 등장. 1990년대 후반 [ATN(Addicted To Noise)]에서 본 사진과 똑같은 모습이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스티븐 맬크머스(Stephen Malkmus). [ATN] 화보를 빼면 "Shady Lane" 뮤직 비디오 클립이 그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비주얼 데이터의 전부였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다행이었다(그 뮤직 비디오에서마저 그는 '목 없는' 사나이로 출현하지 않는가). 반듯한 꽃미남형 얼굴에 꺽다리형 체구. 환호하는 그의 팬들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으며 그리로 발걸음을 옮기는 '우리의' 미스터 스티븐 맬크머스. 이어지는 꽃다발 증정식(?)과 사인 공세, 사진 촬영에 친절하고 익살맞게 포즈를 취해주는 것을 보니 긴장이 좀 풀렸다. 심하게 말해 외골수 '환자'가 전설이 되는 이 동네(?)에서 그런 민간인적(?) 온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접대하는 '진짜' 민간인 입장에서 반갑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쯤 해 가서 아는 척. 신심 어리고 얌전한 팬들은 조용히 물러가고. 악수를 한 후 공항 라운지의 한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의 있게 걷는 것은 귀찮다는 듯 발을 질질 끄는 그의 걸음걸이에 일순 '이것이야말로 슬래커(slacker)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팬 서비스용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불현듯... -.-;

불고기 정식을 메뉴에서 고른 그는 "기내식도 이걸 먹었는데 별로 맛이 없었는데, 여기는 맛있다"며 능숙한 젓가락질 솜씨를 보여주었다.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고. 두어 달 전 휴가차 하와이에 갔을 때도 잊지 않고 한국식당을 들렀었다고. 그러나 식성에 비해 상당한 소식가(한국 체류 내내 밥 반 공기 이상을 넘기는 그를 보지 못했다). 마타도어(Matador) 레이블의 공동사장인 크리스 롬바르디(Chris Lombardi)와 인터내셔널 마케팅 팀장인 제스퍼 에클로우(Jesper Eklow), 힐리엄(Helium)의 리더이자 이제는 마타도어 소속 솔로 뮤지션인 메리 티모니(Mary Timony)는 9시 55분 비행기로 도착 예정이기에 맬크머스만을 태운 채 서울로 향했다. 첫 방문객다운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인천 공항이 멋지다며 새로 지은 것 같다고.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사 관련 책을 읽었다는 그는 일본과의 정치적 문화적 관계가 여전히 민감하냐는 질문부터 한국 전쟁에 대한 것까지, 한때의 역사학도다운(?) 질문을 하기도 했다. 서울의 평균 인구는 물론 서울과 평양간의 거리 등을 묻기도 해서 그에 대한 수치적 정보가 미진한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으나 동행한 알레스 뮤직의 이응민씨 덕에 모면. 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배철수 목소리를 들으며 웃은 그는 "일본 사람 억양 같다"고 한 마디. 더불어 중국어도 들어 봤는데 한국어가 더 듣기 좋다는 이야기도 한다.

알레스 뮤직과 마타도어 레이블과의 전격 계약이 성사될 즈음, 맬크머스와 티모니의 중국 공연 소식이 들려오고 겸사겸사 해서 한국 공연도 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맬크머스 측에서 흘러나오게 된다. 예스 사인을 보낸 알레스 뮤직 측은 맬크머스와 티모니의 앨범 라이선스는 물론 마타도어와의 계약 체결 기념을 명목으로 한 공연 기획을 추진하지만 중국 정부의 공연 금지로 맬크머스 일행의 중국 행은 좌절되고 만다. 그래서 남은 것이 한국행. 공연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관광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그는 희망 관광 코스 중에 "크레이지"한 한국 음식 시식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예를 들면? 소의 내장이나 뇌. 그는 자신의 배와 머리를 번갈아 가리키며 씩 웃는다. 개고기는 어떤가? 불쑥 물었다. 요새 여긴 개고기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될 만큼 떠들썩한데. 정말인가? 전혀 몰랐다. (잠시 생각 후) 월드컵 때문인가? 그렇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개고기 식문화를 정말 몰랐나? 전혀 몰랐다. 그렇군. (잠시 또 생각하던 그) 넌 먹어봤니? 아뇨;;(*.*) 한 번 먹어보고 싶은데. 같이 가서 먹자. 헉!!! 농담이지? 설마아(...가 사람 잡은 이야기는 곧. 개봉박두!) 우여곡절 끝에 명동 R 호텔에 도착한 일행. 필요한 게 있으면 어쩌구 운을 떼는데 "난 잘해 나갈 수 있을 거야." 웃으며 손을 내민다. 내일 오전 9시에 로비에 픽업하러 오겠다고 말한 후 호텔을 나왔다.


1월 6일 일요일 오전 9시

명동 R 호텔 라운지 도착. 맬크머스 외 세 명의 백인 발견. 대륙형 체구의 맘 좋게 생긴 털보 아저씨 둘과 고딕 풍으로 화장시키면 멋지겠다 싶은 브루넷의 처녀. 크리스 롬바르디와 제스퍼 에클로우, 그리고 메리 티모니였다. 그들을 밴에 태운 후 삼청각 쪽 한식집에서 아침. 알레스 뮤직의 김효진씨는 한겨레신문에 나온 관련기사 ([링크]) 를 맬크머스에게 건네주었다. '미 인디 록의 전설'이란 타이틀을 통역해 주자 미소. 효진씨가 맬크머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자 에클로우는 익살맞게 "전설!"하며 환호한다. 맬크머스 역시 익살맞은 미소로 카메라 응시. 식사 후 '역사적 비감이 교차하는 곳' 삼청각과 경복궁을 들러 여의도로 간다.


오후 4시 30분

Stephen Malkmus Interview

최초의 인터뷰는 [weiv] 측과 이루어졌다. 신현준 형이 롬바르디와 에클로우를, 이용우와 내가 맬크머스와 티모니를 대상으로 각개 인터뷰를 벌이기 시작했다. 송창훈은 사진을 찍었다.

10년 간 함께 하며 미국 인디 록의 지형도를 바꾼 페이브먼트(Pavement)가 해산한지 1년 후인 2000년, 맬크머스는 포틀랜드로 거주지를 옮긴다. 밴드 생활에 있어서 음악적 열정의 공유 못지 않게 같은 지역 내에 거주하는 것이 결속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새로운 행보를 위해 평소 좋아하던 포틀랜드 출신의 밴드 직스(Jigs)와 손을 잡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솔로 앨범 [Stephen Malkmus](Matador, 2001)는 페이브먼트 시절 때와는 다른 매끈한 사운드 텍스처에 대한 논란과 함께 마타도어의 상업적 고려 때문에 솔로로 탈바꿈해 나온 결과물이라는 루머를 낳기도 했다.

사진: 스티븐 맬크머스
"그렇지 않다. 이것은 엄연히 나의 솔로 앨범이다. 페이브먼트의 업적에 대해서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10년 간 한 밴드에 있다보니 음악적으로는 진퇴양난이 되었다. 페이브먼트에서 시도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가장 컸던 건 멤버들이 전부 다른 지역에 떨어져 산다는 점이었다. 처음 4, 5년간은 열정만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그 후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직스는 그런 면에서 매우 만족스럽다. 페이브먼트와 달리 직스는 나의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닐 영의 백 밴드)'라 말할 수 있다. 뭐랄까, 페이브먼트 때가 멤버의 개념이었다면 직스는 보스의 개념으로 일한다고나 할까(웃음)."

반농담조로 [Swedish Reggae]라 이름했던 솔로 앨범의 타이틀은, 페이브먼트 때와는 차별 화된(=진중한?)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Stephen Malkmus]로 바뀌어 나오고 유럽과 미국 전역을 중심으로 투어를 시작한다. 향수에 차 공연장을 찾은 팬들은 그가 페이브먼트 시절을 완전히 잊은 듯 솔로 앨범 수록곡만으로 세트 리스트를 채운 것에 다소 실망하기도 하는데.

"페이브먼트 시절의 공연과는 사뭇 다른, 이상하기까지 한(even strange) 분위기를 맛봤다. 앞으로도 페이브먼트 시절의 노래는 연주하지 않을 예정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썰렁했던 건 아니었다. 할로윈을 맞아 일리노이에서 벌인 공연은 지난 1년 간 치른 공연 중에서 가장 재밌는 것이었다. 직스의 기타리스트가 헨리 롤린스처럼 짝 달라붙는 반바지에 온 몸에 문신을 그린 채 격렬하게 연주하는 진풍경을 연출했기 때문이다(웃음)."

그런데 이곳에서 페이브먼트 커버 밴드와 함께 페이브먼트 시절을 재현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처음 제안 받았을 때는 내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솔로가 되어서도 페이브먼트 시절의 노래를 공연 리스트에 올린다는 것은 옛 친구들에 대한 예우가 아닐 뿐만 아니라 내 솔로 활동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제안이 가령 뉴욕에서 온 것이었다면 당연히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의 한국 방문의 목적은 즐기는 것(have fun)이었고 공연도 그런 마음으로 치를 생각이었다. 팬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가급적 들어줄 의향으로 왔다. 내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행운이다(웃음)."

1992년 노이즈와 팝이란 씨실과 날실이 불협하게 얽힌 음역 위로 달콤하게 휘청대는 음색이 기이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던 [Slanted & Enchanted]가 나왔을 때 맬크머스는 가령 커트 코베인 같은 사람이 죽어라 추구하며 동시에 고민했던 모든 문제에 대해 처음부터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행복하게 절망하면서 가끔 신랄한 비판의 날도 내세울 수 있는. 유명담이 되어버린 스톤 템플 파일럿츠(Stone Temple Pilots)나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 등에 대한 실명 비판은 어떠한가?

"스톤 템플 파일럿츠 같은 경우는 물론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아냥거림에 가까웠지만 '공격'이라기보다는 '장난'이었다. 스매싱 펌킨스도 마찬가지고. 공격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대규모 레이블이나 빅 밴드의 반대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매싱 펌킨스의 경우 몇몇 곡은 좋아한다. 가령 "1979" 같은 곡."

"하지만 그 사람(빌리) 창법은 정말이지..."

"징징대는(whining)?"

"그렇다(미소). 그런 창법은... R.E.M.의 경우는 물론 좋아한 밴드였고. 그 노래("Unseen Power Of The Picket Fence" - [No Alternative](Arista, 1993))도 헌사보다는 장난에 가까웠지만."

창법! (에클로우의 코멘트에 의하면) '캘리포니아 특유의 느긋한 스타일(Californian laidback style)의 한 유형으로 넌피니토(non-finito)한 연주 스타일만큼이나 풀려있고 비틀거리는 창법은 어떠한가?

"캘리포니아적이다. 팔세토나 고음의 가창력에 신경 쓰지 않는. 루 리드나 로빈 윌리엄슨(Robin Williamson),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등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솔로 앨범의 경우 팔세토나 고음의 창법에 신경 쓰지 않고, 루 리드처럼 말하는 듯한 창법을 취했다."

그 모든 것과 함께 1990년대 로파이의 미학을 일구었다는 평가에 대해서, 다시 말해 로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더불어 사운드 텍스처나 가사 면에서 그것과는 많이 달라진 솔로 앨범에 대해서는.

"첫 앨범 [Slanted & Enchanted]는 로파이라는 말에 들어맞는 앨범이었다. 로파이는 기본적으로 DIY 정신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 면에서 [Terror Twilight]은 DIY가 아닌 레코딩, 프로듀싱에 보다 많은 신경을 썼다. [Stephen Malkmus]가 페이브먼트 시절 때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의도하지도 않았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함께 일하게 된 사람들, 세월, 그리고 음악적 취향이다. 페이브먼트 마지막 앨범과 솔로 앨범간의 시간차만 해도 2년이다. 여러모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기간이다."

페이브먼트 시절을 포함, 지금까지 마타도어나 드랙시티와 같은 인디 레이블이 아닌 대규모 레이블의 계약 제안을 받은 적은 없는지? 있었다면 그런 제안에도 불구하고 인디로 '남은' 이유는 무엇인가.

"인디 레이블은, 마타도어를 예로 들면, 소속 밴드에 대해 매우 충직하다. 사업적 관계 이전에 우정을 쌓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 음악적 이해에 있어서도 대규모 레이블의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 폭이 넓다. 예술을 우선으로 한다고 할까(Art First!). 그리고 내가 대규모 레이블로 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내 음악이 기본적으로 적은 수의 청중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힙합과 같은 음악에 비할 때 말이다."

그 말은 동시에 살만하다는 뜻도 될텐데. 이런 질문은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호의적인 인터뷰 분위기에 용기를 내 묻기로. 인디 뮤지션으로 다른 일 할 필요 없이 살만한가? 솔로 앨범의 경우 얼마나 팔렸는지?

"살만하다. 물론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살만하지 않았다면 아마 대규모 레이블의 빅 밴드를 꿈꿨을 것이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미국 밴드들에게 주요 수입원을 좌우하는 것은 투어다. 소닉 유쓰(Sonic Youth)가 대표적인 예다. 소닉 유쓰의 앨범 판매량은 실제로 보잘 것 없다. 5만 장이나 팔릴까. 하지만 공연장에서 그들을 찾는 관객들의 수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 솔로 앨범의 경우 매우 성공적이었다. (정확한 수치를 묻자) 십만 장 이상이 팔렸다. 물론 미국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 정도면 인디 뮤지션으로선 아주 성공적인 판매량이다. 그리고 나 또한 백 회가 넘는 공연을 했고. 아까도 말했지만 대규모 레이블의 빅 스타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재닛 잭슨(Janet Jackson)의 경우 제작비와 홍보비가 엄청나기 때문에 백만 장이 팔려 나가도 실패라고 여긴다."

어느 정도면 인디 뮤지션에게 엄청난 성공이라고 여겨지는지?

"한 오십만 장?(웃음) 그거면 충분하다. 쉽지는 않지만. 많이 안 팔려도 맥도널드에서 한 끼 때울 정도만 된다면 인디 뮤지션으로 사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다(웃음)."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맬크머스는 이곳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이 홈페이지에 직접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디지털 문화에 대해 무관심한 문외한으로 사는 몇몇 '인디' 뮤지션들과 조금 달라 보였다. 팬들과 채팅도 두어 번 해 봤다는 이야기가 인디 앨범 판매량 이야기와 겹치면서 MP3나 저작권 공유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상관없다. 얼마든지 들으라고 하지, 뭐. MP3가 나타났다고 해서 공연장으로 오는 사람들의 수가 줄진 않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실제 앨범 판매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줄어든다고 해도 한 만 장? 만 장 조금 더 될까? 그 정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수치다. 공연 티켓, 티셔츠 같은 것에 돈을 들이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물론 내 앨범을 사는 것이 좋은 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사진: 크리스 롬바르디, 메리 티모니, 제스퍼 에클로우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두 번째 취재팀이 왔을 때까지 티모니의 인터뷰는 시작도 못한 상태. 체류 기간동안 붙어 다니는 이점을 이용, 틈틈이 인터뷰하기로 티모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터뷰를 마쳤다. 인터뷰가 끝난 후 63 빌딩의 한식당에 도착, 갈비와 냉면으로 저녁을 마무리. 한식당 스피커에서 내내 흘러나오던 가야금 연주에 맬크머스, 에클로우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사운드 사이사이의 여백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고 한 마디. 맬크머스는 가야금 연주 앨범을, 에클로우는 가야금 구입을 쇼핑 리스트에 추가하며 안내를 부탁하기도.


1월 7일 월요일

일행을 태운 밴이 대학로 SH 클럽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경. 리허설 일정은 맬크머스 - 티모니 - 언니네 이발관 순으로 잡혀 있다. 그때까지도 셋 리스트는 확정되지 않은 상태. 이에 대한 맬크머스의 변명(?)은 "페이브먼트 넘버들은 커버 밴드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고 솔로 넘버의 경우도 마찬가지. 리허설동안 정하겠다"는 것. 기타 튜닝이나 이펙트 문제 등을 언급하기 위해 잠시 멈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제외하면 맬크머스와 커버 밴드의 호흡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제대로 맞아 들어갔다. 해체 이후 페이브먼트 노래는 흥얼거려본 적도 없다는 맬크머스는 커버 밴드가 준비해 온 모든 곡들의 가사를 막힘 없이 불러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Vague Space"와 같은 솔로 곡은 물론 "Shady Lane"이나 "Major League", "In The Mouth Of A Desert"와 같은 곡들을 부르는 것을 보다가 백스테이지로 가 어제 못한 티모니의 인터뷰를 시작했다.


Mary Timony Interview

목소리만 들었을 때와는 달리 실제 보니 얼굴이 귀엽게 보인다. 그런 소리 종종 듣나.

"(웃음) 모르겠다! 어쨌든 칭찬해 주어서 고맙다."

음악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

"1990년 워싱턴 DC 출신 오토클레이브(Autoclave)와 연주를 하면서 처음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그 후 1992년 힐리엄(Helium)을 결성했다. 8년 동안 힐리엄에서 두 어장의 앨범을 발매한 이후 그 다음부터는 쭉 솔로로 활동해 오고 있다."

그렇다면 힐리엄은 해체한 것인가?

"그렇다. 공식적으로 해체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힐리엄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이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워싱턴 DC에 있는 듀크 엘링턴 예술 학교(Duke Ellington School of the Arts)에서 비올라를 전공했다던데. 비올라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아마추어 펑크 밴드를 한 건가, 아니면 클래식을 전공하다 어떤 계기로 인해 펑크에 빠진 건가. 뮤지션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가까이 접해 있었고 음악 하는 것이 좋았다. 클래식 기타와 비올라 등 여러 종류의 악기 연주 교습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암튼 많은 악기들과 많은 음악들 속에 살다보니 나도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록 음악에 경도된 시기는 고등학교 때(1980년대).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펑크 씬이 형성되었다. 그들의 공연을 찾아보러 다니고 하면서 서서히 록 음악이 좋아졌다."

1980년대 펑크 씬이라면 라이엇 걸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힐리엄은 'radical feminism과 punk rock을 믹스했다'는 평이 있다. 동의하는가. 펑크 씬에서 혹은 인디 씬에서 여성 밴드로서 특별한 어려움이 있(었)는가. 혹시 이런 페미니즘 어쩌구 하는 질문들이 짜증나는가.

"그렇지 않다. 그 점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다. 당시 라이엇 걸은 굉장한 씬을 가지고 있었고, 대학 시절에 들은 페미니즘 강의나 책으로부터 얻은 것과 함께 나를 관련 문화에 깊이 빠져들게 했다. 초기 힐리엄의 가사들은 그런 것들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나온 것들이다. 짜증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다르다. 그런 식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보다 자연스럽게, 그때 그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더 좋다."

당신은 매우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타나 드럼은 물론 키보드 종류는 거의 다 섭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음악 교습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악기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는지?

"기타를 맨 처음 시작한지 얼마 안돼 키보드를 배우기 시작했다. 기타와는 다른 사운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매혹됐다. 지금은 키보드보다 피아노 쪽에 치중하는 편이지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는 모르겠다(웃음). 그냥 스튜디오에 있으면서 어떤 악기의 소리가 괜찮다 싶으면 그걸 집어들고... 그렇게 시작됐다(웃음)."

힐리엄의 음악 스타일에 대해서 스스로 정의하는 바는? 싸이키델릭 하드 록부터 심지어 프로그레시브까지 포괄하고 있는데?

"이것도 대답하기가 참 곤란한 질문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큰 영향을 받은 음악 스타일 중엔 1960년대 초반의 영국 포크 씬도 있는 반면 몇 백년 전의 클래식 음악도 무시할 수 없다."

당신의 음악에 대해 프로그레시브 록(prog-rock)적이라는 평이 있다. 그것을 당신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애정, 혹은 영향으로 읽어도 괜찮을지?

"물론(웃음)."

공식 사이트가 없는 것 같다. 힐리엄 팬 사이트도 현재는 운영이 안 되는 곳이 많고.. 스스로 자신의 사이트를 만들 생각은 없나.

"옛날에 한 번 들른 적은 있는데 그 이후로는 가본 적이 없다. 조만간 만들 계획이긴 하다."

이쯤해서 티모니의 리허설 차례가 왔다. 맬크머스와 다른 일행은 건너 편 카페로 쉬러 가고. 티모니의 리허설 시간은 예정보다 30분 가량 더 늘어났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키보드의 톤이나 음정이 문제인 듯.

지켜보는 관계자의 입장에선 무대 위의 공연에 비할 때 더디고 지루하기까지 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7시, SH 클럽은 관객들로 꽉꽉 들어 차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대하던 공연. 리허설을 거의 다 봐 버렸기 때문에 다소 김빠진 공연 관람이 되겠다 싶었던 것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공연이란 역시 뮤지션에게나 관객에게나 한 쪽이라도 부재하면 의미가 없는 '현장의 놀이' 아니겠는가. 티모니의 음울하게 가라앉은 첫 공연이 끝나고 흰 와이셔츠에 파란 코듀로이 바지 차림의 맬크머스가 무대에 올랐다. 진지하고 탐구적(?)이었던 리허설의 맬크머스는 즐겁게 재롱을 피우기까지. 솔로 넘버가 끝난 후 뒤에 선 페이브먼트 커버 밴드를 아우르며 "우리는 페이브먼트입니다. 무덤에서 돌아왔죠."라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은 1998년 여름, "AT&T"를 들으며 저토록 흥겹고 무심하게 '아무라도 와서 날 구원해 주겠지' 염원할 수 있는 마인드는 무엇인가 감탄했던 시절로 되돌아갔다. 이 많은 이야기들은 다른 웨이버의 공연 후기에 맡기자. 사인회를 위해 팬들에게 둘러싸인 그들을 뒤로하고 내일 일정을 위해 귀가했다.


1월 8일 화요일

아침 10시에 있는 인터뷰를 위해 로비에 도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피곤 때문에 눈도 뜨지 못하는 맬크머스가 좀비처럼 비틀 비틀 걸어 나왔다. 괜찮냐고 물으니 똑같이 물으며 등을 두들겨 준다. 그래도 눈은 여전히 못 뜬다. 아침에 잠깐 만난 에클로우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미국에서의 인터뷰도 잘 응하지 않는다고. 한 인터뷰는 자신이 아닌 드러머를 내보내는 바람에 작은 마찰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고.

"포틀랜드의 경우, 내가 하는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대개가 컨트리 음악을 듣는다. 인터뷰는커녕 거리에서 사인을 하는 경우도 없다. 스타 대접을 받고 싶으면 대도시로 나가면 되지만 그건 농담이고(웃음).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인터뷰(스케줄로 잡힌 것만 11건)를 하게될 줄은 몰랐다."

이만하면 관광치고는 좀 가혹하군.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그를 데리고 원음 방송국 인터뷰까지 강행했다. 방송국을 가는 도중, 용산 중간에서 그가 관심을 보이는 건물에 대해 미군기지라고 대답. 아직까지 미군이 주둔해 있는지 몰랐다고. 유감이라고. 그가 본 서울 시민들은 어딘가 조용하고 일면 침체돼 있는 듯해서 나름대로는 북한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는데. 음...

라디오 방송에서 맬크머스는 자신의 노래들을 직접 선곡했다. 노래가 나올 때마다 한 손을 이마에 짚고 신중하게 한 음절 한 음절 경청하는 '대가(?)'의 자세를 보이기도. 한 록 바에서 자신의 음악이 나오자 황망해 하며 일어나 화장실로 사라진 후 노래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았던 작년의 마크 코즐렉(Mark Kozelek)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밝혀진 이유는 힘 빠질 정도로 간단. "이 노래("Trojan Curfew")는 6개월만에 처음 듣기 때문이다(미소)."

인터뷰가 다 끝났다는 것을 알자 기사회생한 맬크머스는 자신을 버리고 회현동을 전전하며 자신이 차지해야할 바이닐들을 모조리 긁어모으고 있을 에클로우와 롬바르디를 저주하며 발을 굴렀다. 셋 모두 엄청난 바이닐 콜렉터들이라는 정보에 관광 일정에 회현동 및 (가능하다면) 황학동 쇼핑을 넣긴 했었다. 무엇을 사고 싶냐는 말에 "한국의 1960-70년대 싸이키델릭, 포크 록 앨범을 사야 한다"며 추천 리스트를 부탁한다. 호텔 로비에 내려준 후 일단 굿바이.

신촌에서 만두 전골을 저녁으로 한 일행은 8시가 다 되어 클럽 '빵'으로 갔다. 페이브먼트 커버 밴드의 일원이었던 '잠'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 소식을 듣고 몰려든 맬크머스 팬들과 클러버들이 조촐하게 모인 그 공연은 맬크머스, 티모니, 에클로우가 무대에 올라가 즉흥 연주를 하면서 더욱 흥겨워졌다. 싸이키델릭 임프로바이제이션으로 무궁무진하게 버전업한 "I'm Looking For My Man"을 필두로 티모니의 기타 버전 "Want U"까지, 어제로 끝이 난 줄 알았던 감동적인 여흥이 계속 되었다. 티모니의 솔로 긱(gig)이 펼쳐질 동안 맬크머스와 롬바르디는 클러버들과 함께 뉴욕 테러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에클로우와 잠의 기타리스트는 체스를 벌이는 등 '진정한 화합의 장(?)'을 연출하기도. 마지막 코스로 '벨 앤 세바스찬'에 들러 알레스 뮤직과 마타도어 레이블의 계약 성사를 축하하는 축배를 들고 끝.


1월 8일 수요일

어제 호텔 로비에서 헤어지기 전에 맬크머스와 롬바르디는 오늘 일정 중에서 반드시 확보해야할 것들을 부탁했다. 그것은 보신탕과 노래방, 그리고 레이브 바였다. 세 코스를 롬바르디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로 쏘겠다는 것이다! 저녁때마다 도합 소주 예닐 곱병을 비운 사람들의 호언장담을 믿어도 될지? 어쨌거나 밤이면 밤마다 맥주 집과 노래방을 전전했다는 그들이 원하는 노래방은 유형이 좀 다른 것이었다. 좀더 '라이브(?)'하고 술을 함께 마실 수 있는 곳. 이것은 세 남자의 월권에 가까운 선택이지 사실 티모니의 심중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 아닐까? 하며 티모니의 안색을 살피니 마냥 즐거워 보인다. -.-;

농담으로 "그렇다면 맬크머스와 티모니는 약속해라. 다음 번 앨범에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노래를 만들겠다고"라고 말하니 "긍정적인 가사로 꽉 채워주마!" 호언장담하는 맬크머스. 한때 채식주의자였다더니 저리 달라질 수 있을까 싶어 물으니 "옛날 여자 친구가 채식주의자여서 좀 따라했지만 관계가 끝나면서 채식주의 인생도 끝났다"고 멋쩍게 미소.

이미지: 티모니의 '강아지 그림'
해서... 이태원을 들른 후 강남의 커다란 보신탕 집으로 직행했다. 넓은 온돌 방 홀(?)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네 명의 건장한 백인 남녀들이 문에 들어서자 종업원 아줌마들의 표정이 일순 긴장한 것도 진풍경이라면 진풍경. 쭉 둘러앉아 수육과 전골을 시킨 후 서로의 몬도가네 경험담이 펼쳐지고. 마침내 수육부터 등장! 주저하지 않고 젓가락으로 수육을 집어든 그들은 역시 축배. 에클로우가 카메라를 꺼내 수육을 든 맬크머스와 티모니를 찍었다. 맬크머스는 미소 지으며 "이걸 브리짓 바르도에게 보내 주겠다"고 농담^^; 먹어보자마자 소고기보다 부드럽다며 탄성. 티모니는 "개고기 정말 맛좋아요(Dog Rules)"하며 즉석에서 강아지 그림을 그려 보였고 맬크머스는 롬바르디가 집어든 수육에 소금을 뿌려주는 다정다감함을 보여주기도 해서 걸작. 마냥 쳐다보고만 있는 나와 이태원, 황학동 관광을 위해 특별히 온 한 친구에게 그들은 곧 어서 먹어 보라고 강요(?)했다. 한 점 집어드는 순간 에클로우의 카메라 셔터가 찰칵하고. 친구와 나는 서로를 응시하다 "우리 몇 달 후 [쇼킹 아시아3] 에 얼굴 나오는 거 아니냐?"하고 공포에 떨기도. 마지막 날 밤이니 다 잊으라며 맬크머스는 한국인 일행들에게 계속해서 원샷을 요구했다. "이렇게 사람이 없는 건 보신탕이 국제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된 때문일까?"하며 의문하는 맬크머스. "아마도"라고 말했지만 틀렸다. 오후 5시라 저녁 시간치곤 일렀기 때문. 6시를 넘어서자마자 넓은 식당 안은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들어찼다. 더불어 벽안의 네 손님들이 계속해서 희한한 구경거리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기분이 좋아진 티모니가 "소주 정말 좋아"라며 따뜻한 온돌방에 벌렁 드러눕자 멀찍이 서 있던 아줌마 종업원 군단의 분위기는 험악해지기도. 하이트 로고가 박힌 유리컵을 가지고 싶다며 두 개씩 무료로 선물 받은 일행들은 곧장 '라이브'한 노래방으로 갔다.

넓은 룸형 노래방에 미디 사운드와 와이키키 브라더스 백밴드가 함께 하는 그런 곳. 낱말 맞추기 놀이를 열심히 하던 그들은 노래방 기계와 밴드(라곤 하지만 기타리스트 한 명)가 세팅되자마자 음주가무 돌입 준비. 스웨터를 훌러덩 벗어 던진 채 핑크와 갈색 셔츠 바람으로 나선 맬크머스의 첫 곡은 척 베리(Chuck Berry)의 "Johnny B. Goode". 한 다리 개 다리 떨기 율동과 함께 말 울음소리 애드립까지 일사천리, 전천후 DIY 공연(?)이 이어졌다. 티모니의 선곡은 신디 로퍼(Cyndi Lauper)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 뿐이랴. "Hotel California"부터 "Surfin' USA"까지 섭렵한 후 노래방을 나왔을 때는 열 시를 넘어섰다.

그 다음 일정은 홍대앞 '벨 앤 세바스찬' 카페. 그들을 보고 싶어하는 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맬크머스와 티모니는 각각 하회탈과 징과 같은 특산품을 선물 받았다. 보다 '리얼'한 코리아를 맛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 둘은 받은 선물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회탈은 우스우면서 어딘가 섬뜩하다고.

DJ 롬바르디 (레이브 바 타령을 하는 롬바르디에게 에클로우가 즉석에서 붙인 별명)의 재촉으로 홍대 부근의 한 레이브 바를 찾았다. 바 안은 한산. 네온 요요나 팔찌를 휘두르며 춤을 추는 레이버들 너머로 후드 재킷을 머리에 뒤집어 쓴 채 스피커 앞에서 노숙자처럼 건들거리던 맬크머스는 일정 내내 내가 목격한 것 중 최고의 진풍경이었다.


1월 9일 목요일

5일간의 빡빡하고 정신없는 일정을 끝으로 그들이 한국을 떠나는 날. 짐을 한가득 이고 나온 일행은 서로가 산 쇼핑 품목을 내보이고 있었다. 플라스틱 팩 소주를 두 병씩 선물. 자기가 산 바이닐들이 괜찮은지 봐 달라며 맬크머스는 가방을 풀었는데 거기엔 산울림, 양희은, 가야금 연주곡, 신중현 등의 바이닐들이 빼곡이 담겨 있었다. 한국의 밥 딜런(한대수)의 바이닐 값은 상상을 초월해서 포기했다고 한다. 복각 씨디가 있다고 했으나 역시 바이닐 콜렉터들에겐 무용지물인 듯. 양희은은 한국의 조운 바에즈란 소개에 샀단다. 티모니는 한국 전통 인형, 호랑이 민화, 모자 등등 최다 쇼퍼였음을 보여주고.

안개가 자욱하게 낀 영종도를 지나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맬크머스 티모니 둘다 다음 번 앨범 발매를 기념으로 한 번 더 찾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알 수가 없는 것을. 비행 일정은 온 것과 마찬가지로 맬크머스 따로, 롬바르디와 에클로우와 티모니는 함께. 오사카를 경유해 포틀랜드로 돌아간다며 가라데 포즈를 취해 보인 맬크머스는 힘차게 출국. 바이~

나머지 셋은 공항 뷔페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이 뭐냐는 물음에 통일되게 나온 답은 "Dog & Show" 노래 제목 같다고 하자 영감을 얻을 것 같다며 티모니가 미소.






작별의 순간은 맬크머스와의 그것만큼 짧고 명쾌했다. 재공연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다시 만나게 되면 뮤지션에게나 청중에게나 양자 모두에게 각별할 듯. 좋은 만남, 좋은 공연, 좋은 시간이었다. 200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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