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잔잔한 멜로영화를 처음 보았을땐, 좀 지루하게 여겼었다. 청춘의 한 시절, 삶과 죽음에 대한 상념보다는 마냥 젊음의 열기에 들떠있던 시간이 많았다. 무한할듯한 열기가 식기 시작했을때, 이 영화를 다시 보았고, 너무나 숙연해졌다. 삶에 대한 비관도 낙관도 아닌, 살아간다는 건 저런것이구나. 를 담담하게 전해 줬다. 사랑이 꼭 어떤 관문을 통과하고 인증을 받아야 하는게 아니라 막 시작하려는 설레이는 사랑의 마음 자체를 너무나 잘 그려내었다. 하지만 엇갈림에서 오는 안타까움과 생의 진리는 나날이 아니 순간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위엣글은, 언젠가 이 영화에 대해 쓰다 만 글의 앞 부분이다. 
 
 어제 이 영화가 15년만에 다시 극장에서 개봉했다. 개봉날 저녁에 목동 메가박스에서 봤다. 보통 CGV에 많이 가다가. 메가박스는 극장 로비 부터 많이 생소했다. 로비의 조명이 너무 밝고, 티켓 부쓰는 은행의 창구 처럼 바뀌었다. 너무 어두컴컴한 CGV 극장의 인테리어에 익숙해져서 더 낯설게 느껴진듯.. 조금은 어리둥절. 극장 처음 온 사람도 아닌데 적당히 설레임 상태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이자, 매년 한번씩은 학생들과 보아오던 영화를 처음으로 정식 극장에서 보게 된 것이다. 
 
 동행인과 나는 과도한 극장 광고의 해악에 대해 동감한 바였지만, 메가박스의 광고는 처음 보는게 많았고 되게 재밌었다. 성형외과.치과. 광고들은 거의 개그 콘서트를 보는 듯했다. 저런 광고라면 봐줄만은 하군 하던 찰나, 센스 없게. 8월의 크리스마스 광고가 나왔다. 몇 분 후면 이 영화를 볼건데..참나..

 역시나 극장에선 빛의 질감, 암부의 디테일, 일상의 섬세한 소리들이 더욱 잘 느껴져, 그동안 비디오나 동영상 파일로 감상하던 송구스러움을 감격의 찬탄으로 뒤바꿔 놓았다. 

 최고의 작품은 자신의 나이듦,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느 시절에 다시 보아도 끊임없이 새로운 말을 건네는 작품이다. 22살의 내가 본 감흥과. 30의 내가 느낀 감정. 그리고 지금 이 영화를 보는 나는 매번 다르고, 이 영화는 항시 똑같지만, 저마다의 감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작품들의 특성은 표현이 단선적이거나 너무 친절하지 않음에서 온다. 직접 말하고 드러내는게 아닌, 상상하고 유추하게 만들어 은은한 울림을 자아내게 한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성에 생의 기쁨이 담겨있고, 유한한 삶에 깃든 슬픔이 사랑을 재촉한다. 또다른 사랑을..

 장면마다 사진적 일상성의 특별함이 배어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하나의 시로 만드는 것. 사각 프레임과 빛의 비춤은 사건이나 이야기를 쫏아가는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모습들, 행동들이 사진적 프레임 안에 들어오고 나간다. 빛과 어둠 그리고 학교 운동장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얼마 안 남은 정원의 심리를 아스라히 전해준다. 결국, 다림과 정원이 처음 만난 무더위의 8월이 그들에겐 크리스마스 였다. 8월과 겨울 사이, 정원은 어쩔수없는 죽음이 예고됐고, 다림은 삶의 최고의 기쁨일, 사랑의 완성을 기대했지만, 어긋남은 사진이라는 좋았던 순간의 추억만을 남기며 전달되지 못한 말 보다 더 강한 여운을 남긴다. 사랑의 설레임만이 오롯히 사진으로 봉인된 채. 

 자꾸 보다 보니까 모든 장면이 인상적인데, 몇몇가지만을 말해보자면 정원이 여동생과 마루에 앉아 수박 먹으며 동생이 "아직도 지원이 좋아해?" 하니까 말 대신. 수박씨 뱉기로 응답하는 장면. 말보다 하나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헛헛한 표현이 너무나 좋다. 또 해가 늬웃한 오후에 정원이 마루에서 발톱을 깍는데 골목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소한 소리들.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그 둘이 운동장에서 달리기 할 때다. 나는 이 장면에서 심은하란 배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그 벅찬 기분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이 각자 사우나를 끝내고 나와서 정원이 다림에게 귤 하나를 건네는 장면이다. 이 얼마나 풋풋하고 사랑스러운지. 이 시퀀스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게 다 있다. 운동장 달리기. 동네 사우나.. 귤 건네기.ㅋㅋ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는 매우 소심해졌다. 감동의 말들은 옹알거렸고 왠지 계속 슬프다. 이제 겨울이래서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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