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김수영




  김수영은 평생 자신의 내면에 ‘시에 반역하는 마음’이 생길까봐 노심초사했다. ‘시에 반역하는 마음’은 사태의 인력에 끌리거나 자신의 기질에 안주했을 때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사태와 자신이 고정된 의미망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거리 두기에 실패할 때, 시는 쓰일 수 없다. 시를 탄생시킬 수 있는 마음은 고정된 의미망으로 부터 벗어난 구름처럼 자유로운 마음이다. 54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행복과 상대방이 원하는 행복이 다를 수가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한다. 상대방이 어느 경우에 행복한지를 읽어 낼 수 있는 감수성이 생기기를 바란다면 말이다. “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_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그렇다. 자신의 욕심을 비우고 타자와의 거리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도 시인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고 사태를 낯설게 성찰할 때에만 가능하니 말이다. 시나 사랑이 가능하려면, 타자나 자신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시인이 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자신이 마주친 사건이나 사물과 자신을 새롭게 연결하려는 욕망, 즉 사랑이 없다면 시를 쓰는 동력과 시를 쓰려는 의지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이 욕심을 없앨 때 내 시에도 진경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칸트는 자유란 “새롭게 행동을 개시할 수 있는 능력” 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68


 나만의 삶, 나만의 감성, 나만의 욕망을 되찾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침잠하면 안 된다. 오히려 외부로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외부는 어떤 식으로든지 마음을 격동시킬 테니까 말이다. 자신의 사유로 예측하지 못한 미묘한 감정이 출현할 때, 우리는 드디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다.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 153


 마음의 비밀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기도록 도와주는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무엇인가 바라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때, 그렇다고 해서 바라는 것을 포기 할 수도 없을 때 우리는 바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바로 이 순간이 제대로 된 글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모든 글다운 글에는 절망 속에 다시 강해지려는 희망과도 같은 것, 혹은 되찾은 희망속에서도 현재의 절망이 더 몸서리쳐지도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시인의 모든 시는 자신의 삶에 직면하려는 비애의 과정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여러모로 김수영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내놓은 시들은 삶의 단독성에 이르려는 치열한 노력의 흔적이나 서러운 눈물 자국이라고 할 수 있다. 163


 모든 예술가가 예술가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시를 쓰려면 독특한 생활의 방식(즉 인식의 방법)이 선행되어야”하니 말이다. 

 온몸으로 자기만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기만의 인식에 이른 사람만이 독특한 시를 쓸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이가 독특한 시를 쓰려고 한다면, 이는 단지 거짓 제스처에 불과하다. 189


 예술은 자기 이해에 도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고, 동시에 자기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삶과 시가 일치가 되어야만 한다는,  그렇다. 시는 자기 삶의 투철한 이해여야만 하고, 반대로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전망이기도 해야 한다. 192


 김수영에 따르면 진정한 시인은 “ 남의 흉내를 내지 않고 남이 흉내를 낼 수 없는 시를 쓰려는 눈과 열정을 가진 사람 “ 이어야만 한다. 192


 삶과 예술에 대한 김수영의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쉽다. 즉,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는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자기 이해에 기반을 두는 인간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정직하게 살아 내지 못한다. 물론 그것이 일순간의 안일을 선택한 비겁함 때문에 생긴 비극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투철한 사상이나 철학의 결여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삶이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통찰의 결여 말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 혹은 다른 누구의 삶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제스처, 김수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포즈”를 취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포즈’를 싫어한 시인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자신에게만 어울리는 ‘포즈’나 제스처를 만들지 못하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200


 인문(인문) 이란 말은 매우 잘 만든 말이다. 사람을 뜻하는 인과 문양이나 표현을 의미하는 문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으니 말이다. 인문학은 사람과 그의 표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사람이 눈길을 걸으면 그의 발자국이 찍히는 법이다. 발자국이 찍히지 않았다면, 그곳에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눈길에서 사람과 발자국은 항상 서로가 서로를 가리키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김수영은 “시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모두가 카다란 의미의 포즈” 라고 말했다.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 내면,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포즈’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불행히도 그에 어울리는 ‘포즈’가 만들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가 실은 타인의 ‘포즈’로 살았기 때문에 벌어진 안타까운 현상이다. 마치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발자국만 따라서 눈길을 걷다가 자신의 발자국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201


 1945년 우리 민족은 독립당하게 되었다. 216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과거의 노예가 되는 것은 정신분석학만의 가르침이 아니라 인문학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교육과 습관의 힘은 아무리 창조적인 사람이라도 완전히 떨치기 힘든 고질적인 질병과 같기 때문이다. 223


 “심금의 교류” 는 타인도 나만큼 자유롭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타인의 삶을 강제할 수 없다는 자각에 이를 때에만, 우리는 그를 감동시킬 수 있는 표현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법이다.  234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고 그것을 표현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서로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의 행동이나 표현에는 “ 전달과 노예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심금을 교류할 수 있는 언어” 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단독성=새로움=상상력’이란 기묘한 삼위일체가 성립한다. 단독적인 것만이 새롭게 느껴지고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만이 단독적이고 새로운 삶을 살아 낼 수 있다. 하긴 상상력이란 기존의 사유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사람에게는 찾을 수 없는 능력이다. 김수영이 “ 시적 인식이란 새로운 진실의 발견 “ 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37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성원들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을 본다면, 이는 자신만의 삶에 이르지 않았다는 증거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나니까 볼 수 있는 것,  이것을 봐야만 한다. 정치가의 시선도 아버지의 시선도 목사의 시선도 자본가의 시선도 혹은 과거 위대한 작가의 시선도 아니다. 오직 나만의 시선으로 사물의 진실을 볼 때, 그것은 과거에 맹목적으로 따르던 시선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시선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적 인식”이다. 시적 인식으로 발견된 “새로운 진실”은 내게도 새롭지만, 다른 공동체 성원들에게도 새로울 수밖에 없다. 아니 다른 공동체 성원들은 내가 발견한 진실을 위험하고 불온한 진실이라고 두려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모든 공동체가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새로운 진실”은 공동체가 애써 지키려는 공통된 중심을 붕괴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까. 238


 자신의 삶을 자기 스타일대로 정직하게 살아 낸다면, 우리는 타인의 삶에 공명하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 아닌가. 269


‘ 자유의 방종은 그 척도의 기준이 사랑에 있다는 것만을 말해 두고 싶습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자유는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호홉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도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환경에서는 여간 조심해서 보지 않으면 분간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사랑이 순결하면 순결할수록 더 그렇습니다. 기도가 눈에 보이지 않듯이 사랑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의 방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백이면 백이 거의 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_ <요즈음 느끼는 일> 1963.2   270


‘ 4월 26일’ 후의 나의 정신의 변이 혹은 발전이 있다면, 그것은 강인한 고독의 감득과 인식이다. 이 고독이 이제부터의 나의 창조의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뚜렷하게 느낀다. 혁명도 이 위대한 고독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혁명이란 위대한 창조적 추진력의 부본이니까. 요즈음의 나의 심경은 외향적 명랑성과 내향적 침잠 혹은 섬세성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졸시 <푸른 하늘을>이 약간의 비관미를 띠고 있는 것은 역시 격려의 의미에서 오는 것이리라. <일기초2> 1960.6.16   274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 그것을....

<시여, 침을 뱉어라> 1968.4


 한자를 분석하면 자유(자유)는 “자신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312

 현실에 대한 고민이 커질수록 현실을 극복하려는 행동을 시작해야만 한다. 330

 진정한 시, 진정한 소설, 진정한 철학, 진정한 예술은 항상 ‘불온한’ 것, 무엇인가 ‘야생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62

 

 여기서 우리는 ‘관념에서의 자유’와 ‘삶에서의 자유’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솝 우화>에는 신 포도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느 여우가 길을 가다가 맛있어 보이는 포도를 발견한다. 그런데 포도는 너무나 높은 곳에 열려 있다. 여우는 몇 번이나 뛰어서 포도를 잡으려고 했지만 도무지 딸 수 없었다. 그러자 여우는 속으로 말한다. “저 포도는 신 포도야.”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여우는 포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관념에서의 자유’다. 

 이런 관념에서의 자유는 포도를 따 먹으려는 의지를 좌절시키고, 끝내는 실천에의 전망도 봉쇄해 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도피자”나 “기만적 유심주의자”의 전략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만적 책략은 진정한 인문주의자를 만나는 순간 여지없이 좌절된다. 진정한 인문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물어볼 테니까 말이다. “여우야. 너는 먹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포도가 시다는 걸 알았니?” 관념에서의 자유가 허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여우는 어떻게 할까? 아마 여우는 지금 자신의 방식으로는 포도를 딸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포도를 따려고 할 것이다. 마침내 여우는 실천적 전망을 확보하면서 ‘삶에서의 자유’로 한 걸음 내딛게 될 것이다. 366


 모든 실험적인 문학은 필연적으로는 완전한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진보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1968.2  374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려는 이유는 항상 압도적인 권력의 억압으로부터 유래하는 자기 검열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374


 우리들의 언어가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는 것을 중단했을 때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는 것이다. 사회인의 목적은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통해서 적시에 심금의 교류를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에 지장이 되는 모든 사회는 야만의 사회라는 것이다. <히프레스 문학론> 1964  376


인간의 정당한 목적 , 바로 자유다. 그리고 새로움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그는 과거에 살던 누구와도 닮지 않고 앞으로 태어날 누구와도 닮지 않을 바로 그 자신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움과 자유의 존재론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삶에 걸맞게 새로운 삶의 스타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위기에 빠질 때 작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경고는 자유가 부정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것일 수도, 아니면 스스로 온몸으로 자유를 구가하며 자신만의 작품을 만듦으로써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간접적인 것일 수도 있다. 진정한 작가의 작품들이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벽과의 충돌을 기술하거나, 동시대 사람들의 통념을 조롱하는 전혀 새로운 삶의 전망을 보여 주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카프카가 그랬고, 바이런이 그랬고, 그리고 우리 시인 김수영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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