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무척 훌륭하고 유익하게 읽었다. 고미숙씨가 대장으로 있는 공부 커뮤니티에서 나온 결과물이래서인지 주장하는 바도 비슷하고 전체적인 문체도 흡사한 일관성이 있다. 그 영향아래 있지만 언어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지식과 생각해 보게 함은 언어적 존재인 우리의 근본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영감을 이끌어내는 면이 좋았다. 

읽은지 몇달이 지나서 자세한 감흥이 흐릿하지만 나중에 꼭 다시 읽어 볼 책이다. 몇달 묵혀두었다 반납이 코앞이라 마킹해 두었던 부분을 다시 읽어 본다. 



 파동 상태의 물질이 우리가 관찰하는 순간 입자의 형태로 포착되듯이, 언어는 유동적인 사건의 세계를 하나로 고정하고, 뒤섞인 채 존재하는 사물들을 독립적 실체로 분절한다. 원래부터 나는 '나'로, 너는 '너'로 존재했던 게 아니라 '나'와 '너'라는 명명을 통해 나와 너가 분리되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다. 강조하건대, 언어는 사물과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중립적 도구가 아니다. 인간은 명명을 통해 세계를 격자화하고, 사물들을 특정한 좌표계에 고정시킨다. 

 언어는 힘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행위와 사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기도 하다. 고등학생, 남자, 여자,장남,모범생 등의 '꼬리표'를 떼고, 그 말들의 용법을 무한히 확대시키면서 새로운 언어게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새로운 것을 행하는 것이고, 새로운 신체를 갖게 되는 것이며, 새로운 세계-새로운 삶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43-44


 언어를 새롭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수많은 '나들'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단 하나의 '나'를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여기저기를 넘나들면서 때론 사슴이 되고, 때론 나뭇잎이 되고, 때론 바람이 되기. 그렇게 무수히 많은 존재들과 교감하면서 '변신의 왕'이 되기.  58


102-103,  122 


 물론 기존의 것을 단지 부정한다고 해서 '위험한 책'이 되는 건 아니다. 정말 위험한 건 사람들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변하게 하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게 만드는 책들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위험함'은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 못지않게 새로운 가치의 창조에서 감지되는 힘이다. 


 나는 오로지 꽉 물거나 쿡쿡 찌르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하러 책을 읽겠는가?........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카프카.262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부정하는 용기다. 무엇을? 예전의 나를, 변하지 않는 나를, 반복되는 명령을, 날 가두는 감옥을, 획일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꿈을. 어떤 작가가 예전의 명성에 갇혀 변화하려 들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예술가들이 당대의 예술적 관습을 충실히 따르기만 했다면 새로운 예술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옛사랑의 추억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부정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부정 없는 긍정은 대단히 무력하다. 카프카 소설의 힘은 '되기'를 통한 부정의 힘이다. 348


 달리는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돼


"어휴-" 하고 쥐가 말했다. 

" 세상은 매일같이 좁아지고 있어. 처음에는 너무나 넓어서 두려웠지. 한없이 달리며, 좌우로 멀리까지 담장이 펼쳐져 행복해했었지. 그러나 그 긴 담장들이 어찌나 빠른 속도로 마주 달려오는지, 어느덧 나는 막다른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구석에는 내가 달려들 덫이 놓여 있어."

" 너는 달리는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돼." 하고 말하며 고양이는 쥐를 잡아 먹었다. 


카프카의 [작은 우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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