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추석에 대한 느낌은 서늘하던가 쌀쌀했더라면, 지금은 한낮의 더위가 가을이라 말하기엔 뭣하다. 아열대 기후로 변해가고 있다는게 실감된다. 예나 지금이나 명절에 대해 별 감흥이 없다. 일년에 두번 보게되는 친인척들과 하나마나한 담소는 5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도 없고, 대신 무럭무럭 자라나는 초,중등생 조카뻘 친척 아이들의 반년새 변해버린 키를 보고 있자니, 무력한 나의 청춘의 소멸이 눈앞에서 참수당하는 심정이 된다. 더디고 더딘 청춘의 유예. 


 극도로 개인화 되고 자본화. 서구화 된 일상의 삶에 일년에 두번 명절은 그나마 잊고 있던 전통 관습에의 접속 같다. 예전의 가족의 개념과. 지금의 가족의 의미는 큰강과 실개천의 차이만큼 굉장히 지엽적이고 협소화 되었다. 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의 해체라는 담론은 가족의 해체, 파편화된 일상을 예고했다. 어쩌면 이런 명절 풍습도, 이미 구색맞추기에 불과하지 않을까. 나름의 절충. 급격한 변화의 아이러니. 


 예전엔 아무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절하고, 제삿밥 먹고, 산소에 가고 했는데, 요즘에 들어 느껴지는 단상은 이 모든 것이. '귀엽다'. 조상의 영혼에게 진수성찬을 드시라고 상을 차리고, 영혼을 기리며 절을 하고, 산소에 가서 술한잔, 안주 한점 올리고,, 그 의미. 그 행동을 되새길수록. 졸라 귀엽다..

어쩜 이리 귀여운 일들을 예전엔 그토록 기계적으로 행했나. 조상님들에게 부끄러워진다. 순수한 영혼들에게 미안해진다. 이제서라도 뭔가에 접속한 느낌이 드니 마음이 편안해 진다. 


 갖가지 색깔의 코스모스 꽃에 정신줄 놨다. 노란색. 흰색. 자주색. 분홍색. 파란색. 곱디 고운 색 들의 향연에 마샤 튜더 할머니의 심정이 새겨졌다. 아리따운 꽃에게 메시지가 왔는데, 꽃밭에 자유롭게 노니고  있는 나비와 벌 이 내심 부러웠다. 작은새는 벌처럼 유영하며 한동안 꽃에 날갯짓으로 시원한 바람을 보냈다. 꽃은 고마워 진한 향기를 내뿜었고 앉을수 없는 작은새는 그 기억을 간직하며 대양의 바람을 맞서 어디론가 떠났다. 


 작렬하는 햇빛 아래, 고개숙인 볏삭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연하지만. 도정된 쌀은 식물의 열매였다. 가녀린 줄기에 가지런히 줄줄이 영글어 있는 단단한 작은 열매. 토양은 매년 반복되는 수확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생명의 정수는 곡기에 달려있다. 쌀과 밀. 밥과 빵. 엄청난 생명의 신비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려는 논밭이 사랑스러워보였다. 태양에 달구어진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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