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자주 가는 목욕탕이 하나 생겼다. 이 목욕탕에 발길이 가는 이유는 다른곳 보다도 뿌연 수증기 안개가 많기 때문이다. 탕에 들어서면 온탕과 열탕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로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은 안개에 쉽싸이게 된다. 습하고 따스한 증기 안개에 체감적으로 포근한 안정감을 얻는다. 뜨거운 온탕에 앉아있다 보면 근원적인 회기 성향이 심리적 안정을 찾아주기 때문에 목욕탕을 오게 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뱃속 따스한 양수의 포근함을 그리워 하는거 아닌가 하는.. 여하튼 반신욕을 하며 안개에 싸인 공간을 둘러보다 보면 이 뿌연함이 나를 보듬어 주는 것을 느낀다. 안개속에서 나는 '유레카'를 외치기 위해 반어적으로 생각을 비우고 다시 정렬한다. 


 안개속에서 반신욕을 하며 책을 읽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목욕탕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몇 번 그 남자를 보았다. 책을 읽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는 남자였다. 내가 냉탕과 온탕, 사우나를 들락거릴 동안, 남자는 지긋히 앉아서 책에 빠져들었다. 뽀얀 안개 속에서 들어앉은 그의 뒷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풍경이 떠올랐다. 내 눈에 그 이미지가 각인되었다. 사진을 찍을 순 없고, 그저 그 풍경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흔 중반은 되어보이는 그는 책을 읽는 동안 미동도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살아있는 그림이 되었다. 


 언젠가 뉴욕의 겨울밤, 뉴욕대 건물이 밀집한 워싱턴 스퀘어 공원 쪽의 브로드웨이 상에 위치한 조그만 서점을 구경했던 일이 있다. 반스앤노블 같은 쾌적함은 없지만, 작지만 꽤 깔끔했다. 여든살은 너끈할 정도의 백발의 백인 노인이 쭈글쭈글한 손으로 문장들을 짚어가며 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대단한 인상을 받았다. 어떤 위시감 이랄까. 온화하게 집중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면서 평온해졌다. 그가 입은 낡은 회색 스웨터는 평생 소박한 삶을 추구했던 자의 증명과도 같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왠지 유명한 석학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 언젠가는 뉴멕시코주 산타페에서 어느날 아침 자동차로 방랑하며 보았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맑고 건조한 공기속에서 아침 태양이 빛을 비추었고, 영화속에 나올법한 집들과 한적한 거리의 풍경들. 이른 아침에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중년 여자의 모습이었다. 차에서 스쳐지나가는 풍경이었지만 그 순간이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 날 아침 방랑의 여행에서 고독을 메만져주던 풍경이었다. 

 책을 읽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설레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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