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어른들의 치유와 성장 이야기란 점에서, 영화 '머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 영화가 생각났다. 개봉때 극장에서 보았고, 영화가 너무 좋아서 원작 소설까지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도 훌륭했다. 영화는 나름 각색을 잘했다고 본다. 당연히 명배우들의 소소한 표정 연기를 보는 재미가 더 강렬했다. 음악의 사용은 또 얼마나 감각적인지 레드 제플린과.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노래가 나오는 부분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당시 같이 봤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 남는데, 상영 내내 너무나 지루해 했다. 이렇게 너무나 상반된 영화 관람도 처음이었다. 끝나고 듣자하니 자기는 드라마 영화는 잘 못 본다고 했다. 환타지 액션 블록버스터 취향의 사람한테 로맨스 코미디물을 가장한 조금은 작가주의적? 영화를 골랐으니 사전 파악도 안하고 대뜸 이 영화를 고른 내가 나쁜놈 이었다. 


  더 나쁜일은 그 사람의 몸매를 인지했던 순간인데 아직은 이도 저도 아닌 마음 상태에서 키만 큰 사람이라고 여겼다가 두꺼운 외투를 벗고 원피스 차림으로 직접 커피를 가지러 가는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본의아니게) 세상에나. 그렇게 아름다운 몸매는 본 적이 없다. 연예인이나. 몸매 좋다는 패션 모델들 조차도. 심지어 av배우도 그런 비율과 아찔한 골반가..각... 칵 소리나게 충격받았고 이내 혼란스러웠다. 내 눈엔 그리 이쁜 얼굴은 아니어서 반신반의의 마음이 돌연 그리스 석고상을 대하듯 새하얗케 됐다. 너무나 시각 중심적인 반향에 짐짓 속물같은 자신을 질타했지만, 그러나 이게 남성의 자연적 본능인걸 뭐 나더러 어쩌라구. 얼굴과 몸의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겪으면서 초반 이성과의 관계에서 시각적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몸이 스스로 말을 한다는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란 표어는 이때 쓰는 건가. 그러나 어쨌던간 여러모로 통하는게 없었다. 여기까지 말하고 싶지만, 짐작하듯이 설레발 치다가 망쳐버렸다. 뒤늦게 안 사실인데 이날 다시 그 사람을 만난거는 어른들의 공작이었다.


  나중에 다른 경험과 맞물려 이런 생각의 정리를 하게 되었는데, 외양에 빠진다는건 상품에 눈이 돌아가듯 소유욕의 발현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들의 만족일 뿐이다. 아직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믿고 보는 것에 사랑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지금은 아니다. 아직도 모르는건 마찬가지지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바라보는 아름다움에는 진정한 소통은 없었다. 얼핏 이미지를 떠나 진정한 소통의 즐거움을 알것도 같으나 그마저도 좌초 된건가. 인정하기 싫지만.. 예전엔 눈은 높고 마음의 장벽도 높았는데, 지금은 눈도 낮고 마음의 높이도 낮아진게 문제다. 마음이 문제다..


  쓸데없는 잡담이 길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명배우들의 출중한 연기와 가족애, 마지막 댄스 경연 대회의 대미를 장식하며 마무리 짓는걸 보면 언듯 또다른 명작 '리틀 미스 선샤인' 이 생각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남녀 주인공의 이상한 로맨스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서로의 상처를 통해 부딪히고 치유하면서 성장과 사랑을 이룬다. 라는,, 현 상태는 시궁창이지만 긍정적인 태도로 살아가다 보면 구름뒤 밝게 빛나는 태양이 희망을 예고하듯 언젠가 구름의 가장자리에서 한줄기 빛을 받아 더 높이 삶을 살아보려는 자들에게 보내는 용기다. 


  주인공 팻 (브래들리 쿠퍼) 이 왜 정신병원에 7~8개월 있었고, 현재도 불안정한 상태를 설명해주는 그 열불나는 씬은 영화에선 초반에 보여주지만. 소설에선 나중에야 (내 기억으론 결말에) 말한다. 각각의 장르에 맞게 이 사건 발설의 전개 방식은 알맞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초반에 팻의 시점샷으로 자신의 집 샤워실에 부인이 다른 남자와 나체로 얽켜있다면 그것도 직장 동료인, 어느 누가 꼭지가 돌지 않겠는가. 폭력을 행사하다 못해 살인 까지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이 눈 앞에서 펼쳐졌고, 그는 폭행의 결과로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아내를 잃고, 직장을 잃었지만, 자신이 부인을 사랑하고 앞으로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는 붕괴된 멘탈을 위태롭게 다스린다. 일면 아내의 외도 행각을 발견하고 파탄이 났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를 잊지 못하는 팻의 무모함은 언듯 이해되지 않으나, 그는 단순히 그날의 사건 이전에, 자기의 조울증으로 결혼생활의 위기를 가져왔고 그 결과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자괴감에 벌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더더욱 과거의 행복했던 한 때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정신적 충격으로 퇴행단계와 분노장애와 조울증 까지, 치료가 다 끝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보호로 집에 돌아온 그는 다시 전부인과 합칠 수 있다는 희망적 착각에 빠져있다. 그런 상태로 가족과. 지인들과의 첨예한 관계는 무릇, 되게 심각한 상태로 치닫지만 이 영화의 기본적 톤은 어둡지 않다. 슬픔을 위트로 승화시키는 힘. 연출자의 능력도 좋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최상이다. 좋아하는 배우 브래들리 쿠퍼의 최고의 연기가 아닐까 싶다. 아픈 아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사랑과 배려의 눈길을 끝까지 보내는 엄마를 보면 이 영화가 특정한 서양의 가정 문화를 넘어 보편적인 가족애를 담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아버지 로버트 드 니로의 캐릭터와 연기도 무척 인상 깊은데, 아버지와 아들은 핏줄이 그러하듯 별개가 아니다. 아버지의 광적인 미식축구에 열정은 미신과 스포츠 도박에 빠지게 하고, 각종 강박증. 편집증. 경기장 폭행사건으로 영구 입장 금지등. 하는 행동을 보면 그 애비에 그 아들이다. 


  새벽에 감정이 붕괴된 팻이 결혼식 비디오를 찾으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때, 흐르는 레드 제플린의 음악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날카로운 샤우팅 창법의 노래가 흐르며 본의 아니게 팻은 엄마를 치게 되고. 아빠를 때리고 자기도 맞는 장면은, 그 상황과 영화속 캐릭터들에 심하게 감정 이입이 되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 로버트 드 니로가 옆집의 정신병 인터뷰 하자는 학생 집에 가서 독설을 내뿜는 장면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성기 때 성격파 배우의 카리스마를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늙었고 이제 노인 역할을 주로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왕년의 아우라가 내비쳤다. 연기에 있어 로버트 드 니로만의 자기 영역이 있는 거 같다. 어떤 영화속 캐릭터든.. 

  다음날 아버지가 형에 비해서 너한테 사랑을 많이 못줬다며 어렵게 말을 꺼내고 눈물을 훔칠때, 의외로 감동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다 그러하듯? 깊이 들어가면 지금의 성격이나 어떤 문제는 본인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것이다. 어머니의 헌신적 노력외에 아버지의 표현 못했지만 속마음을 내보이는 점이 뭉클 했다. 

  쓰레기 비닐을 땀복 조끼처럼 둘러 입고 그는 열심히 동네를 조깅한다. 단 하나의 목표인 전부인을 다시 만나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그러다 여주인공 티파니가 끈질기게 따라오고, 이상한 데이트를 하게 되고. 서로간의 거래가 오가면서, 이야기는 흐르는데, 영화를 보다보면. 이 영화의 제목에 대본 또는 각본의 의미인 플레이북 이 들어가는 이유를 어림 짐작할 수 있을 거 같다. 친구는 이 영화를 보고 무슨 환타지성 연출같다고 생각보다 별로 라고 했는데, 팻의 정신병동 친구 (크리스 터커) 가 개연적이지 않게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도 그렇고, 티파니가 팻의 조깅 시간을 알고 끈질기게 쫒아가는 것도 영화만 보면 개연성이 없다. 소설에선 팻의 엄마가 시켜서 한 거로 나오는데, 어쨌거나 제목의 플레이북의 의미가 곳곳에 포진해 있다. 팻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주변인들의 짜여진 각본처럼. 팻의 성장을 돕고, 서로가 치유함으로써 깨진 조각은 퍼즐처럼 맞추어 간다. 찰리 채플린의 명언인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과거의 상처에 붙잡혀 이상한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한 팻과 티파니. 이 둘의 만남은 흥미진진하다. 통후추의 화끈함과 깨알같은 재미가 공존한다. 티파니 역의 제니퍼 로렌스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연기를 잘 했지만, 큰 상을 너무 일찍 받은게 아닌가 싶다. 

  둘은 열심히 춤을 연습한다. 팻에겐 어떠한 책 보다도 춤을 추며 땀을 흘리고 상대와 교감하는 것이  

중요했다. 춤 경연의 중간에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경쾌한 록 음악이 나올때 막춤 추듯한 그들의 모습은 가슴을 뜨겁게 했다. 마무리 동작에서 이상야릇하게 된 것도 웃기고.. 감정의 극단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렇게 춤과 편지로 서로를 이해했다. 마지막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결정적으로 조언하는 것도 인상깊었다. 누군가 손을 내밀려 할때, 마음을 알아채는게 중요하다고 ~ 지금 여기 이순간에 찾아오는 인생의 큰 변화에 마주서야 된다고.. 서로의 광기가 어떻게 조화로워지는지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사랑스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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