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의 글.


 3월의 첫 월요일은 생글생글한 시작의 설레임이 물씬 풍겨난다. 차가운 바람은 봄을 예고하는 따가운 햇살에 얼마간의 온기를 지니고 있다. 개학,개강의 날. 새로운 이들을 만난다는 설레임과 두려움. 우연과 인연의 장이 펼쳐지는 날이다. 이렇게 역동하는 변화의 장은 케케묵은 선생들의 또다른 골칫거리를 한아름 떠안게 된 시무룩한 표정 조차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인해 기대와 희망으로 채우게 될 것이다. 오히려 직업으로써만의 선생은 그런 아이들의 눈빛에 감화 받아야 한다. 


 오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두 조카녀석들의 해맑은 웃음이 떠오른다. 그리곤, 내가 입학했던 날이 뇌리에 스친다. 첫 선생은 케케묵은 할머니 선생 이었다. 내 기억으론 물질적 욕심에 찌든 얼굴이었다. 그런 연유인지 나는 그리 해맑은 아이는 아니였던 것 같다. 

 얼마 전, 연락을 간혹 나누던 제자와 잠시 만났다. 몇 년 전, 첫 강의의 긴장을 마치 성모 마리아의 미소를 수업 내내 지어보이던 그 학생의 눈길을 보며 용기를 얻었고, 위안 받았다. 작년 한 해가 넘어가는 사이, 이성친구가 생겨 무척 행복한 대학생 커플 사진을 봤었는데, 이 날 듣자하니 고새 깨졌다고 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바람이겠거니 여겼는데, 되게 아픈 모양이다. 쓰린 가슴으로 한숨짓는 모습에 내가 해 준 말은 고작 '원래 다 그런거야' 투의 꼰대의 뻔한 말 밖에는 없었다. 


 김형경씨의 신간 '남자를 위하여'를 보면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양이, 남자는 1 여자는 9 라고 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아홉배쯤 더 좋아하는 이유를 타당한 유추로 설명하는데, 남자는 사회적 성공을 향해 열정의 9를 쏟고 나머지 1정도를 여자에게 준다면 여자는 그 모든 노력을 오직 남자에게 쏟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자가 느끼는 정서적, 감정적 친밀감이 남자의 아홉배가 아닐까 싶기 때문에 실연을 당했을때, 감정의 여파가 더 크고 오래가는 것 같다. 내가 아는 경우만 해도 여자들이 남자랑 안좋게 헤어지고 나서 폭삭 늙는 것만 봐도. 남자들이 첫사랑을 쉽게 못 잊는 것도, 아직은 사회적 책무감이 없을때의 '사랑이 전부다.'란 감정에서 그런것도 같고, 3년 아래의 대학 여자 후배의 그동안의 삶의 경과만을 보더라도 버림 받은 상처 때문에 오랜 동안 헤어나오질 못하더라.


 이런 이들이 제반된 사항은 천성적으로 착하고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남자들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점점 영혼의 통로라는 눈이 퀭 해 지는 지경. 서른이 훌쩍 넘은 그 후배는 그렇다 쳐도, (종종 보면 안쓰러움) 이 제자는 지금이 시작인데, 훌훌 잘 털어버리기를 바랬다. 


 아무래도 채 한시간도 안되어 헤어졌기 때문에 딱히 이야기를 듣거나, 해줄 말이 필요 없이 잠시 같이 있어준 것만이 다 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위로나, 판단, 충고나 조언의 말이 불필요 한 것임에도 나는 어줍짢게 이런저런 토를 달은게 마음에 걸렸다. 이런 찜찜함은 결국, 나의 문제로 화살을 돌렸는데, 어떤 비수가 여전히 존재했다. 


 몇일후, 장문의 감사 메시지가 왔고, 나는 그 답장으로 비교적 장문의 메일을 후루룩 써내려갔다. 내가 이런 경험을 잘 알아서라기 보다, 남녀노소, 범인, 성인군자를 막론하고, 인간이고 그것이 진정한 마음이라면 이런 아픔에 속수무책인게 당연한것 같다. 우리가 문학작품이나 영화속에서 큰 감동을 받는것도 내 아픔 보다 더 큰 상처를 마주했을 때, 받는 위로 인 것이다. 타인의 더 큰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자아는 더욱 커지거나 무마돼, 마음의 벽에 갇혀 헤집던 고통도 굴레를 벗어날 것이다. 천재 니체도 벤야민도 좋아 하는 여자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자기를 옭아맨거 보면 나의 찌질함이 더이상 부끄럽지 않다. 사랑 앞에선 인간은 다 마찬가지다. 누가 누굴 위로하고 조언하겠는가. 



 내가 처음으로 깊이 몰입해서 한 호홉으로 글을 쓴, 몇년전의 회한의 경험은 언제고 글을 쓸때, 마음에 새기고 있다. 자기기만과 과시로의 글쓰기가 얼마나 우둔했고 비겁했는지, 자아도취의 몽매가 상대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가슴아프게 깨달았다. 훌훌 털어버리려고 썼던 그 글이 결국 상처로 작용했고 돌고 돌았다. 하나의 글이 가진 반향은 의외로 컸다. 정신의 총제적 반영은 단어와 문장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데, 이 소통은 근본적으로 오독과 오해를 불러온다. 일년전 상대는 내가 전한 메시지를 정 반대로 이해했다. 어느 정도의 오해가 아니라, 전혀 다른 해석, 완벽한 오해에 다시 한번 말하고 글쓰기의 어려움에 좌절했다. 더 나아가선 심리의 반영,반향을 조금은 공부하게 되었는데, 상대의 언어에 되갚는 대응은 치명적이었다. 나의 언어는 상대의 말에 빗대어, 당신이 멋진 사람이고 당신이 지금 나를 싫어하지만 나의 장점을 알아 볼 수 있게, 내가 더욱 좋아하겠다. 노력하겠다.의 의미를 상대는 내가 자뻑 망상의 기고만장한 남자로 받아들였더라. 상대의 어마어마한 분노가 잠시 자존감을 헤쳤지만, 먼저 내가 시작한 인과응보여서 슬픔이 더 컸다. 


 하는김에 하나 더 억울한걸 말해 보자면, 상대의 출신학교를 듣고, 내가 보인 표정에서 상대는 내가 학벌을 따지고 무시하는 반응으로 받아들여 되게, 화가 났었더라. 내가 지은 놀란 눈 표정은 평소 예상했던 그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1번 국도를 타다 보게되는 어느 학교 표지판을 보며 당연히 저기를 다녔겠구나라고 생각에, 그게 아닌 답변이 나오자, 그동안 나만의 유추와 착각이 허탈해졌다고 할까.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에서, 인지하지도 못한 사소한 행동 하나가 상대에겐 상처가 되고 오해의 불씨가 되었다 쳐도, 그런 분노의 폭발은 감내하기 힘들었다. 잘근잘근 곱씹는 상대의 잔인한 언사에 가슴이 무너졌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이상하게도 상대 앞에 서면 탈탈 털려 백지의 바보가 된다. 그 쪽이 신기가 쎈건지, 색기가 쎈건지 이성의 작동은 무마된다. 감정이 투사되어 반응했던 나의 행동에도 문제가 많았다. 관심의 언어는 직언으로 날아갔고, 이게 아닌데'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위에 말한 두가지 오해 말고도, 뭔가 있으려나.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어떤 좋아함이 순수를 가장한 강요라고 느꼈을까. 싫은 사람은 뭘해도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믿는 대로 보는 오류 였을까. 상대를 탓하진 않는다. 오히려, 모멸감은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처음 본 이후로 상대는 소통의 어려움을 알려준 언제 어디서건 나의 글쓰기 선생님 같은 고마운 존재다. 오독과 오해의 설킴과 핡큄에도 불구하고 단념과 체념의 상대가 아니라 마음을 비워, 있는 그대로의 나와 상대가 心心하게 다시 볼 수 있을까. 이젠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 뭔가를 기대할 것도 없고, 이렇게 털어 놓음으로서 후회할 것도 없어지겠지만, 아이들의 해맑고 순박한 모든 표정을 그러담아 환한 웃음을 짓던 그 마지막 모습만은 안 잊혀진다. 

그래서 뭘 어쩌려구..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은 붓 글씨를 쓰면서 원기옥을 가다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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