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참혹한 수난과 죽음을 리얼하게 묘사한 이 작품을 뒤늦게 보았다. 극장 개봉시에도 많은 논란이 되었었는데, 여러가지 논란 중에서도 적나라한 폭력 장면이 나로써는 매우 두려웠었다. ( 개인적으로 피에 대한 공포심이 커서, 잔혹한 장면이나, 내옆의 누군가가 피가 나고 아퍼한다면 내 몸이 아픈것처럼 동일시를 느끼는 감각이 예민하다. 그래서 공포영화는 질색한다. )  그런 내게 예수의 삶에 관심이 가지게 된 계기를 언젠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독실한 카톨릭 집안인 외가집에서 본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의 조각이었다. 아주 어릴때 였는데 세밀하게 묘사된 고통스런 예수상은 어린 마음에 슬픔과 의문을 심어 주었던것 같다.
 잊혀졌던 오랜 의문은 작년에 존경하는 지식인 김규항 님의 책 예수전을 통해서 서서히 사라졌다. 여러번 읽으면서 마음에 담을 아주 멋진 책이었다. 또 조영남 씨가 쓴 책 예수의 샅바를 잡다 도 재미있게 읽었었다. 수박 겉핥기 식의 예수에 관한 관심이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것 같다. 특히 이 영화를 보고나서 더욱 예수님의 삶에 관한 앎의 의지가 강해진걸 느낀다.  

 
 유다의 밀고로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되기 까지의 예수의 수난의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이성적으로 분석, 비판, 평가 할 필요가 없는 작품인것 같다. 크리스찬 이면 누구나 다 아는 성경의 이야기 이고, 예수의 수난을 두고 고담준론이나 성서의 해석.고증에 왈가불가 하기 보단 마음과 몸으로 깊이 느껴야 하는 영화다. 그 처절한  고통을 그 한없는 용서를. 관람자 내면에 조금이라도 승화 시켜야 한다. 그 끔직한 수난의 묘사가 내 마음을 허물고 같이 아파할때, 피에 대한 공포의 편견은 없어지고 담담하고 숙연하게 예수의 마지막 삶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아야 했다. 인간의 마음속의 선과 악 을 넘어서는 그 무한한 진리를..느낀다.

 유명한 배우인 감독 멜 깁슨의 의도는 확연하다. 죽음이 난무하고 폭력이 장난처럼 익숙해진 이 시대에 예수의 수난을 더욱더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에게 고통을 일깨우고 하루하루 감사하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무감각한 주변의 폭력에 대한 확실한 각성으로써 잔인한 묘사는 꽤 큰 울림을 준다. 책에서는 못 느끼는 확실한 공감각적 표현으로 인해 그 고통은 내면으로 체득화되어 나의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더 이상 선혈이 두렵거나 보기 싫지도 않다. 기분 나쁜 공포영화속 피와는 당연히 차원이 다르다. 끔찍하지만 성스럽다. 그 가 흘린 피를 통해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의 삶을 돌아보고 배워야 한다. 그 분을 통해 매일매일 거듭 태어나야 한다.

 나는 크리스찬이 아니다. 불교적 가르침과 수행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을 넘어선 신의 존재를 믿는다. 나는 불교도도 아니고 천주교도 아닌 그저 나날이 수행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그 하나. 하느님을 믿는다. 나는 보았으므로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P.S.  네이버 지식인 fox317 글 발췌.

이 영화의 감독 멜깁슨은 이 영화를 성경 그대로를 옮겨 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마태, 누가, 요한, 마가 복음서를 비롯,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슬픈 수난'에 소개된 성 앤 캐써린 에머리치의 일기들, 그리고 성 마리아 오브 아그레다의 '하나님의 신비한 도시' 등 다양한 자료를 원전으로 하여 충실히 인용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 반유대인적 내용으로 제작 단계부터 많은 논란을 일으켰었죠...
예수가 죽기 전 12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영화배우 멜 깁슨이 감독, 제작, 시나리오 집필 등 1인 3역을 맡았고, 특히 유태인들과 일부 기독교 신자들의 반발로 제작 기간 중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미국 개봉시 평론가들의 반응은 호평과 혹평으로 양분되었는데요...개인의 종교적 관점이 다소 실린 듯한 후자쪽 평론가들의 반응이 숫적으로 약간 우세하였다고 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아 자수를 하는 대형 범죄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늘어만 갔고 반대로 이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한 유대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죠.

이 영화는 서기 33년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라틴어와 아랍어로 촬영할 계획이 알려진 후, 촬영 초기부터 투자자로부터 외면을 받았고, 멜 깁슨은 자산 3천만불을 투입하여 영화 제작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어려움은 영화제작 도중, 반유대인적 내용에 항의하는 유대인 출신 거물들과 종교인들의 비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죠. 극중 예수의 죽음이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한 것으로 비춰지면서 영화는 유대반명예훼손연맹 등의 단체로부터 강력 항의를 받았고, 유대인 출신이 많은 메이저 영화사들의 사장들로부터 "앞으로는 멜 깁슨과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비난을 들었으며, 이 덕분에 완성된 필름은 배급자를 찾지못해 1년 가까이 창고 안에서 잠자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한 뒤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영화가 엄청난 논쟁의 중심에 섰던 것이 흥행면에서 도움이 되었는지, 엄청난 수입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사순절이었던 수요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첫날인 수요일 하루동안에만 2,356만불(이틀동안의 유료시사회 수입을 합치면 2,656만불)을 벌어들이는 기염을 토해 흥행돌풍을 예상케 했는데, 이는 역대 5번째로 높은 수요일 당일 수입(1위는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의 3,450만불)이었습니다.

입춘이 지났지만 눈은 많이 오고 기온은 차갑다. 하지만 해는 한겨울 보다는 더욱  길어졌고 따듯한 온기가 서려있다. 나즈막한 햇살 속에 실려오는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살을 에이는 겨울 바람이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어찌 할 도리 없듯이 한결 부드럽게 내 볼을 휘감는다. 정말 겨울답게 추웠던 이 계절은 왕성한 푸르름의 생명력을 기약하고, 희망한다.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은 온전한 바람을 한 없이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무형,무색의 에너지 속에서 나란 실체의 존재를 끊임없이 느낀다. 강한 맞 바람을 맞으며 내 얼굴에 닿은 거친 파열음을 듣는다. 바람 자체는 소리가 없다. 내가 역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의 한 가운데서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실존. 이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바람의 맛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의 즐거움이다. 변화를 생각하는 모든 이는 바람을 꿈꾼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다는 바람의 속성은, 바람을 피운다. 라는 중의적인 부정성도 내포하고 있다. 내면의 바람이 우리를 일깨우기를. 간절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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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70대 후반 나이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마지막 연기작 으로써, 삶과 죽음에 대한 숙고의 성찰을 보여준다.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감독이 노년에 와서 삶의 철학을 영화 속에 응축한 이 작품은 그의 영화 인생에서 최고의 정점을 이룬다. 1992년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이어지는 그의 수두룩한 명작들 ( 퍼펙트 월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스페이스 카우보이,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라 베이비, 아버지의 깃발, 체인질링.. ) 을 넘어 흥행과 비평 모두 최고를 달렸다. 노장 감독의 의례적 대우가 아니라, 진정 깊이 있는 삶의 성찰을 통한 노 감독의 따뜻하며 예리한 메시지를 담은 역작이다.


 작년에 국내 개봉시 처음 봤을때보다,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보니, 좀 더 깊이있는 메시지와 잔잔한 재미를 뱔견하여,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다시보기를 권하는 바이며 처음보시는 분은 나의 감상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물론 영화 감상후에..( 이 글은 줄거리 위주가 아니라 그리 상관은 없겠다.)  자 그럼 영화속으로..

 영화의 시작과 끝은 장례식 장면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죽음은 끝인가 시작인가? 27살 애송이 신부의 판에 박힌 설교에서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시작한다. 삶은 무엇인가?. 시작과 끝은 삶과 죽음이라는 굴레를 반복하듯이 사람들의 관계속으로 이동한다.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 부인의 죽음으로써 그는 타인과의 관계의 새로운 국면으로 영화는 전개되며, 삶의 변화를 통해 구원에 이루며, 결국 마지막에 그는 숭고의 죽음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에게 삶의 국면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한다. 영화속에서의 결말을 넘어선 현실의 관객 모두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는 고스란히 전해진다.

 월트 코왈스키는 한국전 참전용사로써 평생 내면의 상처를 가진, 지극히 보수적인 폴란드계 백인 영감탱이 이다.  그의 부인은 평생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그를  걱정해 죽기전 신부님한테 부탁한다. 그래서 책만 읽은 애송이 신부는 그렇게 냉대를 당하면서도 장례식 이후,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말 뿐인 구원과 참회의 공허한 설교는 그의 인생경험에 비춰볼때 턱도 없이 가소롭기만 하다.

 월트와 신부의 대립을 통해서 타인의 삶에 참여(관계)하는 방식의 문제를 제시한다. 월트는 전쟁체험에서 죽음에 대한 경험 ( 살기 위한 즉각적인 적을 살상하는 반응 ) 을 통해 부질없는 말이 먼저가 아니라 행동으로 삶을 실천하는 모습을 시종일관 보여준다. 영화속에서 이러한 계기의 시작은, 월트가 옆집의 몽족 사람들에게 쥐새끼 같은 동양놈들이라고 증오의 시선을 보내던 차에 신부는 월트가 있는 술집에 찾아와 삶과 죽음에 대해 질문한다. 월트는 죽음에 대한 고통스런 체험은 생생히 말하지만 삶의 문제에 대해선 이렇다할 답변을 못한다. 삶에 대해선 모른다는 신부의 일침에.. ' 그럴지도 모르지 '라고 그는 낮게 읖조린다. 그리곤 영화는 삶의 문제에 월트가 어떻게 참여하는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특히나 이 장면에서 인물에 떨어지는 조명이, 빛 과 어둠으로 극단적인데 삶과 죽음이라는 큰 화두를, 시종일관 영상과 상황속에서 대비를 통해 보여준다. 대체적으로 초반과 후반의 월트가 등장하는 씬은 강한 명암대비를 이루어 삶과 죽음의 줄타기 하는 듯한 심리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때로는 인공적인 조명의 사용을 최대한 배제하고 자연적인 빛의 상황하에서 인물의 다양한 심리를 표현한다. 얼굴에 드리워지는 음영의 농도와 양이 영화속 인물의 심리를 드러낸다고 보면 된다.

 
 영화의 첫 대사가 친구인 듯한 늙은 노인이 월트에게 조문하면서 "부인의 명복을 비네
She's a real Bitch." 라고 말한다. 영화 내내 월트의 친구들과의 대화 방식은 이런식이다. 이태리계 이발사, 아일랜드계 공사 감독관 과  대화에서의 재미도 그러하고, 마지막 월트의 유언장에도 여전하다. 타오에게도 그런식의 남자들의 대화법을 교육시키는데 이러한 삶의 태도는 신부의 교과서 읊조리는 공허한 말 과 극명히 대비를 이룬다. 그는 행동이 결여된, 경험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말들은 철저히 배척한다. 자신의 말이 아닌 것들은 죽어 있는 말로써, 그와 친구들과의 말은 죽음을 넘어선 삶을 유희하는 풍류의 자세를 보여준다.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과 죽어있는 말의 차이를 통해 타인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가르치고 일깨운다.

 신부는 불쑥 월트의 집, 술집에  찾아와 대뜸 월트라고 부르는데 정작 월트는 미스터 코왈스키 라고 부르라고 정색을 하며 말한다. 관계의 기본인 호칭부터 월트는 심기가 불편한 것이다. 이스트우드 감독은 끊임없이 소통의 기본인 호칭 문제를 대화 속에서 계속 야기시키고, 관계의 진정한 발전에서 그것은 무마된다.

 이러한 점은 노년의 감독이 미국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잔소리 같은 가르침이다. 실제로 공화당 지지자인 이스트우드 감독은 미국의 보수적인 가치들을 역설한다. 큰아들의 도요타 랜드크루저 SUV 를 타는 것을 마땅치찮은 시선을 보내며 포드를 타면 어디 덧 나나 라고 읊조린다. ( 현재 도요타 자동차 가 말이 많지만 그 일이 터지기 전까지 미국 젊은이들은 도요타가 미국 차 브랜드 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 만큼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절대적이었고, 현지화 되었었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죽음을 앞두고 신부한테 고해성사 하는 세가지 이야기 ( 젊었을때 다른 여인과 고작 키스한점,(불륜), 세금을 탈세한 점, 자식들에게 정이 없었던 점 ) 는 미국인 에게 고하는 직접적인 메시지 이다.


 월트의 행동 자체가, 이스트우드가 말하려는 미국의 보수적 견지의 가치를 보여주려는 듯 하다. 월트가 초반에 야만인 이라고 불렀던 옆집 몽족 사람들에게 참여하는 계기는, 몽족 갱들이 밤에 타오를 괴롭히는 소란에서, 월트는 한국전에서 썼던 M1 소총을 들이대며 그들을 물리친다. 위압적이고 으스스한 자세로, 그리고 또 타오의 누나 수가 길거리에서 흑인 깡패한테 위험에 처했을때,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과 대결한다. ( 이스트우드 감독을 유명하게 만든 황야의 무법자. 더티 해리 형사의 냉혹한 인상을 찌푸리며..) 보통 사람들로써는 어려운, 이웃의 위험에 참여함으로써 월트는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며 이웃 ( 타 민족 ) 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수가 몽족 갱들에게 심각하게 폭행을 당했을때, 그는 분노에 치밀며 반격을 행하리라고 다짐한다. 그는 자신과 이웃이 조금이라도 당하는 꼴을 못 보고 어떤식이라도 행동을 취한다. 그의 행동에서 즉각적인 미국의 단면을 보았으나, 마지막 행동은 우리에겐 큰 반전 이었다. 모든 이념, 사상, 종교 를 넘어서는 숭고의 자세 그 자체로써, 60년전 한국전쟁에서의 죄의식으로부터 구원받는다. 빚진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죽음으로써..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 미국인들 이면서 각자 꼬리표가 앞에 붙는다. 결국 백인이던 흑인이던 다 이방인 이라는, 월트 자신은 폴란드계 영감이며 이태리계 이발사, 아일랜드계, 아프리칸 흑인, 멕시칸 갱, 몽족. 그리고 병원내에서 월트는 인도 사람들 사이에 앉아서 무슬림 간호사로 부터 코스키 라는 이상한 발음으로 불려지고 중국계 의사한테 상담 받는다. 월트의 인상은 지푸려지지만 결국 이런 인종의 비빔밥화가 된 미국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면을 옆집의 몽족 소년 타오와의 관계에서 깨닫는다. 이웃을 돕는 타오의 심성을 발견한 그는 개인주의가 심화된 사회에서 타오에게 노동의 수고를 가지고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차고의 평생 모은 공구들, 1972년 포드 그랜 토리노 를 통해 남자가 가져야할 가치, 풍류 들을 가르친다. 영화속의 모든 점들이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훈수 인것 같다.
 이러한 다 인종 국가에서 어떻게 화합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월트의 삶과 변화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월트의 장례식에선 애송이 신부도 깨달은 바가 있어 설교의 내용 자체가 진솔한 말로 바뀐다. 영화 초반에 월트의 부인 장례식 이후 월트의 집과 옆집 타오네 집의  아기의 탄생 파티의 대비 처럼 유언장 앞에선 월트의 자식과 타오는 서로 엇갈린다. 타오의 엺은 미소는 월트의 죽음으로써 또 다른 삶이 전이 되는 것은 암시한다.(1972 포드 그랜 토리노를 통해서)
  영화속에서 여러번 변주되어 들렸던 메인 주제곡은 월트(이스트우드) 감독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노래 불러진다. 아스라이 울려퍼지는 그랜 토리노..

P.S.
 영화 초반에 월트의 손자 들이 옛날 전쟁 사진을 들고 '한국이 어디야?' 하는 그 어이없어 하는 어감에서 씁슬했었다.

 타오의 엄마와 누나인 수가 월트에게 일을 시키라고 데려왔을때, 그 둘이 타오에게 순간 구박하는 장면이 되게 재밌었다. 여자들의 기세가 장난아니어서 월트도 혀를 쯧쯧 찬다.

 수가 아일랜드 청년하고 걷다가 흑인 깡패를 만났을때, 아일랜드 청년이 흑인 흉내내는 말투와 행동이 어이없이 웃기다.

 


어제 저녁에 EBS 로비 카페에서 마신 아메리카노 한 잔에 지금까지도 내 몸은 커피의 숙취에 휘둘린다. 밤에 들어와서 보통때이면 책 보며 잘 준비 할 시간에, 지하실에서 앰프 키고 기타를 치고 운동장을 10바퀴 이상 돌았는데도 잠 이 도저히 안와 새벽 네시 까지 이런 저런 공연 영상 보다가 겨우 잤다. 짧은 취침 이후 정오에 가까운 지금, 여전히 카페인에 의한 흥분과 속쓰림은 여전하다. 평소에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이 아닌데도 오후에 마신 커피 한 잔이 이렇게 불면과 후유증에 시달리게 했다. 아마도 카페인 마약의 액기스를 넣은 듯 하다.

 아주 가끔 찾아오는 불면의 밤은 그리 건설적이지 못하다. 잠을 자야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밤의 시간은 집중이 되지 않는다. 배회자 처럼 서성거리게만 된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 새벽의 청아함 과는 극과 극이다. 하루가 마무리 되지 않는 이 커피의 위력.. 다시는 오후 다섯시 이후로 커피를 마시지 않겠노라고 몸과 마음은 다짐한다. 정말 커피와 담배는 연한 마약이라는 말이 맞는것 같다.

 오랫만에 만나는 친구 Y와 스페이스 공감 라이브를 봤다. 잘 모르는 남성3인조 모던락 밴드M*트 라는 밴드인데, 밴드명을 정확히 기입하지 않는 것은 좀 씹어줄 생각이기 때문이다. 

 겨우 1.5집을 낸 신인 밴드였는데, 지명도가 없어서 인지 녹화도 하지 않았다. 물론 공감 라이브 래서 박자가 안 맞거나 삑사리가 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 무대에 선다는 건 연주력은 검증 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던락 밴드로써의 스타일, 개성 문제이다. 모던락 이란게 테크닉 위주가 아니라, 감성 위주이기 때문에 보컬의 음색과 기타의 톤 멜로디의 진행이 매우 중요하다. 가사의 전달력은 물론이고,, 초반에 소녀 취향의 칭얼대는 사랑노래 에서 부터 조짐이 보였다. 

 어떤 악기 파트이던 존재감 없이(톤의 평이함) 서로 보통의 사운드로 비슷비슷한 모던락 송을 들려줄뿐이었다. 곡에 대한 실망이 무대위 멤버들의 외양에 눈길이 갔는데 노래와 건반을 맡은 사람이 아주 눈에 거슬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지지배 처럼 구는 패션계 똘마니 같은 옷차림 이었다. 검정 스키니 진에 커다랗고 헐랭한 스웨터에 목은 늘어져서 한쪽 어깨엔 나시 끈이 보이고, 큰 뿔테 안경에 검은 생머리의 헤어 스타일은 딱 여성형 게이들의 전형 같이 보였다. ( 커피 숙취 때문에 까칠하게 쓰는것 이해해 주길 바란다. ㅋㅋ )

 문제는 그 보컬의 음색. 특히 마이크의 잘못된 사용에 있었다. 노래 내내 마이크에 입을 바짝 붙히고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방 초보도 그러진 않을 것이다. 마이크와 입과의 밀착으로 인해 저음의 증가와 텁텁한 보이스로 인해 곡의 매력이, 힘을 잃었다. 물론 가사의 메시지에 집중될일은 턱도 없고, 단지 그 밴드의 드러머가 정말 잘 생겼다. 일본 순정 만화에서 갓 튀어나온 인물이었다. 처음엔 백인과 혼혈이라고 생각했었다.  곡 중간에 멘트에선 분명 native Korean 이었는데, 마지막 인사할때 무대앞에 섰을때 보니까 오리지날 코케이션( Caucasian (백인 ) 인 것 같았다. 마치 젊은 날의 톰 크루즈와 버나드 버틀러 ( Suede의 초기 기타리스트 ) 를 합친듯한 외모였다.

 그 드러머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면 우리나라 밴드 음악의 판도가 완전 뒤바뀔 것 같다. 댄스 그룹 아이돌을 좋아하는 10대 소녀 팬들이 밴드 음악을 하는 그들에게 몰릴 것이 뻔하니까.. 가증스러운 짝퉁 씨*블루 같은 것들은 내팽겨질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가요계에서 밴드 음악이 인디 라는 딱지 말고 주류에서 한 30퍼센트 정도 대중들의 호응과 인지도를 누렸으면 좋겠다. 너무 소박한 바램이다.

 깁슨 레스폴 커스텀을 멘 기타리스트를 보기보다 드러머의 외모에 감탄을 연발했다. 기타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왠지 남자 제시카(소녀시대)를 보는듯한 감탄.ㅋ

 그래도 개성없는 록 밴드의 공연이라도, 최상의 라이브 공간인 스페이스 공감에서 느끼는 맛이 있었다. 좌석도 정면이었고, 신인인 그들도 많이 준비 한 것 같았다.  친구와의 대화도 즐거웠다. 다시한번 말하자면 나의 이 혹평은 커피의 위력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부디 상처받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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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너스 하이. 보통 달리기 30분 이상을 했을때, 찾아오는 황홀경 이라고 한다.  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마약에 취하게 되는 효과와 같은 것으로써 팔과 다리가 가벼워지고 몸에 리듬감이 생기며 구름 위를 걷는 듯, 꽃밭 속을 걷는 듯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이라고 한다. 전에도 얼핏 비슷한 느낌을 얻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던 시기가 아니라 체한듯한 마음이 많이 덜어졌을때 한 번 찾아왔었다. 뭐랄까. 계속 하염없이 달릴 수 있을 거 같은 기분.

 오늘 찾아온 이 느낌은 일시적인 것은 아닌것 같다. 그 동안 일주일에 네번 정도는 밤에 집 앞 운동장에서 뛰어 왔었다.  많이는 아니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살짝 땀이 날 정도에서 그만두었으나 몇주 전 부터 도는 횟 수를 늘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오늘  모든게 편안해 지는 어떤 지점에 돌입했다. 규칙 적인 리듬 속에서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느낌. 마치 명상이 잘 될때, 호홉과 내면의 집중하는 점 만 남기고 모든 감각이 없어지는 느낌과 비슷했다. 경험상 그 둘의 관건은 호홉인것 같다. 호홉이 깊고 규칙적인 궤도에 오르면 몸과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등산, 요가 , 수영 등등 어떤 스포츠 라도 기본은 호홉일 것이다.

 무리하지 않고 달리기를 정지했을때도 숨은 고르게 차분했었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제는 어둠이 내리 깔린 휑한 운동장의 하늘에 별이 많이 보였는데 오늘은 구름이 군데군데 많이 보였다. 비행기 운항 항로가 아닌 하늘 지점에 이상한 빛이 떠 있었다. 비행기의 경광등은 아닌것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잠시 다른 쪽 하늘의 비행기를 보고 있다가 그 불빛을 다시 보니, 짧은 시간에 한쪽으로 아주 많이 이동해 있었다. 순간 UFO 라고 생각하고 그 때 부터 눈을 부릅뜨고 쳐다봤다. 곧 서서히 구름속으로 사라져서 구름에 까만 점이 한동안 보였다. 무슨 빛 이었을까. 머릿 속엔 멀더 요원이 들어와 수사를 하는 사이 내 마음속 한 구석에선, 안녕~ 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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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드디어 이석원의 산문집 < 보통의 존재 > 를 읽었다. 그 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간략히 말하자면, 모던록 밴드 ' 언니네 이발관 ' 의 보컬리스트 이다. 
사실 이 밴드, 좋아하는 밴드도 아니고, 더더욱 이석원 이란 사람은 인상도 안좋고, 특히 그들의 음악은, 20년여를 록 음악에 심취해온 내겐 너무 평범하게 들렸다. 그러다 친구가 연말에 그들의 공연을 보고 와서, 어느 보통의 존재 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앨범의 주제이자, 보컬 이석원이 마흔 언저리에 자신이 보통의 존재 일 뿐이라는 섬뜩한 자각에서 출발 했다라고..

 그때까지는 보통의 존재 란 말 자체가 가지는 아련한 서글픔이 약간의 궁금증을 유발했었다. 내 마음에 우연히 던져진 그 말이 잔잔한 물위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 처럼 파동을 일으켰다. 짐작은 하지만 그가 말하는 보통의 존재에 대해서 듣고 싶었다. 마음의 작은 움직음은 스페이스 공감 라이브를 다시보기로 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말랑말랑한 록 음악은 내가 지향하는 록 스피릿 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전히 보통의 밴드로 느껴졌다. ( 내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긴 비평을 할 수 있지만, 이 글은 음악 리뷰가 아니라, 책을 읽고 나서 쓰게된 글 이므로 여기서 줄인다. )

 그렇게 관심에서 잊혀져 갈 무렵,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게 이석원이 쓴 '보통의 존재' 란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인터넷서 검색해 보니, 노란색 표지의 이쁘장한 책 이었다. 인터넷 서점의 독자 리뷰는 믿을수 없어, 블로그의 평을 보니, 다들 반응이 좋다. 분명 제목이 주는 힘이 있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중들의 '공감'. 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하지만 난 신중했다. 궁금증을 무릅쓰고, 이미 그런식의 구매에서 실망한적이 많기에 주문하기를 바로 눌러버리는 대신 내일 서점에서 좀 읽어 보고 사기로 결정했다.

 얄밉게도 그 책은 빤빤히 비닐 포장이 되어 나머지 보통의 책들 속에서 유별나 보였다. 그리 얇은 책도 아니고 영화 개봉작의 원작 소설도 아닌데 그렇게 비닐옷을 입고 있는게 영 어색해 보였다. 출판사의 처사가 참 치사하다. 내용이 부실하기 때문일까. 왜 보통의 존재란 이름을 단 이렇게 예쁜책은 특별한 존재에 처해 대중의 손길에 유리됐을까. 나처럼 에세이류는 서점에서 읽어버리는 사람이 많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해도 서점의 모든 책은 다른책들과 공정하게 속 알맹이를 공개해야 한다. 그것이 책의 기본 윤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국 출판사의 옹절한 처사에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로 반항했다.

 담담하고 진솔한 그의 이야기들은 나의 내면을 수시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자주 멈춰서서, 추억이 스멀스멀 꿈틀거리는 것을 음미했다. 한 사람의 내면 일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힘이 이 책에는 있었다. 어쩌면 보통이 아닌 저자 (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했었고, 이혼했고. 예민한 가수인 ) 가 세상의 모든 보통의 존재에게 건네는 위로 인 것 같다. 꿈과 희망에 대한 거품어린 수사가 아니라 무덤덤하게 자기 자신과 일상을 이야기 한다. 사랑과 이별, 가족, 건강, 그리고 삶의 진리 까지.. 공감하는 글 귀가 색다른 감성의 인식을 건드릴때마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삶은 지금 여기에 있었고, 마음의 언 땅은 나와의 낯선 대화를 통해 차츰 녹아내리고 있었다.

 지금 글을 쓰면서, 웨일즈가 낳은 영국의 국민밴드 Stereophonics 의 베스트 앨범을 들으며 록 음악은 '이런것이야.' 하면서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을 생각해본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뮤지션 이석원 으로써가 아니라 작가 이석원 씨를 좋아한다. 나 또한 글쓰기를 통해서 삶의 한 꼭지를 정리하고 새롭게 나아가기를 원한다. 보통의 존재로써가 아니라 내 삶의 주인공으로써, 결국 누구나 보통의 존재일 뿐이라는  평등과 겸손을 가지고..

 책속의, 맘에드는 짧은 아포리즘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결속
 
진정으로 굳은 결속은
대화가 끊기지 않는 사이가 아니라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사이를 말한다.

두려움

세상의 수많은 두려움 중에서
아주 일상적으로 언제나 마주치는 것.

거절당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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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어렸을때 꽤나 히트친 유행가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었다.
' 사랑을 하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사랑이 그런거라니..

사랑은 적어도 잉크 가득 채운 만년필로 꾹꾹 눌러 써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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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 보험 갱신하러 인터넷 다이렉트 보험 산출 하던중, 신년운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서 해 보았다. 인터넷 점 꽤 치곤 너무 잘 맞추는 것 같고 글도 재밌어서, 올려본다. ( 우울할때 보면 좋을것 같아서..) 아마 나를 아는 사람은 한 90 퍼센트 이상은 맞다고 생각할 것이다. ( 특히나 붉은 글씨 부분을 읽으면서 ) 인터넷 점 치곤  문장의 위트가 엿 보여서 어이없이 웃고, 수긍하게 만들었다. 안톤 체홉을 인용하질 않나..왠지 옆에서 얘기 하고 있는 듯한, 나로써는 100퍼센트 공감하는 글이다.
 아랫 글은 평생운 이고. 신년운세와 달별운세도 있었는데, 올해는 간혹 로또를 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무아미타불 ^^  /  모두에게 복을 나누는 마음으로...


자신의 의견과 감정을 잘 드러내고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능력 또한 뛰어난 사람. 한마디로 개성이 강한 당신은 예술인일 수밖에요. 우선, 사주상으로도 최선의 직업을 택했으니 행여 자신의 선택에 근본적인 회의는 시간낭비, 정력 낭비임을 짚고 넘어갑니다. 창조적이고 문예적인 기질을 타고난 당신은 다재다능한 재주꾼이죠. 게다가 직관력이 발달해 돌발 상황에도 재빨리 대처하며, 지혜롭게 이야기할 줄도 알아 임기응변에도 능합니다.

개성이 강한 나머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타인에 대해 세심히 배려할 줄 아는 착한 마음의 소유자. 자선사업가 같은 희생정신도 있고, 낭만을 알고 낙천적이어서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타입입니다. 순수, 대중 예술뿐만 아니라 프리랜서, 전문직 계통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좋은 말솜씨와 낙천적인 성품은 영업직과 교직에도 어울리고, 당신에겐 사업가다운 자질도 기대할 수 있답니다. 이처럼 다방면에 자질이 있는 당신이지만, 문제는 조직생활에 맞지 않는 기질입니다. 개성과 기질이 너무 도드라집니다. 보통의 가치관과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 속에 어울려야 하는 조직에선 소위 왕따가 되는 건 시간문제죠. 그리고 권위와 권력 등 고정된 기존 체제에 대항하는 안티 성향이 강해, 오만불손하고 황야의 무법자 같은 태도가 속출하기도 합니다. 자기표현이 강하고 자유로운 나머지 행동이나 확실한 믿음에 앞서 말부터 먼저 우수수 쏟아내는 경솔함도 당신이 자주 하는 실수입니다. 남들 입방아의 단골 손님으로, 시시비비의 대상이 되고....따가운 시선들이 당신을 옥죄고 상처가 되어 이윽고 절망에 빠졌던 경험도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많이 단련되셨다구요?

예술적 기질을 타고난 당신. 이미 유명해졌거나 아직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으니, 믿고 오로지 모든 힘을 기울이십쇼. 게다가 예술을 하면 배고프다고 하는데, 당신의 경우엔 생계에 곤란을 느낄 만큼 궁핍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엄격한 규율과 꽉 짜여진 조직에서는 한시로 버틸 수 없는 당신. 혹 버티려면 자신의 능력과 기질을 완전히 죽여야 하는데 이것은 당신은 물론 조직에도 무척 안 좋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한순간 폭력적인 행동 등으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겁니다. 과감히 조직생활을 벗어 던지고 개인적인 활동을 하는 게 절대로 유리합니다. 창작활동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등의 경제적인 활동도 자신의 직관과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에 몸담아야만 잘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장점이 단점이 되지 않도록 말과 행동의 표현을 감추는 노력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특히 이성에게 자신의 감정을 오버하는 등의 행동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남을 뿐이라는 것 아시죠? 이런! 당신이 원하던 바라구요? 과연 괜찮을까요.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로 다가올텐데.....반드시. 그것도 감수하시렵니까?

영원한 구속이라는 결혼, 아직 안한 것이 당신답습니다. 앞으로 진정 내 여자를 만들고 싶다면, 먼저 아름다운 구속은 감수하셔야 하는 것은 알고 계시겠죠. 당신의 여자가 당신을 이해 못하겠다며 힘들어 할 땐 종종 당신의 낭만적인 기질을 발휘해 그녀를 감동시킬 이벤트, 만들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독신주의자든 아니든 앞날을 대비해 돈 좀 모아두시구요. 거의 모든 도망자가 미혼자라던데.....체홉이 말하길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서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니 그런 순간이 오면 도망자 생활 청산해보시죠.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 게다가 예술을 하는 당신은 보통사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허락 받은 선택된 사람입니다. 20대의 치기가 이젠 성숙한 경험이 되어 당신의 작업 속에 녹아들고 있겠죠. 모든 일에 극단으로 치닫는 감정을 조절하는 인내, 절제의 미덕 놓지 말고 유명세에 연연치 않는 긴 예술인으로 다져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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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어떤 사람에게 '솔직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릴 때 자세히 살펴보면, 남들이 화제로 삼지 않는 성적인 문제를 노골적으로 털어놓거나, 성 해방을 빙자하여 비도덕과 비윤리를 미화시키거나, 숨겨야 할 자신의 치부를 대담하게 드러내는 반행위에 대해 찬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성적인 화제에 대해서 낯 하나 붉히지 않고 말하는 태연함은 솔직함 때문이 아니라 천박함 때문이고, 자신의 약점이나 숨겨야 할 치부를 대담하게 노출하는 행위는 솔직함 때문이 아니라 뻔뻔함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든 남에게 쉽게 고백하는 행위 자체를 솔직함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솔직함이 아니라 오히려 참을성이 없는 성급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솔직하다는 것'은 '숨김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솔직하다는 것'은 '꾸밈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 최인호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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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상대가 결혼 상대로는 최고죠."

"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과정입니다. 이야깃거리는 내 안의 깊은 곳에 있기에 그곳까지 우물을 파고들어 가듯 들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곳은 매우 어두운 장소이지요. 하지만 제가 좀더 깊게 파고들어 갈수록, 그리고 더 오랜 시간 그 깊은 곳에 머물수록 제 소설은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작품을 쓸 때마다 한층 더 깊은 곳에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

" 나의 주인공들을 보면, 늘 뭔가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을 찾기 위해 방황하죠. 그가 무엇을 찾느냐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사실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주인공은 혼자 외로이 서 있고 그 가운데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시간을 허비하고 가능성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입니다. 상실감의 그림자 아래에서 산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일단 산다는 것을 선택한 이상, 나의 주인공들이나 우리 모두는 전력을 다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고 싶다면, 그건 희망일 수 있겠네요."

" 읽기 쉽고 즐거우려면 문장에 리듬이 있어야 합니다. 그건 작가 고유의 문체라고도 할 수 있죠. 소설의 기본 기능은 독자를 '유혹'하는 데 있습니다."
 
                                                                                             -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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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꿈 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눈을 떳어도 현실과 꿈과의 경계 안에서 오래 서성거린다. 꿈은 꿈 답게 말도 안되게 오락가락 황당무개 해야 하거늘, 오늘 새벽의 꿈 같은 경우 완벽한 한편의 장편 영화였다. 꿈속에서 이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겠다고,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다짐했었다. 그러나 지금, 거의 모든 꿈 속의 기억이 망각으로 유실되고 있다. 아, 이 아련한 망각의 슬픔이여... 분명 매트릭스를 능가하는 경험이었고, 마음에 되새기고 있었는데, 망각의 늪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의식과 무의식, 잠재의식의 완벽한 통합이었다.

폴 매카트니가 예스터데이를 작곡한 일화처럼, ( 한밤에 잠에서 갑자기 깨서 피아노 치면서 뚝딱 만들어낸 ) 신의 계시와도 같았지만, 나는 그것을 잡지 못했다.
그래도 안심인것은 나의 무의식과 잠재의식은 뒤틀어지고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진리를 얻기 위해 한마음으로 덩어리 졌었다. 요 몇일 사이 참선 이 매우 잘 됐었는데 그것의 미미한 반응인지도 모르겠다. 내 삶의 주인이자, 스펙타클 속에서 주인공이었다.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꿈의 자동 기술법이라도 있었으면..

 영혼이 그저 딱딱한 뼈속의 단백질 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초라한가..그것이 현실의 갇힌 세계라면, 꿈은 영혼의 해방구 이다. 의식이 만들어낸 모든 가치의 무장해제 이다. 현실에서의 바람 처럼 그것은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대 자유의 세계이다. 흩어진 바람을 일념으로 뭉쳐서 이끈다면, 지구위의 모든것을 날려버릴 무서운 태풍도 될 수 있다. 꿈을 꾼다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혁명을 꿈꾸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꿈은 무의식에 각인 시키는 것이다. 그 무의식은 한 밤의 꿈을 통해 자유롭게 현현되어, 우리의 의식의 경직성에 자극을 준다. 그럼으로써 거듭 태어난다. Born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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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  책,

내 생활 공간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책들을 보면 간혹, 애증의 심리가 솟구친다. 언젠가 읽었던 책들과 읽다 만 책들, 그리고 사 놓기만 한 책들이 불편한 모양새로 내게 불만을 토로하는듯 하다. 특히나 요즘은 도서관서 빌린 책들이나, 서점에서 원_나잇 스탠드 하는 책들 에게 밀려서, 먼지만 쌓이고 종이 들의 시체 처럼 보일 뿐 이다. 내 방에 안착한, 그러니까 내가 소유한 책 이란 명제 에서 오는 나태함과 허영심 어린 책들이 내게 묘한 압력을 주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레임과 지적인 탐구에 대한 부담이 동시에 작용한다. 언젠가는 먼지를 털고 콧 기름 발라가며 손 때 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소유되지 않은 책 과의 외도가 더욱 짜릿하다. 왜냐하면 서점에서 보는 책은 몸이 편하지 않으며, 빌린 책은 날짜의 한계가 있으므로 절박하게, 더욱 집중해서 한 숨에 읽기 때문이다.

 서점에서의 책 읽기는 편하지 않음에서 오는 긴장과 집중이, 삶에서 몰입의 희열을 깨닫게 해준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진리에 다가서기 어렵다는걸 비교 체험으로써 느끼게 해준다. 그렇다고 서점에서 쟝 보드리야르나 롤랑 바르트 등등의 학자들의 책을 읽진 않는다. 새로나온 에세이, 사회비평 등등이 서점에서 읽기가 딱 좋다. 최근에 장영희, 한비야, 홍세화 님의 새책을 읽었다. ( 제목은 적지 않겠다.) 책을 좋아하다 보면 책 고르는 안목이 좋아지는데, 역시 위 세 저자들의 책은 아주 뛰어난 문장과 함께, 탁월한 감수성과 통찰을 보여준다. 한비야 님의 책은 그동안 일부러 거부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베스트셀러 책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연히 뻔한 내용일꺼라 짐작한, 제목도 마음에 안 들었던,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 를 보고 편견이 사라졌다. 또 무릎팍 도사에 나온 그녀의 모습을 보고 글의 진정성이 더욱 느껴졌다. 문장을 읽으면서 상상한 저자의 어투와 호홉이 실제 모습(방송에서지만.) 과 대단히 비슷하단 느낌이 들었다. 한 마디로 솔직하고 경계에 얽매이지 않은 시원시원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배울점이 많은 분이라 생각한다.

 홍세화 님의 책은 두고 두고 곱씹어 볼 사회 비평서 인데, 개인적인 이유에서 책 구입은 망설여 진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소유에 대한 정체라고 할까.. 지식,비평은 흘러서 소통돼야 하는데 한 번 읽었던 책들이 결국, 방안의 책장에 종이들의 성전이 되가는 꼴이 이제는 싫어졌기 때문이다. 대학을 지식 혹은 지성의 상아탑 이라고 하는데, 공부는 쌓는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쳐가는 것이고 오히려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전에 전기류의 책들을 ( 브레송,만레이,트뤼포,헬뮤트 뉴튼 자서전 등등..) 개인 직거래로 팔았다. 다른 중고 거래와는 달리 책의 직거래는 묘한 정서적 희열이 있다. 내 정서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풀어 놓음으로써 오는 작은 해방감과, 책을 받은 사람의 얼굴에 퍼지는 설레임이 교차하면서 그 책은 사명을 다 한 것이다. 떠나보냄으로써 드디어 내 영혼에 각인 되었다.

 반면에 이외수 님의 ' 하악하악 ' 류의 책들은 딱 서점에서 읽을 용 이라 생각한다. 작가 이외수를 싫어하진 않는다. 그의 글 에서 성찰과 영감을 얻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상업적인 냄새가 난다. 고급 종이에 이쁜 칼라 일러스트와 짧고 농축된 문장들, 지면의 여백, 보기에 좋지만, 비싼 책 가격에, 한 시간 정도에 읽히는 분량은, 왠지 출판사 사장 배불려 주는 꼴 인 것 같다. 이외수 님 이름으로 이런 책들이 꽤 많다. 그러니 책의 좋음을 떠나서 펜시 상품으로써 밖에 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출판 시장이 불황이라면서, 왜 파주 교하의 출판단지의 출판사 사옥들은 그렇게 멋지고 으리으리 하게 지으셨는지, 화천 감성마을엔 그 멋대가리 없는 콘크리트 벙커의 집을 지으셨는지, 모를일이다. 자본주의 세계에선 돈이 공기와도 같은 것인데, 파주나 강원도 좋은 공기에서 돈 냄새 많이 맡으셨는데 뭐라 탓 할 일이 아니다. 선택은 내 몫 이니까.

  더 할 얘기가 많지만, 책 하나만 추천하고 마친다. 김중혁의 단편 소설집 ' 악기들의 도서관 ' 참 재밌게 읽었다. 젊은 작가의,  현대인의 감수성을 잘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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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국내에서 인기끌었던 팝송이 있었다. 국내에서만 이름이 알려진 영국 밴드 리알토가 부른 monday morning 5:19 이었다.  가사 내용은 모르지만 친숙한 멜로디와 제목이 주는 상상력이, 핸드폰의 알람 이후 이불 속에서 공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내게 흥얼거리게 만들었다.  나의 월요일 아침 5:19 는 잘라내야할 망상이 널브러져 있었다.

 정신은 육체를 이끌지 못했다. 새벽의 달콤함을 즐기는 육체는 포근함 속에 이미 함락되었고, 목표를 잃은 의식은 우왕좌왕 사색으로 점철될 뿐이었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 사색은 결국 헛된 망상일뿐, 삶의 부스러기 와도 같다. 마치 헬률가스 가득한 풍선을 마신듯, 결코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가질 (낼) 수 없다.
 
 일요일 아침과는 전혀 다른 긴장이 서려있다. 곧 고요의 파괴는 이루어지고 지체없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몰릴 것이다. 시간의 속성은 원래 그러하니 슬퍼할 일은 못 되나, 그 속절없음에 모든 세포들은 깨어있어야 한다. 이 순간의 점들이 결국  나  이다. 아무것도 아닌, 텅빈 마음으로 무언가를 행하고 있을 뿐인..

 정상을 앞둔 가파른 산길의 한걸음, 한걸음 같이 ..   해는 이미 떠올랐다. 이제 아침 밥을 먹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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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기타리스트 존 프루시안테가 공식적으로 밴드에서 탈퇴했다. 그의 홈페이지에 http://johnfrusciante.com/ 공식적 입장 표명을 했다. 새로운 분야의 음악을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마디로 밴드 멤버에 구애받지 않은 자기 색깔의 음악을 하겠단 것이다. 작년에 나온 그의 솔로 앨범 The Empyrean 이 본인 의지의 일환인듯 싶다. 존 의 팬으로써 그의 솔로앨범은 훌륭한 아트이고,  솔로 활동에 성원을 보내는 바 이지만, 더 이상 존이 없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마치 크림 없는 케익인, 그저 카스테라 일 뿐이다. 그것은 이미 1995년 앨범 One Hot Minute 에서 어느정도 증명되었다. (존이 첫 번째로 탈퇴하고 제인스 어딕션의 기타리스트 데이브 나바로가 들어와 만든 음반) 이 앨범 전 후의 존이 참여한 앨범들과 많이 비교된다. 물론 데이브 나바로도 아주 출중한 기타리스트 이긴 해도,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기타리스트는 영원히 존 프루시안테 일 수 밖에 없다. 



 존 프루시안테는 7살 때부터 기타를 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미 LA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유명한, (1983 년 페어팩스 고등학교 동창생 보컬 앤쏘니 키디스, 베이시스트 플리 주축) 앨범 세개를 이미 발표한, 인기 밴드였던 레드 핫 칠리 페퍼스에 1988 년에 가입하게 된다. 기존 기타리스트 였던 하이렐 슬로벡 이 마약과용으로 사망하자, 절친했던 드러머 잭 아이언스도 동시에 탈퇴한다. 그후 잭 아이언스는 펄잼의 초기 드러머를 맡았다. 어쨋든 존은 십대 후반에 명성이 자자했던 밴드에 기타리스트로 가입하고. 곧 밴드는 1989 년에 Mother's Milk 발표해 첫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곧 대망의, 1991 년에 발표한 앨범 Blood Sugar Sex Magik 을 통해 세계적인 밴드로 도약하게 된다.

 성공한 앨범의 공연 투어가 한창이던 1993년에 존은 돌연 밴드를 탈퇴한다. 성공한 밴드의 유명세와, 살인적인 스케줄 등..음악 산업안에서 감수성 풍부한 20대 초반의 젊은 예술가가 버티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음악적 자유를 위해서 떠났지만, 돈 많은 혈기왕성한 락 기타리스트에겐 마약 중독이란 깊은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투브에서 그 당시 중독된 상태의 존의 모습을 보면, 정말. 처참해 보인다. 생각해 보면 존이 고맙기도 하다. 그 많은 재능있고 순수했던 뮤지션들이 마약으로 죽어갔다. 죽음의 조우를 극복하고 존은 재활치료에 성공했고, 보컬인 앤쏘니 키디스는 존이 마약 구입으로 팔아버린 기타를 대신해, 현재 존의 메인 기타인 (위 사진속) 1962년 오리지날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선물하며, 밴드의 재가입을 종용한다. 


 재가입후 1999년에 Californication 앨범을 발표하며 존의 성공적인 복귀를 이루어냈다. Scar Tissue, Otherside 등등 히트곡을 연발하며, 잦은 밴드 멤버 교체의 역경을 헤쳐나간 밴드나, 삶의 끝에서 허우적 되던 존 자신의 인간 승리라 할수 있었다.

 그리고 2002년
By the Way 범을 통해 더욱 성숙된 하모니를 보여주었다. 이 앨범의 투어로 유명한 공연이 2004년 아일랜드 에서의 Live At Slane Castle 이었다. 고풍스런 성이 옆에 있는 엄청난 관객 규모의 야외 공연 인데, 작년에 이 공연 영상을 인터넷서 다운 받으면서 급격히 레드 핫 칠리 페퍼스에 빠져들게 되었다. 보진 않았지만 같은 해에 영국 하이드 파크에서도 20만명 이상을 동원하며 그 해 한 장소 공연으로 최고의 흥행을 했다고 한다.꼭 DVD 로 사야겠다. 또 처음이자 마지막일듯한 한국에서도 공연을 했다. 뒤늦게 이들을 안 것이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다. 

 2006년에 그들의 역사적인 앨범, 이제는 존이 다시 탈퇴한 시점에서 더욱 역사적인 앨범이 될 대망의 더블 앨범인
Stadium Arcadium 을 발표한다. 작년 한해 이 앨범을 무수히 많이 들었는데, 내게 있어 이 앨범은 한 5년 전부터 시들어졌던 음악 감상의 즐거움을 다시 찾게 해준 고마운 음반이다. 엄격히 말하면 존의 기타 연주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북돋아 주었다. 존의 스트라토캐스터 소리에 감동 받아, 내 생애 첫 펜더 어메리칸 스탠다드 스트라토캐스터도 구입했고, 심지어 어깨 팔뚝에 지미 헨드릭스 이미지의 문신을 하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이니, 또 영국보다 캘리포니아를 가보고 싶기도 하고, 영국산 우울한 음악을 좋아하던 내겐 대단한 변화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더블 앨범들, _비틀즈의 화이트앨범, 스매싱 펌킨스의 멜론콜리 인피니티 새드니스, 클래쉬의 런던 콜링_, 등등과 함께 존이 마지막으로 참여한 이 스타디움 아카디움 앨범은 대중 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40대의 완숙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이룩한  밴드 음악의 최상의 완성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의 라이브 공연을 보면 멤버들끼리의 자주 눈 맞추며 웃고, 음악의 하모니를 위해 서로 영혼으로 소통하는 것이 느껴진다. 드럼 앞에서 베이스 플리 와 존은 자주 서로 마주 보며 연주를 하는데 그들의 눈빛은 서로 한없이 존경을 표하고 있다. 실제로 인터뷰 등에서 보면 서로의 연주에 감탄한다고 한다. 93년에 존이 탈퇴할때도 존 보다 형인 플리에게 너와 연주 하는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하지만 ~ 이라고.. 속깊이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음악을 통해 최상의 예술, 완벽한 하모니의 예술을 보여준다. 혼신의 열정의 기운이 감상자에게도 전해진다. 그들을 통해 나는 캘리포니아의 투명하고 강렬한 태양을 꿈꾼다. 

 
마약 중독이라는 인생의 큰 암초에서 벗어나 가장 위대한 록 밴드의 역사를 만들어 갔던 그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30대 후반의 그에게 성공적인 솔로 아티스트 커리어를 이루기를 기원한다. 강인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 맑고 순수한 눈과. 어눌한 말투에서 보이는 천성적 여림이, 그의 연주와 함께 천재성을 엿보이게 한다. 다시는 마약에 빠질일은 없겠지만 오래살아서 꾸준히 좋은 음악, 연주를 들려주시기를..


 여담이지만 내가 존 프루시안테를 좋아하게 된 복선 같은 일이 있었는데, 반스앤노블 서점에서 애니 레보비츠의 뮤직 이란 사진집을 보다가 아래 사진을 보고 버팔로 66, 브라운 버니를 만든 감독겸 배우, 뮤지션이기도 한 '빈센트 갈로' 라고 알고 있었다. 그 사진집은 작업실 공간의 뮤지션들을 찍은 것이었는데 특히나 아래의 빈센트 갈로 라고 착각한 사진은 오래 보았던 기억이 있다. 팔의 흐릿한 문신 자국들과 우수에 찬 표정이 묘한 울림을 주었었다. 



 

 


 평소에 나는 길거리 음식을 잘 안 먹는 편이다. 이유는 서울의 대기 오염도와 연관이 있다.

 전철역에서 집으로 가는 길의 험난한 눈밭을 헤치며, 큰길로 들어서는 모퉁이에 섰다. 눈 밭에 파묻힌듯 보이는 작은 행상이 하나 있었다. 벌어진 비닐 틈으로 보니. 작은 붕어빵 틀과. 바로 밑에 흰 종이위에 천원에 여덟개 라고 쓰여 있었다. 아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 천 원 어치요." 네개는 이미 틀에 올려져 있었고, 나머지 네개를 만드느랴고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의 손이 분주히 움직였다. 천원에 여덞개의 붕어빵은 금새 내 마음을 미안하게 했다. 싸고 양많은 것을 추구하는 경제논리에 입각한 일말의 내 욕심이,  부지런한 그녀의 손놀림앞에 부끄러웠다. ' 남는게 있을까?' 짧은 상념 끝에 나머지 네개의 붕어빵이 다 만들어져, 흰 종이 봉투에 담겨지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구겨진 천원짜리 지폐를 펴서 건네고 봉투를 받으면서 진심으로 " 감사합니다 " 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눈을 제대로 보질 못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 맛있게 드세요 " 였던것 같다. 그 순간의 어렴풋한 인상은, 아주 환하게 웃으며 붕어빵 여덟개가 든 흰 봉투를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갓 구워나온 봉투속 뜨거운 붕어빵은 장갑을 벗은 내 손을 얼지 않게 온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봉투를 든 따스한 손을 타고, 마음속 깊은곳에 뜨거운 감동이 접촉됐다. 식을까봐 재빨리 꺼내 먹어보았다. 그 뜨거움이 내 이기심과. 허영, 마음의 오염을 건드렸다. 고통스러웠다. 서울의 대기 오염이 문제가 아니었다. 삶의 문제였다. '어떤 가치로 어떻게 살 것인가?' 의 문제였다. 나는 어떤 Trade 로 타인에게 감동을 선사할지 더욱 심사숙고해 볼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삶은 누군가의 것을 많이 뺏으려는 것,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눠주고, 채워주는 마음으로 충만한, 그래서 무의식적 행동으로 구현되는 삶이다. 지금 우리에겐 연대의식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모든것이 나와 별개가 아닌 끈으로 연결된 나의 일부라는 마음만이 앞으로의 희망이다. 앞으로의 시대정신은 들뢰즈/카타리 가 말한 리좀(나무 뿌리와 같은 구조, 모두 얽히고 섥힌) 과 같은 것이라 한다. 그 시대정신,사조의 사회적,개인적 발현은 연대의식, 연대감으로 정의하고 싶다. '나' 란 것이 고작 이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라는게 우습지 않을까? 우주와도 같은 마음은 만물을 나로 만들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끔직히 여기는 마음은 타인에게도 동등할 것이다.

 내 지적 허영은 추운 겨울날의 삶의 리얼함에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붕어빵은 맛있었다. 나는 충분히 느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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