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지 오래되어서 자세한 감흥이 기억 나지 않지만, 역시 좋은책. 

그래서 약간의 발췌만..


김춘수의 시 '꽃'에 등장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구절도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인식할 때만 그것이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만히 사물이나 현상을 응시하지 않고서는 그것의 의미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 40


 그저 대중예술은 당대의 기쁨과 슬픔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어법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하지만 고급예술은 어법이 다르다. 당대의 모순을 드러내고 실존의 고민을 고급스러운 예술양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고급예술이다. 그래서 대중예술은 ‘흔적’을 등한시하지만, 고급예술은 ‘영원성’을 중시한다. 대중예술은 그 시대에서만 소비되지만, 고급예술은 당대를 넘어서도 유효하고 다음 시대에도 가치가 보존된다. 

 대중예술이건 고급예술이건 예술가는 모순을 영감으로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감상자들의 심장을 날카로운 창으로 관통하는 법이다. 예술을 통해 대중은 비로소 눈을 뜨고 문제를 인식하며, 모순에 부딪히면서 세상으로 한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획득한다. 53


아우라(Aura)는 후광, 광채 등의 의미가 있는 그리스어. 종교에서 예배 대상물의 장엄함을 나타내는 용어였으나 인체와 관련하여 언급할 때 아우라는 신체에서 발산되는 보이지 않는 기나 은은한 향기 혹은 사람이나 물건을 에워싸고 있는 고유의 분위기를 뜻한다. 미술에서는 독일 평론가 발터 벤야민의 복제예술에 대한 이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는데, 그는 예술작품의 원본이 지니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유일한 현존성에서 도출되는 아우라를 말하면서, 그것을 ‘아무리 가까워도 아득히 멀리 존재하는 것의 한 번뿐인 현상’이라 하였다. _ 박연선 <색채용어사전>


 하늘이 어떤 이에게 장차 큰일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그 근육과 뼈를 지치게 하며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도록 가로막는데, 이것은 그의 마음을 움직여 그 성질을 단련시키며 예전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을 더 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언제나 잘못을 저지른 뒤에야 바로잡을 수 있고, 곤란을 당하고 뜻대로 잘 되지 않은 다음에야 분발하고 상황을 알게 되며, 잘못된 신호가 나타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내부적으로 법도 있는 집안은 제대로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외부적으로 적이나 외환이 없는 나라는 언제나 망하게 된다. 우리는 그 다음에야 우환이 사는 길이고, 안락이 죽는 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_ <맹자>


 자기혁명. 204p


 그가 지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금하지 않겠노라.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라.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_ 박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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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은 감흥이 기억이 안나서 그냥 약간의 발췌만. 


코드와 메시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소통이 가능하려면 수신자와 발신자는 코드(code)를 공유해야 한다. 가령 러시아어 문장을 한국어 사용자가 이해할 수는 없잖은가. 매체의 시장에서는 이렇게 발신자(작가)와 수신자(대중)가 공유하는 코드로 작성한 문장만이 상품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 경우 수신자나 발신자가 자기들이 공유하는 코드 안에 영원히 갇혀버린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철학이나 예술의 과제는 바로 그 코드 자체를 반성하는 데에 있다. 71


 익숙한 것은 편하다. 하지만 익숙함 사이에서의 삶은 쳇바퀴 속 다람쥐처럼 새로움이 없는 반복뿐이다. 그러나 익숙한 것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낯설게 바라볼 때, 의식하지 못한 것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삶과 죽음 같은 가장 기본적 문제마저 차가울 만큼 낯설게 성찰할 수 있다면, 당신은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만나게 될 것이다. 193


세계의 유미화


루키즘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점증하는 유미화 현상이다.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소비자는 상품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 즉 상품 자체가 아니라 상품과 상품의 ‘차이’를 소비한다는 얘기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디자인, 이미지, 브랜드 등이다. 나아가 현대소비자는 상품을 일종의 내러티브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상품의 생산과 소비를 물리적 현상에서 미학적 허구로 바꿔놓는다. 일찍이 벤야민은 이를 “무기물의 섹스어필”이라 불렀다. 231


얼굴은 풍경이다. _고흐의 자화상.


“ 얼굴과 풍경의 상보성 안에서 하나를 다른 것으로 구성하라. 그것들을 채색하라. 그것들을 완성하라. 얼굴과 풍경의 교본들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 건물, 마을이나 도시, 기념물이나 공장 (...) 이것들은 건축이 변형시키는 풍경 안에서 얼굴로서 기능한다. 회화는 얼굴에 따라 풍경을 위치시키고, 하나를 다른 하나처럼 취급함으로써 그 운동을 역전시키기도 한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얼굴을 하나의 풍경으로 취급한다. “ (들뢰즈-가타리,<천개의 고원>) 287


예술의 진리 


예술은 아름다움만이 논의 대상이 아니다. 세상에 이름을 알린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행적과 작품을 통해 동시대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바꿔주었다. 전체에 휩쓸리거나 지시에 끌려 다니지도 않았다. 작가 이름과 작품명을 줄줄 외워대는 ‘지각’으로 예술을 대하지 말라. 송곳 같은 ‘감각’을 되살려 예술의 숨어 있는 진리와 마주하라.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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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김수영




  김수영은 평생 자신의 내면에 ‘시에 반역하는 마음’이 생길까봐 노심초사했다. ‘시에 반역하는 마음’은 사태의 인력에 끌리거나 자신의 기질에 안주했을 때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사태와 자신이 고정된 의미망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거리 두기에 실패할 때, 시는 쓰일 수 없다. 시를 탄생시킬 수 있는 마음은 고정된 의미망으로 부터 벗어난 구름처럼 자유로운 마음이다. 54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행복과 상대방이 원하는 행복이 다를 수가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한다. 상대방이 어느 경우에 행복한지를 읽어 낼 수 있는 감수성이 생기기를 바란다면 말이다. “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_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그렇다. 자신의 욕심을 비우고 타자와의 거리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도 시인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고 사태를 낯설게 성찰할 때에만 가능하니 말이다. 시나 사랑이 가능하려면, 타자나 자신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시인이 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자신이 마주친 사건이나 사물과 자신을 새롭게 연결하려는 욕망, 즉 사랑이 없다면 시를 쓰는 동력과 시를 쓰려는 의지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이 욕심을 없앨 때 내 시에도 진경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칸트는 자유란 “새롭게 행동을 개시할 수 있는 능력” 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68


 나만의 삶, 나만의 감성, 나만의 욕망을 되찾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침잠하면 안 된다. 오히려 외부로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외부는 어떤 식으로든지 마음을 격동시킬 테니까 말이다. 자신의 사유로 예측하지 못한 미묘한 감정이 출현할 때, 우리는 드디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다.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 153


 마음의 비밀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기도록 도와주는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무엇인가 바라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때, 그렇다고 해서 바라는 것을 포기 할 수도 없을 때 우리는 바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바로 이 순간이 제대로 된 글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모든 글다운 글에는 절망 속에 다시 강해지려는 희망과도 같은 것, 혹은 되찾은 희망속에서도 현재의 절망이 더 몸서리쳐지도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시인의 모든 시는 자신의 삶에 직면하려는 비애의 과정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여러모로 김수영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내놓은 시들은 삶의 단독성에 이르려는 치열한 노력의 흔적이나 서러운 눈물 자국이라고 할 수 있다. 163


 모든 예술가가 예술가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시를 쓰려면 독특한 생활의 방식(즉 인식의 방법)이 선행되어야”하니 말이다. 

 온몸으로 자기만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기만의 인식에 이른 사람만이 독특한 시를 쓸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이가 독특한 시를 쓰려고 한다면, 이는 단지 거짓 제스처에 불과하다. 189


 예술은 자기 이해에 도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고, 동시에 자기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삶과 시가 일치가 되어야만 한다는,  그렇다. 시는 자기 삶의 투철한 이해여야만 하고, 반대로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전망이기도 해야 한다. 192


 김수영에 따르면 진정한 시인은 “ 남의 흉내를 내지 않고 남이 흉내를 낼 수 없는 시를 쓰려는 눈과 열정을 가진 사람 “ 이어야만 한다. 192


 삶과 예술에 대한 김수영의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쉽다. 즉,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는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자기 이해에 기반을 두는 인간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정직하게 살아 내지 못한다. 물론 그것이 일순간의 안일을 선택한 비겁함 때문에 생긴 비극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투철한 사상이나 철학의 결여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삶이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통찰의 결여 말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 혹은 다른 누구의 삶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제스처, 김수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포즈”를 취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포즈’를 싫어한 시인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자신에게만 어울리는 ‘포즈’나 제스처를 만들지 못하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200


 인문(인문) 이란 말은 매우 잘 만든 말이다. 사람을 뜻하는 인과 문양이나 표현을 의미하는 문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으니 말이다. 인문학은 사람과 그의 표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사람이 눈길을 걸으면 그의 발자국이 찍히는 법이다. 발자국이 찍히지 않았다면, 그곳에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눈길에서 사람과 발자국은 항상 서로가 서로를 가리키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김수영은 “시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모두가 카다란 의미의 포즈” 라고 말했다.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 내면,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포즈’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불행히도 그에 어울리는 ‘포즈’가 만들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가 실은 타인의 ‘포즈’로 살았기 때문에 벌어진 안타까운 현상이다. 마치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발자국만 따라서 눈길을 걷다가 자신의 발자국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201


 1945년 우리 민족은 독립당하게 되었다. 216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과거의 노예가 되는 것은 정신분석학만의 가르침이 아니라 인문학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교육과 습관의 힘은 아무리 창조적인 사람이라도 완전히 떨치기 힘든 고질적인 질병과 같기 때문이다. 223


 “심금의 교류” 는 타인도 나만큼 자유롭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타인의 삶을 강제할 수 없다는 자각에 이를 때에만, 우리는 그를 감동시킬 수 있는 표현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법이다.  234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고 그것을 표현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서로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의 행동이나 표현에는 “ 전달과 노예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심금을 교류할 수 있는 언어” 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단독성=새로움=상상력’이란 기묘한 삼위일체가 성립한다. 단독적인 것만이 새롭게 느껴지고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만이 단독적이고 새로운 삶을 살아 낼 수 있다. 하긴 상상력이란 기존의 사유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사람에게는 찾을 수 없는 능력이다. 김수영이 “ 시적 인식이란 새로운 진실의 발견 “ 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37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성원들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을 본다면, 이는 자신만의 삶에 이르지 않았다는 증거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나니까 볼 수 있는 것,  이것을 봐야만 한다. 정치가의 시선도 아버지의 시선도 목사의 시선도 자본가의 시선도 혹은 과거 위대한 작가의 시선도 아니다. 오직 나만의 시선으로 사물의 진실을 볼 때, 그것은 과거에 맹목적으로 따르던 시선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시선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적 인식”이다. 시적 인식으로 발견된 “새로운 진실”은 내게도 새롭지만, 다른 공동체 성원들에게도 새로울 수밖에 없다. 아니 다른 공동체 성원들은 내가 발견한 진실을 위험하고 불온한 진실이라고 두려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모든 공동체가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새로운 진실”은 공동체가 애써 지키려는 공통된 중심을 붕괴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까. 238


 자신의 삶을 자기 스타일대로 정직하게 살아 낸다면, 우리는 타인의 삶에 공명하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 아닌가. 269


‘ 자유의 방종은 그 척도의 기준이 사랑에 있다는 것만을 말해 두고 싶습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자유는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호홉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도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환경에서는 여간 조심해서 보지 않으면 분간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사랑이 순결하면 순결할수록 더 그렇습니다. 기도가 눈에 보이지 않듯이 사랑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의 방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백이면 백이 거의 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_ <요즈음 느끼는 일> 1963.2   270


‘ 4월 26일’ 후의 나의 정신의 변이 혹은 발전이 있다면, 그것은 강인한 고독의 감득과 인식이다. 이 고독이 이제부터의 나의 창조의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뚜렷하게 느낀다. 혁명도 이 위대한 고독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혁명이란 위대한 창조적 추진력의 부본이니까. 요즈음의 나의 심경은 외향적 명랑성과 내향적 침잠 혹은 섬세성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졸시 <푸른 하늘을>이 약간의 비관미를 띠고 있는 것은 역시 격려의 의미에서 오는 것이리라. <일기초2> 1960.6.16   274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 그것을....

<시여, 침을 뱉어라> 1968.4


 한자를 분석하면 자유(자유)는 “자신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312

 현실에 대한 고민이 커질수록 현실을 극복하려는 행동을 시작해야만 한다. 330

 진정한 시, 진정한 소설, 진정한 철학, 진정한 예술은 항상 ‘불온한’ 것, 무엇인가 ‘야생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62

 

 여기서 우리는 ‘관념에서의 자유’와 ‘삶에서의 자유’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솝 우화>에는 신 포도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느 여우가 길을 가다가 맛있어 보이는 포도를 발견한다. 그런데 포도는 너무나 높은 곳에 열려 있다. 여우는 몇 번이나 뛰어서 포도를 잡으려고 했지만 도무지 딸 수 없었다. 그러자 여우는 속으로 말한다. “저 포도는 신 포도야.”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여우는 포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관념에서의 자유’다. 

 이런 관념에서의 자유는 포도를 따 먹으려는 의지를 좌절시키고, 끝내는 실천에의 전망도 봉쇄해 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도피자”나 “기만적 유심주의자”의 전략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만적 책략은 진정한 인문주의자를 만나는 순간 여지없이 좌절된다. 진정한 인문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물어볼 테니까 말이다. “여우야. 너는 먹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포도가 시다는 걸 알았니?” 관념에서의 자유가 허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여우는 어떻게 할까? 아마 여우는 지금 자신의 방식으로는 포도를 딸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포도를 따려고 할 것이다. 마침내 여우는 실천적 전망을 확보하면서 ‘삶에서의 자유’로 한 걸음 내딛게 될 것이다. 366


 모든 실험적인 문학은 필연적으로는 완전한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진보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1968.2  374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려는 이유는 항상 압도적인 권력의 억압으로부터 유래하는 자기 검열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374


 우리들의 언어가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는 것을 중단했을 때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는 것이다. 사회인의 목적은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통해서 적시에 심금의 교류를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에 지장이 되는 모든 사회는 야만의 사회라는 것이다. <히프레스 문학론> 1964  376


인간의 정당한 목적 , 바로 자유다. 그리고 새로움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그는 과거에 살던 누구와도 닮지 않고 앞으로 태어날 누구와도 닮지 않을 바로 그 자신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움과 자유의 존재론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삶에 걸맞게 새로운 삶의 스타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위기에 빠질 때 작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경고는 자유가 부정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것일 수도, 아니면 스스로 온몸으로 자유를 구가하며 자신만의 작품을 만듦으로써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간접적인 것일 수도 있다. 진정한 작가의 작품들이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벽과의 충돌을 기술하거나, 동시대 사람들의 통념을 조롱하는 전혀 새로운 삶의 전망을 보여 주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카프카가 그랬고, 바이런이 그랬고, 그리고 우리 시인 김수영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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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지는 좀 되는데, 서점의 진열대에서 발견하고 읽어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다가 내용이 좋아서 곧 서점과 도서관에서 다 읽어버렸다. 그러구선 잊고 있었는데 생각지않은 선물을 받으니 되게 반가웠다. 안그래도 이런 책은 소장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자세한 감흥은 떠오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책과 유사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 도 서점과 도서관에서 틈틈히 읽고 있었는데, 그 텀이 길어 읽은 내용이 기억나질 않는다. 

 이 두 책은 강연록의 문체로 아주 친절하게 소설과 소설가의 내면을 설명해준다는게 비슷하다. 내용이 안 좋을수 없는 책이다. 노벨상까지 받은 중장년의 소설가의 인생과 소설 이야기는 우리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순간 잊혀져가는 시간의 디테일을 함구하게 한다. 


 발췌한 것을 읽으면서 다시 음미해봐야겠다. 


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12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에게 삶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느낌을 얼마나 이끌어 내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합니다. 소설은 삶에 관한 우리의 중심 사상에 호소해야 하고 , 그러한 기대 아래 읽혀야 합니다. 34


 귀스타브 플로베르 ‘감정 교육’ 토마스 만 ‘마의 산’


 이 일상 생활을 공유한다는 느낌은 소설의 보편적 힘이 되기도 하고 한계가 되기도 합니다.  


소설 읽기의 기본적인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우리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소설가가 쓰고자 하는 시대의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둡니다.


 모든 소설가의 작품은 삶에 관한 수많은 작은 관찰들을, 개인적인 감각에 의거한 삶의 경험들을 전시하는 별자리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진짜 주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아니라, 세계의 속성입니다. 주인공들의 삶, 세상 속에서 그들이 차지한 위치,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순간순간 보고 느끼는 방식 등이 순문학 소설의 소재가 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일련의 소재들을 단어를 통해 ‘보는’것 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도 말로 표현된 적 없는 삶의 어떤 지대를 탐색해 나와 같은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이 겪는 상황, 생각, 느낌을 처음으로 단어로 옮기는 것입니다. 먼저 내 머릿속에는 사람, 사물, 이야기, 이미지, 상황, 신념,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란히 한데 모여 형성된 어떤 짜임이 있습니다. 이 짜임을 위해 상상한 일련의 뜨개질 본도 있습니다. 극적으로 표현하고 강조하고 심화시키고 싶은 상황들도 있습니다.69


소설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개성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가 그들 눈에 어떻게 보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세계가 그 사람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식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소설가로서 나의 주된 임무는 모든 등장인물과 되도록 일일이 동일화되고,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소설의 세계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설 예술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순간은 소설가가 정치적 관점이나 소속 정당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 문화,계층,성별 등에서 우리와 전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려 노력할 때입니다. 도덕적,문화적,정치적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공감을 통해 동일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71


 소설가가 지극리 ‘소박’하면서 동시에 지극히 ‘성찰적’일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작가가 될 것입니다. 


 소설 예술은 우리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우리 자신처럼 말할 수 있는 기량입니다. 

 문화,역사 ,계층, 성별의 차이를 극복하고 온갖 종류의 주인공을 창조하려는 갈망은 사실 우리 밖으로 나가 전체를 보고 발견해 내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나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신 밖으로 나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전체적으로 보고, 가능한 한 많이 보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동일화된다는 것. 이런 점에서 소설가는 광대한 풍경의 시적인 면을 포착하기 위해 높은 산으로 올라간 옛 중국 화가와도 닮았습니다. 

 소설을 구성하는 것은 전체가 보이는 상상의 어떤 관점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 상상의 관점에서는 소설의 중심부도 가장 잘 감지됩니다. 74


 나에게 소설 쓰기는, 풍경 속에서(세계에서) 소설 캐릭터들의 심리 상태, 감정,생각 등을 포착해 내는 것입니다. 


 모든 작가는 시각적 상상력과 단어적 상상력에 동시에 호소합니다. 


92`93~ 중요, 핵심.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존재하면서, 매 순간 우리 나름대로 느꼈던 경험들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당연히, 보는 것입니다. 소설 쓰기는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소설 읽기는 다른 사람의 단어를 가지고 우리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특정 장면을 눈앞에 떠올리는 과정입니다. ~ 내가 쓸 문장을 한 편의 그림처럼 내가 쓸 장면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떠올리려고 애씁니다.  시각적 상상력으로 내가 쓸 장을 한 장면 한 장면, 한 문장 한 문장 구상하면서, 나는 단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될 세부 사항에 초점을 둡니다. 


가장 적절한 단어 ( le mot juste )

소설가는 상상했던 것을 가장 잘 표현할 단어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을 상상하는 법도 배웁니다.

적절한 심상 ( l’image juste )



 소설 예술의 심장부에 내재된 핵심 패러독스는 소설가가 세상을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세계관을 표현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소설에 푹 빠져 읽을 때 세상의 소리, 냄새, 모습 들과 마주칠수록 우리는 삶에서 찾지 못한 현실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 소설에는 보거나 만질 수 있는 물건도, 냄새도, 소리도, 맛을 볼 무엇인가도 없습니다. 좋은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머릿속 한편에서 우리가 현실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감각은 그러한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 줍니다. 내 생각에 이러한 모순된 상황이야말로 우리 안에 있는 깊은 결핍감의 원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읽은 책이 강렬하고 설득력이 넘치는 만큼 우리 마음속 결핍감도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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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소설 읽는 맛인거야 ! 대단한 흡인력,  이야기를 풀어내는 입담이 대단했다. 책을 잡으면 400페이지의 분량임에도 하루안에 읽게 된다. 

 단편 소설 하나만 발표했고, 첫 장편소설인데 이 정도라니 역시 소설가는 타고난 뭔가가 있어야 되는듯. 요즘 이 작가의 수식어가 희대의 이야기꾼이던데 꽤 수긍된다.


 이 작가를 알게 된 계기는 소설가 박민규를 좋아한다는 나의 말 때문이었다. 언젠가 소개팅녀와 책 이야기를 하다 박민규를 좋아하시면 천명관의 고래를 꼭 읽어보시라고 강추했고, 헤어지고 의례 하게되는 안부인사도 잊은채 나는 그 책 만은 잊지 앉으려 노력했다. 이 책을 읽고나니 몇년전에도 대학선배로부터 똑같은 이유로 추천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고래는 그렇게 무의식의 수면을 박차고 나는 이야기가 가진 힘에 무참히 매혹되었다. 


 이야기란 바로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소설속의 한 문장이다. 


 소설의 본질이 무얼까. 문자시대에서 소설은 문학의 위치에 예술작품이 되었고, 지금의 인터넷 시대에선 꽤 고전적인 장르가 되어버렸다.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인터넷의 발달은 문자문화에서 구술문화로 역진화되었다. 구술문화의 액기스는 이야기이고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은 소설이 제격이었다. sns가 점령한 우리의 문화에서 소설은 새로운 틀을 갖고 다시 태어난다. 기존의 소설과는 다른 양상. 그것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

비문학의 원초성에 기댄다. 관념의 묘사보다는 행위를 기술하는 상황의 전개는 영상시대에 맞게 빠르게 흘러간다. 작가의 감성은 최대한 배제되고,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변사가 되어, 구수하고 걸쭉한 입담을 과시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으로써의 소설이기 보다는, 좀 더 원초적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살이 붙는 이야기의 법칙이었다. 

 


 소설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이 여인들의 인생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게 될 것이다. 소설읽기의 감동은 타인의 삶의 경험을 내재화 시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작가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라도 삶에 대한 다양한 시각으로 자신을 성찰할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 삶의 역사를 통찰하는 경험이자   심심한 삶에 재미와 상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수시로 여러가지 ~의 법칙이었다.가 등장한다. 그것은 기존의 관념에 조롱을 하는 작가만의 재치였고 전체적으로 이 작품으로 소설의 법칙을 해체시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은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복선이 깔리고 인물의 성격이 묘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것에서 벗어나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입담 좋은 변사가 살을 붙여 너무나 재밌게 이야기 해서 언뜻 무협지처럼 술술술 읽혀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진 않을까 의심할 수 있으나, 그렇게 가볍게 재밌고 말 성질은 아니다. 기욤 뮈소 같은 대중적 소설과는 다른 차원이다. 묵직한데 해학적이라고 할까.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고, 뒤의 심사평만 보아도 평론가와 기존 소설가의 호평과 질투가 드러난다. 


 여인들을 통한 인간의 덧없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판타지 였다. 성적인 표현도 얼마나 구수하고 정겨운지 시각적인 매력뿐만이 아닌 미묘한 후각 혹은 육감으로 전하는 농밀한 성적 표현이 와 닿았다.

이것은 재미난 사람의 법칙이었다. 아무튼 특별하게 재밌었다. 


 소설속의 한 문장들.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 책의 기획의도는 참 좋아보인다. 대중음악을 넘어서 이 시대의 아티스트로서의 라디오헤드를 철학적으로 접목시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저자가 여러명이듯 뭔가 사변적인 글을 모아서 그런지 편집이 산만하게 느껴진다. 내용은 좋지만 임팩트가 없는듯 하다. 철학의 풋내음 같은것도 느껴지고 뭔가 그런(잘난)척 한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더더욱 번역서이니, 읽다보면 몰입보다는 흠~ 지루한 느낌을 지울수 없다. 

 다행히도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라디오헤드 1~6집 앨범을 새로운 기분으로 청감했다. 특히 KID-A 음반 이후는 정말 오랬만에 감상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꽤 예술적이다. 1~3집의 기타팝을 좋아하지만 키드 에이의 Idioteque 라이브의 충격을 잊을수가 없다. 그것들의 가사들을 음미하고 저자들이 제공하는 철학적 상념들을 사유해본다. 그들이 어떠한 철학을 접목시키더라도 라디오헤드 음악은 가사의 메시지를 몰라도 훌륭한 예술이었다. 이 책은 그들의 음악을 좀 더 깊이, 애정어린 시선으로 감상하게 한다.

 

 국내에서 내한공연을 가장 원했던 뮤지션 1위여서 그런지 참 적절한 시기에 책이 출간된것 같다. 지산에 못간 안타까움을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음반을 반복청취하며 달랬다. 라디오헤드는 우리시대의 핑크 플로이드이고 대중음악과 예술. 사회참여가 별개가 아니란 것을 알려준다.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내용의 가사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단어는 '의지'와 '용기'일 것이다.

 어떻게 라디오헤드의 음악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대중음악이 어떻게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를 분류하다 보니 대중음악이 우리의 믿음과 행동에 미치는 효과는 꼭 의도된 게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중음악은 우리가 조리 있게 말로 옮기지 않아도 생각했던 것들을 간직할 수 있게 도와준다. 노래를 듣고 인식과 감정이 덜 분리된 어떤 상태의 감성을 간직할 수 있게 한다. 노래는 마음을 단단히 먹게 하기도 하고 느슨하게 풀어서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좋아하는 노래와 밴드는 당신이 지킬 수 있는 믿음과 하려는 행동을 지배한다. 대중음악은 거울도, 심리검사도 아니고 강의도 아니며 번역이 가능한 시 혹은 강력한 연설도 아니다. 대중음악을 통해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기는 하지만 대중음악이 하는 일은 단지 당신이 시작한 일들을 자극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아니면 대중음악은 어디선가 일어날지 모르는 어떤 심상을 마련하는 일 따위를 소화하며 대비한다. 음악이 아니었다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어떤 심상이 음악을 통해 반복되고 일깨워지면서 우리의 삶에 다시 재가동되는 것이다. 81


 음악은 우리가 이미지에게 동의하게 한다. 125

 불행을 예술적으로 묘사하면 행복의 본질에 대해 철학적으로 성찰하게 된다. 그리고 개인의 운명과 그들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사이의 관계를 추적하도록 도전의식을 북돋는다. 129


 저항은 이성 혹은 정의가 부족할 때뿐 아니라 몰이해로 인해서도 태어난다. 저항감은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저항하면서 우리는 더 나은 것을 가질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저항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지키고 그것을 존중할 가치가 있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긍정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 가치를 물려받으라고 고백하고 싶어진다. 물론 카뮈의 책에서도 함정과 위험이 있지만 그 위험과 함정들도 엄청난 가능성이다.

 카뮈는 데카르트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저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상황을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듣고 있다고 느낀다.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서로의 운명을 동일시한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가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가치라는 걸 예언하고 우리를 이해하고 우리에게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합류한다. 저항과 단결은 서로 의지한다 단결은 저항을 정당화하는데 이것이 저항의 근원이다. 저항이 요구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인정할때 비로소 저항이다. 부조리함의 고통은 더 이상 개인적인 게 아니다. 저항은 감정과 과업처럼 공유되는 것이다. 결국 저항이 지키려는 궁극적인 가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일 테니까. 257


 결국 영어를 해야한다는 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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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오는 일요일 하루종일 이 책을 읽었다. 완벽한 독서 체험이었다. 몇일전 서점에서 아이쇼핑하다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직감적으로 마음이 떨렸다.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젊은 연인 시절 이야기라니.. 주문한 책은 어제 저녁에 도착했고, 헬스장을 갔다오고 나서 차분하게 차를 마시며 책장을 열었다. (책을 사자마자 바로 읽고 이렇게 후기를 바로 쓰는 것도 참 오랬만에 바람직한 일)


 나는 동반자 동행인이란 말을 좋아한다. 인생에서 완벽한 동반자를 만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일 거라 믿는다. 사랑이던 우정이던 나의 반쪽을 만나 서로 부족한 것을 채우고 북돋으면서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는것. 또는 훌륭한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는 과정. 그것이 신이 내린 섭리가 아닐까.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46년생 동갑내기로 20살에 뉴욕에서 만난이후로 89년에 로버트가 에이즈로 죽을때까지 그들이 예술가로서 걸어온 삶의 흔적들을 세밀하게 말해준다. 사랑하는 연인이자 예술의 동지로써 가난한 두 예술가가 뉴욕의 한 복판에서 성장하는 과정은 내가 가장 흠모하던 시대인 60년대 후반과 70년대의 뉴욕에 내가 들어간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의 주인공처럼. 패티 스미스의 눈으로 첼시 호텔의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을 생생하게 만나게 된다. 어떤 예술가의 자서전 보다도 더 흥분되는 일이었다. 내가 가 보았던 뉴욕의 곳곳에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발자취를 유입시켜 60년대 후반의 뉴욕으로 시간여행을 했다. 워싱턴스퀘어, 세인트마크스, 23가, CBGB 등등..서로 의지하며 예술가로 성장해가는 그들의 모습이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정말 오랜만에 책을 읽으며 순수하게 설레이는 감정을 느꼈다. 한끼 사먹을 돈이 없어서 핫도그를 반으로 나눠 먹거나 미술관 티켓값이 부담돼 번갈아가면서 한명만 들어가서 보고 전시가 어땠는지 이야기를 해주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작업에 대한 순수한 열정. 둘의 포트폴리오를 담보삼아 첼시 호텔에 입성하고 거기서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은 전후 미국의 문화,예술의 역사를 관통하고 만들어 갔다. 돈벌이의 위기속에서 그들은 예술의 열정을 버리지 않았고 그런 그들을 응원해주고 작은 도움으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후원해주는 마음씀의 풍토가 있었다. 


 시간의 간극이 크지만 뉴욕에 있던 시절 23가 첼시 호텔 앞을 지나 크리스피 크리미 도넛가게를 간혹 가던일이 생각난다. 그땐 거기를 지나치면서 시드와 낸시를 생각했다. 다시 뉴욕에 간다면 패티와  로버트의 발자취를 쫏고 싶다. 그러나 그때의 첼시 호텔은 전설이 되었고, CBGB는 없어졌다고 들었다. 지금의 윌리엄스버그는 또 어찌 변했을지..뉴욕에서 배곪아 보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외로웠다. 뉴욕의 공기는 그런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의 고뇌가 숨쉬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세렌디피디의 그 황홀하게 달디 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버브의 비터스위트 심포니 를 다시금 듣고 싶다.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사진작가였다. 지금도 그의 사도마조히즘의 변태 사진을 보면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고전적 미학으로 사진을 가장 잘 찍는 사진가이기도 하다. 마약쟁이에다 게이 남창인 그는 인간의 선과 악을 당시 뉴욕의 가장 하위문화에 극단적으로 대입시킨것 같다. 그 미려한 꽃 정물 사진을 보다가 변태 사진을 보면 기묘하다 못해 선과 악. 추와 미가 다 모호해진다. 다들 예술의 이상향, 이상화를 꿈꿀때, 그 반대편으로 간 사람이 그다. 거칠지만 뭔가 애잔한 발버둥이 느껴진다. 세간의 논란을 떠나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신에게 솔직했고 순수하게 표현했다고 본다. 


 로버트가 찍어준 패티의 데뷔앨범 사진은 정말 최고의 인물사진인것 같다. 그들의 이야기가 잘 함축된..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아라키가 아주 싫지도 좋지도 않았었다. 항상 흥미롭고 대단한 사진가라고 여겼다. 좀 나쁜? 취향의 별종이지만 남들이 하지 않는걸 과감히 하는 걸 보고 멋지게 느껴졌다. 전세계적인 아라키의 인기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언제부턴가 아라키 사진의 매력을 알았다. 


 우리는 사회적인 도덕이나 불문율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성에 관한 말이나 표현이 항상 억압돼있다. 그래서 간혹 혈기 왕성하던 어릴적 친구들은 만나면 과도하게 음담패설을 지껄이고, 그 억압된 말의 해방감을 만끽한다. 그런것과 마찬가지로 아라키의 사진은 보통사람들에게 인간이 가진 본질적 에로틱함의 자유를 제공하는 것 같다. 포르노그래피를 포르노만은 아닌 것으로 만든 천재라고 이제는 서서히 느낀다. 


 아랫도리를 벗은 여인이 찍혀진 사진은 어떠한 속박의 굴레도 없다. 수도 없이 많은 여자들을 찍으며 그는 섹스를 모델과의 친밀함, 유대의 과정으로 여기는 듯 하다. 일본이란 나라가 가진 성의식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지만, 어떤 면에선 가식없는 그들의 솔직함이 맘에 들기도 한다. 


 집에 타쎈에서 나온 아라키의 컴필레이션 성격의 두꺼운 사진집이 있는데, 나는 간혹 어머니나 조카가 내가 없는 사이 우연히라도 볼까봐 걱정된다.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변태 사진보다야 훨씬 낫지만, 그 두꺼운 사진집의 대다수가 여자의 가랑이 사이라던가 벗겨놓고 끈에 묶여 있던가..라면 좀 정상은 아니라고 볼 것이다. 


 2000년인가 2002년 초반에 일민미술관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아라키의 전시가 크게 열린것으로 알고 있다. 이 때 신문 기사를 통해 듣게 되었는데, 세계적인 사진가여서 오프닝때, 사회의 내노라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이 모였는데, 그들의 충격이 만만치 않았던, 아이러닉한 광경이었다고 한다. 아라키의 그런 사진들이 대형 액자에 걸려있는 와중, 젊잔빼고 있으나 욹그락붉그락 거리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비친다. 


 아라키가 멋진건 그런점이다. 가식과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난 지점에 그의 사진에 있다. 원초적 욕망의 추구. 사진으로써의 소통. 노골적인 순수함.. 그런 것이 점점 마음에 와닿는 중에, 이책을 읽으니 그의 대단함이 책제목과 같이 되었다. 하나의 걸림도 없는 자유인이다. 말하는 듯한 문체는 투명한 내면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사진의 시작은 패션


 어깨에 가방을 멘 채로 찍으면 안 된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맨몸으로, 몸으로 찍어야 합니다. ‘사진 찍으러 왔습니다’가 아니라 거리에 녹아들었다는 느낌이어야 합니다. 염탐꾼이 되든가, 찍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일부러 드러내든가,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삼각대를 세우고 4X5 인치 대형 카메라로 일부러라도 확실히 찍어야 합니다. 어중간한 모습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관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은데, 예를 들어 차라도 한잔 권할 수 있는 관계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복장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진은 관계의 문제이거든요...그러니까 ‘어!’ 사진가가 왔네’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좋지 않겠지요.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 사진의 시작은 자기 자신과 가까운 대상부터 관계를 만들고 차근차근 해나가면 됩니다. 알아챈 걸 계속해 적용해나가면 사진의 여러 가지 기술과 방법을 알게 되지요. 방법론이란 건 현장에서 나옵니다. 즉흥적인 아이디어랄까, 그런 걸 과감하게 해나가는 게 좋습니다. 

사진에서는 사건이 없는 쪽에 드라마틱하고 중요한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불이야’ 보다 ‘마음의 불이요’ 가 더 중요한 것을 담게 마련입니다. 사진으로 사건을 표현하기는 쉬워요.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내면까지 도달할 수 없게 됩니다. 사건이란 것은 표층이 대단하니까요. 물론 표층도 내면을 담고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나쁘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쁜 사진이 나온다는건 결국 찍은 사람이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습이 부족한 거지요. 그만큼 사진에는 자기 자신이 속속들이 드러납니다. 정말 사진을 하다 보면 자기가 탄로 나니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서 감추는 거지요.. 성기에도 껍데기를 씌워 보이지 않게 하듯 말입니다. 진실이 보이지 않게! 


 사진이란 묘사하고 찍는 데 여러 가지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사진을 찍는다는 일은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 사람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돌아서는 타이밍 - 셔터를 누를 때는 다가서는 타이밍도 필요하지만 끝낼 때의 타이밍도 절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대목이 미움을 받을지 사랑을 받을지 나뉘는 갈림길이지요. 어렵지요. 뭔가 좋은 기운을 남긴다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내 사진에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동시에 들어가 있어요.  한 장의 사진 속에 그걸 집어넣어서, 느껴지게 해야 되는 거지요. 과거, 미래 , 현재를 한 장으로 보여주어야 해요. 


 사진은 공동 작업- 사진은 일종의 인터뷰입니다. 인터뷰라는 것이 상대로부터 무엇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사진은 인터뷰와 똑같습니다. 표현이 아닌 표출. 그러니까 상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무엇을 끌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닮게 그리는 게 데생은 아니잖아요. 기분을 데생해야지요.



 좋은 의미에서 들춰내는 폭로랄까 피사체랄까 상대가 모르고 있던 점을 찾아내서 가르쳐줄 수도 있고요. 그런 게 사진 작업입니다. 당신 부인이 이렇게 매력적이랍니다. 매일 밤 마주하면서도 모르고 계셨죠? 적당히 거리를 두고 보지 않아서 그렇답니다. 라고 말해주는 겁니다. 


인생을 바꾸고 싶으면 여자를 바꾸고, 남자를 바꾸고 장소를 바꾸세요. 자기 사진을 바꾸고 싶다면 카메라를 바꾸면 됩니다. 카메라를 바꾸면 사진이 달라지거든요. 


 인간은 과거를 짊어지고 살아가지요. 사진은 과거를 질질 끌어와 현재를 찍으니까요. 과거를 끌어오지 않는 사진은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과거는 어머니 같은 겁니다. 노스탤지어라고 하고 센티멘탈이라고도 말들 하는데 그게 없다면 인간이 아니니까요. 


 혹시라도 사람들이 제각각이고, 관계성이 전혀 없더라도 나는 관계성을 만들고 싶어요. 인간관계는 이어져야만 합니다. 


 대상은 처음부터 이미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요. 사진 찍히는 대상이란 건 그런 거예요. 음 하지만 그 이야기를 눈앞에 생생히 되살릴 수 있는 사진을 찍는 것이 관건인 거죠. 그래야 좋은 사진이랄까. 재미있는 사진이 됩니다. 


 역시 솔직한 기분으로 찍으면 좋게 나와요. 자신의 마음렌즈로 찍는 것처럼요..


 한낮의 스트로보 같은 느낌.


 프레이밍을 정확히 하는 건, 틀에 집어넣는 거잖아요. 그렇게 상자 안에 넣는 게 아니고 ‘ 이 사진은 프레이밍이 없군!’ 하는 기분이어야 하는 거지요. 


 언제까지나 영원히 종점은 없다고 할 정도로 움직이지 않으면 바로 끝나버립니다.  완성이란 건 멈추는 것이고, 그건 죽음이니까. 


 사람에게 끌리는 친근감을 가졌다는 건 실은 사진가가 되기 위한 최대의 요소일지도 몰라요. 인간성의 문제니까 말이죠.

 사람을 찍을 때는 역시 찍는 사람의 매무새 같은 것도..

 사랑받을 수 없다면 피카츄처럼 되지 않으면 안 돼요. 좀도둑도 아니면서 도둑처럼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는 하지 마세요.


 대개 아래쪽이 알몸이 되면 얼굴도 꾸밈이 없어집니다



 

 좋은 아내를 만나면 행복할 것이다.

 악처를 만나면 철학가가 될 것이다. _ 소크라테스


 책의 표지를 보고 책에 처음 읽게 되는 위의 문장을 읽고 나면, 역시 한대수 답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실로 나는 그동안 한대수(존칭을 쓰고 싶지만 편의상 여기선 생략)의 책들을 오래전부터 읽어왔었다. 이전에는 뮤지션으로써, 지식인으로써 존경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인간적인 존경을 넘어서 어떤 삶의 숭고함 까지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알콜 중독에 빠진 아내와 어린 딸을 돌보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TV에서 지켜봤을 것이다. 가감없이? 보여준 그 다큐멘터리에서 그의 고충과 따듯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한 연민 혹은 공감을 일으켰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 또한 그의 삶의 진면목을 엿볼수 있었다. 그의 굴곡진 삶에서 우러나오는 연륜은 문장 하나하나가 관조적이고 절제된 어조로 이야기한다. 자상한 할아버지의 생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히피라는 수식어 처럼 자유롭고 부드럽다. 


 갑부집 아들로 태어난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는 이미 이전의 자서전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의 부친의 일화도 인상깊었었고, 참고 기사 _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11222000217


 보헤미안으로써 늦게 아버지가 된 그의 삶의 이야기들과 세상을 보는 관점은 어떤 유명한 학자의 글보다도 진솔하다. 사진 수필집인데, 나는 수필 부분이 확실히 더 마음에 든다.

 정말 양호한 책이다. 한대수 1집 '멀고 먼 길'을 들으며 나는 양호한 생각을 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 _ 찰리 채플린

고미숙씨의 문체는 이제 너무 익숙해서인지,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금방 읽었다.  그렇다고 내용이 허접하거나 가벼운게 절대 아니다. 고전의 지혜를 바탕으로 현재 우리네 삶과 접목시키는 통찰과 혜안이 가득하다. 다만. 고미숙씨의 다른 저작의 논지와 주장이 거의 비슷해서 나는 그리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다시 좋은 말씀들을 경청하니..지혜의 눈이 밝힌다. 


 결국 몸과 마음..의 문제.  


 유익한 책 이었다. 읽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삶의 습속들을 바꾸는 계기와 자극을 심어준다. 몸의 우주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김형경씨의 책을 접하고 나서,  정신분석이란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을 심어 주었다. 사람풍경. 

좋은 이별 . 천개의 공감은 대중적으로 이미 알려진 심리 에세이 저작들이다. 이 책들을 볼 때 위로의 감응을 불러왔다. 더 나아가 그녀의 본격적 소설 작품도 읽었다. 그녀의 정신분석 과정을 들으면서 나를 파헤치고 있었다. 자기 자신과의 대면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자신의 솔직한 경험을 타인과 공유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나를 만나는 일은 중요하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잘 살기 위해서는..



 만가지 행동은. 심리 에세이 3권을 통해서.. 분석적 차원에 질문과 답을 한 것이라면.. 요번 책은. 그것의 삶속의 행동에 관한 것이다. 훈습이란 말은..'훈련하여 몸에 배게 하는 것이다.' 자기 내면의 문제를 인식하고 일상과 경험 속에서 자기를 변화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을 말한다. 불교에서의 만행을 풀어쓴 것이 이 책의 제목이다. 이론은 알지만.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지에 대한 본인의 경험담이다. 



 여행 속에서 만나게 된 일화들을 얘기하며. 이 책은 차츰 어떤 단계를 밟아 나간다. 나한테는 중.후반부가 인상이 깊었는데, 전이. 역전이. 투사적 동일시.. 이런 부분이..새롭게 다가왔다. 내 경험에 비춰보며.. 고개를 끄덕끄덕.. 그때..내 정신은 그랬었구나를 연발했다. 사실 새롭게 안 사실보다..다시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사소할 수 있는 사건이 어떻게 내게 의미를 갖게 되고 새로운 인식과 깨우침을 통해 변화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 그것을 긍정하는 삶을 배웠다. 만남은 앎의 공부를 이끈다. 



 그 과정의 끝은 결국..종교다.. 종교란 ‘으뜸가는 가르침’ 이란 뜻이라고 하던데, 가르침의 정수를 담고 있는 종교는 그만큼 중요할 것이다. 

 낯선 삶과의 마주침에서 오는 차이의 긍정.. 그리고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


이제 나는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을 가르는 기준을 하나 가지고 있다. 아마추어가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일한다면 프로페셔널은 자기에게 유익하고 즐거운 일을 한다. 아마추어가 타인과 경쟁한다면 프로페셔널은 오직 자신과 경쟁한다. 아마추어가 끝까지 가 보자는 마음으로 덤빈다면 프로페셔널은 언제든 그 일에서 물러설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내면에서 느끼는 결핍감 유무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80


 어떤 경험이나 감각이든 그것을 내면에 조용히 간직할 수 있을 때에만 그것을 자기에게 유익한 성분으로 숙성,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 혼자 조용히 머무는 사람은 신비한 지혜에 닿는다." 97


상대의 감정에 대응하는 순간, 고스란히 그와 똑같은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타인의 분노에 감염되어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일보다 허망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126


공감이나 공명도 내면을 비워 내면 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지만 내면을 비우면 타인의 지혜와도 곧바로 소통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 저 마음이 내 마음이다." " 온 인류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존재" "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는 말이 다 같은 의미..모든 타인은 존중하거나 배우는 대상일 뿐이었다. 133


 페르소나는 가면이라는 의미로, 외부적 인격, 사회적 자기 등을 뜻한다. 생애 초기에는 그것을 만들어 가져야 하고 ,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 인생 전반의 목표라 여긴다. 그러나 페르소나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니며, 그것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면 위험하고 미성숙한 사람이 된다. 군인처럼 강인함만 지나치게 드러내려 하거나, 선생님처럼 자신의 옳음만 부여 주려 애쓰게 되는 것이다.  152

 페르소나는 원형들 중 한 가지를 선택하여 그 사회에 수용되는 아이덴티티를 만든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치유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무사가 되어 인류가 만들어 둔 역할을 떠맡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원형에는 그림자가 섞여 들어 왕보다는 폭군이, 무사보다는 약탈자가, 마술사보다는 사기꾼이, 연인보다는 난봉꾼이 더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155


 훈습의 전 과정에서 두 번째로 넘기 어려운 고비는 역전이였다. 역전이를 행동화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이 역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상대방에게서 건너오는 감정에 휩싸여 그대로 반응하는 일이 많았다. 내면에 분노가 많은 사람에게 반응하여 목소리 높여 많은 말을 하고 온 날은 입맛이 썼다. 그때는 자주 '마음은 다만 거울일 뿐'이라고 중얼거렸다. 187


 충고, 탐색, 해석, 비판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말을 되갚아주는 방식으로 대응하지도 않는다. 

 우상 숭배는 욕동에 이끌려 다니는 일이고, 그것은 곧잘 중독으로 치닫는다. 

 투사적 동일시 "생각은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곳에 존재한다."

 '아드레날린 후 우울증'

 사랑엔 우연은 없다. 


 마음속의 감옥에서 학대하고 학대당하는 나의 미성숙함이 사뭇치게 괴롭다. 진실은 깔끔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오래간만에 책에 관한 포스팅이다.  아마도 그동안은    독서의 순수한 매력보다는 어떤 목적이 있어 읽었기 때문에, 책에 관한 글은 다소 마음에 동하지 않았다.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은. FEED,BACK을 위한 자양분으로써가 아닌, 아무런 기대도 없이 저자의 경험과 세계가 오롯히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때이다. 


 일요일 오전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비틀즈. 클래쉬. 밥 딜런. U2.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음악은 또다시  새로운 열정으로 다가왔다. 


 로큰롤의 열정을 다시 일깨우는 이 책은 완벽한 독서 체험이었다. 포근한 일요일 아침을 일깨우는 존 레논의 음악과 함께, 이 책은 기대이상이었다. 


 저자는 1939년 생으로 LA타임즈의 팝음악 전문기자 였다. 존 레논과 한살 차이인 그는 반세기의 로큰롤 역사를 꿰뚫는 인터뷰어였다. 엘비스 프레슬리..조니 캐쉬.. 밥 딜런.. 존 레논. 엘튼 존. 브루스 스프링스턴. U2의 보노.. 커트 코베인, 잭 화이트 까지.. 


 이 책의 핵심은 그들과 단지 뮤지션과 기자와의 관계를 넘어, 록스타의 인간적인 면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친구와 같은 관계로 발전해 진정한 음악과..로큰롤의 가치를 파헤친다는 것이다. 그가 만났던 수많은 뮤지션 중에서도.. 위에 말했던 진정성 있는 뮤지션들을 많이 이야기한다. 반평생 음악계에 몸담었던 저자의 견해와..비전은 나의 생각과도 완벽히 일치했다. 

 

 마지막 부분에.. 죽어가는 로큰롤의 가치를 일깨우줄 구세주로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잭 화이트를 언급하는 것도..나는 완벽히 동의한다.  로큰롤계의 에미넘이랄수 있는 잭 화이트는(둘 다 디트로이트 빈민가 출신)  위대한 선배 뮤지션들의 명맥을 잇는 천재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음악은 남들은 아무도 그러지 못할 때, 내가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는 이유를 주었죠." _ 잭 화이트 2007 LA 공연에서..


 책의 서문은 보노가 썼다. 존 레논. 브루스 스프링스틴 보노의 진솔한 생각을 엿듣고 싶다면.. 그리고 록 스타의 허상을 깨부시고 진정한 로큰롤의 가치를 고민한다면 이 책은 많은 영감을 줄 수 있는 책이다. 


 70대 할아버지 평론가가 쓴 이 글은. 담백한듯 검소하며, 어린 손주들에게. 반세기 로큰롤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하며 미래의 비전을 피력한다. 우리의 정신과 열망을 이끌어주는 무엇이 있는 로큰롤이 다음 세대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도록 건재한 모습을 보고 싶다..는



 " 로큰롤은 더 나은 날에 대한 약속이며 최고의 뮤지션은 의무감을 갖고 이러한 록의 정신을 세상에 퍼뜨리는 사람이다. 나는 항상 록의 자유 정신을 믿어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록 뮤지션들을 만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p.27


 " 기억에 남는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강렬한 독창성 혹은 내면 깊은 곳의 두려움과 원대한 꿈들을 용감하게 직시하는 것을 통해 우리들 각자의 희노애락을 더듬어 보도록  도와준다. 예술가들은 자신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몰두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다시 강조하자면 강인해져야만 한다. 예술가로서의 제니스는 그러한 모든 것을 갗추었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그녀는 미흡했던 것이다. 그녀는 충분히 강인하지 못했다. " p.66


 " 독창성은 미묘한 것이어서, 누군가의 단순한 솜씨가 아닌 그 사람이 갖춘 감성적 기질의 결과물인 것이다. "  p.173


 " 나는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야말로 로큰롤의 가장 위대한 특성이라고 생각하는데.. " p.176


 " 기타를 처음으로 연주할 때부터 전 제가 재능이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어요. "

 " 살아있는 느낌. 내 안에서 열망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죠. 그때 기분은 마치 철없는 아이가 거리를 방황하다가 답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로큰롤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만족을 느끼게 한 유일한 존재예요. " 176~177

 "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서만 잘 쓸 수 있는 법이죠. "

 "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자유는 그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자유다. 바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 - 브루스 스프링스틴


"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그 방법들을 생각해 볼께요.." 208


"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일들을 알고 있어야 해요. 그 중의 한 가지는 바로 행복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찾아내어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든 관계없이 그것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  383- 커트 코베인


 " 나는 가능한 한 곡들을 3차원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요. 1차원이나 2차원적인 노래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곳에 유머를 배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404 - 밥 딜런


 " 록은 리듬과 화음 그리고 멜로디를 하나로 녹여낼 수 있어요. 몸으로 리듬을 느끼고 마음으로 멜로디를 느끼죠. 그리고 영혼으로 화음을 느껴요. 이건 아주 강력한 혼합물이에요. 클래식 음악에는 화음과 멜로디는 있지만 리듬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록 음악이 더 뛰어난 거에요. 록은 아직까지도 가장 강력한 예술이에요. " 459 - 보노


 " 한때는 나 자신만을 위해 음악을 만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가끔 그건 더 큰일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마치 안테나가 된 것 같았죠. 신이나 어떤 존재가 나를 이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안테나가 되고 싶어요. 멈추지 않을 거예요. 속도를 줄여야 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너무 많은 의욕과 너무 많은 열정이 제 안에서 분출되고 있으니까요.." 460 - 33살의 잭 화이트.



 머리도 쉴겸 심심풀이도 읽었던 책인데, 역시..김영하는 글을 대단히 잘 쓴다.란.. 부러움을 한가득 남긴, 그리 나쁘지 않은 책이다. 왜냐면..책의 제목이 영화 이야기 인데.. 정작 영화 이야기는 몇 줄 밖에 나오지 않는다. 저자가 처음 부터 말했듯이.. 영화를 별로 좋아 하지 않는다. 그런데..여러 영화 잡지에서 글을 청탁 받았고..그래서 1년 동안.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영화를 보긴 보는데.. 글은 영화를 몇 줄만 언급하고 만다. 그런면에서..글 발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가지고 모티브 삼아 글을 쓴다. 딱히 영화 이야기도 아니면서. 태연하게 서술하는 그의 작가적 역량에 감탄한다.

  반면 이우일의 카툰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그런 그림을 싫어한다. 편집자가 새로운 실험을 한 모양인데. 글을 잘 쓰는 작가의 문장을 정지하고..카툰을 볼 이유가 되지 않는다.  

 김영하는 타고난 글쟁이 인 것 같다. 똑같은 이유로. 예전에 김영하의 여행자 도쿄 란 책을 보게 되었는데. 나는 이 책이..동명이인의 다른 작가가 쓴 책인줄 알았다. 신통치 않은 사진과..글을 버무린 뻔한 여행기 일꺼라고 생각했는데. 책 처음의 단편 소설을 읽다 보니까. 글이 너무 맛깔나고 재밌었다. 아마도 제목이 '마코토'? . 그 단편소설의 일인칭 화자가 여자 여서 동명의 여자 작가 인 줄 알았다. 어쩜 그리 남자 작가가 여성의 시선으로 너스레를 잘 떠는지...
 이 책에서 김영하는 롤라이 35 란 작은 필름 카메라를 예찬한다. 그 카메라로 찍은 도쿄의 사진과 글들은 딱..고만한 여행책 같다. 역시 소설가는 본연의 소설에서 빛을 발하는 셈이다. 소유한 적은 없지만..나도 한 때. 롤라이 35 의 매력에 빠진적이 있다. 김영하의 생각을 들으니..끄덕끄덕 하게 된다. 

  
 후지와라 신야의 책은 차근히 모두 읽어볼만 한 것 같다. 이 사람의 책 중에 세번째로 읽어 본 것인데, 글이 담백하고. 지적인 허세가 없는 느낌이다. 자신이 몸소 겪은 내용..본 사실을 감정적 치우침 없이 겸허한 상태로 서술한다.. 독자 입장에선..뭔가..차분하고 사색적인 느낌에 빠져든다. 이 책은 딱히 여행기도 아니고.. 그렇다고..소설이나 그냥 에세이도 아닌..분류하기엔 모호한 책이다. 90년대 옴진리교 테러와..인도여행을 통한..문명 비판. 그리고 자아성찰. 성향의 글이다. 사실. 이 책을 꼼꼼히 읽진 않았다. 좀 중구난방으로 읽어댔는데..그럼에도..이 책의 전면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글 자체가 좋아서..어느 부분을 읽어도..이 책의 메세지를 얻을 수 있다. 
 20대에 대학을 뛰쳐나와 인도 여행길에 올랐던 저자는 시스템 안에서 배우지 못하는 눈을, 젊은날 인도 여행을 통해서 발견한다. 글의 설득력과 힘들은..그러한 관조에서 오는 듯 하다. 미루마야 겐지와는 또 다른..남자, 신사의 발견이다.
 시간이 나면..이 사람의 인도방랑 이나. 동양 기행을 읽어 봐야 겠다. 

http://heeya1980s.blog.me/64955868
 
  김영민 이란 철학자를 처음 안 것은 영화 인문학 이란 책에서 였을 것이다. 글을 철학자 답게 쓰는 걸로 인상 깊었는데. 책 뒤에 단어를 철학적으로 풀이해 논 글들이 강렬했던 기억이 난다. 간결한 문장들이 바로 핵심을 찌르는 어떤 푼크툼 적 효과 라고 할까.. 그 부분을 따로 복사해 뒀었는데..못 찾겠다.

 요즘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다른 철학자 ( 강신주. 강유원 ) 에 비해. 이 저자의 글은 좀 더 학구적이다. 단어의 사용이 좀 어려워. 쉽게 휘리릭 읽히진 않으나..차분히 음미 할 수록..뜯어 보는 맛 이 있다. 전반적으론 시선 자체가..네가티브 하다. 비수처럼 찌르고 들어와 삶의 환상성을 깨부셔 버리는..철학의 본질에 맞닿아 있어.. 왠지..고독해진다.

 이 책의 초반은 아주 강렬했다. 그러나..중 후반부로 갈수록..관념놀이 하듯 좀 늘어졌다. 머리로 싸움하는 학자의 한계 같은게 느껴졌다. 구성 자체는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과도 흡사하지만. 그 정도의 구성엔 못 미친다. 대중이 쉽게 다가가기엔 부담스러운 문장들이 많으나. 이 철학자의 스타일 이라고 생각한다. 강신주나 강유원도..대중에 쉽게 다가서려는 스타일이 있는 만큼.. 그 반대의 스타일도..존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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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바로 이 스러짐의 환상극을 일러 나는 줄곧 '세속'이라고 불러왔다. 정녕 도달하고 싶은 대상은 이념으로 소실되어버리거나 현실이라는 알리바이 속에 봉인된 채, 내내 우리들은 우여찮게 곁에 있던 대상에 실없는 의미를 매겨 욕망하거나, 그 어떤 '무엇'을 닮은 것을 바로 그 닮았다는 사소하고 우연한 인연을 강조하며 과장스레 다시 욕망하는 것, 바로 이 욕망의 복합체를 일러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념과 욕망의 교착, 진정성과 모방성의 혼동, 생각과 실천의 소외에 따른 부족과 미달, 혹은 과장과 잉여를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좋아해서 어긋나고 미워해서 어긋나는 일, 빨라서 어긋나고 늦어서 어긋나는 일, 부족해서 어긋나고, 지나쳐서 어긋나는 일을 두고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7.

심리학은 어떤 경우에도 뺄 수 없는 탁월한 공부이지만, 심리학주의는 잘라 말해서 공부의 원수인데, 이를테면 심리학주의의 극점에서 드러나는 행태의 전형은 인식의 유아와 실천의 광인이다.

인식의 유아와 실천의 광인은, 그 자신의 상상적 체계 속에서 세속적 어긋남의 실제를 관념적으로 기피한다. 그 인식의 현실 적용력과 효율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정치적 프락시스가 불필요한 것이다. 그 광인은 '(타인과의) 만남' 이라는 공부의 현장에 내려서서 편의와 편차의 세속에 시시각각 시달리는 대신, 무대 위의 시적 고백과 연기에 만족한다. 가령 쿤데라가 " 인생의 어리석음은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갖는 것" 이라고 꼬집은 것이 그러하다. 세속이라는 어긋남의 현실에 단련되는 일은 싱거운 해답들을 물리치고 제대로 된 질문에 몰두하게 만든다. 그래서 쿤데라가 말하는 소설의 지혜도 "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을 갖는 것" 이다. 30

 결국 자신만의 것일 수밖에 없는 '생각'은 대게 지혜를 가린다. 실은 그것이 바로 자신만의 것이기 때문에 자신 속에서 지혜로 발효되지 못한다. 지혜라는 실천성은 이른바 '생각의 전능성' 이 균열되는 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혹은 지혜란,(라캉의 말처럼) 생각이 발견해 내는 것은 그 생각으로 하여금 발견하도록 촉발시킨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어긋남의 깨침을 태반으로 삼기 때문이다. 39

만남의 사건이 몰아오는 진리의 순간이란, 무엇보다도 '내 생각 속의 나'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지평이란 (오직) 타자를 위하여 남겨진 장' 이기에, 나와 상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건강한 거리를 얻기 위한 조건은 곧 '내 생각 속의 나' 즉 유아적 2차원의 상상적-연극적 대면관계가 무너져야 하는 것이다. 45

 타인을 향한 무능 속으로(에서) 급진 하는 인식에 겸허하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은 상상의 거울방을 찢고 나오는 일이며, 허영의 풍선을 터뜨리는 일이며, 생각과 의도와 결심의 관념적 순환으로부터 몸을 끄-을-고 살아가는(걸어가는) 길이다. 88

 왜 인간은 무대적 존재가 되었을까? 하버마스의 표현대로, 왜 우리들은 "서로에게 어떤 것을 연출하는 만남"의 형식으로 상호작용을 하게 되었을까? '불행한 의식'을 거칠 수밖에 없는 인간 현상의 당연한 결말에 불과한 것일까? 이 논의에 좀 더 적확한 형식으로 문제를 고치면, 왜 인간은 의식의 벽 이쪽저쪽으로 나뉜 채 자기가 자기에게 연출할 수밖에 없는 형식으로 상호작용의 기본 형식을 갖추게 되었을까? 물론 그것은 주로 환상 탓이다. 인간의 경우 의식이 곧 자의식이고 성찰이 곧 자기성찰이며, 성애조차 "메타-성적인 어떤 것의 육체적 표현" 이듯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욕망을 특수하고 조금은 기이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일은 곧 인간적이며 환상적이고, 이는 무대적 상호작용의 형식에 근접하게 된다. 지젝의 해석처럼 그것은 "우리들 각자가 상상적 시나리오를 수단으로 하여 일관성이 없는 타자인 상징적 질서의 근본적인 궁지를 해소시키고(시키거나) 은폐하는 방식"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이나 종교라는 가장 오래된 환상들도 결국 그(녀)라는, 그리고 신 이라는 "일관성이 없는 타자인 상징적 질서의 근본적인 궁지"를 내 욕망을 조절하고 유지하는 형식에 얹어놓고 있는 것이다.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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