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시네큐브에 갔다. 옛날에는 썰렁한 곳 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사람들로 북적대는게 안심이 되고 기분이 좋다. 언제라도 아무 영화를 골라 보더라도 믿고 감상할 수 있는 수준작을 상영하는 이곳이야말로 감성의 안식처이자 내가 조금이라도 바뀌는 계기의, 성찰의 제공처였다. 발길 가는대로 계획에 없던, 시간되는대로의 영화 관람에서 이런 재미와 감동을 주는 영화의 발견은 완벽한 하루를 이루게 했다. 


 일본영화의 전형적인 특성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상영 시간이 길고 차분하게 진행되는 나릇한 연출 스타일은 요즘의 영상환경에 역행하지만, 일상에 기반한 삶의 이야기는 사소한 행동이나 의미없어 보이는 마주침에서도 현실을 이루어가는 퍼즐을 제공한다. 시간과 공간의 압축으로 일상의 소중한 의미부여는 우리가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쓰이는 단어에 상징적으로 녹아있는 것을 들춰낸다. 


 그렇게, 일상에 쓰이는 언어(단어)를 수집하고 그 뜻을 길어올려 정의하는 일을 하는 출판사의 사전 편집부서를 그리고 있다. 

 때는 1995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과도기에, 하나의 종이책 사전을 만들기 위해 장장 15년의 각고의 노력끝에 완성되는 과정은 투철한 장인정신이 뭔지를 보여 준다. 이런 점이 일본성.일본 문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의 계승. 남의 시선이나 시대의 유행을 넘어서, 오래 남을 가치있는 일에 투신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이전에 감명 깊게 보았던 장의사에 관한 일본 영화 '굿,바이'에서의 감동과 비슷했다. (히로시에 료코나 아오이 유우 나오는 영화는 이제 설레였던 추억이 아로새겨진 느낌이다.) 


 사람과의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주인공 하지메(성실)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켜켜히 책에 둘러쌓여 있는 하숙집 방과 흡사한 허름하고 옹기종기한 사전 편집부에 영입 되어 단어를 수집하고 정의하는 일을 한다. 처음 그를 영입할 때, 전임자와 오다기리 조가 오른쪽을 설명해 보라고 했는데, 그의 말과 행동은 다른이와 달랐다. 단어, 질문을 대하는 진지함과 사전을 찾는 행동은 묘하게도 인상 깊었다.  감정 표현에 서투른 그가 하숙집 할머니 손녀 에게 한눈에 반해, 어설프지만 몸소 실천하고 깨달아 가며 사랑을 정의하게 된다. 하나의 단어, 글자의 의미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유용되어 한 인간이 발전하는지를 침착하고 유머스럽게 그려낸다. 


 그런 과정에는 사무실 동료와 하숙집 할머니 등의 조연들의 활약이 주를 이룬다. 감초 연기의 핵심은 오다기리 조의 역할이었다. 그는 실로 대단한 배우같다. 주인공 비중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이루었다. 어깨의 힘을 쭉 뺀 능청스러움은 따듯한 동료애를 느끼게 한다. 그의 연인으로 출연하는 배우는 '조제 호랑이~ '에서 장애인 여주인공 이었던, 살짝 푼수 같은 연기가 참 좋았다. 그리고 계약직 사원 아줌마의 센스 작살. 하숙집 할머니의 밝은 웃음과 태도, 편집장의 올곧음과 그 부인의 온화한 미소, 나중에 합류하게 되는 신참 여직원의 새침한 외모와 태도 변화는 하나하나가 재미와 감동을 준다. (오다기리 조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이 웨이'는 치명적 인 것 같음. 히로카즈 감독의 '기적'과 이 영화에서의 연기가 딱 좋은거 같다.)




 일례로 하지메가 하숙집 손녀딸에게 사랑 고백 편지를 써서 오다기리 조한테 봐달라고 하는데, 아마 전부 한자로 쓴 붓글씨에 경끼 하는 장면에선, 요즘 내가 붓글씨를 연습하는 입장에서 너무 웃기고 히껍하는 마음이 와 닿았다. 그렇게 인간관계에 있어 도통 어설픈 하지메의 진심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어쩔 수 없는 영화적 비약으로 압축 되었지만, 당사자들의 상징적인 말들과 태도가 참 인상 깊었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니까..가능한 일. 소심한 캐릭터의 과장은 극적인 해결의 감동을 배가시키나 너무 비약된 감이 없지 않다. 

 그렇게 부부가 되고, 서로 무릎을 꿀어 앉아 밥먹는 모습에서 정중한 태도의 일본 문화를 엿 볼 수 있었다. 이런 일본적 태도는 영화 곳곳에서 뭍어난다. 시대의 흐름 만큼 신조어의 등장과 그것을 수렴하는 일은 현재에 충실하며 다른 한편으론 일본 전통의 가치를 역설하게 만든다.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들을 지금의 관점에서 재정의 하고, 그들 각자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정의는 한권의 사전에 인생을 담은 것이다. 


 선배와, 동료, 부부에 대한 예의를 보며 타인을 존중하는 몸에 배인 일상적 태도를 가늠해 보게 된다. 또, 종이를 고를때나 5번이나 교정작업을 하는 일 등에서 세심한 완벽주의는 자신의 일에 인생을 걸은 자의 열정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이렇게 사소한듯 삶의 중요한 가치들이 많이 녹아 있는 영화였다. 사실 극장의 맨앞에 보아서 인지 초반에 깜박 의식이 잃었으나 필름의 자글자글한 입자감이 아주 푸근하게 감싸 왔다. 다시 한번 섬세하게 본다면 새롭게 보일게 많은 영화였다. 일본 영화 중에서도 매우 수작인 아주 좋은 영화였다. 영화의 원작인 소설 '배를 엮다'도 읽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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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영상 충격에 집중력이 최고조 였다. 모든 장면들이 명화를 감상하듯 경건해졌고, 아름다웠다. 빛과 색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섬세한 카메라 이동과. 미장센의 조화는 그야말로 생동하는 미술관 이었다. 표면적인 내용은 노년의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일상적 작업의 묘사가 주를 이루나, 늙음에 도사리는 육체의 비애는 엄숙하게 만들었고, 그 이면은 평범한 생노병사, 희노애락의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노년의 르누아르가 작업하는 주제는 찬동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여러번의 붓터치의 반복적인 행위로 승화시키는 듯 하다. 젊고 아름다운 생명의 기운을 잡아 채어 캔버스 위에 재현하며 굳어가는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매력적인 누드 모델 데데의 등장으로 더욱 활기를 띤다. 그러던 와중 전쟁에서 부상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 장 르누아르 또한 데데의 매력에 빠져든다. 데데는 이미 유명한 말년의 화가와 아직은 젊은이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유명한 영화 감독이 될 장 르누아르 에게 예술적 뮤즈였던 것이다. 젊은 장 르누아르가 데데 때문에 찬물과 더운물을 오가며 전전긍긍하자, 아버지 르누아르는 여성의 존재를 긍정하는 말들을 한다?. 뭐랄까 아름다운 여성을 통해 예술의 동기와 영감을 얻는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르누아르는 아직 제길을 찾지 못한 불안과 사랑에 흔들리지만, 삶을 마무리 하고 있는 늙은 르누아르는 무심히 아름다운 여인의 몸과 자연을 화폭에 담을 뿐이다. 부자의 대비를 통해 여러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삶과 예술. 그리고 여자. 참 불가분의 오묘한 요소들이다. 


 이야기는 밋밋할 수 있어도 정말 아름다운 영상과 차분한 전개에, 꽤 심상에 많이 남는 작품이었다. 이렇게 우연히 보게 되는 명작은 정말 삶의 선물이었다. 이대 후문의 필름 포럼 이란 작은 영화관 이었는데, 스크린은 작아도 공간이 작은 만큼 몰입이 잘 되었다. 뭔가 인디적 분위기 물씬 풍겼다. 주차도 운이 좋아서 특급 자리였다.ㅎ  또 언제 가보게 될 지 모르겠지만, 이날의 영화 감상은 정말 훌륭했다. 


 촬영감독이 '화양연화'를 찍은 사람이었다. 코닥 필름의 따스한 느낌과. 필름만의 진득한 색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오전이나 오후의 늬웃한 태양의 각도와 선명히 맑은 대기 때의 날만 골라서 촬영 했는데, 그런 인내와 정밀한 장인 정신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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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이 뜨거워진다. 1920~30년대 격동의 동아시아. 나라 잃은 조선인 청년 김산(본명 장지락)의 삶은, 노래 아리랑의 감흥만큼이나 뭉클했다. 이 뜨거운 감동은 민족의 비애 속에서 체념하고 타협하는 삶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길에 투신한 자의 순수한 열정과 고난의 길에서 걷어올린 숭고함 이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독후감을 쓰려는 이 시점에서 내가 사진을 표면적인 이미지의 표상을 넘어서서 바라보게된 계기가 다시금 생각났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첨부된 어느 작고 조악한 화질의 독립군 사진들 이었는데, 멍하게 이 사진들에 빠져들었다. 그 사진은 역사속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종종 책을 펼칠때마다 그 독립투사의 초췌한 모습에 전율이 들며, 사진 찍기 이전과 이후의 삶을 상상해 보았다.(한편의 영화 같이) 그들이 처한 상황은 한장의 사진에 응축돼 있었다. 이것을 해제해 버리면 내 가슴속엔 나만의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이 경험은 백과사전 첨부 사진에서 보고 느꼈던 이국적인 공간,풍경, 이색적인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선, 타인의 삶을 내 안으로 체화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간혹 홍난파 선생이나 원효대사 초상에 낙서로 영구 이미지로 둔갑시켜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했지만, 역사 교과서 사진이야 말로 사진의 진수였다.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의 책 '희망'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일제시대 조선 혁명가의 이야기에 매혹당한 그의 소개는 이 책의 발견만으로도 마음을 떨리게 만들었다. 

 개정판 표지의 사진을 보면서 위에서 말했던 학창시절의 감흥이 떠올랐다. 한장의 사진은 그 삶에 대한 호기심을 낳게 만든다. 

 김산의 삶의 이야기는 미국인 여성 작가 님 웨일즈 (본명: 헬렌 포스터 스노)에 의해 1941년에 아리랑의 노래란 제목으로 첫 출판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이 책은 이념 대립의 매카시즘으로 대변되는 반공 열풍에 쉽쌓여 공공 도서관에서 폐기되고 개인 소장 자체도 탄압을 받게 됐다고 한다. 이 책으로 인해 미지의 나라 조선이 알려지고 서구의 정치인들에게도 조선 문제를 이해시키는 단초가 됐다고 한다. 일본의 탄압이 알려지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혁명과 항일 투쟁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통해 역사적 자료의 가치도 있다. 또한 혁명가의 치열한 삶은 광풍의 역사속 한 인물의 인간적 면모를 통해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하지 않는 신념과 실패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정신의 감동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은 헬렌 포스터 스노가 김산을 수십차례 인터뷰한 구술을 바탕으로 엮어낸 전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김산을 만났을 때는 30대 초반의 그였지만 여러차례의 죽을 고비와 고문으로 인해 몸이 망가져 있었고, 실제로 얼마후 처형 되었다. 34살로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삶은 막을 내렸지만, 그의 이야기를 통해 암울했던 우리의 역사와 아리랑 노래의 한맺힌 구슬픔을 상기해 볼 수 있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던 조선의 민중은 만주, 사할린, 일본, 미국, 남미 까지 살기 위해 떠나야 했다. 김산 또한 11살에 집을 나온 이후로, 격동의 동아시아 한복판에 있었다. 그의 입을 통해서 1923년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의 전모를 알 수 있었고, 중국의 공산당 혁명의 얼레를 알 수 있었다. 그 소용돌이가 근대화된 서구 열강의 식민지화 광풍이 대외적인 요인 이었다면 어느 나라건 계급 투쟁과 토지의 분배 문제를 둘러싼 이념 싸움이 더 큰 불씨 였다. 중국 혁명에 투신한 김산의 삶을 통해 중국의 파란만장한 근대사에 흥미가 생겼다. 리영희 선생의 글을 통해 대만의 역사와 문제를 알았듯이, 젊은 모택동과 장개석의 활동에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역할은 민족문제를 넘어선 부조리한 계급, 노동자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인류애적 행동 이었다. 

 이 책을 읽고 든 의문과 나의 추측은 1919년 3.1운동 이후에 한반도에서 항일 투쟁이든, 좌.우의 이념 대립이든 유혈 투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만주나 상하이에서 독립 운동을 했고, 한반도 에선 왜놈을 몰아내기 위한 적극적 항쟁이 없었다. 민중을 이끌 수장들은 김산처럼 중국을 떠돌다 죽어갔고, 민중들은 1800년대 이래 수많은 농민운동. 전란을 통해 제 일신 하나 보위하자는 마음이 앞서지 않았을까. 우리의 자원이 고스란히 수탈당하면서도 바라만 보거나 동조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국과 마찬가지로 1910~1945,49 년 사이 내부적으로 계급 투쟁과 토지의 분배 문제의 이념 전쟁이 점진적으로 벌어지며, 항일 유혈 투쟁을 했더라면, 6.25 같은 타의에 의해 총동원된 이념 전쟁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6.25는 어짜피 거쳐야 할 과정이 터지지 않고 크게 곪아 터진 경우가 아닐까 싶다. 양반과 노예가 존재하는 뿌리 깊은 계급 사회에 마르크스 주의는 너무나 혁명적이었고 나라가 망하고 급변하면서 억압되었던 계급의식의 표출이 식민지된 현실에 봉쇄되고, 타의적으로 독립을 당하게 되자, 그제서야 터지게 된 본노의 폭발 같다. 이 계급 투쟁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역사가 말해 준다. 중국의 문화혁명. 스탈린 정권의 대숙청. 크메르 루즈의 학살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죽어갔는가. 인간의 평등과 분배의 문제가 얼마나 큰 폭력을 야기할 수 있는지 숙고해 보아야 한다. 


 다시한번, 이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문제가 얼마나 우리나라를 좀먹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친일파의 아들놈이 국회의원으로 뽑히고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를 만들게 하고 국민을 농간케 하는 이 현실. 이념을 넘어서 왜놈과 왜놈의 동조자를 처단하는 의열단이 중국땅이 아닌 이 땅에 활동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민족은 너무 착한 걸까. 그동안 하도 수탈을 당하니 그냥 체념 했던 것일까?. 왠지 반도 나라의 숙명 같기도 하다. 

 다시 아리랑으로 돌아가서 책의 중 후반부를 넘어가면서, 혁명가의 내면적 고충이 인간적으로 와 닿았다. 젊은 남자로서 이성 문제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은 너무 순수하고 귀엽기까지 하다. 혁명가에게도 사랑이 찾아오고 먹고 살아갈 당면한 경제적 고뇌에, 시대를 막론하고 가정을 꾸리는 생존의 문제는 인간의 가장 큰 관건이다. 뭘 믿든 먹고 사는 문제를 벗어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김산은 젊음을 다해 투쟁했지만 그만큼 일찍 생명을 담보잡혔다. 그가 처형 당하지 않았더라도, 고문으로 인한 건강의 훼손은 치명적으로 보인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운명을 자각이라도 했을까.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 헬렌 포스터 스노 와의 대화는 우리에게 큰 선물같은 결과로 남겨졌다.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고향을 떠나 죽어갔는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마도 임진왜란,병자호란 때의 부끄럽고 참혹한 왕실의 행태와 그 이후로 가진자들의 횡포에 대한 민중의 한맺힌 예언이 아닐까. 잊지말고 분노하자. 

 아리랑의 기원의 이야기는 이 책 60~61페이지 참조,

 김산은 우리 시대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고, 가장 추악하고, 가장 혼란스러운 대변동 속으로 내던져진 한 명의 민감한 지식인이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상주의적인 시인이요, 작가였다. 그는 아무런 환상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냉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했지만 또한 변화와 진보를 확신하였다. 고통과 패배는 그의 꿈을 없애버리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사상이 한층 깊은 의미를 지니고 타오르도록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그는 객관적인 사실의 주인공이었지 주관적인 언어의 노예가 아니었다. 육체는 빵으로 살찌지만 정신은 기아와 고통으로 살찐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에 의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만 비로소 지식인은 행동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된다. 김산은 이 약점을 극복하였으며, 그래서 지식인적 패배주의라는 질병에 희생되지 않았던 것이다. 48

 인간은 자기 욕망을 통제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욕망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나는 판단하였다. 인간은 지적의지와 사상을 가질 때에만 인간으로서 존재한다. 그 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자연에 대한 통제력뿐만 아니라 자기 육체도 통제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성에 반대되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에까지 도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183

 오류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오류란 심지어는 진리를 드러내는 데 유익하기도 하다. 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 아닐까? 왜 회의나 걱정 따위로 자신을 괴롭혀야만 하는가? 세상에는 자기에게 괴로움을 주는 적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어차피 인생은 생명을 내놓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 애태워서는 안 된다. 역사는 언제나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승리를 얻는 것이다. 396

 꿈꾸지 않고 자는 것은 행복하다. 자기 먹을 궁리나 하고 타인의 생활방식이나 삶의 목적을 묻지 말 것. 지켜보기만 하고 호기심을 품지 말 것. 

 너무나 진리에 가까운 질문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 질문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자신에게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가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신념과 오류를 지닌 채 행복하게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어라. 근본적인 질문으로 타인의 영혼을 괴롭히지 말라. 자기가 원하는 문제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답을 찾도록 내버려두어라. 397

 나는 내 과거의 경험을 분석하고 가혹한 자기성찰을 철저히 하였다. 401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내 앞에 있는 문제들의 경우를 비교하면서 나 자신의 삶과 오류와 지혜를 음미해 보는 동안 나는 자신에 대하여 강력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느꼈다. 그 때 이후 나는 한 번도 이 신념을 잃어본 적이 없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꺾인 일이 없는 용기와 힘을 지녀왔다.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내 의견과 능력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 일단 어떤 과제에 마음을 쏟기만 하면 그 일을 반드시 해낼 수가 있다. 나는 내 결정이 올바르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할 수 있게 해주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추리를 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리저리 동요한다든지 방향을 잃는 일이 절대로 없다. 결단력도 가지고 있다. 당면한 것과 역사적인 운동을 구별할 수도 있다.  

 무엇이 올바르고 참된가 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한 뒤에는 어떤 외부적인 바람도 그것을 흔들어 놓을 수가 없다. 403


 인류 역사의 전통은 민주주의적이요, 이 전통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천부의 권리이다. 그러나 이 천부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한테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는 자도 있다. 물은 사람을 빠뜨려 죽이기도 하고 구해주기도 한다. 오늘날 인간사회는 고요한 마을 연못이 아니라 성난 홍수이다. 사람은 반드시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14살 때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는 결코 물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 나는 몇 차례나 스스로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파괴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민중과의 계급관계를 유지하는 것.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중은 깊고 어두우며 행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단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소곤거리는 소리와 침묵의 웅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개개인과 집단들은 큰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그리하여 그 때문에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진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지 큰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민중들이 이 작은 목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손에 총을 잡는다. 마을 노파 한 사람의 긴박한 속삭임만으로도 충분하다. 진정한 지도력은 날카로운 귀와 신중한 입을 필요로 한다. 민중의 의지에 따르는 것만이 승리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466


 정초 부터 본의 아니게 노인 코스프레를 하게 되었다. 연휴 끝나고 바로 이어진 월요일 화요일의 강추위는 온몸을 오들오들 움추리게 만들었다. 월요일 저넉에 약속이 있어서 강남쪽으로 넘어갔다가, 약속 장소를 잘 못 찾아서, 30분을 거리에서 헤맸다. 이렇게 추울지 모르고 보통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찬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부니 아이폰의 전원이 나가 버려 더더욱 길을 못 찾았다. 요즈음 살이 붙어서 피하 지방층이 내복의 역할을 한 듯 했으나, 이런 날은 무조건 따숩게 다녀야 했다. 


 그래도 평소에 하체 단련 운동을 해왔던지라, 허리에 문제가 생길지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이 닦다가 세면대에 굽힌 허리의 뒷 쪽에 잠깐 뻔쩍 화끈 대더니 아차! 싶었다. 예전에 두어 차례 이런 적이 있어서 몇일 근육통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게 화근이었는지, 나이듦에 의한 회복의 지연 인진 몰라도 그날밤이 됐을 땐,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 똑바로 누워도 허리를 필 수 없어 웅크려 옆으로 누워야 그나마 고통이 없었다. 새벽녘이 되서야 주기적으로 몸을 돌리던 수고의 피로에 지쳐 잠 들었더니 아주 조금 붓기가 빠졌다. 


 평소에 그 흔한 감기를 잘 안 걸리는 내게, 이런 몇일 간의 고통은 건강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워줬다. 허리가 문제가 생기자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약해지고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읽고 쓰는 모든 정신적 행위는 결국 허리 이하 하체의 건강에서 비롯된 것 이라는 말이 옳았다. 머리나 가슴의 차원에서 더 내려가 하체 힘으로 오래 앉거나 오래 산책하기에서 끌어올린 생각들이 관건이다. 몇일 쉬면 회복될 걸 알기에, 체념에 빠지진 않았지만, 좀 서글퍼지긴 했다. 묵혀두었던 상념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정신을 좀먹게 했다. 자기이해와 자기성찰이 건강함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정신나간 신파가 된다. 육체의 고통은 타인(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든다. 고질적으로 허리가 아픈 후배에게 내심 응원의 마음을 전했고 ~ 글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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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영화들이 있다. 정황의 팩트, 연출의 의도가 어떠한지에 대한 비판적 분석 보다, 딱한 처지에 놓인 인간의 안쓰러움을 먼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측은지심.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근본 도리이자, 가장 큰 가치라 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자신의 생명과 자유에 대한 존중에서 우러나온다. 현대물질만능 사회의 위기는 점차 개인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의 부족이 근본적인 듯 싶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 해 질 때, 우리는 점차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마음 보단 머리가 비대해진 사람들. 자신의 사리분별판단을 앞세워 논리로 위장한 이기적 자아.. '나만 아니면 돼.'의 마음이 각별한 자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부정을 갖다 붙이기 할까. 

 이 영화가 일관적으로 비판 하고 있는 정부, 관료주의의 안일한 작태에 대한 공격에 양심에 찔려 영화에 대한 반감을 그렇게 표현하는지도 모르겠다. 공무원의 본질을 망각하고 철밥통의 벼슬아치로 군림하며, 돈과 권력에 사대하는 양반의식이 이 나라를 망쳐왔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란 걸.


 너무 거리두기의 시선에 익숙한 나머지 차가운 돌처럼 굳어버린 마음에 물어보자. 자기안에 갇힌 겁쟁이를 몰아내자. 정말. 안쓰럽고 화나지 않어?.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단순히 불쌍히 보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야말로 보다 높은 차원의 인간애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슨 직업을 가졌건 어떤 일을 하던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엄연한 픽션이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게 있다. 모르고 한 일 이라는 그녀의 범죄보다. 더 개탄스러운 이런 자들이 군림하는 이 나라. 무지 보다 더 큰 악은 알면서 하지 않는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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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극장에 갔는데, 상영 시간이 무려 3시간이어서 생각지도 못한 스릴을 느꼈다. 영화 시작부터 들고온 커피를 마셔댔더니 보통 영화들이 끝날즈음에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하지만 이 영화는 끝날 기미가 안보이고 나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자세를 뒤틀어가며 오줌보의 압박을 분산시켰다. 예전에 '아이 엠 러브'란

2011/02/09 - [영화] - 아이 엠 러브 (2009)

영화를 볼 때의 식은땀 흐르는 복통과도 견줄 수 있는 긴장이었다. 그냥 화장실 갔다 오기엔 영화의 감상 뒤끝이 개운치 않았던 경험이 있다. '킹콩'을 볼 때 그랬는데, 그 땐, 동행인이 있었기에 소지품을 신경안쓰고 갔다올수 있었다. 하지만 요번엔 감상의 개운찮음 뿐만 아니라 나 홀로 였기 때문에, 끝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기필코 (분출을) 사수하겠음. 이란 결연한 각오로 영화를 감상했다. 막판엔 과잉행동장애(ADHD)의 징후가 드러나 이 나이에 이게 뭔 꼴인가 하는 자조섞인 한 숨이, 더욱 복부를 압박했다. 아마도 그 때 내 배가 칼에 찔린다면 영화 '킬 빌'에서 피가 뿜어나오는 것 처럼 멀건 물줄기 분수쇼의 웃지못할 장관이 연출됐을 것이다. 


 상영시간이 길다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탓할 수도 없다. 왜냐면 감독의 그러한 의도가 '왜'일지 알 것 같고, 그것이 감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리뷰를 보아하니 긴 상영시간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데, 그들의 바람대로 이 영화가 보통 영화 시간이었다면, 영화속 일면에 매끈하게 드러나는 주인공들의 쾌락 놀음에 혹해 본질을 망각했을 것이다. 바보 같이 '나도 돈 많이 벌어서 저렇게 즐기며 살고 싶다.' 라고 호도 될 수 있다. 영화속 상 똘아이들의 광적인 쾌락 놀음을 세시간여 동안 무한 반복되다싶이 보다 보면, 쾌락의 동경이 아니라 '구역질과 역겨움에 인간이 아닌 승냥이들 짓거리.' 라고 개탄하고 분노해야 마땅한 것이다. 후반부에 주인공 조던 벨포트(레오 디카프리오)가 마약을 너무 많이 해 뇌성마비 단계를 꽤 길고 엽기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감독의 그러한 의도의 단적인 예 라고 보여진다. 대저택과 페라리 스포츠카, 헬리콥터, 섹스와 마약의 황홀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저게 인간이니?' 라고 묻고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속도감있게 광적인 그들의 상태를 보여준다. 사무실에서 사람(난쟁이)을 던져 다트 과녁에 맞추는 게임을 아무렇지 않게 즐기는 그들은 나찌 독일군의 살인 놀음을 연상케 한다. 여자 직원이 현금 다발 앞에 자신의 여성성의 상징인 금발 머리를 내놓아 가차없이 바리깡으로 밀리는 장면은 돈의 욕망에 굴복한 인간 광기의 처연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곤 영화는 실제 인물이었던 조던 벨포트(레오 디카프리오)가 어떻게 주식 시장에서 굴러먹었고 떼돈을 벌며 어떤 난장질의 삶을 살았는지 연대기적으로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처음, 디카프리오(주인공)에게 주식시장판의 생리를 가르치던 (배우)매튜 매커너히의 영혼없는 눈이 인상깊었다. 그의 말과 모든 행동들이 '눈뜨고 코 베인다'라는 약육강식의 무서움을 보여준다. 무기나 힘이 있는 것도 아닌, 인간의 탐욕에 기댄 허구의 가치를 말로 사기쳐먹는 이 월가의 파렴치한 행태. 주식을 해서 개인이 돈을 번다는 건, 보통 아버지들이 누누히 강조 하시는 경구인 '보증 서는 놈은 낳지도 말라?'는 말과 궤를 같이 한다. 


 이렇듯 영혼없는 눈을 가진 뜨악한 인물들이 떼거지로 나온다. 그중의 압권은 수차례 등장하는 디카프리오의 사무실 연설 장면이다. 나찌의 집회를 방불케하기도 하고, 참된 신앙이 아닌 돈을 신으로 모신 광신도 집회 같은 모습은 괴벨스나 대형 교회의 동태 눈깔 목사에게 현혹되어 돈의 탐욕에 눈이 먼 광기의 면면을 보여준다. 또 갖가지 난교 파티, 공적인 곳에서 거침없는 성행위 등등이 당혹스럽게 하는데 그중, 디카프리오의 동업자 도니가 보통 파티의 사람들 다 있는 곳에서 발기된 칵을 꺼내 그 짓하다 제지당하는 장면은 정말. 암튼 '어~휴 '하는 장면들 많다. 


 마지막 부분에 FBI 던햄? 요원이 보여준 바른 신념과 그의 눈을 통해서 보여준 지하철의 가난에 지친 보통 사람들의 모습은 잠깐이지만 큰 울림을 준다. 영화가 여태 계속 보여준 장면들과 너무 큰 대비여서 순간 이질적인 느낌이 들지만, 헛된 욕망의 눈을 내려놓고 본다면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현실이다. 주인공이 맥도날드 점원으로 일하는 평범한 인생을 최대의 수치로 여기는데, 화려한 언술로 남 등쳐먹어 배부른 그가 더 낫다고 어찌 말 할 수 있겠는가. 최악의 인간은 그처럼 남 꼬득여 눈물 단물 다 쪽 빼먹는 사기꾼들인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게 관객들에게 묻는다. 이 사기꾼의 농간에 또 당할거냐? 그에게 현혹되는 순진한 사람들의 얼굴들이 비친다. 그게 우리다. 무엇을 팔아야 하고 사야하는 이 자본주의의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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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일러 있음 -


 상상이 (미래의) 현실에 바탕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회피기제로 환상에 빠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망상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월터 미티는 수시로 망상에 빠져든다. 20세기의 유명한 사진매체 잡지 '라이프'지에서 16년간이나 네가티브 필름 편집인으로 일한 그는 마흔 두살의 무기력하고 소심한 사내이다. 그가 일하는 공간은 어두컴컴한 필름 라이브러리. 사진작가들이 전세계의 다채로운 삶의 모습들을 찍은 필름을 현상,인화,관리하는 그의 삶은 현실의 굴레에 꽁꽁 갇혀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엄마와 여동생을 부양하는 그는 너무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다. 직장과 일이 여태 그의 삶의 전부였다. 특별한 삶의 경험이 전무하다. 여행조차도 만무하다. 그렇게 현실의 퍽퍽한 삶에 갇힌 순수한 그의 유일한 낙은 상상에 빠져드는 일. 병적인 망상은 이 영화의 주연이자 감독인 벤 스틸러의 장기대로 너무나 스펙타클하고 코미디스럽게 잘 연출되어 재미를 주지만 망상에서 돌아온 월터 미티는 대인관계에서 너무 자주 멍때리는 자로 위험해 보인다.

 

 좋아하는 여직원 앞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망상의 공상에 빠지는 그에게 현실의 위기가 닥치는데, 기존의 잡지책 '라이프'지는 폐간 되고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직장을 잃을 위기다. 구조조정을 위한 신출내기 CEO 앞에서도 멍때리다가 "그라운드 콘트롤, 메이저 톰" 이라고 (데이빗 보위의 명곡 'space oddity'의 가사중, 나중에 선택의 결정적 순간에 직접 이 노래가 감동적으로 흐른다) 조롱을 받는데, 정작 그는 상상속에서나 해소할 뿐이다. 그가 당면한 문제는 마지막 호 표지에 쓰일 사진 네가티브 원본의 행방을 모른다는 거다. 마지막호 인쇄를 2주 정도 앞두고 단서를 가지고 백방으로 뛰어보지만 모두 다 허사, 그는 직접 전설적 사진작가(숀 펜)를 찾아 나선다. 상상의 벽을 깨부셔, 실제적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그의 결단은 숭고해 보였다. 그는 비로서 '라이프' 잡지의 모토인 이 문구 대로의 삶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사진작가의 행방을 쫒아 그린란드-아이슬란드-히말라야(아프가니스탄)의 환상적인 풍경속에서 그는 다채로운 경험을 한다. 상어가 우글거리는 북해의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고, 화산 폭발을 만나기도 하며, 자신의 장기인 스케이트 보드를 정말 멋지게 탄다. 


(넥타이를 반으로 잘라 양손에 돌멩이를 묶고 곡선 주로에서 스케이트 보드의 중심을 잡고 달리는 이 장면이 내겐 어떤 스펙타클한 장면보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 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그린란드의 펍에서 술취한 헬기 조종사 때문에 포기하려 할 때, 상상으로 좋아하는 여직원(쉐릴)이 나타나 기타치며 '스페이스 오디티' 노래를 부르면서 용기를 북돋는데, 그가 헬기에 뛰어들며, 데이빗 보위의 오리지널 곡 '스페이스 오디티'가 흐른다. 이 노래를 몰랐던 사람도. 이 장면에서 노래가 너무 좋다는 걸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그런 행동의 용기는 상상속 사랑의 힘 이랄까. 이때 부터 상상을 압도하는 현실속에 빠져들면서 월터의 상상은 멈춘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의 망상 보다는 현실의 경험들이 영화를 아름답게 채우면서 월터 미티의 변화 만큼이나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희열을 느끼게 된다. 결국 전설의 사진작가(숀 펜)를 찾게 되고 그에게서 삶의 정수를 듣게 된다. 정말 아름다운 순간은 목적의 집착이 아닌, 순간순간 직접 뛰어들어 가슴 뛰는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바로 저기와 여기, 이 순간에 머무는 일 뿐이라고.이 장면에서 누구는 닭살스런 교훈 같이 허세어리게 보던데, 나는 이 작품의 핵심이 여기이고, 이런 진리를 이렇게 풀어내는게 좋았다. 


 라이프지 마지막호 커버 사진으로 쓰일, 삶의 정수가 담겼다는 한장의 필름을 찾지 못했고, 직장에서 해고되었지만 해보지 못했던 삶의 경험들이 그의 인생에 채워졌다는게 중요했다. 새로 쓰는 이력서에는 짝 매칭 사이트에서 공란으로 두었던, 해본 것, 가본 것, 특별한 것을 자신감있게 쓸 수 있었다. 상상속의 자신이 아니라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신을 찾은 것이다. 둘다 직장에서 짤렸지만 좋아하는 쉐릴과의 관계도 친밀해진다. 그리고 못 찾을 줄 알았던 삶의 정수가 담긴 문제의 25번 사진 컷이 자신이 지니고 있었으나 알아채지 못했던 지갑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처럼, 그 사진은 많은 울림을 자아내게 했다. 


 디지털 세상의 변혁에 못이겨 직장은 사라졌고 실직했지만, 일에 몰두하며 그 순간에 머물러 있는 월터의 사진이야말로 삶의 정수이고, 월터 같은 모든 현대인에게 바치는 헌사 같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결혼할때 엄마에게 선물했다는 그랜드 피아노를 처신 하는 자세나, 물성을 가진 작은 필름을 찾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게, 다 어쩜 디지털 세상의 시대착오적인 고독한 모습으로 볼수도 있지만, 벤 스틸러 감독은 이런 아날로그 감성의 가치에 향수어린 애정을 부여하고 있다. 

 녹록치 않은 경제적 현실속에서도 가족애를 잃지 않는 모습은 가슴 뭉클했다. 더불어 좋아하는 쉐릴과의 상큼한 결말도 상상이 일구어낸 희망이 현실의 위기를 돌파하는 듬듬한 버팀목이 될 것이라 믿는다. 


 마치 오손 웰즈 감독의 걸작 '시민 케인'에서 의문의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였던 것 과도 같았던, 그 문제의 사진 한장을 찾는 과정이 이렇게 감동적일줄이야. 극장 상영 끝물에 봐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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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이엠의 음반은 90년대의 수많은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의 명반에 밀려 자주 듣지 못했다. 명반은 그 예술적 생명력을 잃지 않는 법인데, 미세 먼지가 휩쓴 어느 겨울날 주말, 무심코 먼지 털어 들어본 이 앨범은 감동이었다.  

 알이엠은 80년대 초부터 활동해온 90년대 얼터너티브 밴드들에겐 대 선배 같은 존재다. 

 70년대 후반의 디스코 열풍과 MTV의 시작으로 대형 팝스타의 등장. 헤비메탈 밴드들의 득세 등, 80년대의 음악씬은 정치의 우익 보수화에 맞물려 뮤지션들도 재벌이상의 돈과 지위를 가졌다. 대형 스타디움 공연과 초대형 리무진, 마약과 섹스는 그러한 천한 자본주의의 성공의 상징이었다. 


 그런 화려한 뮤직 비즈니스 세계의 이면인 언더그라운드에서, 수많은 지방 대학 축제며 동네 파티며, 누군가의 생일 파티에 초대되어 소박하게 포크,컨트리,록 풍의 음악을 연주한 밴드가 있었는데, 그들이 R.E.M. 이었다.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자기들의 음악을 하는 그들에겐 오랜 무명 생활은 당연지사. 그당시 뜰려고 음악을 했다면 강력한 꽃단장 헤비메탈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해가고  90년대 들어 일련의 신세대 음악군이 등장하면서, 알이엠은 새로운 음악군의 선구자적인 존재가 되었다. 세상이 뭔가에 홀려 있어도 묵묵히 자기들만의 토양을 일군 탓이다. 



  R.E.M.이란 밴드명은 (래피드 아이 무브먼트)의 약자이다. 램 수면 상태(잠에서 깨어나기 전의 얕은 수면 상태에서의 빠른 안구 운동)를 말한다. 수능 시험 볼 때, 영어과목 문항 중에 R.E.M.을 설명하는 지문이 나왔었다. 나는 이 밴드 때문에 그 뜻을 알고 있어서 지문을 독해하지도 않고 대번에 정답을 알 수 있었다. 매우 귀중한 시간 절약 이었다. 또 중학교 땐, 동네 조그만 음반 가게에서 알이엠 테잎 있냐니까 R.ef 테이프를 줬던 기억도 난다. 


 이 음반의 제목인 '오토매틱 포 더 피플'은 그들의 고향에 있는 한 레스토랑 주인장의 표어 였다고 한다. 누구나 무엇을 주문하던 '오토매틱'이라고 외쳤다는데, 뭔가 근면하고 투철한 서비스 정신이 드러나는 삶의 해학이 엿보인다. 알이엠의 음악도 그런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을 천명하는 것일 게다. 


 이 음반은 그들의 여덟번째 음반인데, 바로 전작 '아웃 오브 타임'을 통해서 오랜 무명에서 벗어나 존재가 급부상했었다. '루징 마이 릴리전''샤이니 해피 피플'같은 히트곡을 포함해 전반적으로 밝은 분위기의 앨범이었는데, 그 후속작인 이 음반은 그런 성공의 축포를 터트리는 대신, 차분한 발라드의 성찰적인 분위기가 다분하다. 


 동시대 다른 밴드 들에 비해 그들은 꾸밈이 없다. 음악적으로나 외향적 스타일 면에서도 너무나 담담하고 소박하다. 너무 심심할 정도여서 오히려 비슷한 시기에 출발해 세계 최고의 록밴드 위치에 오른 U2를 더 좋아했었다. 그들 다 헤비메탈시기에 모던록의 텃밭을 일군 얼터너티브의 선구자라고 말 할 수 있다. 


 알이엠의 음악을 종종 들어왔지만 유독 요즘에서야 또다른 발견을 한 기분이다. 특히 이 음반은 동양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한폭의 여백미학이 일품인 동양화를 보는 듯한 감흥이다. 높은 성량과 화려한 기교가 없어서 더욱 마음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U2 같이 화려한 색채의 마술을 부리듯한 소리와 보노의 드라마틱한 보컬은 즉각 감동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알이엠의 보컬 마이클 스타이프의 보컬은 모든 집착을 내려놓은 고승의 경지 인 것 같다. 비음섞인 음이탈스러운 보이스는 오히려 그만의 개성이다. 알이엠과 U2를 비교해서 들어보면 재밌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한의 정서와 미국 시골의 소박한 감성들이 어떻게 소리의 스타일로 구현되는지..엿 볼 수 있다. 


 보컬 마이클 스타이프는 가장 아름다운 게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동성연애자들이 탐탁지 않지만 당시 보수적인 록 씬에서 그의 커밍 아웃은 참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왼쪽 - 마이클 스타이프 

 지금 R.E.M.은 해체한 상태다. 드러머가 중간에 탈퇴하고 오랬동안 삼인조로 활동했는데, 기어코 밴드는 와해되었다. u2가 태양이었다면 알이엠은 달같은 존재였는데, 그 은은한 달빛의 여운이 너무나 아쉽다. 생전 커트 코베인도 알이엠을 매우 좋아했고, 자살하기전까지 마이클 스타이프와 공동작업 말이 오가며 전화 통화도 오래 했다고 한다. 그가 자살한 화실 안의 CD 플레이어엔 이 '오토매틱 포 더 피플' 음반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노래들에서 위로를 느꼈을까. 많은 이들이 음반의 수록곡 '에브리바디 허츠'를 들으며 위안을 가졌을 것이다. 당시 음악성 있는 밴드들은 뮤직비디오도 예술이었다. 

유투브 everybody hurts 검색 제일 처음 공식 뮤직 비디오. 

http://www.youtube.com/watch?v=ijZRCIrTgQc

 희대의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먼 에 대한 노래 '맨 오브 더 문'은 가장 좋아하는 알이엠 노래다. 짐 캐리 주연의 동명의 영화도 생각난다.


 겨울밤 차를 마시며 앉아 이 음반을 듣다보면 의식이 고양되는것 같다. 너는 나에게 차분한 떨림이었다. 




 암흑의 시대. 언제쯤 여명이 밝을지 모르는, 아니 태양(진실,진리)은 있어도 깜깜한 터널속에 갇힌 암울한 시대에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존재로 어둠에 맞선 지식인이 있으니 우리는 나름 희망을 희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패하고 무자비한 독재 권력에 기대거나 타협하지 않고 옳은 말을 소신대로 한 그의 삶은 우여곡절의 풍파가 있을지언정 그의 글을 통해, 진실을 직시하고 사람들이 폭압에 맞서 행동하게 한 사상의 근거를 이룰수 있었다. 


 그는 진정 참된 지식인의 모범이자 표상이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실로 인간정신의 위대함이라고 본다. 실존적 육체 고문의 고통과 영혼까지 파탄나는 공포에도 불구하고 그의 올곧은 시대정신과 역사인식은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정말 이 시대의 어르신 이었고 진정한 선생님 이었다. 


 여기저기 지면에 발표했던 여러 글을 모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우리의 슬픈 역사, 현실의 문제들을 상기시키고 성찰과 분노를 할 수 있었다. 우리의 훼손된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고 조금이나마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수호하는데 있어 마음가짐을 다잡게 한다. 또한 학생들의 역사공부와 글쓰기 공부는 리영희 선생님의 글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진실되다. 바른 생각의 비롯과 바른 문장의 도출은 이 책의 글을 통해 배울수 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체는 노신에게 배워온다. 


 - 노신이 그 시대의 중국사회에서 해야 할 일은 전통과 지배계급의 허위를 까밝히는 일이었다. 몽매한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는 작업이었다. 그러자면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쉬운 말을 가지고 알기 쉽게 써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물.관계를 평이하게 풀어 써야 한다. 추상적 용어를 덜 쓰고. 구체적 낱말로 표현해야 한다. 이론으로 해명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 증거와 자료를 풍부히 동원해서 제시해야 한다. 학자.전문가.교수.박사 따위의 자화자찬의 높은 자리에서 '가르쳐준다'는 교만한 자세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친절함이 원바탕이어야 한다.   ...이것이 노신이었다. 그가 글을 쓴 시대의 상황은 70년대 오늘의 우리나라 상황과 비슷하다. 정면으로 글을 쓰지 못하는 '반지성'의 시대였기 때문에 역설.해학.완곡.비유....등으로 뜻을 전한 것이 많다. 그 기법을 그에게서 배우려고 했다. [{우상과 이성} 일대기] -


 -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우상과 이성]에서 -



  아직은 독후감을 쓰기에도 벅차다. 너무나 많은 촌철살인의 글귀들은 깨침의 연속이었고,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의 진실 이었다. 그 당연한 논리의 귀결은 우리의 참된 민족정기의 회복이고 나아가 자기 완성의 길이다. 여전히 진실을 왜곡하는 지배체제의 언설에 혹하지 말고 진정한 마음으로 무엇이 옳은 말이고 참된 길인지 숙고해 보자. 


 - 남베트남의 사실을 통해서도 역사는 '과거지사'가 아니라 현재를 규정하며 내일에 영향을 미친다는 평범함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다. 이 같은 역사의식은 거꾸로, '오늘'(현재)을 바로잡고 '내일'(미래)에 착오가 없기를 바란다면 과거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과거는 묻지 마세요"가 아니라 "반드시 과거를 물어야 한다"는 말이다. - [해방 40년의 반성과 민족의 내일] 389


 리영희 선생은 2010년 12월에 돌아가셨다. 생전에도 많은 이들이 선생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갈구하고 나아갔듯이 지금의 우리에겐 더더욱 절실하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본 책이지만, 새로 구입하고 틈틈히 읽고 또 읽어야 겠다. 그리고 한번의 감상문이 아닌 수시로 독후감을 써야할 책이라고 여겨진다. 진실한 마음과 이상을 가진 친구에게도 자주 이 책을 선물 해야겠다. 김수영의 산문집도 그렇고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발견은 삶을 단순한 유희를 넘어 엄숙하게 보게 한다. 그것은 개인의 영달만이 아닌 것에서 오는 반성이자 '무엇을 위해서'란 실존적 행동 추구의 용기이다. 나는 정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짐 자무쉬 감독의 신작이다. 새로 나오는 영화 소식을 수시로 챙기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에 영화가 지나쳐 버리는게 요즘의 극장 환경이다. 뜬금없이 짐 자무쉬의 신작을 알게 되었고, 바로 달려가서 봤다. 평소 길눈이 그리 어두운건 아닌데, 지하 주차장에서 만큼은 엘리베이터를 찾거나, 다시 내 차를 찾을때 꽤나 헤매는 타입이다. 그래서 광고 시간을 지나, 영화가 조금 시작한 지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거 되게 싫어하는데, 차타고 편하게 온게 시간절약 보다는 시간 관념을 상쇄 시켰고 결국, 그렇게 주차장에서 소비된 시간들은 현대 생활의 아이러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짐 자무쉬 영화이고 틸다 스윈튼이 나온다는 것만 알고 들어가서 바로 앞 줄 빈 자리에 앉으니, 뮤지션으로 보이는 퀭한 남자가 고풍스런 음악 작업실에서 멋드러진 기타들을 상대 남자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기타를 매우 좋아하는 내게는 너무나 설레이는 장면인 것이다. 주인공이 그레치 기타의 챗 에킨스 모델을 꺼내 설명하고 튕길 때에는 이미 영화속으로 무한 몰입 됐다. 


 짐 자무쉬의 영화들이 그렇듯, 느릿한 템포, 한량의 호홉속에 깨알같은 재미가 녹아 있다. 음악과 문학, 예술에 대한 탐미적인 애정의 시선 뒤에는 그것에 대한 조롱과 냉소의 함의가 깔려 있다. 어쩌면 감독의 내적 자화상 같이 느껴진다.


 이건 추측인데, 주인공 아담의 캐릭터의 모티브는 잭 화이트

2012/05/28 - [음악] - Jack White 잭 화이트

에서 나온것 같다. 배경이 디트로이트이고 빈티지 악기와 아날로그 음향 장비에 둘러쌓인 뱀파이어 뮤지션. 이전 작품인 '커피와 담배'에서 잭 화이트가 출연하기도 했고, 톰 웨이츠나 이기팝 같은 뮤지션의 출연이나 음악 사용, '데드맨'에서의 닐 영의 영화음악 등등으로 봤을때, 짐 자무쉬의 음악 취향이 유추된다. '리미츠 오브 콘트롤'에서는 기타에 대한 애정을 엿 볼 수 있었다. 


 언젠가 잭 화이트의 창백한 얼굴과 천재적 음악 재능을 보면서 '저 사람은 뱀파이어가 아닐까?' 란 상상의 의문이 들기도 했었다. 특히 음악 분야에서 외계인이나 뱀파이어 일 것 같은 천재가 많이 포진해 있는거 같다. 이런 생각들이 영화 보는 동안 의식의 저변에 흐르는 도중, 너무나 반갑게도 진짜로 잭 화이트가 언급되는 장면이 나왔다. 주인공 아담이 애인 이브(틸다 스윈튼)에게 자동차로 디트로이트 를 구경시켜주는 장면에서 작고 평범한 어느 미국 주택을 가리키며 '저기가 잭 화이트의 어릴적 집이다. 저 곳에서 7번째 아들로 자랐다'고 이브에게 설명해 준다. 그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물론 나만의 감동이겠지만, 짐 자무쉬 감독과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말 나온김에 하나 더 말 해 보자면, 이브의 동생 에바가 아담의 집을 깽판쳤을때, 1902년산 깁슨 L2 란 어쿠스틱 기타가 부서졌는데 이브가 부서진 기타를 주워들고 무심히 보다가 '기타 보디 안 쪽 의 디자인이 너무 아름답다'라고 뜬금없이 찬탄 하는 장면에서 진심으로 감독을 존경 했다. 저런 애정어리고 능청스런 은은한 유머는 짐 자무쉬 만의 개성 이다. 


 이 영화의 일면은 이렇듯, 나를 매혹시키는 것들로 포진 돼 있다. 아니 문학과 음악, 예술에 관심있는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어떤 로망같은 존재로 뱀파이어 주인공들은 그려진다. 그들은 인간세계에 있지만 현재의 삶에서 유리된, 먹고 사는 일에 빗겨나 있는 매우 나이브한 예술 탐미주의자들이다. 

 아담은 하루종일 전위적 음악을 작곡하고 이브는 독서에 빠져있다. 뱀파이어의 본능인 피에 굶주려 사람을 포악하게 잡아먹는 생존을 추구하지 않는다. 고정 거래처에서 편리하게 돈주고 사먹는 피도 앙증맞은 잔에 빼갈 마시듯 흡입하고 마약에 취한 모습을 보인다. 또 피로 만든 아이스바를 먹는 장면도 밥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엿볼수 있다. 아담과 이브란 이름에서 유추되다싶이 오랜 영생을 누린 뱀파이어의 정체성은 염세적인 고상함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원초적 본능인 피에 대한 욕구는 어쩔수 없이 반응하게 되는데, 그들에겐 사람을 직접 잡아먹는 짓은 천박한 것이다. 




 예술과 역사에 달관한 그들에게 현재의 삶은 가치없는 무상함 이다. 그래서 철저히 인간을 좀비라 부르며 현재의 삶의 행태를 저주하고, 과거속의 예술의 영광에 빠져 지낸다. 특히나 아담의 집 배경의 유명 예술가들 사진들이나, 모든 소품들을 보면 노스탤지어의 추구가 물씬 풍겨난다. 시간이 가진 흥망성쇠의 아련함을 깊이 천착한 그는 역사의 유명한 뮤지션들이 그랬듯 자살을 꿈꾸며 유일한 인간 조력자에게 나무로 만든 탄환을 세세히 설명해 가며 주문한다. 자기 음악의 팬이 집앞에 서성이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인간의 클럽에서 썬글라스와 가죽장갑으로 우스꽝스럽게 스스로 유리시킨다. 점점 나를 매혹시켰던 영화속 주인공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 의문이 가기 시작한다. 


 아담과 이브의 이러한 여러 정황들이 현실의 본능에 충실한 이브의 동생 에바의 등장으로 극명히 대비되는데, 그들의 삶의 행태가 예술가, 지식인들의 허세어린 표정들이란걸 점점 깨닫게 해준다. 그것의 확실한 단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의 제목과는 상반되는 장면이 연출되며 영화가 끝나는걸로 확인된다. 

 에바가 죽인 인간의 시체를 처리하고, 어쩔수 없이 모로코로 돌아온 아담과 이브는 이브에게 피를 공급했던 뱀파이어 조력자 말로가 상한 피를 마시고 죽어버리자, 정말 대책없어진다. 남은 돈을 아담에게 줄 악기를 사는데 써버리고, 허기져서 기운 없어진 그들 앞에 키스를 나누고 있는 인간 연인의 사랑스런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사람을 잡아먹는 포악한 그들 본래의 모습으로 화면은 정지되고 영화가 끝나는데, 여기서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속물근성이 들통난 기분.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의도했던 지점이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의 허세와 진짜 삶의 문제를 자기도 각성하고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진짜 사랑은 현실의 삶의 사랑이지, 예술속의, 책을 따라하는 삶이 아닌 것이다. 기름종이의 이면 같이 빤히 보이는 원초적 욕망은 예술이고 나발이고 지금 내가 살고자 하는 욕망 앞에선 모두 다 허세에 불과한 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예술을 부정하고 폄훼하는게 아니라, 예술에 내포된 위험성을 말하는 것이다. 실존의 문제를 망각한 삶의 모습은 블랙 코미디인 것이다. 

 그리고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순혈의 생명성을 강조하는것 같다. 언어유희의 수수께끼 같은 결말, 역시 멋진 작가다. 


 자칫 이 영화의 나른한 분위기에 취해 감독의 메시지를 놓칠 수 있었다 라는게 내겐 함정이었다.

 너무나 재밌는 영화 관람이었다. 틸다 스윈튼의 외모를 유독 감탄하며 보게 되었다. 얼굴의 골격이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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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당찬 제목이다. 삶의 아나키적인 저 문구와 이미지는 경각심을 일으킨다. 유한한 우리 삶에 임하는 태도는 제목의 추가 설명대로 인생이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_ 그럴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를 참 인상깊게 읽었었다. 

2011/07/24 - [책] - 소설가의 각오 _ 마루야마 겐지 산문집


 작가로서의 줏대, 아니 한 사람으로서의 주체적인 인생 철학이 너무나 강렬했었다. 


 이 책은 더하다. 마치 작정하고 회초리를 들어 젊은이들에게 매질을 하고 있는 듯하다. 

 70이 넘은 꼬장한 노인의 말들은 살아있다 못해 독기가 느껴진다. 

 그만큼 현재의 나약한 청춘 군상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적잖이 당혹스럽지만, 내 삶을 돌이켜보고 삶의 태도와 정신을 바짝 추스리는데는 이런 독설이 응급약이다. 

 흔한 힐링 이나 다정다감한 멘토의 위로로 무엇이 개선되겠는가. 다 장사꾼 일 뿐. 백권의 자기계발서 보다 이 책 한 권이 내겐 유효해 보인다.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이 책으로 처음 접하는 사람은 거부감이 많이 들 것이다. 니가 뭔데 극단적인 인생론을 지껄일까 라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삶의 경험으로 온전히 들어가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카프카의 다음 문장은 여러 모로 이 책과 닮아 있다. 

나는 오로지 꽉 물거나 쿡쿡 찌르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하러 책을 읽겠는가?........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카프카.












 삶의 혁명을 꿈꾼다면 사심없이 이 책을 읽고 행동 하자. 망각의 늪에 빠질 때마다 이 책으로 정수리를 갈겨 보자. 



 이제서야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처음으로 집어든 것이 이 책이다. 도서관의 장기 휴관으로 한 보따리의 책들이 몇달간 방에 있었는데 반납이 코앞에 들이닥쳐 재빨리 읽게 된 책이다. 그래서 이 글도 맛뵈기 정도이고, 그의 다른 대표작을 섭렵하고 다시 읽어보려 한다. 왜냐면 그의 작품세계의 시발점, 열쇠가 되는 작품이란다. 대문호라 칭해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이렇게 시간에 쫒겨 얼렁뚱당 읽어댔지만 이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졌으니 어쨌거나 좋은 효과다. 


 왠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되게 고루하게 느껴지고 지레 부담을 느끼게 마련인 것은 나만 그런 것인가? 우연하게 이 책을 접하고 소설 문학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그들의 문턱에 다다러 이제 문을 열어 보고자 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예전에 강신주 철학박사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접하는 것은 시절인연이 중요하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 자칫 너무 어린 나이에 접하면 안 좋을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이제야 대문호라 일컬어지는 그의 소설을 읽을 정신의 근기가 되었나?.


 원래는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인상깊게 읽고 거기서 소개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어봐야지 머리에 저장해 두었다가,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고 그 책인지 착각하고 빌리게 된 것이었다. 


 여하튼 이 책의 첫장 첫 문장을 읽는데, 어라! 되게 현대적인 것이었다. 마흔의 남자가 되는 대로 지껄이는 문체인데, 이 사람의 20년째 찌질한 루저의 삶을 살고 있는 넑두리를 듣게 된다. 그의 과잉된 푸념은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다가도 조장된 분열을 일으킨다. 문체는 속도감이 있지만 간혹 1인칭 관념의 시점이라 철학적 고민도 있고 어떤 부분은 병적인 자의식의 과잉으로 버거운 부분도 있다. _그는 살아 있는 삶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채 오직 이념(관념)만, 즉 '말'만으로 존재한다._역자 해설 부분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세계에서 전환점이 된 소설이며 최초의 실존주의 소설이라 일컬어진다. _ 책 뒷 표 지

 


1부 마지막 챕터 부분에서


" - 당신이 정말로 고통 받았던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자신의 고통을 조금도 존경하지 않소. 당신의 내면에 진실은 있지만, 그 내면에 순결함은 없소. 당신은 아주 시시껄렁한 허영에 사로잡힌 나머지 괜히 과시하기 위해 당신의 진실을 시장바닥에 내놓고 치욕을 자처하는 거요...... 당신은 정말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서도 겁을 집어먹은 까닭에 최후의 한마디를 감추는데, 이는 당신이 그걸 입 밖에 낼 결단력은 없고 오직 겁을 집어먹은 채 시건방지게 굴 줄만 알기 때문이오. 당신은 그놈의 의식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지만 실은 그저 망설이고 있을 뿐인데, 이는 당신의 머리는 작동하고 있으되 당신의 마음은 방탕으로 인해 어둠침침해졌기 때문이오. 깨끗한 마음이 없으면 완전하고 올바른 의식도 없는 법이라오. 당신은 또 남한테 어찌나 끈덕지게 달라붙는지, 또 남을 어찌나 귀찮게 하는지, 또 어찌나 오만상을 찌푸리는지! 허위, 허위, 허위올시다! "

 물론 여러분의 이 모든 말은 지금 나 자신이 지어낸 것이다. 이것도 역시 지하의 산물이다. 나는 거기서 사십 년 동안 계속 여러분의 이런 말을 문틈으로 엿들어 왔다. 이것도 다 나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이지만, 실상 오직 이런 것만 생각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딱히 놀랄 것도 없지, 달달 외울 정도가 되다 보니 자연스레 문학적 형식을 띠게 된걸....... 



2부 소설의 결말


 이 '수기'는 여기서 끝내야 되지 않을까? 내 생각으론 이런 걸 쓰기 시작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적어도 나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부끄러웠다. 다시 말해, 이것은 문학이 아니라 교도 감화를 위한 징벌이다. 사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령 내가 지하의 구석방에서 정신적인 부패에 시달리고 환경의 결핍을 맛보며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유리되어 허영심 가득한 분노나 키우고 그럼으로써 정작 삶을 놓쳐 버린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것은 맹세코 재미없는 일이다. 소설에는 주인공이 필요한 법인데, 여기서는 일부러 반 주인공에게나 걸맞은 특성만 몽땅 모아 놓았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불쾌한 느낌을 준다는 점인, 이는 우리 모두 삶으로부터 유리된 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너나할 것 없이 다 절뚝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나 많이 유리되었는지 진짜 '살아 있는 삶'에 대해서는 때때로 어떤 혐오감마저 느끼고, 또 이 때문에 누가 우리에게 이걸 상기시키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다. 실상 우리는 '살아 있는 삶'을 노동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거의 업무로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다들 속으론 책에 따라 사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는 쪽에 동의한다. 왜 우리는 이따금씩 옥신각신하는 걸까, 왜 변덕을 부리는 걸까, 대체 왜 뭘 요구하는 걸까? 우리 자신도 왜인지는 모른다. 어떻든 우리의 변덕스러운 요구를 들어준다면 우리는 오히려 더 나빠질 것이다. 자, 시험 삼아 우리에게 가령 자립성을 좀 더 많이 주고, 우리 중 아무나의 손을 풀어 활동 범위를 좀 더 넓혀 주고, 보호의 강도를 좀 더 낮춰보라,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말하지만, 당장에 우리를 다시 원래대로 보호해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자, 여러분은 나한테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면서 두 발을 쾅쾅 구를 것이다. 나도 잘 안다. "당신 자신의 얘기만, 당신의 비참한 지하 생활 얘기만 할 것이지, 감히 우리 모두라고 둘러대진 말라." 라면서. 죄송하지만, 여러분, 이 모두란 말로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 자신으로 말 할 것 같으면, 나는 실상 여러분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에서 극단까지 밀고 나갔을 뿐인데, 여러분은 자신의 비겁함을 분별이라 생각하고 이로써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생기로운' 셈이다. 그럼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보라! 실상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한다. 지금 대체 어디에 살아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또 그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를 단 한 권의 책도 없이 홀로 남겨 둬 보라, 그럼 우리는 당장에 갈팡질팡하고 어리둥절해질 것이며, 어디에 합류해야 하고 무엇에 따라야 할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할지, 무엇을 존경해야 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할지 통 모를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조차, 자신만의 진짜 육체와 피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한다. 이것이 너무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나머지, 지금까지는 존재한 적도 없는 무슨 보편 인간이 되려고 안달복달한다. 우리는 사산아, 더욱이 이미 오래전부터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아버지에게서 태어나는 존재이며, 또 이것이 우리는 점점 더 마음에 든다. 취향에 맞는 모양이다. 조만간 우리는 어떻게든 관념으로부터 태어날 궁리를 할 것이다. 하지만 됐다. 더 이상 '지하에서' 이렇게 쓰고 싶지 않다.....


 


 기대했던 대로 아주 훌륭한 라이브 공연을 감상했다. 써드 스톤을 알게 된건 그들의 두번째 앨범(2009)을 통해서 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지미 헨드릭스나 스티비 레이 본, 존 프루시안테의 기타톤과 연주에 흠뻑 빠져있었다. 소문으로 국내에도 제대로 블루스 록을 하는 밴드가 있다고 들었다. 오리지날 62 스트라토캐스터와 빈티지 펜더 앰프 사진의 표지는 강한 직감이 왔다. 정통 블루스 록에서 한국말 가사가 나오는게 신기했다. 그래서 더욱 정감있게 공감됐다. 역시 빈티지 기타의 투명한 기타톤도 훌륭했다. 
 이번 공감 공연은 세번째 앨범 발표를 위한 것이고, 아마도 첫번째 방송 출연이면서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써드 스톤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는 역사적 무대가 되질 않을까 싶다. 


 이제 까지 국내에서 정통 블루스를 하는 음악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김목경, 로다운 30의 윤병주가 명맥을 이어왔다면, 요근래 들어서 은근히 블루스가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 같다. 김대중 이란 걸출한 불루스 맨을 알게 되었고, 찰리 정의 기타 연주와 하현진의 델타 블루스도 인상 깊었다.이런 분위기에 내공이 탄탄한 써드 스톤이 그 흐름을 이끌어 갔으면 좋겠다. 

 블루스, 블루스 록은 대중음악의 뿌리이지만 국내에서는 유독 인기가 없었다. 비틀즈 팬은 많아도 롤링 스톤스 팬은 그리 없다는 것도 이땅의 블루스 인지도가 얼마나 형편없다는 걸 말한다. 신중현씨가 지미 헨드릭스를 흠모하며 미8군 클럽에서 연주하며 가요계의 초석을 일구며, 블루스와 록 음악을 통해 삶의 회한과 자유 정신을 호소했다. 블루스-포크-록 으로 이어지며 자유와 낭만으로 대변되는 청년문화는 곧,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나이트 클럽의 음지로 숨어들었다. 우리나라의 밴드 음악 문화는 유흥업소의 슬픈 딴따라로 치부되었고, 청소년기에 기타에 관심을 가졌다간 부모와 의절할 각오를 했어야 했다. 그래서 기타라는 악기는 자유와 저항을 상징하는 것이자 미래의 폐인으로 가는 관문이란 인식이 기성세대에겐 다분했다. 따지고 보면 밴드 음악의 몰락은 군바리 독재하의 문화 말살 정책의 폐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지금도 언더그라운드에서 밴드 음악을 하는 많은 기타 키드? 들을 응원한다. 

 써드 스톤의 기타겸 보컬 박상도씨의 외모는 고독한 블루스 맨의 영혼과 70년대 초 브리티쉬 록 기타리스트의 아우라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2집 활동하고 나서, 기타 하나 달랑 메고 미국을 여행하며 느낀 것들을 3집에 담았다고 했다. 블루스의 본고장 미국에서 깨달은 바는 힘들게 일하는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닌 미국인을 위한 블루스를 연주하는것에 의문과 회한을 느꼈다고 했다. 그런 깨달음은 한국에 돌아와서의 활동에 자극제가 된 것 같다. 곡 중간에 담담한 짧은 멘트 속에는 블루스 맨의 삶의 고행이 느껴졌다. 뜨기 위해서가 아닌, 진정한 자기 음악을 하려는 진지함이 보기 좋았다. 이 공연을 위해서 얼마나 실력을 닦고 갈았을지. 초반부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번 앨범은 싸이키델릭 블루스 록이다. 포스트 록의 냄새도 나기도 한다. 전작에 비해 다소 어둡고 무거워졌다. 미국에서 느낀바가 그리 밝지만은 않았던 듯 하다. 노래는 더욱 원숙해져 있었다. 혼신을 다해 무아지경에 초대하는 그들의 노력에 열띤 박수를 보냈다. 아직은 대중들에게 생소한 밴드 이지만 그들은 게이트 플라워즈 정도의 인기와 평단의 찬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공연에서 다만 아쉬었던 점은 퍼즈 먹인 기타톤에 딜레이나 리버브 등의 공간계 이펙트를 많이 먹여 부유하고 몽환적인 사운드를 내고 있는데, 어떤 부분은 기타 솔로가 훌륭한데도 명료하지 않게 들렸다. 보컬의 이펙트도 조금 많은것 같았다.요즘 밴드들의 라이브를 보면 전반적으로 기타의 음량이 적은듯한데, 써드 스톤도 좀 더 강렬하게 기타가 튀어나와도 좋을 것 같다. 앰프를 스테레오 효과로 사용해도 좋을 듯 하다. 하나는 다이렉트 톤 다른 하나는 공간계 이펙트 물린것을 무대 양쪽으로 벌려서. 스티비 레이 본 도 클린톤과 드라이브톤을 이렇게 각각의 앰프로 나눠 스테레오로 했다고 하던데.. 
 공연이 끝나고 바로 로비에서 음반 판매와 사인회를 가졌다. 우리 일행 셋이 가장 먼저 사인을 받았다. 좋은 공연을 보았고 답례와 응원을 보내며..  
 공연표를 양도해 주신 얼굴 모를 두 분에게도 매우 감사한다.


치킨 과 맥주를 마시며 공연의 감흥을 나눴다. 세속의 성공을 떠나서 자신의 길에 올인 하는 모습에, 우리는 진정 멋있는 자 라고 동의 했다. 내 인생을 걸 수 있는 것.. 과연 우리는 그것을 찾았을까. 찾고나 있을까.



사진 출처 : http://daru7893.blog.me/80201454237



 이 책 무척 훌륭하고 유익하게 읽었다. 고미숙씨가 대장으로 있는 공부 커뮤니티에서 나온 결과물이래서인지 주장하는 바도 비슷하고 전체적인 문체도 흡사한 일관성이 있다. 그 영향아래 있지만 언어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지식과 생각해 보게 함은 언어적 존재인 우리의 근본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영감을 이끌어내는 면이 좋았다. 

읽은지 몇달이 지나서 자세한 감흥이 흐릿하지만 나중에 꼭 다시 읽어 볼 책이다. 몇달 묵혀두었다 반납이 코앞이라 마킹해 두었던 부분을 다시 읽어 본다. 



 파동 상태의 물질이 우리가 관찰하는 순간 입자의 형태로 포착되듯이, 언어는 유동적인 사건의 세계를 하나로 고정하고, 뒤섞인 채 존재하는 사물들을 독립적 실체로 분절한다. 원래부터 나는 '나'로, 너는 '너'로 존재했던 게 아니라 '나'와 '너'라는 명명을 통해 나와 너가 분리되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다. 강조하건대, 언어는 사물과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중립적 도구가 아니다. 인간은 명명을 통해 세계를 격자화하고, 사물들을 특정한 좌표계에 고정시킨다. 

 언어는 힘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행위와 사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기도 하다. 고등학생, 남자, 여자,장남,모범생 등의 '꼬리표'를 떼고, 그 말들의 용법을 무한히 확대시키면서 새로운 언어게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새로운 것을 행하는 것이고, 새로운 신체를 갖게 되는 것이며, 새로운 세계-새로운 삶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43-44


 언어를 새롭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수많은 '나들'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단 하나의 '나'를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여기저기를 넘나들면서 때론 사슴이 되고, 때론 나뭇잎이 되고, 때론 바람이 되기. 그렇게 무수히 많은 존재들과 교감하면서 '변신의 왕'이 되기.  58


102-103,  122 


 물론 기존의 것을 단지 부정한다고 해서 '위험한 책'이 되는 건 아니다. 정말 위험한 건 사람들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변하게 하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게 만드는 책들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위험함'은 낡은 가치에 대한 부정 못지않게 새로운 가치의 창조에서 감지되는 힘이다. 


 나는 오로지 꽉 물거나 쿡쿡 찌르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하러 책을 읽겠는가?........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카프카.262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부정하는 용기다. 무엇을? 예전의 나를, 변하지 않는 나를, 반복되는 명령을, 날 가두는 감옥을, 획일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꿈을. 어떤 작가가 예전의 명성에 갇혀 변화하려 들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예술가들이 당대의 예술적 관습을 충실히 따르기만 했다면 새로운 예술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옛사랑의 추억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부정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부정 없는 긍정은 대단히 무력하다. 카프카 소설의 힘은 '되기'를 통한 부정의 힘이다. 348


 달리는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돼


"어휴-" 하고 쥐가 말했다. 

" 세상은 매일같이 좁아지고 있어. 처음에는 너무나 넓어서 두려웠지. 한없이 달리며, 좌우로 멀리까지 담장이 펼쳐져 행복해했었지. 그러나 그 긴 담장들이 어찌나 빠른 속도로 마주 달려오는지, 어느덧 나는 막다른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구석에는 내가 달려들 덫이 놓여 있어."

" 너는 달리는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돼." 하고 말하며 고양이는 쥐를 잡아 먹었다. 


카프카의 [작은 우화] 전문.



 




  일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본의 영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의 문화,예술의 전통과 세계적 입지를 부러워하는 글을 썼는데, 마찬가지로 일본의 사진작가 히로시 스기모토는 현대 사진의 대표적 거장으로 전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가 되고, 그의 작업들은 사진계에서 많이 화자되는 스타 작가이다. 


 유럽에서 얼마간 살다 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유럽인들이 일본을 매우 좋아하고 일본인은 보통 아시아 사람들과 같은 레벨이 아닌 문화적 감각(미감)을 소지한 계층으로 본다던데, 여기서도 역시 '한국은 없다'를 여실히 느낀다고 한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무작정 싫은 마음의 무시가 아닌, 좋은점들을 솔직한 눈으로 봐야 한다. 그네 나라의 정체성이야 그렇다 쳐도 그들의 미감 만큼은 훌륭하다고 본다.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동양문화의 특성을 확보했고, 서양인들에겐 일본의 문화는 자기들 눈에 딱 맞는 이국적인 색다름 이었을 거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이 흠모했고 따라하기도 했던 화풍만 보더라도 일본적인 것은 세계의 미감과 연동돼 있다. 


 뉴욕에 성횡하는 일본식 레스토랑만 보더라도 동양성이 서양과 어떻게 접목되어 파급되는지 볼 수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에 스며든 선불교의 가치는 일본성의 모든 기저에 흐르고 있다. 조선시대 배불정책으로 유구한 선의 전통이 산으로 갔다면 일본은 대중 미학으로 발전시켰다고 본다. 그 기저에서 서양의 합리성과 만났으니, 고정된 것은 없고 실체는 없다 라는 선의 진리에 더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통에 갇히지 않은 전통의 합리적 계승이 오늘날 일본의 문화 역량이 아닐까. 


 히로시 스기모토의 개인전은 국내 처음이고, 말로만 듣고, 사진집으로만 보다가 실제 (젤라틴 실버) 프린트를 보니까 생각보단 원본의 아우라를 많이 느끼진 못했다. 인쇄된 복제물이 원본의 가치를 더 상회하게 된다는 기술 복제시대의 이론이 역시나 맞아 떨어진 듯. 사진이 대형이란걸 빼면 사진집과 별로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만큼 독일 인쇄 산업의 기술력이 좋은 것이다. 


 그의 주요한 시리즈가 거의 소개되었다. 전통 흑백 사진의 짙은 흑색을 여실히 느낄 수 있고, 완벽한 퀄리티의 사진의 묘사력을 체험할 수 있다. 여기서 내용적인 면을 말하긴 그렇고, 전시장에 설치된 그의 작업 과정을 소개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가 얼마나 성공한 사진작가이고, 작품의 동기들을 들을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느낀건, 대가들일 수록 작업의 컨셉이 단순하고 심심할 정도로 표현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근데 그 어떤 지점을 찾아 건드리는게 내공이라는 것이겠지. 


 삼성리움미술관이란걸 빼면 전시는 좋았다. 내가 삼성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서 자꾸 이런일이 생기는 건지, 원래 조ㅈ가트니까 그런건지, 당연히 평범해야할 미술관 관람에 매우 기분 나쁜 2 건의 일이 있었다. 


 앉아서 다큐멘터리 영상을 감상하다가 코트와 바지의 주머니에 가지고 있는 지폐들을 무심코 확인하다 보니 입장표를 살 때, 거스름돈 3,000원을 안 받았던게 확실히 기억되었다. 만원내고 영수증과 티켓속에 거스름돈도 받았다고 생각하고 바로 가방 보관소로 휙 돌아섰던 것이다. 근데 생각하면 기분 나쁜게, 그 직원들은 거스름돈을 주지도 않았는데 왜 나를 바로 다시 부르지 않았을까. 알다시피 티켓팅을 하고 가방 보관소 까지 그 넓직한 로비 공간이 있고, 거스름돈 꺼내는게 조금 지체 되었다 해도 " 손님 거스름돈 받아가세요~" 라고 충분히 말 할 수 있었을 텐데. 그걸 무언의 팁이라 생각했을까... 설마. 


 어쨌든 그걸 알아차리자 다시 한번 혹시 내가 어디 흘린거 아닌가 행동을 속기해 보아도 그건 아니었다. 영수증과 티켓을 건넬때, 지폐 세장은 확실히 없었고, 나는 바로 돌아선 것 뿐이었다. 일차적으론 나의 성급함의 불찰일 수 있지만, 분명히 직원이 다시 날 부르는게 정상이고 상식이었다. 


 그냥 내 일차적 불찰로 생각하고 넘어갈수도 있으나 내심 기분이 나뻤다. 그냥 문화재단도 아니고 삼성이래서 더더욱 작은 금액이지만 내 돈 삼천원이 뜯긴게 열받았다. 관람을 마치고 티켓팅 데스크에 가서 아까의 일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사이 직원이 바뀌어 있었는데, 젊은 여직원 표정이 벙쪄했다. 또다시 불쾌감이 엄습했고 그 직원의 눈에 난 쪼잔한 진상 손님이 되어버렸다. 옆자리의 상사인듯한 동료의 눈치를 보아가며 돈을 다시 내어주는 그 짧은 시간 뾰루퉁한 반응에 대해 화를 내야하나 말하나 하나 하는 스트레스. 돈을 받는 순간 더 말을 말자라는 체념이 들었고, 나는 코트를 세차게 휘날리며 가방 보관소로 향했다. 


 내 번호표를 주자 가방만 나왔다. 나는 황당해서 " 카메라는요? "  

 입장할때, 내 작은 카메라만 들고 있었는데, 카메라 반입이 안 되어서 다시 보관소에 와서 내 번호표를 보여 주며 카메라 반입이 안된다하니 먼저 맡긴 내 가방과 같이 보관하라고 맡겼다. 번호표를 두번이나 확인 시켜가며.. 그랬는데, 다른 번호칸에 카메라를 넣어둔 것이었다. 그 가방 손님이 아직 안 가서 망정이지, 나보다 먼저 가방을 찾았는데 작은 갈색 가죽 케이스의 카메라를 내주니 못 된 마음에 가져갔으면 정말 골치 아파지는 것이었다. 

 거기 직원은 여러 차례 사과했다. 


카메라 때문에 왔다 갔다하며 입장해서 보니 어느 커플은 컴팩트 카메라로 서로 찍어주고 있었는데 전시장 지킴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 장소에 대한 마음의 반영이 이렇게 나에게 돌아오나 란 생각을 했다. 역시나 내겐 재수없는 미술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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