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나눴던 이야기 중에, 이 영화가 말해졌다. 아 딱 지금쯤 다시 이 영화를 볼 타이밍이구나. 얼마전엔 영화 르누아르를 보고 혹해서 그 영화의 촬영 감독이 화양연화를 찍은 사람이란 걸 알고, 집에 있는 화양연화 디비디를 넣으니 자꾸 뱉어냈다. 그래서 아쉬운 찰나에 이 영화라도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명배우, 장만옥의 대표작 아닌가! 아마도, 20대 초중반 무렵, 본 '아비정전' 이나 '첨밀밀' 등에서의 장만옥의 이미지가 나도 모르게 무의식에 각인 되었나 보다. 당시. 배우 추상미를 좋아했었고, 복학 하자마자 본 어느 후배에 반하게 되었는데 장만옥과 추상미를 섞은 듯한 얼굴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끌렸던 얼굴형은 턱이 작아 동그랗거나, 정 반대로 길쭉한 얼굴형의 여인들을 번갈아 가면서 좋아했던거 같다. 직구와 변화구의 엄청난 차이만큼, 내 이상형의 기준 같은건 들쑥날쑥 폭투에 가까웠다. 단지 웃는게 예쁘면 그게 다였다. 




 장만옥과 여명의 오랜 사랑이 주된 이야기지만, 그 주변부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방식도 꽤 감동적이다. 세월의 흐름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다양한 사랑을 나누고 지켜가는지.. 장만옥과 살게 되는 조직 보스의 남자다움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미키 마우스 문신, 다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포용력 등. 그리고 중국의 발전하는 시대상 속의 욕망을 엿볼수 있었다. 대륙에서 홍콩으로 그리고 뉴욕으로 이어지며 좀 더 잘 살기 위한 사람들의 인연. 아무리 돈이 최고라 해도 힘들때 진심으로 곁에 있어주며 마음을 내주는 사이가 진짜 사람이다. 


 한참 후에 다시 볼 만한 영화였다. 그나저나 화양연화를 봐야 하는데.. 


 등려군의 그 노래와 자전거 타는 장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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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커트 코베인 사후 20년이 된 해라 유투브에서 너바나의 공연을 틈틈히 감상하고 있었다. 유투브는 대단하다. 개인 소장의 비디오 테잎 영상이라도 전체를 감상할 수 있다. 역시 네버마인드 앨범이 뜨기 전과 바로 그 해 (1991)년 까지의 공연이 더 열정적이고 커트의 보컬 상태도 더 좋은 거 같다. 그 후로는 급격하게 마약으로 무너져 갔지만, 그래도 커트의 보컬은 경이롭다. 노래를 한다기 보다 온몸으로 절규한다가 맞다. 너바나의 곡을 카피하기는 쉽지만 절대 커트 코베인의 늬앙스를 흉내내기란 불가하다. 어찌 이렇게 순수하고 절박한 자의 영혼을 따라 할 수 있겠는가. 


 요즘 세월호 사건의 슬픔과 맞물려 너바나의 정규 3번째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인 유테로(자궁 속) 음반은 묘하게도 격정의 위로를 건넨다. 절규와 자조섞인 음률이 뒤섞인 이 앨범은 고등학생때 내내 꽉막힌 욕구의 분출구 였다. 커트의 처절한 외침은 대리 경험으로 기능했다. 불안한 자의 심리가 이 음반의 노래와 함께 상호 투영 되었다. 20년전. 이 음반이 나왔을때, 종로 3가의 YBM시사 영어사 지하층의 뮤직랜드란 대형 음반 가게에 너바나의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있던게 생각난다. 여전히 메탈리카의 엔터 샌드맨이 흘러 나왔지만, 내 마음은 송두리채 너바나의 모든 것에 쏠려 있었다. 


 한 동안 잊고 있었던 너바나의 음악은 또다시 슬픔과 불안의 자조에 뒤섞여 내게 말을 건넨다. 노랫말은 의미심장하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역설이 분명한 그의 노랫말은 삶에 대한 푸념과 분노가 뜨겁게 타오른다. 첫 번째 곡인 serve the servants (하인을 섬겨라) 부터 예사롭지 않은 정서가 흐른다. 역시나 미묘한 멜로디 진행은 싱글 히트곡은 아니었지만 이 앨범의 첫 노래로 딱이다. 히트곡 '하트 모양인 상자' 와 '날 강간해.' '멍청한.' '페니로얄 티.' '모든 사과' 의 가사는 충격적으로 요절한 커트와 세월호의 참혹함에 맞물려 감동을 자아냈다. 


 좌절감 속의 한낱의 위로로 슬픔을 집어 삼킨다. 볼륨을 높여 자궁속으로..


 


 93년 어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rape me (날 강간해)를 연주하려다 주최측의 반대로 처음 기타 부분만 연주하다가 리튬을 연주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반적인 기질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어서인지 몰라도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경향이 많다. 뭐 냄비 근성이라는 말 고깝게 듣지 말고 반성적 자세로 숙고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절대 잊지 말고 ! 분노 하자 ~~ ! " 연대와 공감을 통한 창조적 분노 만이 이 썩은 의식을 타파 할 수 있을 것이다.  " 재벌 타도 " 는 " 독재 타도 " 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재벌의 해악은 광범위하며 교묘하게 침투해왔다. 잊지 말고, 개개인이 꾸준한 자발적인 운동만이라도 행하자. 탐욕스런 승자독식에 맞서 최소한의 행동이라도 하자. 삼성과 현대가 떡하니 찍힌 상품만이라도 거부하자. 국민을 봉으로 아는 그들의 행태에 분노하면서도 왜 자꾸 그것들은 사는지.. 또 하나의 약속은 우리가 최소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묵묵히 되새겨 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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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스터 참 예쁘다. 만신은 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 이라고 한다. 인간세계에 우리와 같은 몸으로 태어났지만 인간과 신의 다리 역할을 하는, 만가지 영혼들에 제 한 몸 내주어 이승의 회환을 몸소 감내하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무당에 관한 픽션 다큐멘터리다. 


  감독이 박찬경 이라고, 박찬욱 감독의 동생이다. 이 사람은 원래 미술가로 이름이 더 알려졌었다. 사실, 내게는 영화로서는 그다지 재미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전통 인물 다큐멘터리에, 사실을 기반한 과거의 상상적이고 몽환적인 연출을 접목시켜 김금화란 무당의 삶을 다각도로 펼쳐보이는 방식은, 좋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문소리의 연기는 한여름 비오는 날의 개구리마냥 신내린 무당 배우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지금은 무형 인간 문화재로 나라의 무당인 그녀의 삶의 이야기는 개인의 애환을 넘어서 이 나라의 우여곡절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한의 역사, 무당에 대한 대중의 모순된 정서, 전통 문화의 말살과 계승의 다채로운 담론거리를 제시 한다. 무당에 관한 찝찝한 호기심을 넘어 민족 문화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 이성적 논리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재인식, 재발견 이었다. 


  박찬경 감독의 역량은 무당을 통해서 우리의 한을 신명의 정서로 나아가게 한다. 무당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첨예하게 노니는 종합예술인의 면모로 굿(축제)를 벌인다. 수없이 억울하고 어이없이 죽어갔던 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녀는 남은 자들의 화합을 도모했다. 떠난자의 영혼을 달래고, 남겨진 자의 위로와 즐거움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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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를 좋아하지만, 경기를 처음 부터 끝까지 다 보는 경우는 일년에 몇 번 없는거 같다. 선발 투수전으로 신속하게 경기가 진행되는 경우야 2시간 30분 안으로 마치게 되니까 뒤끝이 깔끔하다. 어제 류현진 경기에 이어서 오늘 아침엔 내가 좋아하는 다저스의 투수 잭 그레인키가 선발이었다. 위기를 잘 넘어서며, 1실점으로 막았고, 큰 점수차에서 6회 1아웃까지 잡고, 마운드는 불펜 투수들에게 넘어갔다. 상대팀 애리조나는 어제에 이어 다저스 선발 투수에게 꽁꽁 묶이며 명성있는 타자들의 유명세가 무색하리만큼 빈타에 허덕였다. 하지만 그레인키가 물러난 이후, 다저스의 불펜 투수들은 큰 점수차의 승리를 만끽하지 못하고, 하나같이 빌빌댔다. 그 중에서도. 브랜드 리그 라는 놈은 도저히 그럴수 있지 라는 마음이 안 생긴다. 사실 이 글도 그 놈을 까기 위해서 랄까. 이렇게라도 욕을 안하면 내안의 분노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작년에도 그렇게 불질을 해더러니, 오늘 투구 모습을 보니까, 완전 배팅볼 투수였다. 투수가 마운드 위에서 혼신을 다해 던진다면, 안타를 맞아나가더라도 그럴 수 있지 할 수 있는데, 이 놈은 정말 투구에서 그런것은 고사하고, 뻔뻔한 철면피의 표정이 엿보인다. 류현진 보다 연봉을 더 받는 배팅볼 투수라니.. 고액 연봉 지불이 아깝다해서 불펜에 데리고 있지 말고, 차라리 그 자리 하나를 마이너리그 유망주에게 줬으면 좋겠다. 지금 나 뿐만 아니라 팬들의 댓글에서도 난리가 아닌데, 구단주나 감독은 속으로 얼마나 더 답답하겠냐만은, 오늘같은 경기를 질질 끄는 모습을 보면 이기더라도 전체적인 팀 분위기를 헤치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브랜든 리그는 듣보잡 리그로 보내라. 얘는 KBO 와도 2군으로 내려갈 실력. 


 짜파게티를 먹으며 완전 짜증 폭발하게 만들었다. 오늘 한 경기만을 보구 이러는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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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익 감독의 영화중엔 이 영화만 좋다. 왕의 남자도 나쁘진 않았지만, 정말 좋다는 영화는 이 영화 뿐이다. 황산벌. 그 재밌는 영화적 소재를 가지고 그렇게 밖에 연출을 못하다니, 라디오 스타가 흥행에 성공했고 이 영화가 야심작임에도 흥행에 실패했다는건 취향의 문제라기 보단 대중의 눈높이가 낮다.라고 말하면, '재수없는 놈, *나 잘난체 하네~. 니가 영화를 만들어 봐라.' 등등등. 말 안해도 안다.ㅎ 실은 여성,여심 마케팅에 실패한 대표적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시대극에 드러나는 가부장적 태도와 그것에 어쩔수 없이 내몰린 여인의 삶은 기구하게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자들의 욕망 속에서 흘러가며 자아가 성장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남성적인 시각에서 진행된다. 주체적인 자유가 없고, 선택지가 없는 여인의 답답한 삶과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이 남자들한테는 어떤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만 여자들이 봤을땐, 한없이 짜증나고, 공감하기 힘들며, 불쾌한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일면적으로 보이는, 사랑하지 않은 남자를 그렇게 집착하듯 찾아나서는 과정에 감정이입도 안 되거니와, 마지막 장면의 끝맺음은 개운치 않은 여운을 부채질 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한 여인의 속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내몰린 절망감, 타의에 속박되어 묵묵히 울분을 인내하며 사랑도 희망도 없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 심정을 우리는 감정의 저 밑바닥에서 찾아야 한다. 이 여인의 표상은 우리의 역사속 한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나라를 잃고, 주체적 독립이 완성되지 않은 나라의 슬픈 숙명같이, 돈을 위해 피를 흘리고 돈을 위해 웃음을 팔고, 돈을 위해 양심을 팔아야 하는 기구한 아픔이 스며있다. 

 절박한 전투가 벌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그들의 해후는,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자들의 말못할 탄식이 울분에 넘쳐 진한 여운을 남겼다. 개인의 사연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가 가진 말도 안되는 상황말이다. 내몰린 여성들이 가야했던 그 길 들 말이다. 


  이야기의 이면에 깔려있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은 대형 제작비의 상업 영화와는 안 어울리겠지만, 그럼에도 이준익 감독은 작품을 만들려는 욕심을 부린듯 하다. 그런 의욕이 대중과의 소통에 실패를 불러왔겠지만, 나름 의미있는 시도이고, 다양한 국물 맛을 우려낸 듯한 성과가 있다고 본다. 물론 작위적인 장면들도 많긴 하지만, 주인공 여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가 가져오는 쓸쓸한 여운은 파장이 크다. 음악의 힘과 배우 수애의 힘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좋은 작품이라고 여긴다. 개봉 당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그냥 묻혀지긴 아까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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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니, 올해가 커트 코베인 사망 20주기이고, 4월 5일이 기일이었다. 1994년 4월 8일날 시신이 발견되었고, 사망 추정일이 3일전 이었다. 20년 이라니,, 커트가 죽었을 때, 중앙일보 사회 문화란, 한 페이지를 장식한 기사를 읽고 또 읽으며 안타까워 했던 개기름 번질번질 고등학생인 나. 20년은 정말 세월이란 걸 실감케 한다. 가지고 있는 너바나의 '네버마인드' 씨디도 20년을 훌쩍 넘은 물건이 됐네. 유투브에서 너바나나 커트 코베인 이름만 치면, 언제든 멋지고 잘생긴, 묘한 울림을 주는 스물 몇살의 커트를 만날 수 있다. 퍼블리싱 되지 않았던, 미공개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 있으면 미디어 세계에서 영원히 봉인된 젊은 커트는 영생하고 있는 듯 하다. 


 파라마운트 극장 공연이 디비디로 발매된걸 보았다. 여러대의 16미리 필름으로 촬영되었고, 사운드 녹음이 훌륭했다. 요즘에는 유투브에 풀 공연 영상이 통째로 다 올라와 있어, 그냥 이름만 치고 누르면 귀한 공연 영상들을 끊임없이 볼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크림 또는 블라인드 페이스나 롤링 스톤스의 60년대 후반 하이드 파크 공연 같은건 너무나 설레였다. 젊디 젊은 에릭 클랩튼, 믹 재거, 키스 리차드를 보는 즐거움. 지금의 할아버지와 왕년의 청년의 모습 그 사이를 빼곡히 채운 삶의 드라마와 음악, 지미 헨드릭스와 커트 코베인에게선 보질 못하는 살아있는 자의 향연 이었다. 


 폴 매카트니 경이 한국 공연을 한다던데, 그런 의미에서 반세기 대중 음악의 역사를 일구었던 마지막 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다시는 못 볼 공연이지만, 비틀즈 해산 이후 폴의 솔로 앨범, 노래를 거의 모르는 나로써는 그다지 갈 마음이 안 생긴다. 비틀즈 팬 이지만,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을 폴 보다는 더욱 좋아했다. 수려한 멜로디 이상의 어떤 아픔 같은 것들이 그들에게서 느끼는 감동 이었다. 

 폴 매카트니가 온다면, U2도 올 수 있지 않을까. 티켓 가격이 어마어마 하겠지..아마도 그들의 개런티가 엄청나서 불러올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 폴의 공연 성과가 어떠한지에 따라 가늠이 될 것이다. 라디오헤드와 블러가 왔으면 좋겠다. 보고 싶은 밴드야 많지만, 그래도 한번 다녀갔던 밴드니까, 현실적으로 더 가능하지 않을까. 





부쩍 잠이 늘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게 아니라, 일찍 자고 보통 처럼 일어난다. 꿀잠을 자고 나면 몸은 개운할지 몰라도 마음 한편으론 너무 나태한 생활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든다. 딱 6시간만 자면서도 숙면을 취하는게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일 게다. 불면의 밤을 보내는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려 본다면, 차라리 잠이 많아서 불만인건 행복한 거다. 


 아마도 환절기의 영향도 잠을 불러오는것 같다. 봄 기운이 겨우내 응축된 인고의 시간을 지나 새싹을 틔우듯이 우리 몸의 세포들도 지각 변동으로 바쁘게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 같다. 의식과 감각이 깨워져 나가 타자에게 닿고 싶은 마음은 봄이 불러오는 자연의 이치다. 다만 그 현장성은 인연 조건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어찌 됐건 봄날은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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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절기래서 그런지 피곤한 기운이 몸을 사로잡는다. 많은 말들이 스르륵 스쳐 지나갔던 하루였다.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확신어린 자신감이다. 종종 단어들은 흩날린다. 머릿속에 부유하는 단어들을 순차적 연결고리의 끊임없는 무의식의 작용으로 끄집어 낸다. 

 몇일전 저녁을 먹으며 상대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게 사실이었고, 그런 결점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지적을 받으니 내 자신에게 이거 밖에 못돼. 라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무뎌디지 않고 생생히 작동하고 있다는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지. 봄 이래서, 나는 경솔했는가. 

 어렴풋한 어떤 부탁의 언급을 굳이 왜 그 자리에서 했는지 후회가 된다. 나중에 물어봐도 좋았을 것을.. 상대 입장에선 그 만남이 부탁을 위한 목적의 자리 라고 느꼈을걸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하고 죄송스러워진다. 진심은, 간만에 마주하고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거였다.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는 상황임에도 헤어지고 나서 먼저 메시지가 왔다. 자신을 낮추며 날짜 정해지면 맞춰보겠다고.. 미안하고, 고맙고, 그 마음씀에 송구해졌다. 그러곤 내 자신에게 조금은 질책을 가했다. 


 주유를 하고 무료 세차를 했더니 곧 바로 비가 내렸고, 호두과자를 한입에 넣었다가 뜨거운 팥앙금에 입천장이 호되게 데여 너덜너덜 해졌다. '이런 망할!' 

 미세먼지에 일주일 내내 헛기침이 나왔고 텁텁한 봄에 싱그러움은 자취를 감췄다. 피곤이 쌓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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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감상하고 리뷰를 바로 써야지, 조금 지나서 쓰려고 하니, 막 보고나서의 할 말 많음이 어디론가 쏙 들어가버렸다. 

  매튜 매커너히가 당연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을만 했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디카프리오도 잘 했지만, 이 영화에서의 매커너히는 연기에 관해서 범접할 수 없는 지존의 경지에 오른 듯 하다. 그리고 '더 울프~' 에서의 짧은 조연 연기도 무척 인상깊었고, 원래 이 글에 앞서 리뷰를 쓰려 했던 영화 '머드(2012)'도 무척 좋았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이 배우는 포텐셜이 터지고 대운이 들어오는 시기가 맞물린게 아닌가. 다니엘 데이 루이스 의 연기와 필적하는 명배우의 반열에 들었다. 

 언젠가. 전성기 때,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를 찬탄했던 어떤 글이 떠오른다. 역할에 따라 살을 찌우고 빼고 그런 노력을 넘어서 같은 시기에 완전 극과 극의 정신적,심리적 벡터를 가진 인물의 연기를 완벽하게 오가는 거에 탄복한다는 요지였다. 나도 동의했다. 성격파 배우로의 이미지가 큰 그가 되게 가벼운 연기조차 영화에 완벽히 녹아드는 걸 보며 정말 남다른 배우로구나를 여실히 통감했다. 위에 말한 매튜 매커너히의 일련의 최근작에서도 이런 완벽한 배우의 모습이 눈에 띄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 우드로프가 로데오 경기에 출전한다. 성난 소의 등 위에서 중심을 잡는 그의 모습이 순간 정지되며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는 기존 제도와 권력에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그에 저항함으로써 사회적 진보를 이루게 한, 한 실존 인물에 대한 연대기 이자, 방탕한 탕아였던 자기 자신의 성장담이다. 영화의 감동은 주인공 우드로프의 변화의 양상에서 드러나는 인간애의 발현이다. 나만의 고통이나 이익이 아닌, 다수에게 되돌려지는 일종의 자비적 행보는 큰 울림을 준다. 그건 그가 전혀 도덕적이거나 평범한 사람의 가치에 준하는 삶이 아니라, 그야말로 쓰레기라 불릴수 있는 타락한 카우보이의 삶을 살던 텍사스 마초맨 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소가 갇혀 대기하는 밀폐된 공간에서 쓰리썸으로 떡치는 우드로프의 동물적 모습이다.(저런 질낮은 표현을 쓴것은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그 장면에 대한 인상의 사실적이자 제일 적합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_부디 저질이라고 치부하지 않기를.) 그 공간이 마지막 장면에서의 우드로프의 로데오 경기를 내다 보는 카메라의 시점이고 소 등위에서 중심을 잡는 우드로프를 순간 정지하여 보여주며 끝내는데, 공간을 통한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순환고리는 이 한편의 영화를 통해 한 인간 삶의 변화를 감동적으로 응축하고 있다. 개인의 쾌락.이기를 넘어선 공통의 가치에 투신 했던 자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의 여운은 오래 남았다. 

  아래 부턴 스포일러 포함 

  텍사스 카우보이 오리지널 마초 우드로프는 전기기술자로 일하며 술,마약,섹스,도박 등등 방탕한 삶을 일삼는다. 몸은 점점 말라가고 몸에 사건 사고가 터지면서,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병원에서 30일 시한부 삶을 선고받는다. 항 HIV 바이러스 치료제로 아직 임상실험중인 AZT란 약을 몰래 빼내어 복용하지만 상태만 악화 된다. 절박하게 직접 이 병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멕시코의 한 의사를 찾아 가게 되는데, 그 의사에게서 들은 말은, AZT의 부작용의 심각성과 그 대안으로 비타민, 아연, 단백질 등의 약제를 추천받는다. 미국 식약청(FDA)에 승인이 되지 않은 약품에 아직 규제가 없던 시절, 그는 대량으로 약품을 가져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이란 명칭으로 모텔방에 사무실을 꾸리고, 자기 처럼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에게 판매를 한다. 여기서 병원과 제약회사가 어떻게 공모하여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돈을 벌어들이는 더러운 공생관계를 볼 수 있고, 그것에 반하는 운동? 을 우드로프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이제는 에이즈가 공포의 병이 아닌 잘 관리하면 오래 살 수 있는 병이 된 것이다. 


  
  에이즈에 걸리기전 그의 삶은 너무나 난장판이자 동성애,여성성에 대한 극단의 혐오를 가진 악한 자로 보이지만, 시한부를 선고 받고 자신이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가 겪는 변화는 은근 감동적이다. 대놓고 휴머니즘적 환골탈태가 아니라, 그 따듯한 본성이 드러나는 몇몇 순간들이 그렇다. 비지니스 파트너인 트랜스젠더 레이언(자레드 레토. 남우 조연상 수상)에 대한 태도도 그렇고(대표적으로 마트에서 벌어진 일) 여자 의사와의 정서적 관계나, 경찰관 친구에게 보내줬던 약품 등등, 일면 더럽고 거친 그의 삶에 보석같이 빛나는 선한 본성의 발현이었다. 막판에는 식약청과 법원의 압박에도 자기 사비를 털어 아픈 사람들에게 옳은 약을 구해주고자 하는 자비심까지 엿보인다. 같이 일한 동료들이 나열해서 그에게 고마움과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장면에선 감동이 몰려왔다. 


   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 80년대 내가 꼬맹이 시절때에, 이 에이즈란 말은 공포 그 자체였다. 70~8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나 뉴욕을 위시해 전세계적으로 번진 희기병. 혈액에 면역 체계가 없어지는,, HIV 바이러스 자체가 규명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도 그려지듯이, 내 몸안의 특정한 세포나 바이러스를 죽이는게 아니라,(AZT는 좋은 세포도 다 죽임) 면역 체계를 강화시킬 수 있는 물질을 섭취하고, 자연적인 섭생을 함으로써 관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드로프가 레이언과 마트에서 장 볼때, 가공식품 먹지 말고 유기농 채소 위주로 담고, 마약은 면역을 떨어뜨린다느니, 자신이 에이즈가 걸림으로서 완전 다른 삶 의 차원으로 들어간다. 병이 완벽한 인생 변곡점의 동기가 되고, 공부를 함으로서 자신이 투신해야할 가치를 찾았다. 

  이 에이즈 란 병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과도한 정기의 남용으로 인한 필연적 과정으로 보인다. 60년대 성혁명 이후로 급진적인 성의 행태는 마약의 환각과 어울려 자연의 정기를 고갈시키는 쾌락으로만으로 치달았다. 히피들의 자연을 사랑하고 사랑과 평화를 외치는 건, 실상 개인의 극단적인 쾌락만 추구했을 뿐, 결과적으로 허세어린 치기의 공허한 모순이었다. 그들이 추구해야 할 건, 아메리카 땅의 인디언들의 전통과, 기상을 이어받는 자연과의 합일 이어야 했지, 동물적 쾌락의 무분별한 추구는 결과적으로 80년대 에이즈의 창궐을 비롯해, 수많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잉태되고 사산되고,, 그러한, 잘 알려지지 않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포스트모던의 가치를 두가지로 수렴한다면 다양성과 자율성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90년대 중반 이후로 어쨌던간 이런 흐름 속에 기존의 의식, 가치들이 와해되고 해체되어 다양성의 수렴 과정이라고 불 수 있는데, 나한텐 아직 동성연애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그러니까 게이들에 대한 본질적 반감 보다는 그들의 사랑의 행위에 대해 극단적인 거부감이 있다. 그건 당연히 조물주나, 자연에 반하는, 정상이 아닌 것이다. 요즘 같이 비주류, 소외계층, 음지문화에 대한 관대한 시선과 드러냄은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넘어 자부심까지 가지며 거리 축제를 벌이고 그러는데 솔직히 말하면 못마땅하다. 사회적 억압에 맞서, 동성애자 운동가들의 노력은 충분히 이해가되나, 자칫 그것이 당연한 거고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헤게모니의 전도는 위험하다. 일례로 모임에서 어떤 젊은 여성이 에이즈와 동성애, 동성연애의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고 피력하며, 동성애에 대한 사회진보적 분위기에 매몰되, 그것에 대한 부정적 사고를 무식한 꼰대나 갖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는데, 나는 이런 것이야말로 무지의 소산이고, 그런 비주류 문화의 오도 인 것 같다. 어쩌면 그녀가 레즈비언만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르는데, 나는 민망함에도 불구하고, 애널섹스의 위험성이 가진, 더 큰 쾌락을 위한 자연적이지 않은 무리수가 피의 오염을 불러오는지 일갈해 버렸다. 

  사랑의 다양한 행태가 사랑의 본질을 우선할 순 없다. 자율성을 존중하지만 극단적인 감각의 쾌락 추구는 위험해 보인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남자와 바람이 났거나, 여자친구가 흑인과 바람이 났다면, 절대 이전으로 돌아 올 수 없다는 우스개 말은, 너무 육체적 쾌락에 집착한 시각이고, 그게 요즘 욕망 벡터의 전부다. 자연, 모든 사물과 교감 할 수 있는 정기를 보호하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 

  영화속에서, 데이빗 보위와 함께 글램록의 양두산맥 이었던 T-REX의 요절한 천재 마크 볼란의 사진과 음악이 끊임없이 노출되어진다. 우드로프의 동업자인 트랜스젠더 레이언의 우상으로, 글램록의 특성상 그 분위기가 다분하지만 마크 볼란이 동성애자인 건 처음 알았다. 영화속에서 듣는 데이빗 보위와 티렉스의 노래는 너무나 좋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주루룩 나오는 주옥같은 음악이 티렉스의 마크 볼란 노래다. 

  1991년에 에이즈로 죽은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 를 통해 동성연애의 실상과 에이즈의 공포를 상징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이 영화를 통해 오랬만에 에이즈에 대한 어릴적 공포의 추억과 다양한 상념들을 불러왔고, 지금의 다양한 면역 계통 병들을 생각해 보면, 병은 어떤 대가 라 생각된다. 자연.환경.생명의 위기에 대한 대가의 변화.
  에이즈와 동성애에 대한 더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여기서 줄여야 겠다. 이런 주절거림이 영화의 감동의 본말을 주객전도 하는 것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성찰하게 하는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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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3일의 글.


 3월의 첫 월요일은 생글생글한 시작의 설레임이 물씬 풍겨난다. 차가운 바람은 봄을 예고하는 따가운 햇살에 얼마간의 온기를 지니고 있다. 개학,개강의 날. 새로운 이들을 만난다는 설레임과 두려움. 우연과 인연의 장이 펼쳐지는 날이다. 이렇게 역동하는 변화의 장은 케케묵은 선생들의 또다른 골칫거리를 한아름 떠안게 된 시무룩한 표정 조차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인해 기대와 희망으로 채우게 될 것이다. 오히려 직업으로써만의 선생은 그런 아이들의 눈빛에 감화 받아야 한다. 


 오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두 조카녀석들의 해맑은 웃음이 떠오른다. 그리곤, 내가 입학했던 날이 뇌리에 스친다. 첫 선생은 케케묵은 할머니 선생 이었다. 내 기억으론 물질적 욕심에 찌든 얼굴이었다. 그런 연유인지 나는 그리 해맑은 아이는 아니였던 것 같다. 

 얼마 전, 연락을 간혹 나누던 제자와 잠시 만났다. 몇 년 전, 첫 강의의 긴장을 마치 성모 마리아의 미소를 수업 내내 지어보이던 그 학생의 눈길을 보며 용기를 얻었고, 위안 받았다. 작년 한 해가 넘어가는 사이, 이성친구가 생겨 무척 행복한 대학생 커플 사진을 봤었는데, 이 날 듣자하니 고새 깨졌다고 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바람이겠거니 여겼는데, 되게 아픈 모양이다. 쓰린 가슴으로 한숨짓는 모습에 내가 해 준 말은 고작 '원래 다 그런거야' 투의 꼰대의 뻔한 말 밖에는 없었다. 


 김형경씨의 신간 '남자를 위하여'를 보면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양이, 남자는 1 여자는 9 라고 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아홉배쯤 더 좋아하는 이유를 타당한 유추로 설명하는데, 남자는 사회적 성공을 향해 열정의 9를 쏟고 나머지 1정도를 여자에게 준다면 여자는 그 모든 노력을 오직 남자에게 쏟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자가 느끼는 정서적, 감정적 친밀감이 남자의 아홉배가 아닐까 싶기 때문에 실연을 당했을때, 감정의 여파가 더 크고 오래가는 것 같다. 내가 아는 경우만 해도 여자들이 남자랑 안좋게 헤어지고 나서 폭삭 늙는 것만 봐도. 남자들이 첫사랑을 쉽게 못 잊는 것도, 아직은 사회적 책무감이 없을때의 '사랑이 전부다.'란 감정에서 그런것도 같고, 3년 아래의 대학 여자 후배의 그동안의 삶의 경과만을 보더라도 버림 받은 상처 때문에 오랜 동안 헤어나오질 못하더라.


 이런 이들이 제반된 사항은 천성적으로 착하고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남자들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점점 영혼의 통로라는 눈이 퀭 해 지는 지경. 서른이 훌쩍 넘은 그 후배는 그렇다 쳐도, (종종 보면 안쓰러움) 이 제자는 지금이 시작인데, 훌훌 잘 털어버리기를 바랬다. 


 아무래도 채 한시간도 안되어 헤어졌기 때문에 딱히 이야기를 듣거나, 해줄 말이 필요 없이 잠시 같이 있어준 것만이 다 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위로나, 판단, 충고나 조언의 말이 불필요 한 것임에도 나는 어줍짢게 이런저런 토를 달은게 마음에 걸렸다. 이런 찜찜함은 결국, 나의 문제로 화살을 돌렸는데, 어떤 비수가 여전히 존재했다. 


 몇일후, 장문의 감사 메시지가 왔고, 나는 그 답장으로 비교적 장문의 메일을 후루룩 써내려갔다. 내가 이런 경험을 잘 알아서라기 보다, 남녀노소, 범인, 성인군자를 막론하고, 인간이고 그것이 진정한 마음이라면 이런 아픔에 속수무책인게 당연한것 같다. 우리가 문학작품이나 영화속에서 큰 감동을 받는것도 내 아픔 보다 더 큰 상처를 마주했을 때, 받는 위로 인 것이다. 타인의 더 큰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자아는 더욱 커지거나 무마돼, 마음의 벽에 갇혀 헤집던 고통도 굴레를 벗어날 것이다. 천재 니체도 벤야민도 좋아 하는 여자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자기를 옭아맨거 보면 나의 찌질함이 더이상 부끄럽지 않다. 사랑 앞에선 인간은 다 마찬가지다. 누가 누굴 위로하고 조언하겠는가. 



 내가 처음으로 깊이 몰입해서 한 호홉으로 글을 쓴, 몇년전의 회한의 경험은 언제고 글을 쓸때, 마음에 새기고 있다. 자기기만과 과시로의 글쓰기가 얼마나 우둔했고 비겁했는지, 자아도취의 몽매가 상대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가슴아프게 깨달았다. 훌훌 털어버리려고 썼던 그 글이 결국 상처로 작용했고 돌고 돌았다. 하나의 글이 가진 반향은 의외로 컸다. 정신의 총제적 반영은 단어와 문장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데, 이 소통은 근본적으로 오독과 오해를 불러온다. 일년전 상대는 내가 전한 메시지를 정 반대로 이해했다. 어느 정도의 오해가 아니라, 전혀 다른 해석, 완벽한 오해에 다시 한번 말하고 글쓰기의 어려움에 좌절했다. 더 나아가선 심리의 반영,반향을 조금은 공부하게 되었는데, 상대의 언어에 되갚는 대응은 치명적이었다. 나의 언어는 상대의 말에 빗대어, 당신이 멋진 사람이고 당신이 지금 나를 싫어하지만 나의 장점을 알아 볼 수 있게, 내가 더욱 좋아하겠다. 노력하겠다.의 의미를 상대는 내가 자뻑 망상의 기고만장한 남자로 받아들였더라. 상대의 어마어마한 분노가 잠시 자존감을 헤쳤지만, 먼저 내가 시작한 인과응보여서 슬픔이 더 컸다. 


 하는김에 하나 더 억울한걸 말해 보자면, 상대의 출신학교를 듣고, 내가 보인 표정에서 상대는 내가 학벌을 따지고 무시하는 반응으로 받아들여 되게, 화가 났었더라. 내가 지은 놀란 눈 표정은 평소 예상했던 그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1번 국도를 타다 보게되는 어느 학교 표지판을 보며 당연히 저기를 다녔겠구나라고 생각에, 그게 아닌 답변이 나오자, 그동안 나만의 유추와 착각이 허탈해졌다고 할까.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에서, 인지하지도 못한 사소한 행동 하나가 상대에겐 상처가 되고 오해의 불씨가 되었다 쳐도, 그런 분노의 폭발은 감내하기 힘들었다. 잘근잘근 곱씹는 상대의 잔인한 언사에 가슴이 무너졌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이상하게도 상대 앞에 서면 탈탈 털려 백지의 바보가 된다. 그 쪽이 신기가 쎈건지, 색기가 쎈건지 이성의 작동은 무마된다. 감정이 투사되어 반응했던 나의 행동에도 문제가 많았다. 관심의 언어는 직언으로 날아갔고, 이게 아닌데'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위에 말한 두가지 오해 말고도, 뭔가 있으려나.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어떤 좋아함이 순수를 가장한 강요라고 느꼈을까. 싫은 사람은 뭘해도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믿는 대로 보는 오류 였을까. 상대를 탓하진 않는다. 오히려, 모멸감은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처음 본 이후로 상대는 소통의 어려움을 알려준 언제 어디서건 나의 글쓰기 선생님 같은 고마운 존재다. 오독과 오해의 설킴과 핡큄에도 불구하고 단념과 체념의 상대가 아니라 마음을 비워, 있는 그대로의 나와 상대가 心心하게 다시 볼 수 있을까. 이젠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 뭔가를 기대할 것도 없고, 이렇게 털어 놓음으로서 후회할 것도 없어지겠지만, 아이들의 해맑고 순박한 모든 표정을 그러담아 환한 웃음을 짓던 그 마지막 모습만은 안 잊혀진다. 

그래서 뭘 어쩌려구..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은 붓 글씨를 쓰면서 원기옥을 가다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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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 스포츠 방송에 별 관심도 없던 내게 이번 소치 동계 올림픽은 이상하게도 감동의 연속이었다. 아무튼 여자 쇼트트랙 경기에서 조해리 선수에게 팬심이 작동하여, 이후, 위와 같은 대화들을.. ㅋㅋ

 동계체전은 못 가봤지만, 다른 경기라도 언젠가 꼭 가봐야지. 조해리 화이팅~~


 그나저나 뒷북이지만 폐막식에서 다음 개최지인 평창, 대한민국의 홍보 공연은 좀 별루였단 생각이 든다. 의외로 사람들이 폐막식을 안 보았는지. (재방송이라도) 인터넷 상에도 별 말들이 없다. 아리랑을 조수미-나윤선-이승철이 나와 각기 다른 스타일의 편곡으로 메들리 형식으로 불렀는데, 나윤선은 최고였지만, 아리랑과 조수미의 클래식한 성악과는 언밸런스 했고, 여기에 이승철이 왜 나왔는지..정말 비호감의 인물이자 노래와 편곡도 그지 같았다. 또 하늘에서 내려온 거문고를 두루마기 한복 입은 중년의 사내가 거문고 연주하는 건, 우리안의 전통에 갇힌, 고루함이 엿보였다. 차라리 싸이와 사물놀이패의 화려한 율무의 협동 공연이라면 어땠을까..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에서의 다음 개최지 런던 영국의 대중 문화 자부심 이었던, 전설적 그룹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가 백발의 머리를 휘날리며 '홀 로타 러브'를 연주하는 모습이야말로 전세계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1988년 하계 서울 올림픽이 최악의 개회식으로 이름이 올리듯이 앞으로 평창 동계 올림픽. 심히 걱정된다. 문화적 역량이 한계가. 짧은 프리젠테이션 공연 이었지만, 드러나 보여, 더더욱. 


 아래에 퍼온 글은 참 많은걸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 


 김연아 피겨 경기시 

한국해설자와 서양해설자의 해설내용 비교 

*한국 "저 기술은 가산점을 받게 되어 있어요." 
*서양 "나비죠? 그렇군요. 마치 꽃잎에 사뿐히 내려앉는 나비의 날개짓이 느껴지네요" 

*한국 "코너에서 착지 자세가 불안정하면 감점 요인이 됩니다." 
*서양 "은반 위를 쓰다듬으면서 코너로 날아오릅니다. 실크가 하늘거리며 잔무늬를 경기장에 흩뿌리네요." 

*한국 "저런 점프는 난이도가 높죠. 경쟁에서 유리합니다." 
*서양 "제가 잘못봤나요? 저 점프! 투명한 날개로 날아오릅니다. 천사입니까? 오늘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와 이 경기장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고 있습니다. 감사할 따름이네요" 

*한국 "경기를 완전히 지배했습니다. 금메달이네요! 금메달! 금메달!" 
*서양 "울어도 되나요? 정말이지 눈물이 나네요. 저는 오늘밤을 언제고 기억할 겁니다. 
이 경기장에서 유나의 아름다운 몸짓을 바라본 저는 정말 행운입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 해설자를 욕할 수 없습니다. 딱 우리 수준에
   맞게 해설해 주는 겁니다. 


 

 인터넷으로 여러나라의 중계 방송을 보며 해설을 들었는데, 정말 저랬다. ㅜㅜ


 빙상 연맹 회장이 이건희 사위 더라. 윗대가리 세명은 삼성맨이고, 역시나 더러운건 이유가 있었어..


 아무쪼록 조해리 선수 부상 당하지 말고, 건강하게 선수 생활 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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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의 역습은 맑은 하늘을 없애 버렸다. 몸과 마음이 텁텁해진다. 기나긴 미세먼지의 영향으로 3월의 첫날임에도 마음이 울적하다. 맑은 공기 밝은 햇살의 그리움. 봄 비가 간절해진다. 담배를 피우나 안피우나 마찬가지라고 누군가 그랬다. 이미 대기가 담배연기의 해악 만큼 오염되었는데, 금연해서 뭐하냐.의 자포자기 투의 씁쓸함. 가뜩이나 이 꼴같지 않은 정부에 떨어질 정도 없는데, 심지어 이 국토의 아름다움을 더러운 먼지가 감춰버렸다. 운동을 못해서 그런가, 공허하다. 토요일 밤의 한가로움이 일요일 밤의 후회어린 적막함 같다. 이런 날은 일찍 자버리는게 상책일 듯 하다. 새로운 내일을 기대하며.. 


 몇일전 카드재발급과 여타 일로 은행에 다녀왔다. 은행원들은 친절하지만, 그들의 모니터속에 내 속속들이 정보들이 까벌려지는게 내심 불편하다. 미용실에 앉아 안경 벗고 헤어컷팅 당할때의 느낌과 비슷한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서비스적 특권으로 무방비로 보여지는 신체와 개인 정보. 그런데 더 생각해 보니, 치과나 여자들이 산부인과 갔을때가 가장 기분이 더럽겠단 생각에, 은행에서의 찜찜함은 축에도 못 끼는구나 라고 허탈해진다. 


 그래서 어쨌거나 은행 창구에 은행원과 대면하고 앉아 있으면 나는 무뚝뚝하다. 딱히 시선을 둘때가 마땅치 않아 그들의 빠른 손놀림에 내심 감탄하며 앉아 있다. 명찰의 이름도 한번 보고, 내 쪽에서 부담스런 시선을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속으로 저 여자는 나이가 몇 살일지 유추해 보는 사이, 이래저래 여기저기 이름과 싸인을 요구하는 안내가 이어진다. 어느샌가 일단의 업무는 끝나고, 모바일 뱅킹에 가입안하셨다고, 직접 내스마트폰에 설치를 해주고 자세히 알려준다. 집중해서 설명을 듣고 있자니 노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나쁘다는건 아니다. 대리 직책을 달고 있는 이 직원은 아가씨라고 부르기엔 연로했고, 아줌마라고 불리기엔 조금 억울해 보였다. 


 예상치 않게 폰뱅킹 안내를 받느라 예금 상품 상담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이 가늠못할 나이의 은행원은 능수능란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나는 구몬학습 받는 초딩처럼 공손히 듣고 있었고, 여전히 무뚝뚝했다. 굳이 나까지 화대에 응대하면 너무 가식적인 살기 좋은 나라의 장면 아닌가.. 


 그 직원이 나와 동갑이라고 밝혔을땐, 좀 의아해했는데 아마도 어떤 나이 제한 상품 설명에서, 이 요건 안에 드니 적극 추천하며 말했던 것이었다. 동갑의 고객에 어떤 동질감을 느꼈을까. 상담이 조금 길어지며 어떤 친밀감이 조금 형성된건, 직원의 나이가 나랑 같다는 것을 말하는 순간, 그동안의 무표정을 버리고 쓴 미소를 지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 지금 내 나이의 여자가 이렇게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자조섞인 미소. 매일보는 나 자신의 노화를 가늠하기 힘들지만 동년배들을 통해 '아 내 나이듦은 이 정도 구나' 라고 느끼는 이젠 흔한 충격. 아가씨도 아닌 아줌마도 아닌 뭔가 규정할 수 없는 나이때의 오묘함 이었다. 그 사람의 손에 반지가 있었는지를 볼 생각도 없었고, 어땠는지를 모르니 나이를 떠나서 전혀 안 끌렸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나이에 완전 아줌마로는 안 보였으니 미혼인것 같았다. 동갑보다 미혼의 동질감이 더 컸다.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땐, 속으로 꿋꿋히 골드미스로 잘 살아나가기를 기원했다. 저주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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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동계 올림픽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그래도 쇼트트랙 여자 계주 금메달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심석희가 첫 은메달을 땄을 때만 해도, 나는 쇼트트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마음에 있어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을 했다. 그건 꼼수트랙 이고, 스케이팅의 진수, 아니 동계 올림픽의 진정한 꽃은 스피드 스케이팅 이라고 말이다. 


 대회 초반에 역시나 스피드 스케이팅 이상화 선수가 올림픽 2연패의 금자탑을 세웠고, 4년전 밴쿠버 올림픽에서도 이상화 선수의 터질듯한 허벅지의 힘찬 질주에 감탄해 어떤 글을 썼던 기억이 났다. 피니쉬 라인을 통과한 후, 허리 굽혀 상체를 떨구고 가쁜 숨을 고르는 스케이트 선수들의 모습엔, 우리가 바람을 볼 수 없지만, 내가 만들어내는 바람이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어린 아름다운 순간인지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동계 올림픽의 도박판 같은 짜릿함은 쇼트트랙에서 나온다. 이런 경쟁의 쥐어짜듯 아슬아슬함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 대다수 겠지만, 나는 현실의 아둥바둥함을 꼭 빼다 닮은듯한 쇼트트랙 경기가 내심 불안감을 심어 주었다. 좁은 곳에서의 자리싸움, 교묘한 방해 동작, 실력 만이 아닌 운의 작용. 전략 혹은 계략의 치열함이 난무하는 쇼트트랙 경기는 진정한 스포츠맨쉽 보다는 현실사회의 반영이란 생각에 불편한 마음이 든 것이다. 스피드 스케이팅 처럼 자기를 극해서 얻은 실력만이 다가 아닌 점.이 특히나 우리나라 사회의 반영인 것 같고, 그런 변수와 아둥바둥함에서 우리나라가 쇼트트랙 강국이고, 코치진을 수출하는 나라이자, 그 안으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리라 본다.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수두룩 따는 효자 종목인 만큼, 선수 주변에서 극심하게 횡횡 하는 이기심 들이, 겉잡을수 없는 파행으로 치달아 결국, 뛰어난 선수들과 스포츠의 본질을 망각하여 투전판으로 전락한 소식들을 스포츠 뉴스의 짦막한 단신 뉴스로 우리는 접해야 했다. 일반인들에겐 금메달을 아무리 딴다 해도, 스포츠 정신보다는 더러운 정치판과 다름 없이 느껴질 뿐이었다. 불쌍한 것은 그럼에도 땀흘리며 연습을 하고 어찌됐던 세계 대회에서 꾸준히 메달을 따내는 선수들이다. 


 종종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못된 구석이 많다는. 민족의 특성에 장점도 많지만 치명적인 단점은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란 속담이 있듯이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봐준다. 그렇게 세기의 쇼트트랙 천재 안현수 와 진선유는 파벌, 왕따의 피해로 다른나라로 귀화했거나 이른 은퇴의 길을 갔다. 

 두각을 나타내는 재능있는 선수를 경계하고 깍아내리는 온갖 행위들이 난무했을 정치적 이기심은 안현수의 일로 도마위에 올랐다. 예전에 스포츠 뉴스에서 짧게 안현수 아버지와 다른이들이 싸우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이번 올림픽에서 그가 러시아 대표로 금메달 3개를 따면서 빙산연맹과 쇼트트랙의 파벌문제에 성토가 빗발친다. 나 또한 그런 일환에서 알게된 안현수의 귀화 배경의 몇몇 다큐멘터리와 인터뷰를 찾아 보면서 너무도 안쓰럽고 답답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가장 나쁜 기질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쇼트트랙 여자 계주 3000m 금메달 경기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김연아나 이상화의 경기 보다 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단체전의 총력은 그야말로 국가를 대표하는 희열이 있었다. 사실 이 경기를 보기 이전과 이후로 올림픽 대회와 쇼트트랙 경기에 대한 나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가장한 현대 정치, 국가 체제의 교묘한 속내는 히틀러 시대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나 전두환 시대에 결정된 1988 서울 올림픽의 경우를 보더라도 알 수 있고, 냉전시대의 미.소 양국의 올림픽은 또 어땠는가. 더 앞으로 나아가서, 근대 스포츠는 잃어버린 자연. 육체에 대한 복고주의 향수 아닌가. 국가의 미명아래 행해지는 개인 육체에 대한 초탈. 

 스포츠에 대한 비판적 식견은 사실, 내가 몸을 움직여 땀을 흘려 얻은 경험과 '달리기와 존재하기' 란 책을 읽고 인식이 바뀌었다. 이 책을 쓴 조지 쉬언은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운동 철학자란 말 그대로 운동의 의미를 몸이 기억하고 가슴에 새기게 했다. 그리고 계속 말하게 되는 여자 계주 금메달 경기. 

 사실 이 글의 요지는 '조해리 선수 너무 예뻐요'가 본래 의도다. 경기후 방송 인터뷰에서 잠시 감정에 북받혀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에 왠지 가슴이 아렸다. 진정성. 선한 인상에 숨겨진 고생의 흔적들이 비춰졌다. 이런 호기심은 조해리 선수의 여러 인터뷰와 글들을 보면서 첫인상에 직감했던 그대로였다. 금메달의 감동은 맏언니 조혜리 선수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수록 더욱 뭉클해졌다. 

 

 아주 간략히 이야기 하자면, 10대 때부터 기량이 탑 이었는데, 첫 올림픽은 바뀐 나이 규정 때문에 28일 차이로 출전이 무산됐고, 다음 올림픽은 20대 초반이었는데, 부상 때문에 출전 못했다. 이때, 슬럼프와 우울증에 자살 사이트 까지 가입해 봤다고 한다. 조해리 선수에 대해선 파벌 문제가 언급되지 않는데, 안현수와 같은 코치 밑에서 있었다고 하니, 왠지 의구심이 들긴 한다. 다른 동료들이 메달을 따고 돌아오면서 내심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다음 대회인 밴쿠버 올림픽에선 계주 금메달을 따고도 이해못할 판정으로 실격당했다. 이 때 분통한 기억이 나는데, 결국 시상대에 오르지 못한 선수들의 면면을 볼 수 없었고, 김연아의 피겨 금메달의 환호에 묻혀 곧 잊혀져 갔다. 그렇게 해서 이번 대회, 쇼트트랙 선수로서는 환갑의 나이라는 29살에 드디어 금메달을 딴 것이다. 심석희를 비롯한 나이 어린 선수들이 잘 했기도 하지만, 최고참인 조해리의 역할이 제일 눈에 띈다. 개인전에서도 후배를 위해 커버해 주는 모습이나, 눈물 지으며 격려하는 장면들. 정말 아름답다. 그녀가 개인전에도 욕심을 내서 메달을 하나 더 땄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인터뷰를 보고 들으면서 쇼트트랙에 대한 표피적인 선입견이 없어졌다. 예리한 칼날 위에 속도와 지구력 싸움은 첨예한 위험 속에 부상을 달고 사는 것 이었다. 그렇게 앳되고 이쁜 선수들의 몸은 훈련의 고통으로 매일 만신창이가 되는 모양이다. 운동에만 매진하기에도 벅찰텐데 꼭 당사자가 아니라도, 파벌로 인한 근심과 이미지 추락은 참 힘들었을 것 같다. 안현수의 인터뷰를 보면 조심스레 기죽어 말하는 모양새가 안쓰럽다.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더라도 그의 표정을 보면 그동안 얼마나 심적 고통이 많았을지 느껴진다. 그렇게 8년만에 다시 3관왕이 됐다는게 정말 기쁘다. 국적을 떠나서, 한 인간 승리의 감동 이었다. 안현수에서 빅토르 안으로 바뀌는, 마지막 공항 출국장에서 가족과 헤어지는 의미 심장한 영상이 뇌리에 남는다. 그가 금메달을 따고 환호할 때나, 조해리가 눈물을 지을 때, 다시 봐도 뭉클 하다. 


 이규혁 선수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러나 다음 평창에선 빅토르 안이나, 조해리, 이상화를 볼 수 있을까. 이상화는 나이가 그래도 어리니 3연패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이 감동을 이어서 꼭 쇼트트랙 경기장을 가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실업팀 경기도 있고, 빙상 경기 대회를 관람해 보리라. 조해리 선수에게 싸인 받고 싶다..ㅎㅎ 


 조해리 선수 트위터 에서 나머지 사진은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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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김연아의 경기 이후로 마음이 계속 짠하다. 사실 그렇게 김연아에 열성적인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닌데, 피겨 퀸의 마지막 경기 라는 것과, 그녀가 보인 회한의 표정들이 마음에 깊이 울렸다. 동시에 아사다 마오의 울음에도 마음이 동했다. 어떤 관념적 사랑의 감동보다. 이런 스포츠에서 드러나는 육체의 자기 극복 한계와의 싸움에서 표출 되는 감정의 사뭇치는 여운은 인간 영혼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일 것이다. 


 너무 큰 부담을 안겨주었던 김연아. 그런 짐을 짊어지고 자기 몸 망가지랴 최선을 다해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소명을 다한 그녀에게 정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스포츠 이상의 예술적 심미안을 갖게 해준 그녀의 몸짓은 점수로 매길 수 없는 아름다움 이었다. 고작 24살 밖에 안 되지만, 너무나 대인배 같은 성품이 뭍어나는 그녀의 말과 행동은 많은 귀감과 용기를 준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어떤 어려움을 헤쳐 넘어 본 자들이 진정 어른인 것이다. 담대하고, 현명한.. 김연아에게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이 감동 잊지 않겠음.


 내 인생 최고의 스포츠 스타는 박찬호와. 김연아. 화려한 성공의 이면에 도사리는 그늘에서 어떤 시련을 겪었을지 가늠해 볼 수록 마음이 짠 해진다. 


 종종 사람들이 박찬호의 한만두 사건이 조롱어리게 화자 되는데, 나는 그 사건에 정말 감동을 느낀다. 실제로 그 경기를 라이브로 감상했던 나는 (1이닝)회에 같은 타자에게 루 홈런 개를 얻어 맞는, 처참히 무너진 박찬호의 멘탈을 걱정하며 내 일 같이 가슴이 아팠다. 그날은 그렇게 부끄럽게 마운드를 내려왔지만 그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전무후무한 기록의 불명예한 희생양이 됐지만 그런 실패를 안고 계속 선발투수로 경력을 이어갔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정신적 충격으로 확 무너졌을 것이다. 이 날 이후로 박찬호는 잘하는 선수 이상의 존경심이 생겼다. 


 박찬호와 김연아는 내게 그런 짠한 감동을 새기게 한다. 이제 시대의 뒷편이 아닌 삶의 2막을 열어가는 그들의 모습에 감사의 응원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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